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아는 통화버튼을 눌렀다.“심은호 씨.”그녀의 차분하고 정중한 목소리가 늦은 밤 통화하는 애매한 분위기를 날려버렸다.이어 남자의 자상한 중저음 목소리가 들렸다.“검색어 봤어요.”강민아가 서둘러 물었다.“교수님은 괜찮으세요?”“벌써 주무세요.”심한기가 인터넷 가십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을 확인한 강민아는 안도했고 심은호가 말을 이어갔다.“편히 주무시라고 제가 몰래 수면제 두 알을 넣었어요.”“...”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교수님께서 인터넷 댓글 보고 화 많이 나셨죠?”“그쪽 부정행위를 도왔다는 모함이 아니라 4년 전에 장기명과 일어났던 갈등이 다시 언급되어 화가 나서 몸을 떨더라고요. 모두가 수재인 장기명을 질투해 아버지가 일부러 짓밟았다고 생각해요.”강민아는 죄책감, 양심 때문에 서경대를 자퇴한 후 무의식적으로 서경대와 관련된 모든 뉴스에 귀를 닫았다.그래서 자퇴 후 심한기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장기명은 저도 잘 아는 사람이에요.”강민아가 입을 열었다.반진경의 남편이었던 장기명을 가족 모임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늘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중후한 외모에 수수한 옷차림을 한 그는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사람 표정을 잘 읽고 부지런히 움직여서 반씨 가문 어르신들도 트집을 잡지 못했다.강씨 가문을 둔 강민아에 비하면 장기명은 정말 무일푼이었다.외딴 변두리 도시에서 태어나 가난한 집안에서 힘들게 공부해 하성 사범대에 입학한 뒤 다시 피나는 노력으로 서경대에 들어가 박사 학위를 받고 서경대에 남아 교직에 몸담고 있었다.반진경은 그의 지혜롭고 섹시한 두뇌에 매료되었다.올해 초 반진경은 장기명이 학장이 되는 건 정해진 사실이며 서경대에서 가장 젊은 학장이 될 거라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다녔다.강민아는 장기명도 수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장기명과 교수님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요?”“4년 전에 장기명이 발표한 논문 못 봤죠? 보내줄 테니까 한번 봐요.”강민아는 의아해하며 노트북을 손에 들
학생에게 뒤통수를 맞은 심한기는 강민아가 정말 장기명에게 자신의 연구 결과를 줬다고 생각했다.그래서 5년 후 강민아를 다시 만난 심한기는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심은호가 물었다.“혹시 논문 초안 아직 가지고 있어요?”강민아는 손을 들어 시큰거리는 눈을 가렸다.“예전에 쓰던 컴퓨터에 우유를 쏟았는데 꺼진 후엔 다시 켜지지 않았어요. 결국 도우미 아주머니가 쓰레기라고 버렸죠...”당시 강민아가 어린 민이를 안고 있을 때 아이가 우유를 노트북 키보드에 쏟았다.강민아는 제일 먼저 아이를 컴퓨터에서 멀리 떨어뜨리고 화상을 입지 않았는지 확인한 뒤 한참을 달래서야 민이는 겨우 그녀의 품에서 떨어졌다.강민아가 다시 컴퓨터를 닦았을 땐 컴퓨터에 블루스크린이 뜬 것을 발견했다.반하준에게 도움을 청해 반하준이 기술 전문가를 불러 컴퓨터를 복구해 주길 바랐다.“내가 네 컴퓨터 고치라고 기술 인원을 데려온 줄 알아? 알아서 고쳐.”“컴퓨터엔 내 대학 시절 연구 결과들이 전부 들어있어!”“이미 자퇴했잖아. 게다가 본과생이 쓴 걸 어떻게 연구 결과라고 할 수 있어?”술에 취한 남자의 나른하고 무기력한 목소리 뒤로 그의 곁에서 강나현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준 씨, 누구 전화야?”“쓸데없는 전화.”전화가 끊기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눈물이 툭 떨어졌다.강민아는 고장 난 노트북을 들고 수리하는 곳에 찾아갔으나 그녀의 컴퓨터를 살펴본 수리공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한밤중에 네 번째 수리점으로 달려가던 중 전화벨이 울리며 연진숙의 전화가 걸려 왔다.“또 어디로 갔어? 집에서 애들은 안 보고.”“집에 도우미가 있는데...”“민이가 너만 안 보이면 울잖아. 지금 뭐 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장 집으로 와!”강민아는 의자에 앉아 웅크린 채 두 손으로 종아리를 감쌌다.그녀에게 아이는 한때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하지만 이젠 의문만 들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서 그녀에겐 뭐가 남았을까.비단 같은 머리카락이 폭포
네티즌들에게 제일 먼저 충격을 안겨준 건 강민아의 외모였다.수많은 사람은 머릿속이 하얘졌고, 강민아를 손가락질하려던 일부 블로거들은 턱을 문지르며 말을 잇지 못했다.어떤 이들은 안경을 쓰고 화면에 가까이 다가가기도 했다.강민아의 얼굴을 보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억누르지 못하는 라이브 블로거도 있었다.5대의 카메라 앵글 속에 잡힌 강민아는 통나무로 만든 긴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비에 젖은 재킷은 미처 갈아입을 겨를도 없이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잔뜩 붙어 있었다.그녀는 두 손을 비비고 숨을 들이마신 후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겉모습은 얼어붙은 눈사람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강민아가 조직위원회에 자신을 소개하는 말에 네티즌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제가 살고 있는 시그니엘에 전기가 나가서 지금 임시로 심한기 교수님 집에서 문제를 풀고 있습니다.”강민아는 심한기 교수의 집에서 문제를 풀고 있다는 사실을 조직위원회 측에도 숨기지 않았다.“강민아 씨, 불가항력적인 특수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에 조직위원회에서 논의한 결과 대회에 계속 참가하는 것에 동의했으니 이제 B 지문 문제지를 보내드릴게요. 시험 시간은 이미 3시간이 지났고 재도전 기회는 없습니다. 다른 응시자들과 마찬가지로 5시간 내 답안지를 제출해야 합니다.”“네, 알겠습니다.”강민아는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문제 풀이를 시작했다.그녀는 컴퓨터와 산수 종이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그동안 ALI 조직위원회 직원이 강민아의 응시 환경을 점검하기 위해 심한기의 집을 방문했다.강민아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카메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컴퓨터 화면 오른쪽 하단을 힐끗 쳐다봤으니 질문에 답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거야.”네티즌과 함께 강민아의 부정행위를 살펴보던 블로거는 그녀의 미세한 표정까지도 포착했다.“원래대로면 제시간 안에 문제를 전부 답변하기 힘들죠. 예선 시간은 8시간밖에 되지 않기에 참가자들은 최대한 자신이 잘하는
잠에서 깨어난 그들은 자신들의 SNS 계정이 네티즌들의 질타와 비난으로 잠식된 것을 발견했다.[그러게 내가 서둘러 사과글 지우지 말자고 했잖아요. 이제 어떡할 거예요!]몇몇 재벌가 사모님들은 긴급 상의에 돌입했다.[강민아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어도 결승에 오를 수 없어요. 예선에서 다른 참가자들이 점수를 조절해서 강민아가 1등을 했다는 블로거 분석 못 봤어요?][일단 며칠 조용히 있어요. 강민아가 결승에서 명문대 박사들에게 지면 어차피 조롱당할 거예요.]어제 앞다퉈서 강민아와 인터뷰하던 언론사들은 바뀐 여론에 인터뷰 영상을 서둘러 삭제했었다.유명 채널에서 먼저 강민아의 인터뷰 영상을 공개하고 특집 기사로 다뤘다.제작진 측에선 지유빈이 어젯밤 강민아와 통화한 녹취록도 영상에 넣었다.강민아가 경연을 위해 심한기의 집에 간 진짜 이유를 알게 된 네티즌들은 의견이 분분했고 일부 네티즌들은 예선 당일 시그니엘에 갑자기 전기가 나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강민아 전남편을 프라이팬에 넣어서 기름에 볶아버릴 거야!][짐승만도 못한 인간, 이 말밖에 할 말이 없네.][강민아는 어린 나이에 사람인지 개인지 몰랐던 거지.]순식간에 ‘강민아 전남편’이라는 키워드가 인기 검색어에 올랐고, 네티즌들은 강민아의 전남편이 누구인지 밝혀내지 못했지만 그의 조상까지 대대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부신 그룹“에취!”반하준은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 재채기했고, 엄규민은 휴대전화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엄규민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인기 급상승 검색어에 ‘강민아 전남편’이라는 문구가 뜨자 엄규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큰일 났다!그는 황급히 반하준의 까만 뒤통수를 몇 번이고 흘깃 쳐다봤다.반하준은 온라인에서 자신이 한껏 조롱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이걸 어떻게 반하준에게 말해야 할까!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반하준이 밖으로 걸어 나가는데 로비에 오가는 사람들 속 직원들의 열띤 수다 소리가 반하준의 귓가에 들렸다.“강민
그 자리에 있던 직원들과 반하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쳐다보았다.“대표님, 감기 걸리셨어요?”“대표님, 병원 안 가보셔도 돼요? 얼굴이 너무 안 좋아 보여요. 안색이 어두운 게...”직원들의 걱정에 반하준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엄규민이 나서서 직원들에게 한마디 하려는데 반하준은 이미 회사 정문을 향해 곧장 걸어가고 있었다.엄규민은 서둘러 뒤따라가 반하준을 위해 차 문을 열어주었다.“대표님, 로비에서 한가하게 놀던 직원들 전부 기록해 뒀다가 월급 삭감하겠습니다.”차에 탄 반하준은 온몸으로 싸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고개를 들어 엄규민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왜, 내가 강민아의 한심한 전남편이라고 온 세상에 소문내려고?”굵직한 땀방울이 엄규민의 이마에서 뚝뚝 떨어졌다.그는 제자리에 굳어버린 채 입술만 달달 떨었다.“저... 전 그런 뜻이 아니라... 인터넷에 좋지 않은 말들이 너무 많아서요.”엄규민은 반하준에게 휴대전화를 건넸다.그제야 반하준은 인기 검색어 1위가 ‘강민아 전남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콧방귀를 뀌었다.언젠가 강민아 덕분에 그가 유명해질 줄이야.반하준은 인기 검색어 아래 달린 댓글을 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발아래 존재하는 것들에겐 눈길조차 줄 생각이 없었다.만약 강민아가 결승에서 좋은 성적을 따낸다면...반하준은 아량을 베풀어 강민아를 회사에 데려와 연봉 수억의 자리를 줘서 자신을 위해 일하게 할 생각이었다.그 순간 반하준의 휴대폰이 울리고 강나현의 전화임을 확인한 그가 전화를 받았다.“하준 씨, 오늘 밤에 정수산에서 레이싱 경기가 있는데 민이 데리고 구경하러 가고 싶어.”반하준의 목소리가 다소 차가웠다.“민이가 갈 곳이 아니야.”“하준 씨, 내가 민이 데리고 산에 오르는 게 걱정되면 하준 씨도 같이 가.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강나현의 말이 반하준을 자극했다. 오늘은 반유하의 생일이다. 과거 반유하가 레이싱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반하준은 정수산 크로스컨트리 대회를 후원했다.“우리가 땅에
강나현 앞에 앉은 민이는 무척 신이 났다.“역시 현이 형밖에 없어요. 예전엔 아빠가 날 데리고 레이싱 경기에 가는 건 꿈도 못 꿨는데.”아이가 입을 삐죽거렸다.“그 촌스러운 시골 여자보다 형이 백배, 천배는 나아요!”강나현은 킥킥 웃으며 치솟는 눈썹을 억누르지 못했다.“네 엄마가 인터넷에서 사람들에게 욕먹는 거 알아?”민이가 정정했다.“그 여자는 이제 내 엄마가 아니에요!”강나현의 눈가에 머금은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민이는 호기심에 물었다.“왜 욕먹는데요?”“민아 언니가 부정행위로 수학 경시대회 예선에서 1등 했거든. 네티즌들이 성적이 거짓이라는 걸 알아냈어. 본인 실력으로는 절대 1등 할 수가 없으니까.”말하며 강나현이 SNS를 열어 민이에게 강민아를 욕하는 댓글을 읽어주려는데 인기 검색어가 ‘강민아 전남편’일 줄이야.검색어를 클릭한 강나현은 사람들의 댓글을 보고 당황했다.서둘러 강민아에 대한 댓글을 찾아보니 전에 강민아가 부정행위를 했다며 확신에 차서 말했던 블로거가 사과문을 올리고 자신의 오해라며 밝혔다.이후 강민아와 관련된 인기 댓글을 찾아보니 절반은 그녀의 미모를 칭찬하는 댓글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한심한 전 남편을 만난 것에 대해 가슴 아파하는 댓글이었다.강나현의 숨이 턱 막히며 휴대폰을 잡은 손이 떨렸다.“현이 형?”민이는 처음 보는 강나현의 무서운 표정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당장이라도 휴대전화에 들어가 상대를 때릴 것 같은 사악한 눈빛이었다.번뜩 정신을 차린 강나현이 웃으며 민이에게 물었다.“네가 보기엔 엄마가 예뻐, 내가 예뻐?”민이가 잠시 망설이나 강나현의 얼굴이 극도로 일그러졌다.“현이 형이 제일 예쁘죠!”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강나현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민이에게 말했다.“그 여자 얘기는 그만하자. 오토바이 운전해 보지 않을래?”민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공이 확장되며 설렘을 드러냈다.“정말 운전해도 돼요? 하지만 차가 무거운데...”강나현이 가슴
그동안 강나현은 민이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는 모습을 여러 번 찍어 SNS에 올렸다.계정을 개설한 지 5년이 지났지만 팔로워 수는 2천 명 남짓에 그쳤고 오토바이를 타는 멋진 영상을 올리면 ‘좋아요'를 눌러주는 것은 전부 그녀의 오합지졸 친구들이었다.강나현이 처음으로 민이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는 영상을 자신의 계정에 올렸을 때 하룻밤 사이 큰 화젯거리가 된 자신을 발견했다.그 후 자주 민이를 데리고 오토바이를 타게 되었고, 민이와 함께 찍은 영상은 매번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했다.강나현은 SNS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었기에 지난 한 달 동안 부지런히 업데이트를 해왔고, 그녀의 계정은 수백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리게 되었다.물론 강나현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컸지만 강나현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자신을 질투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치부했다.다섯 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무거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건 그녀만 할 수 있는 짓이었다.하지만 강나현은 이번 주에 민이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는 영상을 다시 올렸을 때 조회수가 20만으로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네티즌들은 이제 이런 종류의 영상에 식상해하고 있었다.그래서 강나현은 절친한 친구와 의논해 크게 한 건을 준비했다.오토바이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데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다섯 살배기 아이가 조종하게 했다.그러더니 갑자기 와인 한 병과 잔을 꺼내 오토바이에 앉아서 술을 따랐고,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와중에도 술잔을 흔들며 느긋함을 보여줬다.그 모습을 찍은 친구는 마이크에 대고 소리쳤다.“완벽해. 나현, 이 영상에 ‘좋아요’가 최소 십만개는 달릴 거야.”...강민아의 일상은 여느 때와 같았다. 정이를 학교에 데려다준 후 집에 돌아와 온갖 과제를 연구했다. 대학 시절에 들었던 수업을 그대로 복습하며 강민아는 지난 5년 동안 놓쳤던 지식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저녁에는 정이와 함께 저녁을 먹은 후 정이를 데리고 심씨 가문으로 향했다.낮에 부딪혔던 문제들을 정리해 심한기에게 직접 가르침을
“이 빌어먹을 놈이 어딜 감히 주제도 모르고!” 심한기가 곧장 욕설을 퍼붓자 방연석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교수님!”“망할 놈의 자식, 머리 검은 짐승 같으니라고. 나라에서는 네 얼굴을 가져다 방탄조끼나 만들지 왜 그냥 두는 거냐? 허, 경기에서 물러나라고?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이 자식아! 경고하는데 민아는 절대 대회에서 나갈 리 없어. 민아 능력으론 충분히 금상을 받고도 남아!”방연석은 웃음이 났다.“교수님, 아직 모르시겠지만 많은 참가자들의 청원에 따라 이번 결승전에는 본선 20위 안에 든 참가자들이 서로 질의응답 대결을 펼치는 코너가 하나 더 생겼어요.”강민아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그녀가 망신당하길 기대하는 모습이었다.“교수님 대단한 제자는 대결에서도 이기기 쉽지 않을 텐데, 주부가 금상이라니요. 허, 꿈도 꾸지 마세요.”강민아가 말했다.“방연석, 내가 금상을 받으면 너뿐만 아니라 교수님 일상생활을 방해한 모든 사람이 교수님께 공개로 사과해야 할 거야!”방연석이 팔짱을 꼈다.“웃기는 소리. 네가 정말 이번 대회에서 모두를 이기고 금상을 받으면 내 머리를 비틀어서 너한테 공으로 던져줄게.”강민아가 비웃었다.“현실적으로 가능한 벌칙만 얘기해.”방연석 뒤에 있던 남자가 경멸하듯 말했다.“강민아가 금상 받으면 연석이가 거꾸로 서서 똥 쌀 거야.”그런 저급한 장면은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었다.방연석은 친구가 자신을 불구덩이에 떠미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그러자 친구가 조용히 대꾸했다.“넌 댄스 동아리 회장이니까 거꾸로 똥 싸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잖아?”방연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건 쉽고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정말 그런 짓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신고할 거다.“난 찬성.”심은호는 거실 문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들어와서 심한기 옆으로 다가왔다.“아버지, 거꾸로 돌면서 똥 싸는 거 본 적 없죠? 보고 싶지 않으세요?”심한기는 코를 만지며 살짝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
반하준은 크게 헐떡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굵직한 땀방울이 아치형 눈썹을 따라 떨어지며 눈가에 고여 있었다.땀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고 창문 유리는 흔들리면서도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강나현이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더니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댔다.“하준 씨... 더는 못 참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반하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반하준은 몸을 비틀며 강나현을 떨쳐내려고 했다.“놔!”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강나현은 쉽게 그의 재킷을 벗겨냈다.양복 재킷은 반하준의 손목에 걸렸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걸었다.강나현의 몸엔 남아있는 옷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남자의 턱에 닿으려 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반하준의 속이 뒤집히며 말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나현은 미꾸라지처럼 그에게 매달린 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강나현, 정신 차려!”반하준이 소리쳤지만 강나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온몸이 너무 이상해...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그녀는 말하며 반하준의 얼굴로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 한 올마저 강나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쳤다.그 순간 종아리가 소파에 부딪히며 반하준은 균형을 잃고 온몸이 뒤로 넘어졌다.강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몸을 짓누르며 말했다.“하준 씨, 나 힘들어! 하준 씨도 힘들지? 나 좀 살려줘. 이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릴 거야!”“나한테 손대지 마!”반하준은 몸을 비틀었다.“강나현, 참아! 빌어먹을, 나한테서 떨어져!”강나현은 반하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하준 씨, 우린 약에 취했고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해. 약효가 절정에 달하면 우리 둘은 미친개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이성을 잃고 서로를
“나 건드리지 마!”반하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나현은 더욱 거세게 그의 위로 뛰어올라 그를 제압하려 했다.“난 하준 씨 도와주려는 거야. 나도 벗었는데 왜 안 벗어?”“하지 마, 놓으라고!”그가 저항하면 할수록 강나현은 더욱 흥분했다.“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강나현은 반하준의 정장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아이참, 움직이지 마. 자꾸 몸을 비틀면 나도 정말 무슨 짓할지 몰라?”반하준은 소름이 끼치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는 두 다리를 쭉 뻗어 강나현을 소파에서 차버렸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지며 비참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은 소파에 누운 채 바닥에 굴러떨어진 강나현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자신을 방에 가둔 게 강나현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강나현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하준 씨, 왜 날 발로 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해?”강나현이 씩씩거렸지만 반하준은 무시한 채 소파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등을 돌리고 문에 손을 뻗었지만 방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젠장!”반하준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자신과 강나현을 함께 가두는 데 앞장선 사람이 강민아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창가로 걸어갔지만 창문도 잠겨 있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어 도살당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디퓨저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그는 숨을 참으며 기계로 걸어가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이어진 전선을 뽑고는 기계를 집어 들어 창문 유리에 던졌다.창문만 깨지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테니 그도, 강나현도 이성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꽉 묶여 있었고, 기계를 잡고 있어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비를 맞은 듯 반하준의 얼굴이 뜨거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디퓨저 기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눈을 크게 뜬 강나현은 반하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하준 씨가 왜 여기 있어?”반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침착하려고 애쓰며 조목조목 분석했다.“강민아 비서는 강민아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강나현이 등 뒤로 향한 그의 손을 보았다.“하준 씨 손은... 왜 수갑이 채워져 있어? 강민아가 그러라고 시켰어?”반하준의 얼굴이 검게 탄 냄비처럼 어둡게 변했다. 짜증이 난 그는 멍청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대체 어쩌다 강민아가 그런 걸 즐긴다고 생각했는지 더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거다.그 생각에 반하준은 마음이 복잡하고 오장육부에 불길이 타올랐다.주위를 둘러보며 열쇠를 찾던 그가 강나현을 재촉했다.“열쇠 좀 찾아봐!”“그래.”강나현도 수갑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머릿속으론 지금 반하준과 단둘이 방에 갇혀 있고, 반하준의 손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미로 그에게 마음대로 들이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생각만 해도 강나현은 온몸에 힘이 풀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반하준을 향해 등을 돌렸다.반하준도 약에 취해 충동을 느끼기 쉬운 상태라면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강나현은 열쇠를 찾는 척하면서 말했다.“강민아가 우리 둘을 함정에 빠뜨렸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 난 친동생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모든 책임을 강민아에게 돌리고 그녀와 반하준이 밤을 보내면 반하준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닌 강민아를 탓할 거다.애초에 심은호에게 하려던 짓이었는데 강민아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강민아는 이참에 반하준과 강나현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뜨릴 계획이었다.그녀에게 조롱당했다는 수치심에 강나현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하지만 곧 반하준과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었다.줄곧 반하준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