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강나현은 민이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는 모습을 여러 번 찍어 SNS에 올렸다.계정을 개설한 지 5년이 지났지만 팔로워 수는 2천 명 남짓에 그쳤고 오토바이를 타는 멋진 영상을 올리면 ‘좋아요'를 눌러주는 것은 전부 그녀의 오합지졸 친구들이었다.강나현이 처음으로 민이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는 영상을 자신의 계정에 올렸을 때 하룻밤 사이 큰 화젯거리가 된 자신을 발견했다.그 후 자주 민이를 데리고 오토바이를 타게 되었고, 민이와 함께 찍은 영상은 매번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했다.강나현은 SNS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었기에 지난 한 달 동안 부지런히 업데이트를 해왔고, 그녀의 계정은 수백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리게 되었다.물론 강나현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컸지만 강나현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자신을 질투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치부했다.다섯 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무거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건 그녀만 할 수 있는 짓이었다.하지만 강나현은 이번 주에 민이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는 영상을 다시 올렸을 때 조회수가 20만으로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네티즌들은 이제 이런 종류의 영상에 식상해하고 있었다.그래서 강나현은 절친한 친구와 의논해 크게 한 건을 준비했다.오토바이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데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다섯 살배기 아이가 조종하게 했다.그러더니 갑자기 와인 한 병과 잔을 꺼내 오토바이에 앉아서 술을 따랐고,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와중에도 술잔을 흔들며 느긋함을 보여줬다.그 모습을 찍은 친구는 마이크에 대고 소리쳤다.“완벽해. 나현, 이 영상에 ‘좋아요’가 최소 십만개는 달릴 거야.”...강민아의 일상은 여느 때와 같았다. 정이를 학교에 데려다준 후 집에 돌아와 온갖 과제를 연구했다. 대학 시절에 들었던 수업을 그대로 복습하며 강민아는 지난 5년 동안 놓쳤던 지식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저녁에는 정이와 함께 저녁을 먹은 후 정이를 데리고 심씨 가문으로 향했다.낮에 부딪혔던 문제들을 정리해 심한기에게 직접 가르침을
“이 빌어먹을 놈이 어딜 감히 주제도 모르고!” 심한기가 곧장 욕설을 퍼붓자 방연석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교수님!”“망할 놈의 자식, 머리 검은 짐승 같으니라고. 나라에서는 네 얼굴을 가져다 방탄조끼나 만들지 왜 그냥 두는 거냐? 허, 경기에서 물러나라고?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이 자식아! 경고하는데 민아는 절대 대회에서 나갈 리 없어. 민아 능력으론 충분히 금상을 받고도 남아!”방연석은 웃음이 났다.“교수님, 아직 모르시겠지만 많은 참가자들의 청원에 따라 이번 결승전에는 본선 20위 안에 든 참가자들이 서로 질의응답 대결을 펼치는 코너가 하나 더 생겼어요.”강민아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그녀가 망신당하길 기대하는 모습이었다.“교수님 대단한 제자는 대결에서도 이기기 쉽지 않을 텐데, 주부가 금상이라니요. 허, 꿈도 꾸지 마세요.”강민아가 말했다.“방연석, 내가 금상을 받으면 너뿐만 아니라 교수님 일상생활을 방해한 모든 사람이 교수님께 공개로 사과해야 할 거야!”방연석이 팔짱을 꼈다.“웃기는 소리. 네가 정말 이번 대회에서 모두를 이기고 금상을 받으면 내 머리를 비틀어서 너한테 공으로 던져줄게.”강민아가 비웃었다.“현실적으로 가능한 벌칙만 얘기해.”방연석 뒤에 있던 남자가 경멸하듯 말했다.“강민아가 금상 받으면 연석이가 거꾸로 서서 똥 쌀 거야.”그런 저급한 장면은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었다.방연석은 친구가 자신을 불구덩이에 떠미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그러자 친구가 조용히 대꾸했다.“넌 댄스 동아리 회장이니까 거꾸로 똥 싸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잖아?”방연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건 쉽고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정말 그런 짓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신고할 거다.“난 찬성.”심은호는 거실 문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들어와서 심한기 옆으로 다가왔다.“아버지, 거꾸로 돌면서 똥 싸는 거 본 적 없죠? 보고 싶지 않으세요?”심한기는 코를 만지며 살짝
‘봉긋하고 하얀...’강민아의 머릿속에 이러한 생각이 떠오를 때쯤 심은호가 고개를 돌려 그녀와 눈을 맞췄다.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강민아는 순간 현행범으로 잡힌 기분이었다.그녀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다가와 말했다.“제가 도와드릴게요.”심은호는 내심 무척 신이 났다.강민아가 화장실에 들어갈 때부터 등에 약을 붓는 행동을 반복해서 연습하며 강민아가 그를 발견한 순간 약물을 바지에 쏟았다.강민아는 그의 손에서 약병을 가져가 면봉에 묻힌 뒤 남성의 등 상처에 살며시 발라주었다.상처를 봉합한 의사의 솜씨가 워낙 훌륭해서 상처 표면이 여전히 붉은 색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허리를 다쳤다는 사실도 몰랐을 거다.“미안해요.”강민아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정이를 구해줬는데 제대로 감사 인사를 못 드렸네요.”그렇게 말하던 그녀는 웃으며 심은호에게 물었다.“제가 밥 한 끼 대접할까요? 식당에 가기 싫으면 제가 직접 해도 돼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저 요리 금방 배워요.”심은호는 이미 다 계획이 있었다.“그럼 한 가지만 약속해 줘요.”“네?”남자는 셔츠를 집어 들고 느긋하게 입었다.강민아의 관심을 끌어당긴 그는 말하다 말았고, 그가 고개를 숙여 단추를 잠그자 강민아는 숨이 턱 막히며 방 안의 공기 흐름도 멈추는 것 같았다.심은호의 움직임이 어쩐지 조금 느려진 것 같았다.남자가 살짝 몸을 돌리고 있어 강민아는 남자의 튀어나온 가슴 근육과 복부의 선명한 조각들, 바지 속까지 쭉 이어진 치골까지 한눈에 보였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꾹 참았다. 강렬한 호르몬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일부러 이러는 거다!그는 단추를 잠그며 강민아의 시선을 유도해 복부에서 아래로 미끄러지게 했다.강민아가 넋이 나간 사이 심은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 순진한 눈빛은 마치 조금 전 느꼈던 유혹이 전부 그녀의 망상처럼 보이게 했다.번뜩 정신을 차린 강민아에게 심은호가 말했다.“오늘 밤 정수
심은호가 말했다.“내가 다쳐서 특별히 전문 레이서를 고용했어.”심은호를 본 민이는 고양이를 본 쥐처럼 반하준 뒤로 숨었다.정수산 레이스는 아마추어 경기지만 서경의 최상위층이 주최한 대회로 장소, 상금, 직원들까지 모든 면에서 최고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대회에 참가하는 재벌가 자제들은 1년 동안 수억 원을 들여 최고급 경주용 차를 개조했으니 당연히 전문 레이서도 고용했다.그래야만 레이스에서 3위 안에 진입할 수 있으니까.이 재벌가 자제들에게 순위권 진입은 체면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물론 조금이라도 더 많은 역할을 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 재벌가 자제들은 보통 조수석에 앉아 드라이버의 내비게이터 역할을 하기도 했다.강민아는 이곳 정수산에 나타난 모든 인물을 알고 있었다.반하준과 결혼한 7년 동안 그녀는 남자가 크로스컨트리 레이스에도 참여할 줄은 전혀 몰랐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드림의 드라이버에 대해 무척 궁금해했다.강나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심은호, 그쪽 레이서한테 우리랑 인사나 나누자고 해.”하지만 강민아는 차에서 내릴 생각이 없는 듯 앉아만 있자 재벌 2세 중 한 명이 소리쳤다.“심은호, 네 레이서 무척 오만하네. 우릴 우습게 보는 거야?”심은호가 가소로운 듯 콧방귀를 뀌었다.“루나가 너희 같은 오합지졸을 우습게 볼 만도 하지.”루나라는 이름이 나오자 많은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일부는 잘못 들었다며 귀를 의심했다.참가자와 관중은 물론 열띤 수다를 떨던 스태프들까지 모두 일제히 조용해졌다.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드러내며 심은호와 드림 자동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세상에, 심은호, 네가 누구를 데려왔다고?”가늘게 뜬 남자의 눈 위로 풍성한 속눈썹이 드리워 눈가에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었다.“루나는 레이싱 업계에 한명밖에 없지. 달의 여신.”루나는 로마 신화에서 달을 의미하며 레이싱 서클에서 그 이름은 더더욱 전설적인 존재였다.재벌가 자제들은 환호성을 질렀다.“대박! 심은호,
루나를 데려왔다는 심은호의 말에 강나현은 시종일관 가식적인 미소만 유지하고 있었다.“전직 국내 여자 1위 레이서에 걸맞게 패기가 대단하네.”강나현은 농담 섞인 어투로 감탄하면서도 속으로는 욕하고 있었다.‘은퇴한 지 5, 6년도 지났는데 아직도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나 봐.’“루나는 지지 않아.”심은호가 자리에 있는 모두를 훑어보다가 반하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여기 있는 사람 중 누구도 그 여자를 이길 수 없어.”심은호는 돌아서서 드림을 향해 걸어갔다.강나현이 팔짱을 낀 채 그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루나가 1등 못 하면 내가 드림 좀 갖고 놀아도 돼?”심은호가 걸음을 멈추는 것을 본 강나현은 의기양양했지만 곧바로 돌아보는 그의 잘생긴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있는 것을 보자 바람이 불면서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뱁새 가랑이 찢어지겠네.”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뭐라 그랬어?” 강나현은 이해하지 못했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배를 감싼 채 웃었다.“하하하, 심은호가 너 보고 뱁새래. 하하하!”“닥쳐!” 강나현은 발을 들어 절친을 향해 발길질했다.심은호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갸웃하며 반하준에게 말했다.“루나도 왔는데 박 대표님께서 상금 추가 안 하시나?”이번 레이싱 대회 1등 상품은 160억 상당의 람보르기니 베놈이었다.반하준은 심은호가 루나를 이용해 거하게 뜯어내도 상관하지 않았다.“루나가 1등을 하면 내 차고에 있는 차 세 대를 가져가라고 해.”다른 재벌 2세들이 환호했다.“박 대표님 통이 크시네!”심은호는 대수롭지 않은 듯 콧방귀를 뀌었다.“차 세 대에 대표님께서 직접 세차하는 것까지, 어때?”강나현이 곧바로 반하준을 옹호했다.“그건 너무하잖아!”반하준은 심은호가 그를 저격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도 자신만의 생각이 있었다.“좋아.”그는 심은호가 제시한 조건에 흔쾌히 동의했다.강나현은 불안했다.“하준 씨, 어떻게 자존심도 다 버리고 남에게 세차를 해줄 수 있
반하준은 이번 경기의 승패에 집착하지 않았다. 프로 레이서도 아니었기에 단지 하늘에 있는 반유하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블랙홀을 몰고 레이스 코스를 달렸다.드림의 조수석에 앉은 심은호는 강민아가 멍하니 블랙홀을 쳐다보는 것을 발견했다.“왜 그래요?”강민아가 속눈썹을 깜빡였다. 헬멧을 쓰고 있어서 심은호는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난 저 차 싫어요.”심은호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1등을 하면 반하준 차고에서 차 세 대를 고를 수 있는데 그때 블랙홀을 택해서 폐차장으로 보내 버려요.”강민아는 그의 말에 웃음이 터지며 주위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완전히 사라졌다.과거 그녀는 반씨 가문 차고에서 ‘블랙홀'에 매료되었고, 차 문이 잠겨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는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그녀가 차 내부를 어루만지고 있을 때쯤 반하준이 그녀를 밖으로 끌어당겼다.그때 아직 두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그대로 무거운 배를 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차 문 옆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남자에게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가득한 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철벽처럼 보였다.“내 차 더럽히지 마.”“하준 씨, 난 당신 아내야...”그녀는 자신이 레이싱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데 반씨 가문 차고에 개조한 슈퍼카가 있을 줄은 몰랐다고 말하고 싶었다.동료 레이서를 만나서 기뻤다.차를 보자마자 그 차가 드림과 함께 질주하는 모습을 상상했다.그의 아내로서 반씨 가문 차고에서 반하준의 스포츠카에 타는 게 뭐가 문제일까.“블랙홀이 너보다 훨씬 비싸. 강민아, 다신 내 눈앞에서 이 차에 손대지 마.”아내에게 매정하게 경고한 반하준은 차 문을 잠그고 강민아를 일으켜 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지나쳐 가버렸다.강민아가 손을 뻗어 차 문에 기대어 일어나려는데 서늘한 기운이 화살처럼 그녀에게 꽂혔다.자리에 앉은 채로 뒤돌아보니 멀지 않은 곳에 남자가 가지 않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고고한 자태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반하준의 차에 앉은 강나현은 드림을 향해 달려가는 두 대의 레이싱카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레이싱 경기에 참여한 재벌 2세들도 자기들만의 전략이 있었다.많은 인원이 참가하는 레이스인 만큼 우승을 위해 일부 차량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두꺼운 헬멧을 쓴 강민아의 맑은 동공에는 긴장감과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그녀는 단호하게 기어를 바꾸고 오른쪽 차 바퀴를 들어 올렸다.심은호는 자신의 시야가 위로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쿵쾅거리는 심장에선 거센 충돌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이것이야말로 일방통행인가!레이싱카의 오른쪽 앞바퀴와 뒷바퀴가 완전히 지면을 떠나고 차량 전체가 옆으로 45도 기울어진 채 달리고 있었다.원래 드림을 추돌하려던 차량의 운전자는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조수석에 앉아 있던 재벌 2세가 고개를 돌려보니 차창 옆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섀시가 보였다.마치 늪에 숨어 있던 거대한 짐승이 그들을 향해 피 묻은 입을 벌린 것 같았다.검은 타이어는 머리 위에 달린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들의 차량 지붕 위에서 돌아갔다.이미 호랑이 굴에 들어온 그들은 상대의 차 바퀴와 그들의 차 윗부분이 곧 충돌할 것을 알았다.“이런 젠장!”그저 취미로 소소하게 레이싱을 즐기는 재벌 2세들이 언제 이런 광경을 본 적이나 있겠나.“헉!”여전히 웅성거리며 환호하던 객석의 사람들이 모두 일제히 찬 공기를 들이켰다.이건 특급 레이싱 묘기였다.드림 레이서가 얼마나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으면 크로스컨트리 레이스에서 위기 상황에 이런 묘기를 펼치겠나.드림의 차체가 옆으로 기울어진 모습이 거대한 파도처럼 민이에게 충격을 선사했다.아이는 온몸에 소름이 돋고 흠칫 떨리기까지 했다. 검은 눈동자도 요동치고 있었다.강민아 쪽 차량이 그녀에게 다가올 무렵 조수석에 타고 있던 남자도 옆으로 달리는 드림의 자동차 지붕과 들어 올린 바퀴를 보았다.“젠장!”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본능이 그에게 빨리 물러나라고 경고하고 있었다.더
“기어 올리고 왼쪽으로 꺾어요.”“오른쪽 세 번째 내리막길, 기어 내려요.”강민아는 지도를 통해 오프로드 구간을 머릿속으로 최대한 외웠지만 레이서는 빠른 속도에서 미처 온전한 사고를 하기 어려웠다.이때 심은호가 그녀의 두뇌가 되어줬다.짧고 간결하게 지시를 내리던 심은호는 정수산의 복잡한 오프로드를 머릿속에서 3D 모델로 구축했다.마치 체스판 앞에 앉아 전체 상황을 바라보는 게임 플레이어처럼 강민아가 전진할 방향을 알려주었다.“하준 씨, 달려!”강나현은 반하준의 속도가 빨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내비게이터로 사용하던 지도는 진작 잊어버린 채 어딘가에 처박아두고 조수석에 앉아 반하준의 동반자 역할만 했다.반하준 역시 강나현의 내비게이터 역할이 필요 없었고 자기 판단력만을 믿었다.반하준은 정수산 경기장 기획과 설계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경기장의 복잡한 도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블랙홀은 2구간에서 다른 차들과 나란히 달리면서 드림에 멀리 뒤처졌다.드림이 큰 코너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U자형 덤프를 완성하자 반하준의 검은 눈동자가 확 커졌다.그도 레이스 트랙에서 드림이 네 코너를 모두 정복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반하준은 드림의 원래 주인이 루나라는 것과 여성 레이서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고, 그 외에는 외모나 구체적인 정보는 조사를 했지만 알아내지 못했다.그도 언젠가 드림과 함께 나란히 경기에 임할 줄은 몰랐다.“오빠, 루나를 우리 팀에 영입하자. 난 루나를 스승으로 모실래!”반유하의 목소리가 반하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가 중간책으로 루나의 연락처를 알아냈을 때 돌아오는 건 루나가 은퇴를 준비한다는 소식이었다.나중에 드림이 경매에 오르고 그 자리엔 반하준도 있었다.드림을 사고 싶었지만 경매 시작과 동시에 누군가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불렀다.사업가인 반하준은 레이싱카를 좋아하고 시장가치를 뛰어넘은 가격에도 살 수 있지만 그 가격에 드림을 사는 것은 그에게 손해 보는 거래였다.손해 보는 사업
“설마 심은호가 부사장이 반씨 가문 사모님일 때부터 좋아한 건 아니겠지?”“왜 그렇게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냈나 했더니, 남의 아내를 탐낸 거였어?”가십거리에 사람들은 흥분하며 가만히 앉아있지 못했다.“설마 강민아가 반하준과 이혼하기 전에 두 사람이 이미...”“어쩐지 둘이 그렇게 빨리 만나더라니.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 시그널 주고받은 거 아니야?”“설마 반 대표가 바람피우는 걸 알고 강민아와 이혼한 건가? 세상에!”다들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파격적인 소문에 재벌가 인사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반하준의 어두운 눈동자에 살기가 번뜩였다.심은호가 그의 평판을 망칠 작정이라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심은호를 끌고 갈 것이다!‘심은호, 너만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감히 내 여자를 노렸으니 너도 똑같이 당해봐.’지유빈은 반하준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강민아 씨 말로는 대표님께서 적극 이혼을 원했다고 하던데요. 왜 이혼하고 나서는 강민아 씨가 누굴 만나는지 이렇게 신경 쓰는 거죠?”강민아는 반하준이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했고, 반하준은 지유빈을 우습게 여겼다.“기자로서 아직도 모르겠어? 심은호가 내 아내를 오랫동안 탐냈다고! 5년 전부터 내 아내를 지켜봤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이혼까지 했는데도 왜 계속 아내라고 말하는 거죠? 그 결혼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대표님 혼자인 것 같은데요.”거대한 스피커가 반하준의 몸속에서 울려 퍼지듯 그의 심장을 뒤흔들고 오장육부에 고통을 선사했다.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더 잘 안다. 강민아가 이혼한 뒤 지유빈은 기자로서 업무 때문에 줄곧 강민아를 지켜봤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세 사람의 가십거리에 집중하는 동안 지유빈만 그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다.깊은 곳에서부터 흔들리는 반하준의 눈동자를 보며 남자가 단순히 강민아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그때 반하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무시하고 싶었지만 지유빈의 말에 궁지로 몰린 그는 갑자기 울리는 전화가 구세주처럼
심은호가 헤어지겠다는 말에 반하준은 악랄한 눈빛을 드러냈다.비록 연기라는 걸 알지만 저렇게까지 말해놓고 어떻게 수습할지 두고 볼 작정이었다.“심은호, 이미 말했으면 지켜야지.”반하준은 심은호에게 강민아와 헤어지라고 강요할 생각이었다.“난 심은호 씨랑 헤어질 생각 없어.”강민아가 말하며 심은호의 큰 손을 감싸더니 반하준에게 경고하듯 말했다.“당신이 우리 사이에서 수작을 부린다고 심은호 씨와 안 헤어져.”반하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심장이 저 깊은 나락으로 던져진 듯했다.“민아 씨...”심은호가 부드럽게 그녀를 부르자 강민아가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두 집안 인수식에서 소란을 피운 건 이 사람이에요. 나가도 그쪽이 아니라 반하준이 나가야 한다고요!”심은호는 입꼬리를 씩 올렸고, 반하준은 누군가 몽둥이로 세게 내리치듯 심장 안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심은호는 강민아의 말에 위로받았는지 두 눈이 조금씩 반짝이기 시작했다.“민아 씨는 나한테 참 잘해주네요.”강민아의 단호한 말 한마디면 그는 만족할 것 같았다.강민아가 부드럽게 그를 달랬다.“내 남자 친구니까요.”“강민아!”보다 못한 반하준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내가 여기 있는데!’그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강민아와 심은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맞닿은 두 사람의 시선이 끈적했다.“민아 씨, 아직 말하지 않은 게 하나 더 있어요.”심은호는 큰 결심을 한 듯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예쁜 두 눈에는 슬픈 기색이 묻어났다.“반하준이 우리 둘을 헤어지게 하려고 병원 시스템을 해킹해 내 진료기록을 훔쳐 갔어요. 내가 병원에 다니는 걸 알고 병이라도 있을까 봐 내 진료기록으로 나한테 헤어지라고 협박했어요!”강민아도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녀가 먼저 심은호에게 반하준이 한 어리석은 짓을 널리 알리자고 제안하기도 했다.지금 심은호는 일부러 다른 사람이 들으라고 이런 말을 하는 거다.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가십거리를 직감한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심은호의
강나현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소리쳤다.“나 저 사람 알아! 강승 직원이야!”그녀는 연설문이 바뀐 것이 반하준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증명하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그 순간 장면이 전환되고 연설문을 바꾼 사람이 복도에서 반하준과 단둘이 만나는 게 보였다.두 사람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잡혔다.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거렸다.강나현은 표정이 확 바뀌며 말문이 막힌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반하준을 돌아보았다.심은호의 연설문이 바뀐 게 정말 반하준과 관련이 있을 줄이야.하지만 반하준이 했다기엔 너무 저급한 수작이 아닌가.강승의 직원을 시켜서 연설문을 바꾼 것도 모자라 감히 회사 안에서 직원과 따로 만나다니.그런 짓을 하면서도 반하준은 카메라를 피할 생각조차 못 했던 걸까.강나현은 놀란 표정으로 반하준을 바라봤지만 남자는 다 들키고도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마치 대형 스크린에서 강승 직원과 공모한 사람이 전혀 아닌 것처럼.강민아는 시치미를 떼는 반하준의 모습에 입을 열었다.“그럼 저 직원에게 반 대표님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물어보죠.”카메라에 찍힌 직원은 당황해서 무수히 많은 사람의 시선을 마주한 채 눈에 띄게 두 다리를 덜덜 떨었다.“부사장님, 반 대표님이 저한테 시켰어요! 저한테 2천만원 줬는데 이 돈 다 드릴게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경악하며 말했다.“정말 반하준이 한 짓이야? 심은호를 노리는 건가?”“심은호와 강민아가 만나니까 전남편이 질투가 나는 건 당연하지. 근데 너무 비열하다.”강민아에게 공개적으로 폭로 당한 반하준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너한테 들킬 줄 알았어. 그냥 네가 어떻게 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야. 심은호의 연설문이 바뀐 걸 알고도 아무 말 안 하길래 난 네가...”반하준은 말을 꺼내며 입에서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그는 수치심도 모르는 듯 이렇게 물었다.“그래, 내가 시켰어. 그게 뭐? 강민아, 심은호 때문에 이
강민아는 무언가를 감지하고 심은호를 올려다보았다.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고, 그 순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그때 심은호가 들고 있던 빈 연설문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어떤 못된 사람이 저한테 빈 연설문을 줬네요.”단상 아래가 소란스러워졌다.“왜 아무것도 없어?”“누가 그런 거야?”“이곳 강승에서 설마 강승 직원이 심은호한테 이런 유치한 짓을 한 거야?”강민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심은호는 탁자 위에 두 손을 얹고 앞으로 몸을 숙여 위에서 첫 번째 줄에 앉아 있는 반하준을 내려다보았다.“인수식에서 내 발목을 잡아 공개적으로 망신당하길 바라는 사람이라면, 분명 태산 그룹이 순조롭게 강승 테크를 인수하는 게 못마땅한 거겠죠.”강민아는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인 빈 연설문을 집어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하준에게로 곧장 걸어갔다.“심은호 씨 연설문 내놔.”강민아가 입을 열자마자 반하준의 옆자리는 물론, 뒤편에 앉아있던 재계 거물들도 어안이 벙벙해졌다.“반 대표가 심 대표 연설문을 바꿔치기했다고?”“말도 안 돼, 반 대표가 왜 그런 유치한 짓을 해?”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여 외쳤다.심은호는 자리에 서서 강민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심장이 강심제를 주입한 듯 쿵쾅거렸다.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날카로운 눈썹을 살짝 치켜들고 반하준을 향해 도발적인 비웃음을 보냈다.‘이럴 줄은 몰랐지. 네가 연설문 바꿔서 민아 씨가 날 위해 나서주네.’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턱을 들어 올려 앞에 서 있는 강민아를 올려다보았다.반하준은 강민아를 이런 각도로 바라볼 때마다 자신이 그녀에게 통제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본인조차 열등한 존재로 전처를 올려다보는 것이 기분 좋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강민아가 그에게 강압적으로 굴수록 그의 몸속 세포는 더욱 꿈틀거리기 시작했다.반하준은 강민아가 왜 이토록 위압적인 모습으로 눈앞에 다가왔는지도 잊을 정도로 두 눈이 흐릿하게 변해갔다.강민아는 반하준이 반응하지 않는
하지만 어느 날부터 그는 더 이상 강민아에게 그런 행동을 바라지 않았고, 강민아가 살갑게 다가오는 행동도 거부하기 시작했다.강민아의 상실감에 휩싸인 표정을 뻔히 보면서도 모르는 척했다.한때 그토록 경멸했던 사람을 이젠 소유할 수가 없게 되었고, 그가 손수 버린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고개를 숙여 강민아를 향해 환하게 웃는 심은호의 얼굴을 보며 반하준은 가슴 속에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블랙홀이 생기는 것 같았다.억지로 시선을 돌리며 스스로 끊임없이 되뇌었다.그냥 브로치일 뿐이라고.강민아가 그에게도 브로치 여러 개를 선물했으니 전혀 질투가 나지 않는다.이미 그녀가 주는 브로치, 넥타이, 시계를 무수히 받았으니까.하지만 강민아가 건넨 선물을 어디에 뒀는지도 잊어버렸고, 그녀가 어떤 걸 줬는지도 도저히 기억나지 않았다.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으니까.강민아가 잔뜩 기대하며 그에게 물건을 건넸지만 그는 받지도 않고 아내에게 아무 데나 놓으라고 했다.강민아가 준 선물을 열어보고 싫은 소리만 해댔던 게 떠올랐다.그녀가 준 것들은 한 번도 사용하지도, 착용하지도 않았다.반하준은 당장이라도 집에 달려가 강민아가 줬던 모든 걸 착용하고 심은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심은호는 예쁜 눈동자로 교활하게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예뻐?”자랑하는 거다.“민아 씨 안목이 참 훌륭해.”그는 손을 뻗어 강민아가 직접 달아준 브로치를 만지며 보물처럼 소중하게 여겼다.강민아는 심은호의 팔 안쪽으로 손을 넣어 최대한 자연스럽게 남자의 팔짱을 꼈다.심은호는 시선을 내려 어깨를 나란히 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옷 사이로 몸이 맞닿은 채 서로 체온을 나누고 있었다.“무시해요.”반하준을 언급하는 강민아의 목소리가 다소 매정하게 들렸다.그녀는 회사에 도착하고 나서야 강성진이 직접 반하준에게 초대장을 써서 건넸고, 도어맨이 강성진의 친필 사인을 보고 반하준을 들여보냈다는 걸 알았다.그제야 강성진도 강민아에게 자신이 반하준에게 초대장을 썼다는 메시
검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채 달 모양의 비녀로 머리카락을 고정하자 비녀에 달린 검은색 술이 머리와 예쁜 조화를 이루었다.몸에는 슬림하게 재단된 회색 정장 재킷에 넓고 편안한 슬랙스를 매치하고 발에는 굽이 낮은 단화를 신은 채 반듯하고 당차게 걸어왔다.강승의 직원들은 이렇듯 반듯한 강민아의 모습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부사장님.”직원들은 강민아를 반갑게 맞이했다.하지만 초대된 다른 재계 인사들은 강승을 손에 넣은 강민아를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되었다.적지 않은 사람들이 멀리서 호시탐탐 강민아를 훑어보았다.“대학 졸업도 하기 전에 결혼한 사람이 회사 부사장이 될 줄이야. 반씨 가문에서 7년 동안 사모님으로 지냈는데 강승 주주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누군가 거들었다.“강승에 쓸만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지. 그래서 망하는 거고.”“강성진이 굳이 자식 중에서 후계자를 고른다면 차라리 강나현이 더 나은 것 같은데? 적어도 강성진 곁에서 자란 자식이고 부신 그룹 대표 반하준과 친구잖아.”“맞아. 재계에서는 시험 점수가 아니라 인맥이 중요하지. 강나현은 강민아보다 서경에서 아는 사람도 많잖아. 근데 하필 정의감이 넘치는데 머리는 멍청해서 사람들 다 보는 곳에서 제 아빠 스캔들을 퍼뜨릴 줄이야.”누군가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다.“듣기론 강나현이 누군가의 계약으로 강성진 스캔들을 퍼뜨렸다던데?”“뭐? 누가 감히 강씨 가문 아가씨를 건드려?”“이번 일에 최대 수혜자가 누구겠어. 강민아가 똑똑한 건 맞지만 그걸 자기 핏줄을 상대하는 데 쓰잖아. 저런 사람은 언젠가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그들이 귓속말을 나누는 동안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제복을 입은 한 남자가 휴대폰을 꺼내 이들의 이름을 적고 있었다.심은호는 자신과 강민아의 초대를 받은 이들 중 강민아에게 불만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작은 수첩에 그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두고 나중에 하나씩 처리할 거라고 했다.....심은호가 뒤를 돌아보니 강민아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입꼬리를 올
“심 대표님, 우강 그룹 인수를 축하드립니다.”“우강 그룹을 인수했다는 건 강 부사장과 좋은 소식이 있다는 뜻인가요?”심은호와 강민아가 교제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경 전체가 술렁였다.재계 인사들이 이곳에 참석한 것도 직접 현장에서 소식을 전해 듣기 위해서였다.심은호가 한 손을 양복바지 주머니에 넣자 양복에 주름이 잡혔다.“앞으로 민아 씨와 저에게 좋은 소식이 생기면 가장 먼저 여러분께 알려드리죠.”참석한 사업가들은 심은호와 강민아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채며 두 사람이 정말 사랑하는 사이라고 생각했다.“잘됐네요!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부사장님은 남자 복도 많네요. 누가 봐도 부러워할 정도로 운이 좋아요.”모두가 심은호와 강민아를 놀리며 열광하고 있을 때, 갑자기 주위 목소리가 작아지며 곧이어 심은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씩 바뀌었다.심은호가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비서와 함께 나타난 반하준이 보였다.반하준은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심은호를 향해 곧장 걸어왔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두 기운이 서로 부딪힌 듯 주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몇 발짝 뒤로 물러서야 했다.살짝 내리깐 반하준의 살벌한 눈빛은 마치 사람의 몸 위를 기어다니는 냉혈한 짐승처럼 보였다.그가 햇빛도 닿지 않는 축축하고 음침한 어둠이라면 심은호는 따스한 햇살 아래 반짝이는 천사였다.심은호는 얇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당당하게 웃었다. 앞머리가 살짝 흔들리며 반듯하고 윤기 도는 이마를 돋보이게 했다.반하준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그는 쉽게 현장 분위기를 장악했다.“반 대표님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길가의 쥐새끼처럼 쫓겨날 거란 걸 모르시나?”반하준은 손에 쥔 초대장을 번쩍 들어 보였다.“나 초대장 있어.”“나랑 민아 씨가 직접 초대장을 써서 사람들에게 나눠줬어. 우리가 네 이름을 쓴 기억은 없는데.반하준의 귀에 ‘우리'라는 단어가 유난히 거슬렸다.그는 점점 더 싸늘한 눈빛으로 심은호를 바라보며 건방지게
입을 크게 벌리고 거침없이 쏟아내는 통곡이 텅 빈 농구장에 울려 퍼졌다.강민아가 건네준 귤을 움켜쥔 모습이 꼭 버려진 새끼 짐승 같았다.“도련님!”경호원이 당황하며 서둘러 민이를 달랬지만 민이는 도저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반하준이 다가와 물었다.“반현민, 왜 울어?”툭하면 감정을 터뜨리는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5살이나 돼서 왜 자꾸 울어?”강민아가 민이에게 귤 한 통을 건네는 걸 봤다. 그녀가 가자마자 아이가 우니 반하준은 민이의 무릎 위에 놓여 있던 플라스틱 상자를 가져가려고 손을 뻗었다.“안 돼요!”민이는 비명을 지르며 즉시 몸을 숙여 반하준이 강민아가 준 귤을 가져가려는 것을 막았다.마치 그 귤 상자가 자신의 소중한 소유물인 것처럼.반하준은 차가운 얼굴로 경고했다.“울지 마!”그는 아이를 달랠 줄도 몰랐고 그저 많은 사람 앞에서 갑자기 우는 민이가 못마땅할 뿐이었다.민이는 반하준이 강민아가 준 귤을 빼앗을까 봐 재빨리 손을 뻗어 귤을 입에 넣었다.귤락을 벗기지 않은 귤에서 살짝 쓴맛이 느껴졌지만 민이는 귤의 신맛과 눈물의 쓴맛을 목구멍으로 삼켰다.예전에는 강민아가 귤락을 깨끗이 뜯어내지 않으면 마구 난동을 부렸지만 이제는 그럴 자격을 잃었다.강민아가 귤을 까주는 것도 드문 일이기에 민이는 플라스틱 상자에 담긴 귤을 모두 꺼내 입에 넣었다.반하준은 민이의 입가에서 즙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며 볼품없이 먹는 아들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경호원에게 휴지를 달라고 부탁한 반하준은 허리를 굽혀 민이의 입을 닦아주었다.민이는 반하준이 강민아가 준 귤을 빼앗아 갈까 봐 얼굴을 돌렸고, 반하준은 민이가 자신을 경계하자 무기력하고도 짜증스러운 어투로 말했다.“안 빼앗아!”...일요일, 강승 테크 건물에서는 곧 인수식이 열릴 예정이다.마이바흐 650 폴만의 바퀴가 땅을 밟으며 대문 앞에 멈췄다.제복을 입은 도어맨이 계단을 내려와 문을 열자 심은호가 차에서 내렸다.짙은 회색 스리피스 수트가 187의 큰 키를 돋보이게 하
반하준은 정이와 함께 한 시간 넘게 연습했다. 그의 가슴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심하게 오르내렸고, 거친 헐떡임은 텅 빈 농구 코트에서 선명하게 들렸다.땀은 홍수처럼 그의 머리에서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고 흠뻑 젖은 검은 머리카락은 하나둘씩 아래로 내려와 그의 잘생긴 이목구비를 덮었다. 흐트러진 모습에 전처럼 그렇게 날카로워 보이지 않았다.비라도 맞은 듯 땀이 얼굴을 타고 줄줄이 떨어지고 있었다.외투를 벗은 뒤 입고 있던 니트 조끼와 남색 스포츠 상의가 땀에 젖어 짙은 색으로 변했다.반하준은 몸을 살짝 구부린 채 쓰러지지 않으려고 모든 의지를 동원해 버티고 있었다.하지만 두 다리는 시멘트에 잠긴 듯 걸음을 옮길 수도 없었다.꽃밭에서 뛰어내린 정이는 의상을 입은 채 핑크빛 얼굴을 내놓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땀과 함께 이마에 붙어 있었다.아이가 강민아에게 달려가자 그녀는 정이가 사용하는 텀블러를 건넸다.정이가 벌컥벌컥 물을 마시는 동안 강민아는 작은 수건을 가져와 정이의 옷깃 사이로 손을 넣고 등을 닦아주었다.쪼그리고 앉은 강민아가 다시 정이의 옷 속에 손을 넣어 만져보고는 이렇게 말했다.“옷 다 젖었으니까 일단 옷부터 갈아입을까?”“네.”정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강민아는 정이를 탈의실로 데려갔다. 아이의 연습을 보러 오면서 몇 벌의 옷과 신발, 양말까지 여분으로 챙겨온 것이다.정이가 양말을 벗자 강민아는 자기 양말도 축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새 신발과 양말을 신긴 뒤 세면대로 데려가 수건을 적셔 아이의 얼굴과 손을 닦아주었다.그러고는 다시 정이를 데리고 나오면서 미리 준비해 둔 과일과 기력을 보충해 줄 초코바를 건넸다.정이는 의자에 앉은 채 두 다리를 흔들거렸다.강민아는 민이에게 다가가 귤이 담긴 플라스틱 상자를 건넸다.“먹을래?”민이는 흠칫하며 강민아가 건네준 플라스틱 상자를 황급히 받고는 고개를 숙여보더니 무의식적으로 말했다.“난 하얀 실 싫은데.”그의 말에도 강민아는 아무런 대꾸가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