강민아가 반하준에게 펜을 건넸다.강나현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반하준이 이혼 합의서에 사인한 순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언니는 너무 약해빠졌어. 난 만약 하준 씨 같은 남편이랑 살면 자다가도 웃었을 텐데.”강민아가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강나현을 쳐다보았다.“이젠 한시도 못 참겠어? 너무 티가 나잖아.”반하준이 사인한 이혼 합의서를 강민아에게 던졌다.“억지 부리는 건 그렇다 쳐도 왜 나현이한테 뭐래 그래?”더는 강민아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반하준은 목소리를 낮추고 반우정에게 말했다.“집에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아빠한테 전화해.”반우정은 반하준을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강민아의 손을 꽉 잡았다. 강민아를 쳐다보는 반하준의 눈빛이 차갑기 그지없었다.“정이는 내 딸이라서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지만 넌... 쉽지 않을 거야.”반하준이 경멸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사실은 강민아에게 수를 잘못 뒀으니 언젠가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었다.강민아가 웃으며 말했다.“이 집을 떠나서 내 앞에 펼쳐진 길이 낭떠러지일지라도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야.”반하준의 두 눈에 알 수 없는 빛이 스쳤다.“4주 후에 법원에서 만나.”이 말을 내뱉고 나니 마음이 다 후련했다. 강민아는 반우정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걸어가 신발을 신은 후 마지막으로 반현민을 돌아보았다.“민아, 엄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반현민이 화를 내며 말했다.“그냥 빨리 가요. 맨날 아빠 화만 돋우는 엄마가 싫어요.”강민아가 반우정을 데리고 나간 후 강나현이 반하준에게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민아 언니는 너무 유난스러워. 여자들은 항상 징징거린다니까. 그중에서도 가정주부가 제일 징징거려. 능력도 없고 하는 일도 없어서 이 집을 나가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을 텐데.”그러고는 반하준에게 속마음을 드러냈다.“난 만약 이혼하게 되면 무조건 빈손으로 나갈 거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더라도 사랑했던 사람한
강나현의 꼬드김에 반현민이 고민하기 시작했다.“근데 이렇게 간단한 걸 만들면 칭찬 스티커 못 받는데...”“형이 인터넷에서 칭찬 스티커 왕창 사 줄게. 그럼 우리 민이 칭찬 스티커 부자 되는 거야.”강나현을 쳐다보는 반현민의 눈빛은 마치 바보를 보는 듯했다.“현이 형, 평소에 짝퉁만 입고 다녀요?”강나현이 바로 부인했다.“절대 안 입지.”반현민이 목소리를 높였다.“형이 사 준 칭찬 스티커를 어린이집에 가져갔다가 친구들한테 놀림받으라는 거예요? 선생님이 주는 스티커야말로 진짜 칭찬 스티커란 말이에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 몰라요?”반현민이 씩씩거리면서 화를 냈다.“그건 자신을 속이는 거잖아요.”다섯 살짜리 어린이에게 혼나자 강나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알았어, 알았어. 건담 로봇 만들어주면 되잖아.”‘강민아도 플라스틱 빨대로 건담 로봇을 만들었는데 내가 못 만들 리가 없지.’10분 후 반현민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90%나 완성된 건담 로봇이 강나현의 실수로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반현민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내... 내 건담 로봇 돌려줘요.”“민아,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네 엄마가 만든 건담 로봇이 튼튼하지 않아서 그래.”반현민이 울먹거리며 말했다.“내일 제출해야 한단 말이에요. 엄마한테 갈래요.”강나현이 반현민을 째깍 붙잡았다.“네 엄마는 널 버렸어. 이젠 숙제 안 도와줄 거야.”그러고는 휴대폰을 들고 연락처를 뒤졌다.“다른 사람 불러서 네 엄마가 만든 것보다 훨씬 멋진 건담 로봇을 만들어줄게.”강나현이 아는 이성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반씨 집안에 와서 숙제를 도와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건담 로봇은 무슨. 나와서 술이나 마시자. 아가씨들도 몇 명 불러줄게.”강나현이 솔깃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약속 지켜. 난 애기 같은 여자애들이 제일 좋더라.”전화를 끊은 그녀는 숙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늘 밤에 무슨 일이 있어도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실 생각이었다.결국 중고 거래
반우정이 지지 않고 맞섰다.“건담 로봇은 엄마가 밤새워서 만들어준 거잖아.”“엄마가 만든 건담 로봇이 튼튼하지 않아서 벌써 망가졌어. 현이 형이 다시 만들어준 새 건담 로봇이 최고야.”반현민의 의기양양한 모습에 반우정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엄마가 밤새워 숙제를 도와주는 모습을 다 봤을 텐데 왜 엄마의 노력을 저렇게 무시하는 거지?’사실 강민아도 그렇게까지 힘들게 밤새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가정부에게 야근 수당을 줘서 두 아이의 숙제를 맡긴 적이 있었지만 도우미가 시어머니에게 일러바친 바람에 크게 혼났었다.“우리 집의 후계자를 정성껏 키우라고 고연대를 졸업한 천재 소녀를 며느리로 들인 건데 애들 숙제를 도우미한테 맡기면 어떡해? 민이를 키우는 건 네 평생의 임무야.”도우미는 정해진 시간이 되면 퇴근할 수 있지만 엄마인 그녀는 계속 야근하면서 아이들의 숙제를 끝마쳐야 했다.반우정은 더는 반현민을 쳐다보지 않고 강민아의 손을 잡고 옆으로 지나갔다.반현민이 목을 길게 빼 들고 도로 끝을 애타게 보면서 중얼거렸다.“내 건담 로봇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반현민은 다른 친구들이 부모와 함께 지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몇몇 아이들이 문 앞에서 뭐 하냐고 물을 때마다 웅장하고 멋진 건담 로봇을 기다린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이번 숙제는 환경 지킴이 발표회 행사 중 하나였고 선생님이 각 반에서 우수 작품을 선정할 예정이었다.우수 작품을 만든 아이만이 강단에 서서 작품을 소개할 자격이 있었다.어린이집에서는 매번 행사를 크게 열었는데 심지어 서경 방송국 어린이 채널 기자들까지 와서 이 발표회 행사를 촬영할 예정이었다.어린이집에 다닌 후로 반현민은 1등 자리를 놓친 적이 없었다. 그로 인해 무슨 일이든 1등을 하려는 습관이 생겼다.그때 강나현이 개조한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났고 오토바이 소리가 문 앞에 울려 퍼졌다.반현민이 강나현에게 달려갔다. 강나현이 오토바이를 타는 모습이 항상 멋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왜 이렇게 늦었어
건담 로봇을 제작한 사람은 강나현에게 상자를 열면 거대한 건담 로봇이 쉽게 무너질 수 있으니 상자를 조심해서 다루고 파손 시 책임은 그녀에게 있다고 주의를 줬다.반현민은 강나현을 굳게 믿었던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주아영이 엄숙하게 말했다.“강나현 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현민이 작품이 전시 및 심사를 거치지 않고 무대에 오를 자격을 얻는 건 다른 아이들에게 불공평합니다.”하지만 강나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연진숙 어르신이 이 어린이집 이사장인 거 아세요? 민이 아빠가 오늘 민이 발표를 보러 온다는 건 아시고요?”반현민의 두 눈이 반짝였다.“아빠가 여길 온다고요?”자리에 앉아 있던 반우정은 반현민의 말에 심장이 쿵쾅거렸고 두 눈이 다 반짝였다.“일이 바쁜 아빠가 어린이집에 온다고요?”반현민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강나현이 자랑스럽게 말했다.“내가 오라고 하면 무조건 와.”“현이 형 진짜 대단해요.”강나현을 쳐다보는 반현민의 눈빛에 존경심이 가득했다.강나현이 한 손을 허리에 얹고 가슴을 쫙 펴더니 주아영을 차갑게 쏘아보았다.“제가 말한 대로 해야만 강당에서 진행되는 녹화가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반씨 가문의 도련님이 1등 하지 못하면 이사회에 어떻게 설명하는지 두고 보겠어요.”주아영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반현민을 건드리는 걸 그녀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다른 학부모들조차도 반씨 가문에 함부로 하지 못했고 아이더러 항상 반현민에게 양보하라고 했다....강당 안에 학부모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부분 엄마들이었는데 다들 한껏 치장한 티가 났다.재벌 사모님들은 함께 모여 아이들과 남편 얘기를 하는 것 외에 새로 산 명품이나 경매에서 낙찰받은 골동품에 대한 얘기도 나눴다.“현민이 어머님, 오늘 옷차림이 좀 수수하신데요?”몇몇 재벌 사모님들이 강민아에게 말을 걸면서 그녀를 훑었다. 눈썰미 좋은 사람들은 이미 강민아의 결혼반지가 사라진 것을 알아챘다.모두 강민아가 아들딸 쌍둥이를 낳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반하준을 돌아보던 강민아는 제자리에 굳어버렸다.해가 정말로 서쪽에서 떴나. 그동안 반하준에게 어린이집에서 여는 학부모 동반 활동에 참석하라고 여러 번 말했어도 그는 늘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시어머니 연진숙도 어린이집 활동 때문에 반하준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그녀에게 한소리를 했었다.자녀를 교육하고 자녀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처리하는 것은 전적으로 아내인 강민아의 책임이라면서 말이다.눈 깜짝할 사이에 강나현과 반하준이 강민아 앞으로 다가왔다.“언니, 내가 하준 씨 데려왔어.”자신을 바라보는 강민아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는 것을 본 남자는 피식 웃음이 났다.강민아가 어떻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엔 누가 봐도 사랑이 가득하지 않나.반하준이 강민아 옆에 앉고 강나현도 반하준 옆에 자리를 잡았다.이곳에 있던 재벌가 사모님들이 저마다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흥미진진하게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이따가 민이 손재주 보면 깜짝 놀랄 거야.”강나현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반하준에게 속삭이는 모습이 뒤에서 보면 두 사람의 머리가 바짝 붙어있는 것 같았다.“오늘 반차 냈어?”강민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반하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강나현이 끼어들었다.“하준 씨 오늘 바쁜데 내가 한 시간만 내서 민이 강연 보러 오자고 했어.”강민아의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가 번졌다.“나현이 네가 하는 말이면 다 듣네.”발붙일 틈도 없이 바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단지 반하준에겐 그녀가 중요하지 않았던 거다.막이 걷히고 아이들의 강연이 시작되자 강나현이 무대를 가리키며 신이 나서 외쳤다.“하준 씨 아들 무대에 올랐어!”반현민은 카트를 이용해 1미터가 넘는 커다랗고 빨간 골판지 상자를 무대 위로 가져갔다.붉은 상자엔 ‘우수작'이라는 라벨이 눈에 띄게 붙어 있었다.반현민은 무대 아래 착석한 반하준을 보고 자랑스럽게 가슴을 쭉 내밀었다.강나현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아빠가 정말로 그녀의 말 한마디에 보러 온 것이다.반현민의 맑고 앳된 목소
“민아, 얼른 건담 로봇 꺼내.”강나현이 손을 내밀자 반현민은 곧장 상자를 닫으며 당황한 듯 강나현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아니요. 꺼내면 안 돼요.”“꺼내!”강나현이 낮게 윽박질렀다.“내가 힘들게 건담 로봇 만들어줬는데 네가 이렇게 감추면 얼마나 창피하겠어!”반현민은 강나현이 상자를 열지 못하도록 아예 골판지 상자에 몸을 밀착시켰다.강나현은 아이를 떼어내려 하고 아이는 종이 상자를 꽉 붙잡고 버텼다.그때 갑자기 상자가 뒤집어지고 안에 있던 플라스틱 빨대가 모두 쏟아져 나왔다.흩어진 빨대 더미 속엔 분홍색 포스트잇 한 장도 들어 있었다.포스트잇에 적힌 글이 카메라를 통해 스크린에 그대로 전해졌다.[고작 59,900원으로 사람한테 밤새 건담 로봇을 만들라고 해? 나가 죽어!]반현민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플라스틱 빨대가 무대 아래로 굴러가는 것을 지켜보았다.무대 아래 서 있던 주아영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민아, 너 숙제를 안 해 온 거야?”“아니요. 전 했어요!”반현민의 작은 입은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주아영은 포스트잇을 집어 들고 아이에게 물었다.“그러면 이 쪽지는 뭐야? 누구한테 돈을 주고 시킨 거야? 선생님은 너희들이 부모님과 함께 숙제를 완성하길 바랐는데 어떻게 선생님한테 거짓말을 할 수가 있어?”“윽...”한 번도 이처럼 억울함을 당한 적이 없던 아이는 작은 체구로 큰 무대에 주저앉은 모습이 꼭 버려진 아기 새 같았다.“전...”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알았다.반현민은 강민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강민아가 반씨 가문을 떠나지 않았다면 플라스틱 빨대로 만든 아름답고 멋진 건담 로봇을 만들 수 있었을 거다.아직 완성되지 못한 건담 로봇은 강나현이 망가뜨렸고, 강나현의 거짓말 때문에 이렇게 큰 상자에 쓸데없는 플라스틱 빨대만 잔뜩 들어 있었다.그리고 자신과 강나현은 선생님과 모두를 속인 거짓말쟁이가 되었다.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반현민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아이가 많은
강나현은 황급히 반현민의 입을 막았다.“네 엄마가 와도 무슨 소용이 있어? 널 1등으로 만들어 줄 능력은 있대?”반현민은 흐느끼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반우정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훌륭한 작품을 만든 반우정은 무대 옆에 줄을 서서 올라가 강연하길 기다리고 있었다.“엄마는 정이를 1등으로 만들어줬을 거예요!”강나현이 비웃었다.“정이는 1등 못 해.”반현민은 눈물이 맺힌 눈으로 강나현을 바라보았다.“내 말 안 믿어?”강나현은 반현민의 어깨를 살며시 감쌌다.“저걸 봐.”반우정의 옆에 놓인 거대한 비닐봉지엔 아이가 만든 작품이 담겨 있었다.강나현은 비열한 웃음을 머금은 채 다가가 비닐봉지를 콱 밟으려 했다.힐끗 강나현의 모습을 엿보던 반우정은 강나현보다 훨씬 작은 키로 여자의 발목을 잽싸게 움켜잡아 거대한 힘으로 상대를 넘어뜨렸다.“꺄악!” 바닥에 쓰러지며 비명을 지른 강나현은 분노에 휩싸였다.“반우정, 네가 날 밀어?”반우정이 말했다.“내 작품 밟을 뻔했잖아요!”강나현은 바닥에 주저앉아 부딪혀서 아픈 팔꿈치를 감쌌다.“대체 뭘 보고 내가 네 걸 밟았다는 거야? 네가 일부러 날 민 거잖아!”반우정의 힘이 세다는 건 알고 있지만 50킬로가 넘는 그녀를 단번에 넘어뜨릴 줄은 몰랐다.“정아!”강민아는 강나현이 반우정과 다투는 모습을 보고 서둘러 달려갔다.강나현은 뒤따라온 반하준을 보고 곧장 일러바쳤다.“내가 비틀거리는데 하준 씨 딸이 내 발목을 잡고 넘어뜨렸어. 내가 재빨리 반응하지 않았으면 머리가 바닥에 부딪혔을 거야.”강나현은 위협적으로 말했고 반하준도 딸의 힘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정아, 나현 이모한테 사과해.”아버지의 위엄은 거스를 수 없었기에 반우정은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졌다.“이모가 먼저 내 작품 밟으려고 했어요!”강나현이 곧장 쏘아붙였다.“그래서 내가 밟았어? 그냥 네가 날 노리고 그런 거잖아!”강민아는 반우정을 옆으로 끌어당겼고 아이는 어린 새처럼 그녀의 다리를 감싸 안았다.반우정은
“그래그래. 마음대로 해.”강나현은 반우정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귀족 어린이집의 경쟁은 유난히 치열했고 반우정보다 잘 만들고 연설문을 잘 쓴 아이들은 널리고 널렸다.조금 전 이미 우수작으로 뽑힌 다른 작품들을 둘러본 강나현은 반우정이 1등 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반우정은 작품을 들고 무대에 올랐다.아이는 흰색 긴팔 셔츠에 빨간 체크무늬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에 작은 머리핀을 두 개 꽂고 있었다.반우정은 사랑스럽고 올망졸망한 이목구비에 긴 속눈썹이 검은 눈동자를 더더욱 돋보이게 했다.하지만 아이가 무대에 오르자마자 몇몇 학부모들이 수군거렸다.“반씨 가문 꼬마 아가씨가 조금 뚱뚱한 것 같지 않아요?”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조롱했다.“저게 조금 뚱뚱한 건가요?”두 학부모는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킥킥 웃었다.재벌가 사모님들은 딸을 늘씬하고 아리따운 아가씨로 키우는데 반우정은 무척 건장한 체격이라 또래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남다른 모습이었다.반우정은 무대에서 학부모와 심사위원들에게 손수 만든 작품을 선보였다.플라스틱 빨대로 지은 한옥이었다.“이건 엄마와 제가 함께 만든 한옥이에요. 진짜 한옥을 똑같은 비율로 100배 축소해서 만든 작품이죠.”반우정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메라 대각선에 있던 프롬프트 화면이 검게 변했다.강민아도 아이의 눈빛이 달라진 걸 알아차리고 고개를 홱 돌리니 검게 변한 프롬프트 화면과 함께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한 중년 여성의 모습도 보였다.입을 벙긋하며 무의식적으로 ‘어머님’ 소리가 나올 뻔했지만 꾹 삼켰다.“회장님.”“어머니.”강민아와 반하준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전 시어머니와 인사를 나눈 강민아는 센터 콘솔 쪽으로 가서 프롬프터가 왜 갑자기 꺼졌는지 물어보려는데 연진숙이 그런 그녀의 손목을 홱 낚아챘다.“내가 끄라고 했어.”강민아는 경악했다.“회장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정이가 상을 받으면 민이 마음은 어떨지 생각해 봤어? 민아 너는 엄마가 돼서 아이들을 공평하게 대할 줄도 모르니?”그녀를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
반하준은 크게 헐떡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굵직한 땀방울이 아치형 눈썹을 따라 떨어지며 눈가에 고여 있었다.땀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고 창문 유리는 흔들리면서도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강나현이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더니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댔다.“하준 씨... 더는 못 참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반하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반하준은 몸을 비틀며 강나현을 떨쳐내려고 했다.“놔!”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강나현은 쉽게 그의 재킷을 벗겨냈다.양복 재킷은 반하준의 손목에 걸렸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걸었다.강나현의 몸엔 남아있는 옷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남자의 턱에 닿으려 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반하준의 속이 뒤집히며 말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나현은 미꾸라지처럼 그에게 매달린 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강나현, 정신 차려!”반하준이 소리쳤지만 강나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온몸이 너무 이상해...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그녀는 말하며 반하준의 얼굴로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 한 올마저 강나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쳤다.그 순간 종아리가 소파에 부딪히며 반하준은 균형을 잃고 온몸이 뒤로 넘어졌다.강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몸을 짓누르며 말했다.“하준 씨, 나 힘들어! 하준 씨도 힘들지? 나 좀 살려줘. 이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릴 거야!”“나한테 손대지 마!”반하준은 몸을 비틀었다.“강나현, 참아! 빌어먹을, 나한테서 떨어져!”강나현은 반하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하준 씨, 우린 약에 취했고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해. 약효가 절정에 달하면 우리 둘은 미친개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이성을 잃고 서로를
“나 건드리지 마!”반하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나현은 더욱 거세게 그의 위로 뛰어올라 그를 제압하려 했다.“난 하준 씨 도와주려는 거야. 나도 벗었는데 왜 안 벗어?”“하지 마, 놓으라고!”그가 저항하면 할수록 강나현은 더욱 흥분했다.“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강나현은 반하준의 정장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아이참, 움직이지 마. 자꾸 몸을 비틀면 나도 정말 무슨 짓할지 몰라?”반하준은 소름이 끼치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는 두 다리를 쭉 뻗어 강나현을 소파에서 차버렸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지며 비참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은 소파에 누운 채 바닥에 굴러떨어진 강나현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자신을 방에 가둔 게 강나현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강나현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하준 씨, 왜 날 발로 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해?”강나현이 씩씩거렸지만 반하준은 무시한 채 소파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등을 돌리고 문에 손을 뻗었지만 방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젠장!”반하준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자신과 강나현을 함께 가두는 데 앞장선 사람이 강민아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창가로 걸어갔지만 창문도 잠겨 있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어 도살당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디퓨저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그는 숨을 참으며 기계로 걸어가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이어진 전선을 뽑고는 기계를 집어 들어 창문 유리에 던졌다.창문만 깨지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테니 그도, 강나현도 이성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꽉 묶여 있었고, 기계를 잡고 있어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비를 맞은 듯 반하준의 얼굴이 뜨거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디퓨저 기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눈을 크게 뜬 강나현은 반하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하준 씨가 왜 여기 있어?”반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침착하려고 애쓰며 조목조목 분석했다.“강민아 비서는 강민아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강나현이 등 뒤로 향한 그의 손을 보았다.“하준 씨 손은... 왜 수갑이 채워져 있어? 강민아가 그러라고 시켰어?”반하준의 얼굴이 검게 탄 냄비처럼 어둡게 변했다. 짜증이 난 그는 멍청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대체 어쩌다 강민아가 그런 걸 즐긴다고 생각했는지 더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거다.그 생각에 반하준은 마음이 복잡하고 오장육부에 불길이 타올랐다.주위를 둘러보며 열쇠를 찾던 그가 강나현을 재촉했다.“열쇠 좀 찾아봐!”“그래.”강나현도 수갑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머릿속으론 지금 반하준과 단둘이 방에 갇혀 있고, 반하준의 손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미로 그에게 마음대로 들이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생각만 해도 강나현은 온몸에 힘이 풀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반하준을 향해 등을 돌렸다.반하준도 약에 취해 충동을 느끼기 쉬운 상태라면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강나현은 열쇠를 찾는 척하면서 말했다.“강민아가 우리 둘을 함정에 빠뜨렸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 난 친동생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모든 책임을 강민아에게 돌리고 그녀와 반하준이 밤을 보내면 반하준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닌 강민아를 탓할 거다.애초에 심은호에게 하려던 짓이었는데 강민아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강민아는 이참에 반하준과 강나현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뜨릴 계획이었다.그녀에게 조롱당했다는 수치심에 강나현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하지만 곧 반하준과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었다.줄곧 반하준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