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제27화그날 저녁, 은하의 집 주방에서는 오늘도 음식을 만드는 소리로 가득했다.평소보다 일찍 퇴근해,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우주.은하는 말없이 식탁에 앉아, 오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냉장고 문이 자꾸만 열리고, 정신없이 바쁜 손길이 자꾸만 오갔다.“오빠. 양이 너무 많지 않아…?”“일주일이나 비우는데. 충분히 해 놓고 가야 마음이 편하지.”“배달 시켜 먹어도 돼.”“안 돼. 잘 챙겨 먹어야 돼.”우주가 계란을 풀며 덧붙였다.“약 말이야, 가벼운 증상일 땐 되도록 먹지 말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꼭 챙겨 다니고. 알겠지?”“나, 오빠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잘할 수 있어.”“알아. 이건 그냥 습관 같은 거야. 그래야 오빠 마음이 놓이니까.”은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문 밖, 거리는 이미 어둑해지고 있었다. 혼자 있는 일주일이라는 시간. 정말 혼자서 잘 버틸 수 있을까?긴 시간 혼자 남는 상황은 처음이었지만, 은하는 우주와는 다르게 별 걱정이 되지 않았다. “맞다. 새벽 출발이라, 내일은 학교 혼자 가야 하는데, 괜찮겠어?”“걱정 마시고 잘 다녀 오세요.”***다음날 새벽, 은하는 희미한 새벽빛이 비치는 천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벌써 가는 거구나….’ 방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부스럭 거리는 소리들. 옷감이 스치는 소리, 서랍이 조심스레 열리는 소리까지.우주는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려 했지만, 은하는 원래 잠이 깊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깊이 잠드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이불을 걷어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푸른 여명빛이 내려앉은 창밖.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선 은하의 눈에 커피를 내리고 있는 우주의 모습이 보였다.테이블 아래에 놓인 묵직한 캐리어. 위에 올려진 서류와 여권까지.“미안, 시끄러워서 깼구나?”“괜찮아.”“좀 더 자지. 아직 일러.”“언제 출발해?”“이제 나가려고.”가슴 한 켠이 묘하게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
Last Updated: 2026-06-07
Chapter: 제26화홀로 교실로 돌아가던 중, 복도에서 한 학생과 어깨가 세게 부딪힌 이현. 차가운 눈빛이 그 학생을 매섭게도 노려보았다.“야. 눈깔을 어디다 두고 다니냐?”“미, 미안해….”“됐으니까 꺼져.”학생은 재빨리 자리를 떠났고, 그 모습을 찬희네 무리들이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주먹까지 쥔 모습에 키득거리는 소리가 얄밉게 울려 퍼졌다.“맞지? 쟤 요즘, 기분이 영 별로라니까.”“또 강은하 때문인가?”툴툴 거리며 교실로 돌아온 이현의 눈 앞에 영주가 밝은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야, 백이현! 어디 갔다 와. 한참 찾았잖아.”“왜?”“학교 끝나고 백화점 구경 가자. 겨울 신상 엄청 들어왔대!”“됐다. 관심 없다.”“왜 또 그래? 태하는?”그때였다. 영주의 눈에 은하, 그리고 민희와 함께 웃으며 교실로 들어서는 태하의 모습이 보였다.그 광경을 마주한 영주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앙다물었다.“짜증 나네. 진짜.”그 짜증스러운 목소리에도 이현은 별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지만, 이상하게도 교실로 돌아온 세 사람의 모습을 바라본 그의 기분 역시 찝찝했다. 머릿속에는 아직도 던졌던 말이 맴돌고 있었다.기분이 상한 영주는 자신의 교실로 돌아가며 세 사람을 향해 차가운 말을 던졌다. “고새 절친이라도 됐나 봐? 셋이 아주 보기 좋네~”은하는 별 반응 없이 영주를 지나쳐 버렸고, 태하와 민희 역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반응들이 더더욱 기분 나빴고 말이다.자신의 반으로 돌아온 영주의 입이 삐죽 나와 있었다. 자리에 털썩 앉자 핸드폰 진동음이 짧게 울렸다. [이영주. 학교 끝나고 얘기 좀 해.]‘박찬희? 얘가 날 왜 찾지?’곧바로 메시지를 입력하려다 멈칫했다.찬희와는 크게 엮인 적도 없었고, 평소에 그렇게 자주 대화하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영주는 찬희의 무리가 싫었다. “뭐야, 갑자기.”핸드폰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이내 메시지 창을 닫았다. 지금은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으니까.
Last Updated: 2026-06-07
Chapter: 제25화다음날, 출근을 한 우주는 곧장 설희의 방부터 찾았다. 한 손에는 테이크아웃 커피잔이 들려 있었다. “김설희, 잠깐 시간 돼?”서류를 정리하던 설희가 우주의 목소라에 고개를 들었다. 반갑게 웃으며 들어오라는 손짓.“아침부터 웬일이야? 내 방에 다 찾아오고?”“그… 내일 학회 말이야. 이번엔 가야 할 것 같아서.”“잘 생각했어. 이번엔 원장님이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 같더라.”“그래서 말인데… 은하 부탁 좀 하려고.”역시나 설희답게 고개부터 끄덕이는 모습에 우주는 안도했다.“나야 좋지. 은하도 오랜만에 보고. 근데 은하는 뭐래? 이렇게 부탁하는 거 알면 또 싫어할텐데.”“어, 안 그래도 민폐라더라.”설희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것 봐. 근데 은하 말도 맞긴 해. 고2면, 한참 예민할 나이잖아.”“그래도 미성년자잖아. 아직은 불안하기도 하고…”그가 걱정하는 건, 은하가 단순히 혼자 있는 게 아니다. 혼자 있을 때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 그게 가장 두려웠다.그리고 그 마음은, 옆에서 오랜 시간 봐왔던 설희 또한 알고 있었다.“그럼 이렇게 하자. 갑자기 찾아가기 보단, 은하랑 연락해서 의견 묻고 갈게.”“고맙다. 김설희.”“너도 좀 내려놔. 네 인생은 은하를 돌보는 게 전부가 아니야.”단호하게 떨어진 말에 우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설희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건 우주에게 있어서 만큼은 가장 어려운 일.은하는 이미 그의 전부다. 유일하게 지켜야 하는 세상이란 말이다.***민희와 함께 초코우유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은하. 민희와 함께 있는 모습은 확실히 자연스러워 보였다.태하가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가 말을 걸었다.“매점 다녀오는 길이야?” “응.”초코우유를 손에 쥐고 야금야금 빨아 마시는 모습.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태하에 눈에는 그 모습이 귀여워보였다.“은하야, 너 초코우유 좋아해?”빨대를 물고 있는 입술이 잠시 멈칫하더니, 별 의미 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냥.”“앞으론
Last Updated: 2026-06-06
Chapter: 제24화주방에서는 오늘도 싱크대 물이 흐르는 소리와 도마에 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부드럽게 공간을 메웠다.저녁을 준비하던 우주가 미소를 지었다. 은하를 집에 데려다준 태하라는 녀석, 그 녀석의 서글서글한 말투와 표정이 자꾸만 떠올랐다. ‘벌써 친구가 생긴 걸까?’기분이 묘하게 들떴다. 항상 혼자였던 동생이, 외로운 뒷모습만 보이던 동생이 누군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따뜻해졌다.“은하야. 밥 먹자.”“응.”평소처럼 마주 앉아 저녁 식사를 시작한 두 사람. 우주가 은하의 눈치를 스리슬쩍 살피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기 시작했다.“아까 데려다 준 친구, 태하라고 했지?”“응.”특별한 의미 없이 던진 듯한 짧은 대답. 하지만 우주는 그 반응조차도 다르게 받아들이려 노력 중이었다.생각해보니, 이번 학교에서 만큼은 유독 빠른 시간 안에 적응을 하는 것 같았다. 공황증상으로 인해 쓰러졌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저번에 보건실 앞에서도 가장 표정이 안 좋던데. 태하는 어떤 애 같아?”“몰라.”“응? 몰라?”“아직은 잘 모르겠어.” 단순히 관심이 없어서 인지, 아니면 감정을 숨기려는 방어막이 발동한 건지. 정확하게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런 태도조차 분명한 의미가 있었다.“국 식겠다. 어서 먹어.”“오빠도.”***늦은 저녁, 방에서 쉬던 은하가 물을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우주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걸까.“안된다니 까요. 저번에도 분명 말씀 드렸잖아요.”“아니, 동생이 아직 학생인데 혼자 있다니까요?”“당장 내일 모레 일정인데, 갑자기 또 이러시면….”오빠답지 않게 감정이 격해지고, 언성이 높아진 듯 한 목소리.통화 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한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이건,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것. 은하는 조심스럽게 우주의 방 쪽으로 다가가 귀를 귀울였다.“일주일은 너무 길어요. 안됩니다.”“네. 그럼 차라리 그만두겠습니다.”불편한
Last Updated: 2026-06-06
Chapter: 제23화하교 시간이 되고, 태하가 은하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강은하.”이 이름을 부르기까지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얼마나 용기를 냈던지.“응?”“학교 끝나면, 보통 뭐 해?”예상 밖의 질문에 은하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그건… 왜?”“그냥, 궁금해서.”“그냥 집에 가.”“오늘은 그냥 가지 말고, 나랑 가자.”은하는 걸음을 멈춰 태하를 똑바로 바라보았지만, 태하는 너무도 태연한 모습이었다. 속으로는 잔뜩 긴장했지만 말이다.“그냥 같이 걸으면서 얘기나 하자고.”이상하게 싫다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태하는 쓰러진 자신을 안고 보건실로 달려갔었고, 이현과 불편한 신경전이 생겼을 때, 혹은 생길 것 같은 순간에 늘 제 편이었으니까.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그래.”태하가 피식 웃으며 가방을 어깨에 둘러맸다.처음으로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두 사람.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던 중, 석양빛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러다 학교의 상징은 큰 은행나무 앞에 다다른 순간, 은하가 문득 발 걸음을 멈추었다.태하 역시 마찬가지였다.“왜 그래?”“이 학교에서는, 이 은행나무가 제일 예쁜 것 같아.”태하는 이해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은행나무를 천천히 올려다보았다.“이제 잎도 다 떨어지고, 가지만 남았는데? 뭐가?”정말이었다. 은행나무는 앙상한 가지들만 남아 차가운 바람을 고스란히 견디고 있었다. “그래도, 봄이 되면 또 다시 푸른 잎이 돋잖아. 반드시.”“반드시?”“응. 결국엔 푸르게, 노랗게 변할 거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구나.2년이라는 시간 동안 매일같이 이 앞을 지나면서도 그냥 단순한 나무 그 자체로만 보아왔는데, 이제 막 전학 온 은하는 너무도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반드시 다시 푸르러질 것을 굳건히 믿고 있었다. 그 말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속 깊이 와 닿았다. 이런 감정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오늘부터 태하에게는, 앞으로도 매일같이 마주
Last Updated: 2026-06-06
Chapter: 제22화은하는 달라진 아이들의 반응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어색함은 생각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하지만, 변화 속에서 또 다른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백이현. 그는 이전보다 더 자주, 더 오래도록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업 중에도, 쉬는 시간에도, 가끔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그의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이 계속해서 이어졌다.그러던 어느 날, 쉬는 시간.이현이 자연스럽게 은하의 책상 앞으로 걸어왔다. “강은하.”“…….”“우리, 친구 할래?”은하는 순간 할 말을 잃었고, 태하는 불편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학생들은 믿기지 않는 모습에 또 다시 웅성거렸다.“야 대박, 방금 들었어?”“백이현이? 설마.”“또 장난이겠지 뭐.”이현의 표정은 장난이 아니었다. 평소처럼 장난기가 담긴 표정이 아닌 진지한 표정으로 은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튀어나온 어이없는 대답.“싫어.”너무도 단호한 거절에 교실 분위기는 더더욱 조용해졌다. 모두가 숨을 죽이며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지켜보고 있었으니까.“왜?”단순한 궁금증이 아니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다가 간 건데, 그걸 보란듯이 거절한 강은하. 누군가는 그저 가볍게 웃어 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현은 아니었다. 진심이었으니까. “너에 대해 알고 싶지 않으니까.”이현의 눈빛이 처음으로 강하게 흔들렸다. 은하는 자신에게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 때마침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고, 기분이 언짢아진 이현은 교실 문을 박차고 떠나 버렸다. “백이현 빡친 거 오랜만에 보네.”“진짜. 강은하 대박이다.”은하는 그 모든 웅성거림에도 말없이 교과서를 펴고, 수업을 준비했다.태하 역시 그 상황을 지켜보며, 이제야 안도한 듯 고개를 돌렸다.***교실 밖을 나선 이현은 옥상에 위치한 작은 창고로 향했다. 가끔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찾는 곳이자 몇몇의 학생들이 가끔 올라와 흡연을 하는 곳
Last Updated: 2026-06-05
Chapter: 제29화그날 저녁, 뒤처리를 하느라 손톱까지 새까매진 세준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그리고 리아에겐 네 번째 조건이 생겼다.“주방 출입 금지.”“아저씨! 자격증 준비 중인데! 어떻게 그래요!”“씨발, 어차피 넌 필기에서 탈락이라니까?”진짜 너무해. 이제 막 시작인데, 벌써부터 탈락이라는 소리나 내뱉고. 무시도 정도가 있지.“붙으면요? 이러다 진짜 붙으면요?”“그때 다시 얘기해. 혈압 올라 딱 돌아가실 것 같으니까.” 리아는 죄를 진 게 있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일단은 필기부터 붙자. 그리고 나면 이 말도 안 되는 네 번째 조건은 반드시 철회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후퇴를 택했다.“알겠어요. 근데요 아저씨.. 아저씨 손 어떡해...”새까매진 손을 보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그동안 붉은 피는 수 백 번도 묻혀봤지만, 이딴 한심한 계집애가 태워먹은 프라이팬이나 닦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저녁이나 시켜.”“왜요..? 우리 오늘은.. 이모님 반찬 안 먹어요?”“시키라면 시켜. 썅.”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런가. 오늘은 뭔가를 차릴 기운도, 치울 기운도 없었다. 그리고 리아는 눈치도 없이,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로제 떡볶이를 시켜 버렸다.뚜껑을 열자, 커다란 중국 당면이 꼭 자신을 놀리고 있는 기분이었다.“아...”“완전 맛있겠죠? 많이 드세요 아저씽!”“개 씹...”***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다. 리아는 주방 출입금지 명령을 곧잘 지키면서도, 이모님이 오셨을 땐 알아서 예외라고 결정한 듯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다.“글쎄, 오믈렛이 순식간에 다 타버린 거 있죠?”“오믈렛은 불을 가장 약하게 키고 모양을 잡아야 해요.”“제가 정말.. 그 어렵다는 자격증을 딸 수 있을까요?”“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가 있을 거에요.”리아가 느끼는 이모님은 참 따뜻한 분이었다. 이모님 역시 처음엔 색안경을 꼈었다. 어린 여자가 도세준 대표와 동거를 한다는 사실이 의아했지만, 자꾸만 보다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강리아는 꽤 귀엽고,
Last Updated: 2026-06-07
Chapter: 제28화퇴근을 하고 현관문을 연 세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따라 요망한 강리아가 마중을 나오지 않았으니까. 성큼성큼 거실로 향하자, 거실 테이블에 엎드려 잠이 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저 책들은 다 뭐지? 아, 아까 서점에 들러 샀다는 그 자격증 문제집인가?“강리아.”낮게 흘러든 저음에 리아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세준을 보자마자 히죽, 너무도 환하게 웃는 모습.“아저씨! 언제 왔어요?”“자격증 공부를 한다고? 갑자기?”“네! 한식, 일식, 양식! 모조리 다 딸 거예요!"솔직히 전에 말했던 공인중개사보단 나을 것 같았다. 아니, 조금 더 현실성이 있어 보였다.게다가 요리까지 해서 갖다 바치면 이 얼마나 예쁜 장난감인가. 일단, 기본 실력부터 좀 확인해 볼까.“감자에는 무슨 독이 있지?”“음.. 사포닌이요.”“씹, WHO는 무슨 기관 약칭인데?”“후? 누구? 사람 찾는 곳인가..?”“애기야. 그냥 때려치워.”무식에도 정도가 있지. 이건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상식의 문제잖아. 아무래도 괜한 기대를 했나 보다. 어이가 없어 자리를 떠나자, 리아가 부리나케 일어나 뒤를 졸졸 쫓았다.“왜요? 다 틀렸어요?”“아무것도 하지 마. 화딱지 나니까.”“아저씨는 나이가 많으니까 아는 거고요! 저도 아저씨 나이 되면 다 알게 되거든요?”“어련히 그러시겠어.”드레스 룸으로 향해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내자, 리아가 옷깃을 붙잡아 벗겨냈다.그래. 차라리 이런 거나해. 쓸데 없는 헛짓거리 하지 말고.“우리 애기는 섹스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고.”“씨.. 저 섹스 잘 하거든요?”잘 하기는, 나랑 했던 게 처음이었으면서. 어디서 구라를 치고 앉아 있어.“누가 그래? 난 그런 말 한 기억이 없는데?”“엄청 큰 고추가 막 들어와도 안 울잖아요!”뭐, 그거야 솔직히 인정.이제는 좆도 곧잘 삼켜내고, 벗겨 놓으면 또 기깔나게 야하고 이쁘니까. 무식함 정도는 너그럽게 용서가 됐다.“팔은 안 아파?”“네. 근데 이거 피임 효과 엄청
Last Updated: 2026-06-07
Chapter: 제27화이번에 도착한 곳은 서점이었다. 굉장히 의외인 장소이긴 했지만, 기철은 터벅터벅 리아의 뒤를 따랐다. 그때, 핸드폰이 울리며 익숙한 이름이 떠올랐다.김준수, 자신들의 동선을 실시간으로 체크하고 있는 존재이자, 징징거릴 수 있는 유일한 인물.“어! 준수야...!”“형님, 어딜 그렇게 쏘다니십니까.”그러니까! 너도 다 봤지? 내가 이 좆만한 기지배한테 질질 끌려다니고 있다는 걸.“내 의견이 아니야.. 나 지금 힘들어서 딱 뒤져버리겠다.”“형수님은 되게 신나 보이십니다.”아, 좆만한 기지배는 취소다. 형수님이다. 형수님.“너도 힘들지?.. 너도 이제 그만 쉬고 싶지 않니?”“아니요? 간만에 재밌습니다.”“야 이 개새끼야!”뚝.준수 역시 기철을 놀리듯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긴, 편하게 앉아 모니터로 지켜보는 게 뭐가 그리 힘들겠어. 근데 나는..? 도대체 언제까지 기가 쪽쪽 빨려야 하는 거냐고!“리아야!”“아저씨! 여기요!”애가 무슨 날다람쥐도 아니고, 하마터면 시야에서 놓칠 뻔했다.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가니, 리아는 턱 끝을 두드리며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뭐 사러 온 건데.”“저요, 자격증 준비하려고요!”푸흡,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나올 뻔했다.“아니야, 그런 거 안 해도 돼. 마스터 돈 엄청 잘 버셔. 그러니까 집에 가자.”“한식? 양식? 일식? 아.. 뭘로 하죠?”“요리는 해봤고?”“아니요!”그만하자. 이번 목적지는 제대로 틀려먹었어. 너랑은 어울리지 않는 곳이야.“그렇구나.. 그럼... 조금 더 신중하게 고민해 보고 다시 오는 걸로..”“에라잇! 그냥 다 해야겠다!”결국 종류별로 문제집을 다 구매한 뒤에야 서점을 나올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편으론 기특하기도 했다. 팽팽 놀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 그건 또 눈치가 보였던 건가.“붕어빵이다아아! 대박...!”기특은 개뿔, 차라리 기절을 시키고 데려는 게 더 현명한 판단이었나 보다.아니야. 그건 안 돼. 그것만은
Last Updated: 2026-06-06
Chapter: 제26화“리아야. 가자!”기철의 목소리에 리아가 침실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새까만 선글라스는 작은 얼굴을 반쯤 덮었고, 벙거지 모자에 마스크까지.출근 전, 세준의 경고 같은 당부에 나름 신경 쓴 결과물이었다.“기철 아저씨. 저 이상해요?”“음, 아니야. 됐어. 이게 맞아.”오랜만에 집 밖을 나선 리아는 잔뜩 신이 났다.병원으로 향하는 길, 차 안에서 쫑알쫑알. 한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그럼 아저씨도 투자회사 직원이에요?”“응.”“대빵 아저씨랑은 친해요?”“모신다니까.”“그러니까 왜요?”“대빵이니까!”벌써부터 기가 쪽쪽 빨리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병원은 멀지 않았고, 준수가 미리 손을 써둔 덕분에 접수도 문제없었다. “대박! 제 이름이 김진아래요. 푸하. 김진아가 뭐야앙!”난데없는 범죄 고백에 기철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당황했다.“조용. 누가 들으면 큰일 나.”“근데 투자회사에서 별걸 다 하네요?”“어? 리아야! 너 부른다! 김진아 환자! 4번 진료실로 빨리 가!”리아가 진료실에 들어가자마자, 기철은 핸드폰을 꺼내 세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어. 도착했어?”“예. 지금 막... 진료실에 들어갔습니다...”유난히 힘이 빠진 목소리. 엄살이 아니라, 기진맥진이라는 단어가 자꾸만 떠올랐다.“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저.. 힘이 조금 듭니다.”“어. 뭔지 알아. 조금 더 고생해.”뚝, 전화가 끊기고 기철은 핸드폰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눈은 또 퀭한 것이. 이건 보통 몸살이 오기 전 몰골인데.오전 10시부터 이렇게 힘이 빠지는 느낌은 과음을 한 날을 제외하곤 난생처음이었다.“기철 아저씨!”아... 시술 시간은 또 왜 이렇게 짧아.리아가 팔뚝을 움켜쥐고 기철을 향해 뛰어왔다.“벌... 벌써 끝났어?”“네. 주사처럼 딱! 놓고 주의 사항 설명해 주고. 그게 끝이던데요?”“어.. 집에 가자.”응? 벌써? 얼마만에 외출인데 이 아저씨는 왜 이렇게 센스가 없어.
Last Updated: 2026-06-06
Chapter: 제25화그 사이, 리아는 옷을 갈아입는 세준을 바라보며 쫑알거리고 있었다.“아저씨! 저 아저씨는 왜 또 왔어요?”“며칠만 같이 지낼 거야. 그렇게 알고 있어.”“왜요?”“씹.”그 한 마디에 리아의 입이 잠시 다물렸다.하긴, 여긴 아저씨네 집이니까. 누가 며칠을 와서 지내든 그건 다 아저씨 마음이지 뭐. “근데요 아저씨!”“어.”“저 생리 시작했어요.”젠장할, 솔직히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당장 오늘부터 강리아를 못 먹는다니. 저 맛있는 걸 눈앞에 두고도 며칠이나 참아야 한다니. 그래도 티를 낼 순 없지. 암, 그게 맞는 거지. “생리통은.”“참을만해요!”“나와. 저녁 먹게.”오늘 저녁은 단둘이 아니었다. 기철이 실실 웃으며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테이블 위엔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갖가지 반찬들이 정갈하게 놓였다. 세준이 기철을 바라보며 넌지시 말했다.“내일 얘 데리고 병원 좀 다녀와.”“알겠습니다.”기철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리아는 아니었다.병원이라면 당연히 임플라논 시술일 터. 당연히 아저씨랑 같이 갈 줄 알았다.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근데 이제 딱 두 번 본, 오늘에서야 이름을 알게 된 사람이랑.. 다른 곳도 아닌 산부인과를 다녀오라고? “싫어요!”“왜.”“아저씨랑 같이 갈래요!”“안 돼. 위험해.”“뭐가요! 싫다고요..!”세준은 여전히 강 회장을 믿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보다는 기철이와 가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을 뿐. 문제는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 줘야 이 기지배가 알아들을지. 그것부터가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래서 결국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다.“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아저씨 미워!”눈치만 보던 기철이 스리슬쩍 끼어들었다.“어허! 리아야! 마스터께서 바쁘시단다! 내일은 아저씨랑 함께 갈 것이니 그리 알거라!”“....?”이 황당할 정도로 빠른 적응력은 뭐지? 게다가 요상스러운 사극 말투는 또 뭐고. 당황한 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Last Updated: 2026-06-05
Chapter: 제24화붙잡혔던 손목이 풀리고, 순식간에 자세가 바뀌었다. 리아는 침대 헤드를 붙잡은 채 엎드렸고, 이번엔 젖가슴을 쥐어짜는 동시에 거대한 좆기둥이 뒤에서 파고들었다. 깊숙하게 파고드는 각도에 가녀린 팔이 부르르 떨려왔다. 눈가는 물론, 목덜미부터 허리까지. 온몸이 땀에 젖어 번들거렸다. 세준은 잔뜩 부푼 음핵을 손끝으로 굴려대며 쾅쾅, 힘을 실어 박기 시작했다.“웁, 웁! 우웁!”“아저씨 좆 터지겠어. 애기 때문에 하루도 쉬질 못하잖아.”그때였다. 리아의 허벅지와 엉덩이 살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경련했다.침대 헤드를 붙잡았던 손은 어느새 세준의 팔뚝을 세게 움켜쥐었고, 음핵을 굴려대던 손가락에 뭉근한 액체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어쩜 이렇게 쫀득할까. 어쩜 이렇게 예민할까. 온 힘을 실어 자궁구를 꿰뚫을 듯 박아주었다. 좆기둥을 쥐어짜듯 달라붙는 질벽의 감각에 순식간에 뽑아내자, 뜨겁게 달아오른 보지에서는 물줄기가 민망할 정도로 터져버렸다. “읍.... 으...”절정의 여운에 허덕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새하얀 엉덩이에 정액을 흩뿌렸다. 퓻퓻퓻, 오늘도 정액은 몇 줄기나 터져 나와 허리까지 진득하게 적셔버렸다. 이제야 손을 뻗어 물고 있던 팬티를 빼주자, 억눌렀던 숨이 세차게 터져 나왔다.“하아.. 하아.....”“애기. 시트가 물 바다야.”“아.. 아저씨.. 미안해요..”미안하긴, 질질 싸는 모습이 이렇게나 예쁜데. 이렇게나 귀여운데. 아저씨는 백 번도 더 갈아줄 수 있단다. 그러니까 리아야, 앞으로도 참지 말고 마음껏 싸.***“어. 준수야.”“마스터. 기철 형님 쪽은 한국제약 타깃이 분명합니다.”“미리 알아챘다 그 말인가?”“확실합니다. 유진후와 접촉이 있었습니다.”유진후, 한국제약 부사장이 죽이지 못해 안달인 비열한 새끼. 호락호락하지 않은 놈이란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계집질에 온 정신이 팔려있는 건 또 아니었다니. 의외네.“기철이 거주지부터 물색해.”“예. 마스터.”노출된 거주지는 버리는 게 상책이다
Last Updated: 2026-06-05
Chapter: 60. 평범하게, 제대로6개월 뒤, -KP 전자에서 출시한 VR 서비스, 러브 포텐의 인기가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3.0 업데이트와 동시에 연일 매진 행렬을 벌이고 있는데요. 동시에 프로그램을 개발한 에로스피어의 주가 역시 연중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뉴스 화면을 보던 해인이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내 남편이 백재원이라니. 사람들은 알까, 백재원이 밤마다 어떤 변태로 돌변하는지. 어제는 서재 의자에 2시간이 넘도록 꽁꽁 묶여있었다. 눈이 가려진 채 온몸을 핥아대는데, 아래쪽에 박혀 집요하게 떨어대는 딜도 덕분에 잠시 기절도 했었다.“온, 온해인..! 해인아...!” “아으... 죽어.. 나 죽어...” 그 기억을 떠올리며 뉴스를 보는데 왜 이렇게 웃음이 나는지.두 사람은 결혼식 대신 혼인신고만 했다. 재원은 끝까지 식을 올리자며 설득했지만, 해인의 생각은 달랐다. 어차피 초대할 하객도 딱히 없고. 웨딩 사진으로 간직하면 그뿐이니까. 대신 2주간 프랑스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솔직히 신혼여행이 아니라 호텔 투어 급.5성급 호텔을 죄다 돌며 밤이면 밤, 아침이면 아침. 눈만 마주치면 사랑을 나눴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선 그야말로 떡실신. 2주 만에 살이 3키로나 빠져 있있다. 그리고, 그날 새 생명이 찾아왔다. 생각지도 못한 허니문 베이비. 재원은 해인의 임신 소식을 알고 방방 뛰었다. 태명은 직접 해둥이로 지었다. 온해인을 쏙 빼닮은 아이이길 바라는 마음에.“해둥아~”왔다, 내 남편 백재원. “오빠, 사 왔어?” “당연하지.”손에 들린 장바구니 안, 낮부터 먹고 싶다고 졸라대던 청사과와 초코맛 아이스크림, 그리고 저녁을 만들 식재료까지.“배고프겠다. 손 씻고 금방 만들어줄게.” “뭐래, 내가 다 해놨어.”주방엔 이미 해인이 차려놓은 음식으로 가득이었다. 차돌 된장찌개, 계란찜, 김치볶음. 음식들을 확인한 재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 말라니까.” “지겨워. 요리라도 해야지.” “우리 해둥이 힘들잖아.” “적딩히 해. 얜
Last Updated: 2026-06-03
Chapter: 59. 변태 새끼짜장면과 탕수육이 차려진 식탁. 해인은 팔짱을 낀 채 재원을 쏘아보았다. 이미 주방에 꽉꽉 들어찬 식기들은 물론 커플 머그컵, 커피잔, 와인 잔들을 모조리 봤기 때문.“무슨 생각이야?”재원은 야무지게 짜장면을 비며 해인의 그릇과 바꿔주었다.“말했잖아. 너랑 제대로, 평범하게 살아보고 싶다고.”“제대로 평범하게 살아. 궁전 같은 펜트하우스에서.”“집이랑 직장이랑 가까우면 퇴근이 없어, 퇴근이.”그리고 바로 위층이 카페테리아잖아. 너 쓰러진 곳. 너 칼에 찔린 곳. 나 거기 이제 끔찍해. 너무너무 소름 끼쳐.“그래서? 나랑 동거라도 하겠다는 소리야?”“응. 결혼 준비하면서.”“미친놈.”순간 재원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미친놈이란 말에 상처를 받아서가 아니라, 그 싸늘한 말투랑 눈빛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서. 하긴... 너무 내 생각만 하긴 했어. 욕? 들을만해. 눈앞에 두고도 먹지 못하는 짜장면. 자꾸만 식어가는 탕수육. “먹어. 불겠다.”“누가 결혼을 걸레랑 해.”결국 멈춰있던 젓가락이 짜장면 중간에 꽂혀버렸다. “말 그따위로 할래?”“기억 안 나? 오빠 입에서 나왔던 말이야.”“두고두고 후회했어. 말했잖아. 다 나 때문이라고.”“오빠 때문이든, 아니든 다 사실이잖아. 중독자도, 카이엔도, 성매매도.”온해인을 진짜 어떡하지. 저 굳게 닫힌 마음을 어떻게 되돌리지. 생각해 보니 제대로, 진심 어린 사과를 했던 적이 없다. 그저 미안하단 말을 한 게 다였을 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재원이 해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털썩. 무릎을 꿇고 해인의 손을 움켜쥐었다. 당연히 깜짝 놀란 해인은 어깨를 세차게 때려댔고. “뭐.. 뭐야...! 일어나! 일어나라고!”“있잖아, 온해인. 스무 살 때부터 내 인생엔 늘 네가 있었어. 비틀리고 유치한 마음이 널 지옥으로 몰고, 또 몰았지만.. 그래도 사랑이었어. 그걸.. 네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순간에서야 제대로 깨달아버렸어. 미안해.” 해인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 입에서 나오
Last Updated: 2026-06-02
Chapter: 58. 단단히 미친 백재원“장기 손상이 심각했습니다. 결장은 물론 담낭까지요.”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이런 걸까. 힘이 풀린 다리가 휘청거렸다. “수술은 잘 끝났지만, 워낙에 출혈량이 심해서요... 일단 상태를 지켜보고....”“선생님.. 제발요... 제발..”“중환자실로 옮기겠습니다.”중환자실로 옮겨진 해인은 하루, 이틀..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서도 깨어나지 못했다. 연구소와 병실을 오가던 재원은 점점 피가 말랐다. 면회 시간이 되면 삑삑거리는 기계음을 들으며 손등만을 쓰다듬다 나오는 게 전부. “온해인, 언제까지 잠만 잘 거야? 샌드위치 먹고 싶다며.”이번 일을 겪으며 감각 동기화 실험도 마무리 수순에 들어갔다. 어차피 처음부터 온해인을 위한다는 그 개같은 집착으로 만들었던 프로그램. 더는 아무런 의미도, 기대도 없었다.직원들도 재원의 눈치를 살피며 그저 러브 포텐 출시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힘썼고, 각자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낼 뿐이었다. 오늘도 면회 시간에 맞춰 따뜻한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던 중.“으...”자그마한 신음과 함께 해인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온해인..? 정신이 들어?”“...하......”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조금씩 열리고, 흐릿한 눈동자가 재원을 향해 움직였다. “나 누군지 알아보겠어?”“백... 재원....”“됐다, 됐어... 하.. 해인아..”손등을 이마에 대고 감사하다는 말을 얼마나 했는지 모를 정도롤 중얼거렸다. 의료진들이 서둘러 상태를 살피고, 다행히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다는 기적 같은 말도 흘러나왔고 말이다. 이번엔 정말 온해인이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 그동안 VR에서 혼절은 물론, 칼이 심장을 관통하고, 물속에 뛰어드는 장면을 보며 즐거워했는데. 세상에서 영영 사라진다는 상상을 하니, 못살게 굴었던 날들만 떠올라 가슴을 후벼파고 숨통을 조였다.그리고 분명.. 사랑하고 있었다. 못나고 한심한 사랑이었지만 한 번도 온해인이란 존재 자체를 잊은 적이 없었다. ‘또 백재원이네..’해인은 진통제에
Last Updated: 2026-06-01
Chapter: 57. 이대로 못 보내어느새 파고든 손가락. 아래위에서 질척거리는 소리가 마치 합을 맞추듯 울려 퍼졌다. “아응, 읏..!”분명 백재원인데, 백재원이 가슴을 빨며 손가락을 넣었는데. 이건 몇 번째인지 모를 정도로 적응되어야 하는 감각인데. 이상하게 그 모든 행위가 다정하게 느껴져 온몸이 달아올랐다. 마치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듯 구는 집요한 몸짓 같달까. “오빠, 잠, 잠깐..”“입으로 해줘?”“아니, 그 그게 아니라..!”고개가 스르륵 내려가 골짜기를 핥았다. “응으읏..! 하...!”혀가 닿자마자 활처럼 휘는 허리. 재원은 떠오른 허리를 두 손바닥으로 받쳐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혀를 놀렸다. 음핵을 빙그르르 돌리다가도 쪽, 마치 뽀뽀를 하듯 소리를 내고. 그러다가 또 입술로 모아 쫍쫍쫍. 빨대를 빨 듯 빨아당기고. “아흐으윽..!”아프지 않게 살살 잘근거릴 땐 참지 못하곤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그동안 VR과 현실에서 해왔던 그 어떤 정사보다 짜릿한 느낌이었다.타액과 애액이 뒤엉켜 더는 젖을 곳이 없을 정도로 축축해진 음부. 고개를 든 재원의 눈빛은 욕정으로 들끓고 있었고, 그 욕정만큼 커져 버린 좆이 구멍을 벌리며 전진했다. “으, 이상해.. 오늘 진짜.. 하으응..”마찬가지였다. 온해인의 구멍은 오늘도 오물거리며 자지를 씹어 먹듯 조여대고 있었으니까. 다만, 전처럼 막 다루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천천히, 느긋하게, 이 뜨거운 구멍이 주는 감각을 고스란히 느끼며 지켜보고 싶었다. 재원의 시선이 자신을 뚫어질 듯 응시하자, 해인은 고개를 돌려 입술을 깨물었다. 늘 폭력적으로 박아대는 피스톤에 익숙했는데, 지금은 달랐다. 그의 성기가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져 차마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재원은 손을 뻗어 다시 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르륵 눈을 뜬 해인의 눈동자는 이미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나 봐, 눈 감지 말고.”찌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해인의 몸이 아래 위로 흔들렸다. 엄지 끝이 젖꼭지를 살살 굴리다, 손바
Last Updated: 2026-05-31
Chapter: 56. 많이 봐줬지화들짝! ‘언제.. 잠이 든 거지?’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해인은 창밖에 내려앉은 어둠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몇 시간이나 잔 건지. 호다닥 침대에서 내려와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문고리를 붙잡았다. ?문이 열렸다. 그것도 너무나 쉽게. 아무리 생각해도 가운 차림으로는 나갈 수 없어 자신이 지내던 게스트룸으로 향하던 길, 어디선가 나타난 백재원이 해인을 또다시 안아들었다.“놔...!”“빨빨거리고 돌아다닐래? 상처 벌어지면 꿰매야 돼.”“남 이사 꿰매든 말든..!"정말로 기운이 돌아온 건지 발버둥을 쳐대는 힘이 심상치 않았다. 정말 하마터면 놓쳐버릴 정도로.“대가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해.”“뭐? 대가리?”“카이엔이 집까지 다 알고 있는 마당에, 찾아와서 협박이라도 하면 어쩔 건데?”맞다. 카이엔... 아씨..... 나 어떡해.“까불어.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게.”“이사 가면 되거든?”참 쉽다, 이사가 말처럼 쉽니? 순식간에 뚝딱 끝나는 거니..? “내가 도와줄 테니까, 당분간 잠자코 있으라고.”“싫어..! 나 그 VR이고 지랄이고 이제 다 끔찍하고 짜증 난다고!”“기계 치웠어.”이제야 발버둥이 좀 잦아들었다. 진짜 이 오빠가 왜 이럴까..? 또 무슨 마음을 먹은 건데?“다음 수작은 뭔데..?”“아... 다음 수작?”“어. 지금 말해. 마음의 준비라도 좀 하게.”“고해성사.”아아, 신부님 역할이 하고 싶은 거구나. 이 변태 새끼. 진짜 틀림없는 희대의 개새끼. “이거 놔아아아악..!”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발걸음은 다시 침실로 향했다. 어이없게도 그는 해인을 침대에 내려놓고는 이불로 몸을 칭칭 휘감았다.“야..!”해인은 꼼짝없이 애벌레가 된 모습으로 그의 말을 들어야 했다. 고해성사는 말 그대로 진짜 고해성사였다. 왜 에로스피어에 오게 된 건지, 그동안 어떤 마음을 먹고 농락한 건지.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해인의 몸부림이 얌전해졌다. 아니, 굳어버렸다. 고등학생이었던 자신을 좋아했단 사실도
Last Updated: 2026-05-30
Chapter: 55. 떠오른 기억푸르스름한 빛이 내려앉은 거실. 해인이 세상 느릿한 걸음을 옮겨 주방으로 향했다. 다리는 비틀비틀, 팔뚝에선 억지로 빼낸 수액 바늘 탓에 핏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러든지 말든지, 너무도 목이 타 견딜 수 없었다. 물컵 안에 정수기 물이 반쯤 차올랐다. 물을 마시는 내내 왜 이렇게 팔이 후들거리는지. 머리는 왜 이렇게 멍하고 어지러운지. 목을 축이곤 다시 컵을 내려놓던 그 순간, 손이 힘없이 미끄러지며 쨍그랑! 조용한 새벽을 깨우는 아찔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벌컥-! 침실 문을 열고 부리나케 튀어나온 백재원. 그는 유리 조각을 아무렇지 않게 밟고 지나가는 해인을 보곤 심상치 않음을 느껴버렸다.“야..!”자신도 모르게 달려가 안아 들었다. 해인은 그런 재원을 쳐다보지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너 미쳤어?”“...”이미 상처로 가득한 발, 바닥에 떨어진 붉은 피. 팔도 다리도 엉망이었지만, 가장 엉망인 건 팔 안에 느껴지는 이상하리만큼 가벼운 무게였다. “해보자는 거지? 어?”“응... 하고 싶으면 해....”“미친.”침실로 향해 침대 끄트머리에 앉혀놓고는, 구급상자를 꺼내 들었다. 팔뚝에 거즈를 대곤 꾸욱. 발에 박힌 유리 조각을 빼내기 위해 해인의 손을 끌어당겨 봤지만, 그 팔에는 아무런 힘도, 의지도 없어 보였다.“씨발 좀..! 누르고 있으라고!”“...”딱 폭발하기 직전이었지만, 최대한 심호흡을 하곤 턱을 쥐었다. 눈을 맞추기 위해서. 하지만 그조차 마음처럼 되지 않아 턱을 쥔 손에 힘만 잔뜩 들어가 버렸다.“온해인, 너 정신 안 차려?”“하고 싶으면... 하라고..”그러면서 가운을 벗어내는 모습에 재원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얘가 진짜 왜 이래, 갑자기 왜 생각 없는 온해인 답지 않게 구는 거냐고. “누가 지금 그딴 게 하고 싶대?”팔쪽이 붉게 젖은 가운을 다시 여며주고는, 그대로 자세를 낮췄다. 깊게 박힌 유리 조각들을 빼내는데도 해인은 발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아프다는 신음 하나 내지 않
Last Updated: 2026-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