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번에도 말없이 선생님을 따라 걸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몇몇 학생들의 흘깃거리는 눈초리가 느껴졌다.
아무리 고개를 숙이고 걸어도,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첫 날이라 그래, 이것도 내일이면 괜찮아 질거야.'
2학년 3반 교실 앞에 다다르고 나서야 작은 목소리를 냈다.
“저기… 선생님.”
“응?”
“전학생 소개는 선생님께서 이름 정도만 해주시고요… 저는 바로 자리에 앉고 싶은데요.”
선생님은 은하의 표정을 살피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알겠어. 부담 느끼지 말고 편하게 있으면 돼.”
교실 문이 열리고, 소란스럽던 공간이 자연스레 조용해졌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리에서 새로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저 당연한 호기심과 순리였다.
“얘들아, 오늘부터 우리 반에 새로 온 친구야. 강은하.”
짧은 소개 만으로도 지나친 관심이 느껴졌다. 속삭이는 소리, 흘끔거리는 시선들.
하지만 은하는 가능한 한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려 했다. 절대로 튀면 안 된다. 그건 정말 최악이다.
“은하는 저기, 창가 세 번째 자리에 앉으면 돼.”
선생님의 말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교실을 가로질렀다. 최대한 빨리 자리로 가고 싶었다.
역시나, 몇 걸음 내디딜 때마다 온몸을 노골적으로 스치는듯한 시선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전학생이래.”
“꽤 예쁜데?”
“근데 되게 조용해 보인다.”
익숙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익숙한 불편함이었다.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송화고등학교에서의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일교시가 끝나고 쉬는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교실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책을 덮는 소리, 의자를 끌며 삼삼오오 모이는 학생들.
은하는 긴장 섞인 숨을 내쉬며 가방에서 텀블러를 꺼냈다. 예상했던 대로, 아무리 평범하게 행동해도 전학생을 향한 관심이 시작됐다.
“강은하라고 했지? 넌 원래 어디 학교 다녔어?”
밝은 목소리와 함께 한 여학생이 다가왔다. 긴 머리를 자연스럽게 묶은 학생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은하를 바라봤고, 뒤에는 몇 명의 친구들도 함께 서 있었다.
기대 어린 눈동자들을 마치 배신이라도 하듯, 은하의 입에서 튀어나온 너무도 차가운 대답.
“이전 학교 이름까지 말해야 해?”
모두가 당황했다. 모두가 할 말을 있었다. 질문을 한 여학생은 애써 담담한척 웃어 넘겼다.
“아, 아니…. 그냥 궁금해서. 되게 까칠하네.”
“불편했다면 미안.”
“그래. 난 정민희라고 해.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민희가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다른 학생들도 자연스럽게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난 민지! 김민지야!”
“나는 박정훈~ 잘 부탁해.”
새로운 환경에서 흔히 있는 반응. 자연스러운 관심과 탐색.
은하는 세 번의 전학을 겪으면서도, 아직도 이런 관심이 익숙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익숙했지만 피하고 싶은 감정에 가까웠다.
“근데 너, 왜 전학 온 거야?”
그 질문이 나오자, 분위기가 순간 달라졌다. 불편한 질문에 다들 답을 알고 싶다는 듯 은하를 바라보았다.
“혹시 문제 일으켜서 전학 온 거야?”
누군가의 농담 섞인 말에 몇몇이 킥킥거리며 웃어댔지만, 은하는 손끝이 싸늘해지는 걸 느꼈다.
그때.
“그만해.”
단호한 목소리가 순식간에 울려 퍼졌다.
낮고 차분하지만 분위기를 단숨에 가라앉히는 목소리.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향했다.
그 시선의 끝에는 ‘정태하’가 앉아 있었다. 책을 덮으며 고개를 든 그는 특별한 감정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굳이 그렇게 까지 캐물을 필요는 없잖아.”
말 한마디에 교실 안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누군가는 민망하게 시선을 피했고, 누군가는 머쓱하게 웃었다.
태하의 시선은 이미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이 소동의 주인공, 강은하.
은하는 태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내뱉은 말과는 다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은 더 이상 관심 따윈 받기 싫다는 행동이었다.
이번에는 맨 뒤, 창가자리에 앉아있던 또 다른 남학생이 피식 웃었다. 노골적인 웃음이었다.
“벌 것도 아닌 걸로 되게 예민하게 구네.”
그는 책상에 기대 앉은 채로 턱을 괴고, 흥미로워 죽겠다는 듯 은하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눈동자, 반듯함이란 없이 대충 걸친 듯한 교복, 어딘가 비꼬는 듯한 태도까지.
은하는 고개를 돌려 그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바라보았다. ‘백이현’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지만, 그의 말을 무시한 채 다시 창밖을 응시했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은행나무는 여전히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조용히 지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오늘 하루만 봐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친구들과 소라는 우왕좌왕 하면서도 각자가 맡은 역할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누군가는 카메라를 조정했고 누군가는 조명을 세팅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케이블 타이를 집어 들었고, 소라는 멱살이 붙잡힌 은하의 옆으로 다가와 코트 자락을 붙잡았다.“너무 겁먹진 마. 나도 처음엔 무서웠는데, 자꾸 해보니까 별거 아니더라.”코트가 바닥으로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이제야 소라가 내뱉은 말의 의미를 이해한 순간, 카메라의 용도를 알아챈 순간, 은하는 더 이상 공포를 숨기지 못했다. “최소라… 제발 그만 해…”“지랄하네, 이제 좀 무서운 가봐?”한 친구가 소라를 향해 케이블 타이를 건네주었다.소라는 주저 없이 은하의 손목을 케이블 타이로 묶어버렸다.“하지 마...!”찬희는 그런 은하를 침대쪽으로 밀친 뒤, 허벅지 위에 올라타 체중으로 짓눌렀다."백이현이랑 벌써 했냐? 아니면 아직 아다냐?"거친 손이 티셔츠 안으로 막 파고들려던 그 순간이었다. 쾅-!방 안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경찰입니다! 모두 움직이지 마세요!”무장한 경찰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그들 사이로 숨을 몰아쉬는 한 남자가 뛰어들었다. 백이현. 그의 시야가 은하에게 꽂혔다.침대에 누워 가쁜 몰아쉬고 있는 은하, 그리고 손목에 묶인 케이블 타이, 그 위에 올라탄 개새끼 한 마리. 찬희는 잠시 움찔할 뿐 손을 놓지 않았다.이현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한 걸음에 다가가 찬희의 손목을 거칠게 비틀었다.“놔, 더러운 새끼야.”“악!”찬희의 비명이 터졌고, 그제야 은하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백이현.”“됐어. 이제 괜찮아.”경찰들은 찬희 일당을 하나 둘 제압하기 시작했다.바닥에 흩어진 케이블 타이와 카메라는 증거물로 확보되었고, 소라는 멍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모든 소란 속에서, 이현의 눈에는 은하밖에 보이지 않았다.“나 봐봐, 괜찮아? 숨 쉴 수 있어?”태하 역시 황급히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은하야 괜찮아? 다친 데 없어?”은하가 고
은하와 함께 방 안에 둘러 앉은 찬희와 소라, 그리고 친구들. 그 중심엔 빈 소주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찬희의 손가락이 소주병을 툭툭 두드렸다.“돌릴게. 걸린 사람이 술 마시기. 못 마시면 시키는 거 다 하기.”“콜.”“개콜.”기다렸다는 힘차게 돌아가는 술병. 긴장된 정적 속에서 빠르게 회전하던 병이 마침내 서서히 멈추었다. 병 끝은 다른 친구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모두가 처음부터 정해진 것처럼 같은 말을 내뱉었다.“강은하네?”“강은하 당첨.”은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병이 가리킨 사람이 자신이 아님을 뻔히 알면서도,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이건 술 게임이 아니라, 폭력의 가장 예의 없는 형태였다. 말없이 술잔을 든 은하는 마시는 척, 입술에만 닿게 하고는 잔을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찬희가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뭐하냐? 똑바로 안 마시냐?”“마셨는데?”소라가 불쾌하다는 듯 팔짱을 끼며 눈을 좁혔다.“마시는 척만 했잖아. 어디서 보란 듯이 거짓말을 해.”“너희가 한 거짓말이랑 뭐가 달라? 똑같은 것 같은데?”찬희의 표정이 확실하게 구겨지기 시작했다. 분노가 폭발하기 딱 직전인 것처럼.“여기선 우리 룰을 따라야지.”“내가 왜?”쨍그랑!계속되는 도발에 찬희는 더이상 참지 못했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술병을 벽으로 던져버렸다. 순식간에 병이 박살나며 파편이 튀었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씨발, 뭘 잘했다고 아까부터 신경을 슬슬 긁네? 너 때문에 학교도 짤리고 집에서도 쫓겨나고. 얼마나 좆같은 지 알아?”“박찬희… 아직도 그 모든 게 정말 나 때문이라고 생각해?”“지랄하네. 여기 다 강은하 피해자들 모임이잖아? 안 그래?”주변에서 친구들 역시 날카롭게 비웃으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저 개같은 년 때문에 1년 내내 죽은 듯이 학교 다녔잖아.”“개빡친다니까 진짜.”그들의 말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날카로워졌다.소라 역시 마찬가지였다.“강은하. 그 가식적인 얼굴로 몇
그 순간이었다. 은하가 먼저 술병이 보이는 방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마치 이 모든 상황이 지루한 파티인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한 것.“뭐해? 앉아. 이렇게 만난 것도 오랜만이라며?”소라의 이마에 짙은 주름이 잡혔다. 찬희와 친구들 역시 계속되는 예상 밖의 행동에 말을 잇지 못했다.술잔을 채우는 은하의 손이 살짝 떨렸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심장은 쿵, 쿵,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뛰고 있었다. “오~ 강은하. 언제 이렇게 쌘캐가 된 거야?”은하는 그 비아냥 거리는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술을 삼켰다.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소라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그리고 그 찰나의 고요 속에서, 마음속으로는 누군가를 애타게 불렀다.‘백이현… 제발 나 좀… 나 좀 도와줘.’소라 역시 지고 싶지 않았다. 은하의 당당한 태도에 자꾸만 불쾌함이 피어올랐다. “그냥 마시면 재미 없지. 게임을 시작해볼까?”***같은 시각, 이현의 전화벨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표정은 그저 떨떠름했다.“박 비서님. 저 지금 좀 바쁜데…”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평소의 박 비서와는 뭔가가 달랐다. 단단히 긴장한 목소리였다.“도련님, 은하양이 혼자 어딜 가는 게 좀 이상해서요.”“뭐라고요? 강은하가 왜요?”“그… 그게 사실은…”“뭐냐고요?”“요즘 백 회장님 지시로 은하양이랑 도련님 뒤를 좀….”이현의 표정이 날카롭게 변했다. “지금, 감시라도 했다는 거예요?”박 비서가 당황한 듯 급히 말을 이어갔다.“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은하 양이 혼자서 포레스트빌 아파트로 급하게 이동했는데….”“…거기 민희네 집인데요? 거길 지금 혼자 갔다고요?”“네. 뭔가 굉장히 다급해 보여서, 혹시나 해서요.”“제가 알아 볼게요. 일단 알겠습니다.”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자마자, 곧바로 민희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휴대폰이 꺼져 있다는 멘트만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이현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정민희
전화가 뚝 끊긴 뒤, 은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메시지를 보냈다.[민희야, 괜찮아?]답장은 바로 왔다.[은하야, 나 지금 배터리 10%도 안 남았어ㅠㅠ 나 진짜 너무 창피하고 당황스러워서 미치겠으니까 빨리 와줘. 지금 우리 집에 아무도 없단 말이야ㅠㅠ][집 주소 남겨줘, 빨리.][포레스트빌 201동 806호. 비밀번호는 949913* 나 샤워하느냐고 옷도 하나도 안 입고 있으니까, 혼자 와야 돼 진짜 ㅠㅠㅠㅠ][알겠어. 걱정하지 말고 진정해. 바로 갈게!][응ㅠㅠ 너밖에 없다 진짜 은하야ㅠ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은하가 원장님을 향해 다가갔다.“원장님, 저 친구한테 급한 일이 생겨서요.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금방 올게요!”“응. 은하야~ 얼른 다녀와.”쏜살같이 학원을 튀어나간 뒤, 길가에 세워진 택시에 빠르게 올라탔다.욕실에 갇힌 민희의 상황이 눈에 그려지자 마음은 자꾸만 더 급해졌다.“기사님! 포레스트빌 201동이요!”택시 안에서도 여전히 불안해 하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민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택시 탔어. 괜찮아? 안 추워?][ㅠㅠ추워. 빨리 와.]“하, 조금만 기다려. 민희야….”은하의 떨리는 혼잣말은 엔진 소리에 묻혔고, 택시는 그렇게 포레스트빌로 서서히 향하고 있었다.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은하는 급하게 택시에서 내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다급한 손가락이 8층 버튼을 눌렀다. 층수를 표시하는 디지털 숫자가 빠르게 바뀌었다.'3… 4… 5…’마침, 엘리베이터가 8층에 멈추고 문이 열렸다. “806호, 806호…!”긴 복도를 따라 걷다 보니 곧 806호가 눈앞에 나타났다.숨을 헐떡이며 현관문 앞에 선 은하는 다시 민희와 나눴던 메시지를 보며 천천히 도어락 버튼을 눌렀다. 949913 그리고 *버튼까지 입력 완료.가볍게 잠금 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띠리릭- 철컥-!’집 안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둡고 조용했다. “민희야, 나 왔어. 어디 있어?”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때부터 그들은 정신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조명, 카메라 구도, 음성 샘플 분할. 모두가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소라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들의 흥분을 바라보며 천천히 물 한 모금을 마셨다.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기다림의 끝에 도달한 사람의 냉정한 평온과도 같았다.“무조건 오늘 끝내야 돼. 더 늦어지면 좆된다.”“학원 끝나면 컴퓨터 켜서 친구들한테 DM부터 보낼걸?”“입 다물고 빨리들 움직여라.”***한편, 학원에서 실습 준비를 하던 민희는 앞치마 주머니를 확인하며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조리대 위, 사물함. 그 어디에도 핸드폰이 보이지 않았다.“하, 왜 이렇게 흘리고 다니는 거야. 미치겠네 진짜.”그때, 수업이 시작된다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실습에 집중했다. 하지만 마음만은 편치 않았다.‘또 사달라고 하면 진짜 혼날 텐데…휴.’윤아는 그런 민희를 슬쩍 곁눈질 한 뒤 자연스럽게 찬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정민희 핸드폰 사라진 거 눈치 챔. 빨리들 움직여야 함.]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현은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고 열심히 검색하고 있었다.주말에 은하와 함께 데이트를 할만한 곳을 찾고 있던 것.화면을 넘기면서도 은하와의 행복한 시간을 상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음... 이번 주말에는 어디로 갈까나?”그때, 옆에 앉아 있던 태하가 고개를 돌렸다.“또 데이트 계획이냐?”“응, 방학 때 바짝 땡겨 놀아야지.”태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휴대폰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태하도 요즘 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방학이 되며 여유가 생겨서 그런지,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했다.“둘이 예쁘게 잘 만나니까, 보기 좋네.”“정태하. 나 너한테 진짜 고마운 거 알지?”“뭔 소리야. 갑자기.”“그냥. 사랑한다고.”“꺼져라 진짜. 소름 끼치니까.”“…에라이.”그렇게 두 사람은 여전히 투닥거리며 한가로운 낮 시
찬희 무리들은 민희네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현관 문이 열리자 이전보다 훨씬 더 넓어진 거실이 그들을 맞이했다.원룸보다 천장도 높았고, 창은 크고 환했다. 저녁이 되자마자 이사를 기념한다며, 또 다시 술판을 벌이기 시작한 그들.빈 박스들이 널려있는 거실 탁자 위, 술병이 하나둘 올라갔고 어디선가 튼 힙합 음악이 공간을 채웠다.“아, 여기 진짜 좋다.”“애들은 원룸에 잘 있지?”“응, 알아서들 잘 하고 있음. 너무 좋다. 요즘.”“대박이지 뭐. 밥이랑 잘 곳 주면 알아서 굴러 들어오잖아.”찬희가 비릿하게 웃으며 맥주를 들고는 소라를 바라보았다.“기분이 어때? 이제 곧인데?”“그냥… 좋지 뭐.”그 미소에는 온기라곤 전혀 없었다.하지만 목이 마를 정도로 기다리고 있던 그날이 정말로 가까워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들뜨는 것 같았다.“근데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데? 강은하가 여길 어떻게 와?”“정민희 핸드폰 패턴만 알면 끝이지 뭐.”“응? 패턴?”“김윤아가 정민희 핸드폰 패턴 알아오고, 핸드폰까지 훔쳐오면 그날이 바로 디데이다.”“핸드폰을 가져온다고?”찬희가 만족스러운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 장면을 벌써부터 상상이라도 하듯이.“정민희인 척 연기해서 이 집으로 부를 거야. 그러니까 여기로 이사 온 거 아니야. 아, 유인할 방법은 뭐가 좋겠냐?”“음, 아프다고 할까?”“119 부르면 좆돼.”“백이현이랑 정태하가 같이 오지 못할 만한 이유여야 해.”“머리 좀 굴려봐.”그때, 소라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마시던 잔을 툭 내려놓았다.“오빠, 이건 어때?”“뭐?”“화장실 문이 잠겼는데, 샤워 중이라 옷을 못 입고 있다고. 얼른 와서 문 좀 열어 달라고.”모두의 입이 다물렸다.그 안에 담긴 상황, 구조, 불안, 무력감까지. 모든 게 기가 막히게 그들의 머릿속에 계산되기 시작했다.“와 씨발, 미쳤다.”“개소름. 강은하 성격이면 혼자서 무조건 온다.”“뿌엥~ 은하야~ 창피하니까 빨리 좀 와주면 안 돼? 푸하하하 미쳤는데
잔뜩 인상을 찌푸린 이현이 투덜거렸다.“뭐야, 너는 왜 또 여기 앉아?”“자리가 남길래.”태하는 담담하게 국을 떠먹었다. 태도는 가벼워 보였지만, 그 속에는 '적당히좀 해라' 라는 의미가 분명히 담겨 있었다.갑작스러운 태하의 착석에 은하와 민희 역시 적지 않게 놀란 듯 했다.모두가 퍽 어이없는 상황, 이현이 은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야 전학생.”“…….”“넌 좋겠다. 정태하가 매번 나서서 도와주네?”도발적인 말이 떨어지고, 은하보다 태하가 먼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백이현.”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
“어제 그 말,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뭐?”“유치하다는 말, 굉장히 거슬리더라고?”순간, 주변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살짝 커졌다. 몇몇 학생들이 흘끔거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현은 그런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분위기를 즐기는 듯 팔짱을 끼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은하를 지켜보았다.은하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와, 볼수록 웃기는 애네. 이거.”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현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싹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주변 학생들 사이에서도 점점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은하는
그렇게 은하의 첫 등교는 큰 문제 없이 지나갔다. 약간의 불편한 상황은 생겼지만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마지막 수업이 끝나자 은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검은색 차 한 대. 오빠, 우주였다.“끝났어?”하루 종일 바쁜 일정이었을텐데도, 우주는 은하의 첫 등교가 궁금한 탓에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다.은하는 생각지도 못했던 오빠의 마중에 조금 놀란 듯 했지만, 이내 조용히 끄덕이며 조수석에 올랐다.계절과 다르게 차 안은 따뜻했다. 차창 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오늘, 학교는
태하는 별다른 감정을 담지 않은 얼굴로, 동시에 확고한 분위기를 풍기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이현과 은하 사이에 정확하게 멈춰 섰다. 시선은 은하를 먼저 스쳤다. 짧고도 묘한 무게감이 담긴 눈빛은 곧장 이현을 향해 차갑게 바뀌어갔다.“그만 좀 해.”짧은 정적이 흘렀다. 이현은 태하를 바라보더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어어, 밥이나 먹으러 가자.”한쪽 입술을 비틀며 지어 올리는 미소, 아직도 벽에 기댄 채 잔뜩 긴장하고 있는 학생의 얼굴은 이미 창백했다. 이현은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