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장미리는 딸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이렇게 해도 괜찮겠어? 너 정말 임신한 것도 아닌데, 나중에 들통나면 어쩌려고?” “흥.” 소미는 코웃음을 쳤다.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면서도, 그 안에는 단단한 집착이 서려 있었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면 돼요. 적어도 지금, 그 사람은 날 버릴 수 없으니까요. 내 말이 틀렸나요?”“맞아.” 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다 지시연 때문이야!” 딸의 손을 꼭 잡으며 속상한 듯 말했다. “엄마가 도와줄게. 그 여자가 네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니, 정말 웃기지도 않아! 이 엄만 절대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엄마...” 소미는 창백한 얼굴로 어머니 품에 기댔다. “정말... 이제는 방법이 없어. 나, 정말 고유건을 좋아해.” ‘단순히 남자의 돈과 권력이 아니고,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한다고.’ ‘난 이미 마음속 깊이 고유건이라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어. 이젠 그 남자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아!’‘이생에서, 내가 원하는 남자는 오직 한 사람, 고유건뿐이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유건은 핸드폰을 꺼내 시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신호음이 울리더니 이내 통화 중으로 바뀌었다. ‘받지 않는 게 아니라... 통화 중?’ 그는 이를 악물고 전화를 끊었고, 바로 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병실 문을 열자마자, 시연의 전화 통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유건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집에 간 것도, 일부러 내 전화를 피한 것도 아니었어.’ “응, 좋아. 그럼 그렇게 하자.” 시연은 통화를 마친 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문 앞에 서 있는 유건과 눈이 마주쳤다. “돌아왔네요.”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응.” 유건은 곧장 다가가, 여자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낮고도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부터 와 있었
실험 수업은 45분 만에 끝이 났고, 시연은 수업 시간에 아주 충실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끝나고 나니, 머리가 텅 빈 느낌이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장소미가 보내준 사진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눈을 반쯤 감았다. ‘이 사진이 없었으면, 나는 장소미의 말을 믿지 않았을 거야.’ ‘어젯밤까지만 해도 나한테 잘살아 보자고 했었는데...’ ‘잘살아 보자고?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시연이는 핸드폰을 꼭 쥔 채 계속 서 있었다. “형수님?” 익숙한 목소리에 여자의 정신을 차렸다. 정기환이었다. 유건의 지시로 시연을 데리러 온 기환은, 시연이 한참을 나오지 않자 걱정이 됐는지 직접 강의실 앞으로 찾아왔다. “수업은 끝났어요? 이제 돌아가도 되나요?” “네.” 시연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가요.” ... 병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시연이가 말했던 한 시간을 훌쩍 넘긴 상태였다. 유건은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봤다. 시연이 가방을 내려놓고, 옷장에 다녀오는 것을 보고서야 유건이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수업이 늦게 끝난 건가?” “네.” 시연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교수님께서 이제 부드러운 음식을 먹어도 된다고 하셨어요. 성애 이모님께 전화해서 준비해 달라고 할게요. 저녁은 같이 먹어요.”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 않은 여자의 모습.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건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아니면, 단순히 기분 탓일까?’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 할게.”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시연은 유건의 몸을 조심스레 닦아주고 옷을 갈아입혔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누워 영화를 보다 잠이 들었다. 어느새, 시연의 귓가에 들려오던 남자의 숨소리가 점점 고르게 변하자, 시연은 조용히 눈을 떴다. 허리에 느껴지는 무게... 남자의 팔이 감싸
하지만 시연은 그러지 않았다. 시연은 유건의 품에 기대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좋아요.” 그 후, 두 사람은 함께 씻고 아침을 먹었다. 교수님들이 회진을 돌고 간호사가 치료를 마친 뒤, 별다른 문제 없이 오후 3시가 되었다. 출발하기 전, 시연은 유건의 상처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괜찮아 보이는데요...” 혹시라도 모를 일을 대비해 그녀는 다시 한번 유건에게 붕대를 감아줬다. 이후, 운전기사가 차를 몰아 둘을 웨딩숍으로 데려갔다. 이곳은 G시에서 오래된 맞춤 웨딩숍이었다. 장인이 프랑스와 G시를 오가며 운영하는 곳으로, 한 달 중 보름만 여기에 머물렀다. 오늘은 치수만 재고 스타일을 선택하는 날이라, 장인은 없었다. 대신, 점장이 직접 나와 두 사람을 맞이했다. “고 대표님, 사모님, 안으로 들어오시죠. 아, 신랑 신부님은 따로 치수를 재셔야 합니다.” 점장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안내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치수 재고 나면 디자인을 함께 고르실 수 있어요.” 유건은 시연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갔다 와. 여기서 기다릴게.” “네.” 신부의 치수는 더 정밀하게 측정해야 했기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시연이 나오자, 유건은 이미 끝나 있었다. 하지만 창가에 서서 전화를 받는 모습이었고, 멀리서도 봐도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전화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 대표님, 안 오실 건가요? 소미가 오후 내내 세 번인가 네 번이나 토했어요! 지금 거의 못 서 있을 정도라니까요!]조애린이었다. “알겠어.” 유건의 미간이 깊이 좁혀지던 그 순간, 시연과 눈이 마주쳤다. 유건은 잠시 멈칫하더니, 전화를 짧게 끊어버렸다. 그리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시연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남자의 표정은 깊고 조용했다. “치수는 다 쟀어? 점장이 디자인 샘플을 가져오는 중일 거야. 원하는 걸 고르되, 굳이 하나만 고를 필요는 없어. 부분별로 네
“사모님?” 디자인 샘플을 품에 안고 온 점장이 시연을 보고 멈칫했다. 왜냐하면 시연이는 당장이라도 나가려는 모습이어서 점장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디자인 샘플 가져왔습니다. 앉으시면 하나씩 설명해드릴게요.” “괜찮아요.” 시연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네?” 점장이 당황했다. ‘이게 말이 되나?’ ‘이 사모님은 우리 매장에서 가장 중요한 고객인데, 디자인도 안 보고 그냥 간다고?’ ‘이걸 우리 사장님이 알면, 내 자리도 위험해질 수 있어!’ 이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저희가 실수한 부분이 있나요? 만약 그랬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점장은 오해한 듯했다. “아니에요.” 시연은 상대방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고, 그렇다고 이곳에 남아 있는 것도 쉽지 않았다. 유건도 어차피 떠났고, 시연에게 웨딩드레스가 더는 의미가 없었다. 그래도 점장의 입장이 난처해질 것 같아 잠시 고민하더니, 그녀는 간단히 말했다. “그럼... 제가 못 보더라도, 점장님이 직접 골라주시면 어때요?” “네?!” 점장이 깜짝 놀라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우리 샵의 웨딩드레스는 기본이 수십억 이상인데, 어떻게 내가 신랑과 신부를 대신해서 골라주는 거야?’ “그건 좀... 사모님, 저희가 전문가긴 하지만, 취향은 다 다르니까요.” “괜찮아요.” 시연은 무심하게 말했다. “점장님이 전문가시잖아요. 믿어요. 어떤 걸 골라도 저는 만족할 거예요.” “그래도...” 점장은 여전히 난처한 기색이었다. 이건 전문성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선택의 영역이었다. “그냥 그렇게 해주세요.” 더는 신경 쓰기 귀찮아진 시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대로 걸음을 돌렸다. “급해서 이만 가볼게요.” “사모님...!” 점장의 부르는 소리를 뒤로한 채, 시연은 매장을 빠져나왔다. 마치 도망치듯. ...촬영장, 휴게실
[확실해? 정말 안 말릴 거야?] 소미는 고개를 숙인 채, 입꼬리를 아주 살짝 말아 올렸다. 여자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안 말려. 기억해 둬, 이번 일은 우릴 통해서 나온 게 아니야.] 조애린의 답장은 금방 도착했다. [걱정하지 마, 알아서 할게.] 핸드폰을 닫은 소미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온몸이 묘하게 가벼워졌다. ‘속이 다 시원해!’ ...지씨 저택 앞에 도착하자, 유건은 여전히 소미를 품에 안은 채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대문을 지나 2층까지 올라갔고, 장미리가 바로 뒤를 따랐다. “고 대표님, 제가 도울게요.” “괜찮습니다.” 유건은 고개를 저으며 소미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불을 당겨 그녀의 몸을 감쌌다. “여사님, 만두 좀 부탁드릴게요. 소미 씨가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아이고, 알겠어요!” 장미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쉽게 나가지 않은 채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저기, 고 대표님... 소미한테 시간을 좀 달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그게... 얼마나 더 필요한 건가요?” “엄마!” 소미가 당황하며 소리쳤고, 잔뜩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만해요!” “아니, 엄마는...” 장미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고 대표님, 우리 소미 배가 점점 불러오고 있는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냐고 묻고 싶어요!” “엄마!” 소미가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이제 그만해요! 유건 씨도 다 생각이 있을 거예요. 너무 몰아붙이지 마세요.” “알았다, 알았어.” 딸에게 면박당하자, 장미리는 마지못해 물러났지만, 떠나기 전에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다 자기를 위한 건 줄도 모르고...” 방 안이 조용해졌다. 소미는 미안한 듯 유건을 바라봤다. “걱정돼서 저러시는 거예요. 너무 신경 쓰지 마요.” “나도 알아.” 유건은 짧게 대답하며 미간이 살짝 찌푸렸다. “요즘 몸이 안 좋으면, 촬영장엔 가
은범은 평소에 거짓말하지 않기에, 시연은 은범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날마다 기다리고, 애타게 바라봤을 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내가 이런 은범이를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야...’ ‘그리고 어떤 말들은 확실히 해야 할 때가 왔어.’ “같이 밥 먹자.” 은범의 얼굴이 환해졌다. “응, 좋아.” 시연은 대충 먹자고 했지만, 은범은 그녀의 입맛에 맞춰 단골집을 골랐다. 은범이 주문한 음식도, 시연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졌다. 음식이 나오자, 시연은 고개를 숙인 채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참기 위해 애써 눈을 깜빡였다. 그때,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화면을 확인하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은범은 두어 초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안 받아도 돼?” “응.” 시연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광고 문자야.” “아...” 지금 시연의 마음은 반가움도, 실망도 아니었다. 은범은 그저 묵묵히 그녀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 “왜 이렇게 늦게까지 밥도 못 먹었어? 그 사람은, 너한테 신경도 안 써?” 그는 이름을 말하진 않았지만, 시연은‘그 사람’이 유건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가 임진아에게 이야기했고, 진성빈도 알게 되었으니, 당연히 은범도 알게 됐을 것이었다. 시연은 밥 한 숟갈을 떴다. “난 애가 아니야, 배고프면 알아서 먹으면 돼.” 은범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니까... 고유건이 정말 신경도 안 쓴다는 건가?’ 사실, 은범은 시연과 유건의 일을 성빈에게 듣고 나서,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내가... 너무 늦었나 봐.’ ‘나는 진작 시연의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졌어야 했어. 하지만 항상 보고 싶은 걸 어떡해?’ 은범은 가슴이 저렸다. “시연아, 그 사람... 너한테 잘해?” 시연은 잠시 행동을 멈추고 충분했지만, 그 몇 초의 침묵이면 충분했다. 은범이 확신에 찬 어투로 물었다. “잘 못 해주지, 맞지?” “왜 그렇게 생각해?” 시연은 고개를 들어
“너 괜찮아?” 시연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흘렀는데, 이건 명백한 저혈당 증상이었다. 그녀는 보통은 배가 너무 고플 때만 발작했지만... ‘오늘은 다르네.’ ‘아마... 임신 때문일지도...’ 은범은 그녀의 체질을 알고 있어서 바로 한 손을 주머니로 넣었다. 곧, 남자의 손끝에 닿은 작은 사탕이 나타났다. 시연은 순간 멈칫했다. ‘아직도 이걸 챙기고 다닌다고?’ “자, 시연아.” 은범은 조용히 포장을 벗기고, 시연에게 내밀었다. 시연은 사탕을 받아 들고 입에 넣었다. 여자의 입안에서 퍼지는 단맛과 달리, 마음은 너무도 씁쓸했다. “좀 괜찮아?” 은범은 여전히 시연을 반쯤 안은 채, 온 신경을 그녀에게 쏟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증상이 비교적 심각했기에 시연도 나아지는 걸 느끼지 못했다.은범은 망설임 없이 바로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병실로 데려다줄게!” 몸이 따라주지 않는 상황에서, 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녀가 은범의 품에 안긴 채 병실 앞에 도착했을 때, 정민환은 병실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져, 말까지 더듬었다. “이... 이보세요! 당장 우리 형수님 내려놔요!” 은범이 날카롭게 노려봤다. “몸이 안 좋아서 걷지도 못하는데, 내려놓으라고요?” “아, 그건...!” 민환은 할 말을 잃었고, 결국 문을 열어주었다. 은범은 지체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저기.” 시연이 힘겹게 손끝으로 보호자 침대를 가리켰다. “응.” 그는 조심스럽게 여자를 내려놓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좀 괜찮아?” “응...” 시연의 목소리는 작았고, 아직 기운이 없어 보였다. 은범은 테이블 위에서 티슈를 뽑아, 그녀의 이마와 뺨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더 필요한 거 있어?” “아니, 됐어...” “괜히 사양하지 마.” 그는 주변을 훑어보다가 깨달았다. ‘그 남자는 여기 없네.’ ‘고유
시연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은범의 말이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유건의 눈빛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여보, 노 사장님이 묻잖아? 대답을 안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아?” 누가 들어도 비꼬는 말투였다. 시연은 굳은 표정으로 은범을 향해 고개를 살짝 들었다. “난 괜찮아. 여기까지 바래다줘서 고마워. 이제 가.” “지시연!” 하지만 은범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짙은 눈매에 어둠이 드리웠다. 시연을 도망가지 못하게 막듯이,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줘. 이 시람과 함께해서... 행복해?” 다시 한번, 시연은 침묵했다. 하지만 은범은 시연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연이는 행복하지 않은 거야.’오랜 시간 함께했던 사람이었기에, 은범은 시연이 행복할 때 어떤 모습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은범은 가슴이 미어졌고, 지금 당장 시연을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도 자신이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연아, 행복하지 않다면... 왜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어?” 그가 손을 놓은 건, 시연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길 수 없는 권력을 상대하고 있는 건 알겠지만...’시연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너까지 날 걱정하면, 더 피곤해져. 늦었으니까 이만 돌아가.” “시연아...” “노 사장님.” 은범이 더 말하려 하자, 이번엔 유건이 끊어버렸다. 유건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속에 감춰진 분노는 차갑게 서려 있었다. “내 아내가 가라고 했잖아요. 못 들었어요?”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며 덧붙였다. “노 사장님, 우리 와이프를 데려다준 건 고맙지만, 계속 옆에 붙어 있는 건... 엄연한 스토킹입니다. 보안팀 부를까요?” 유건은 이런 말을 장난으로 하지 않는다는 걸 은범도 알고 있었다. 결국, 은범은 깊은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시연아, 잊지 마. 난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