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 수업은 45분 만에 끝이 났고, 시연은 수업 시간에 아주 충실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끝나고 나니, 머리가 텅 빈 느낌이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장소미가 보내준 사진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눈을 반쯤 감았다. ‘이 사진이 없었으면, 나는 장소미의 말을 믿지 않았을 거야.’ ‘어젯밤까지만 해도 나한테 잘살아 보자고 했었는데...’ ‘잘살아 보자고?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시연이는 핸드폰을 꼭 쥔 채 계속 서 있었다. “형수님?” 익숙한 목소리에 여자의 정신을 차렸다. 정기환이었다. 유건의 지시로 시연을 데리러 온 기환은, 시연이 한참을 나오지 않자 걱정이 됐는지 직접 강의실 앞으로 찾아왔다. “수업은 끝났어요? 이제 돌아가도 되나요?” “네.” 시연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가요.” ... 병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시연이가 말했던 한 시간을 훌쩍 넘긴 상태였다. 유건은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봤다. 시연이 가방을 내려놓고, 옷장에 다녀오는 것을 보고서야 유건이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수업이 늦게 끝난 건가?” “네.” 시연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교수님께서 이제 부드러운 음식을 먹어도 된다고 하셨어요. 성애 이모님께 전화해서 준비해 달라고 할게요. 저녁은 같이 먹어요.”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 않은 여자의 모습.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건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아니면, 단순히 기분 탓일까?’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 할게.”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시연은 유건의 몸을 조심스레 닦아주고 옷을 갈아입혔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누워 영화를 보다 잠이 들었다. 어느새, 시연의 귓가에 들려오던 남자의 숨소리가 점점 고르게 변하자, 시연은 조용히 눈을 떴다. 허리에 느껴지는 무게... 남자의 팔이 감싸
하지만 시연은 그러지 않았다. 시연은 유건의 품에 기대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좋아요.” 그 후, 두 사람은 함께 씻고 아침을 먹었다. 교수님들이 회진을 돌고 간호사가 치료를 마친 뒤, 별다른 문제 없이 오후 3시가 되었다. 출발하기 전, 시연은 유건의 상처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괜찮아 보이는데요...” 혹시라도 모를 일을 대비해 그녀는 다시 한번 유건에게 붕대를 감아줬다. 이후, 운전기사가 차를 몰아 둘을 웨딩숍으로 데려갔다. 이곳은 G시에서 오래된 맞춤 웨딩숍이었다. 장인이 프랑스와 G시를 오가며 운영하는 곳으로, 한 달 중 보름만 여기에 머물렀다. 오늘은 치수만 재고 스타일을 선택하는 날이라, 장인은 없었다. 대신, 점장이 직접 나와 두 사람을 맞이했다. “고 대표님, 사모님, 안으로 들어오시죠. 아, 신랑 신부님은 따로 치수를 재셔야 합니다.” 점장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안내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치수 재고 나면 디자인을 함께 고르실 수 있어요.” 유건은 시연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갔다 와. 여기서 기다릴게.” “네.” 신부의 치수는 더 정밀하게 측정해야 했기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시연이 나오자, 유건은 이미 끝나 있었다. 하지만 창가에 서서 전화를 받는 모습이었고, 멀리서도 봐도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전화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 대표님, 안 오실 건가요? 소미가 오후 내내 세 번인가 네 번이나 토했어요! 지금 거의 못 서 있을 정도라니까요!]조애린이었다. “알겠어.” 유건의 미간이 깊이 좁혀지던 그 순간, 시연과 눈이 마주쳤다. 유건은 잠시 멈칫하더니, 전화를 짧게 끊어버렸다. 그리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시연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남자의 표정은 깊고 조용했다. “치수는 다 쟀어? 점장이 디자인 샘플을 가져오는 중일 거야. 원하는 걸 고르되, 굳이 하나만 고를 필요는 없어. 부분별로 네
“사모님?” 디자인 샘플을 품에 안고 온 점장이 시연을 보고 멈칫했다. 왜냐하면 시연이는 당장이라도 나가려는 모습이어서 점장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디자인 샘플 가져왔습니다. 앉으시면 하나씩 설명해드릴게요.” “괜찮아요.” 시연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네?” 점장이 당황했다. ‘이게 말이 되나?’ ‘이 사모님은 우리 매장에서 가장 중요한 고객인데, 디자인도 안 보고 그냥 간다고?’ ‘이걸 우리 사장님이 알면, 내 자리도 위험해질 수 있어!’ 이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저희가 실수한 부분이 있나요? 만약 그랬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점장은 오해한 듯했다. “아니에요.” 시연은 상대방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고, 그렇다고 이곳에 남아 있는 것도 쉽지 않았다. 유건도 어차피 떠났고, 시연에게 웨딩드레스가 더는 의미가 없었다. 그래도 점장의 입장이 난처해질 것 같아 잠시 고민하더니, 그녀는 간단히 말했다. “그럼... 제가 못 보더라도, 점장님이 직접 골라주시면 어때요?” “네?!” 점장이 깜짝 놀라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우리 샵의 웨딩드레스는 기본이 수십억 이상인데, 어떻게 내가 신랑과 신부를 대신해서 골라주는 거야?’ “그건 좀... 사모님, 저희가 전문가긴 하지만, 취향은 다 다르니까요.” “괜찮아요.” 시연은 무심하게 말했다. “점장님이 전문가시잖아요. 믿어요. 어떤 걸 골라도 저는 만족할 거예요.” “그래도...” 점장은 여전히 난처한 기색이었다. 이건 전문성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선택의 영역이었다. “그냥 그렇게 해주세요.” 더는 신경 쓰기 귀찮아진 시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대로 걸음을 돌렸다. “급해서 이만 가볼게요.” “사모님...!” 점장의 부르는 소리를 뒤로한 채, 시연은 매장을 빠져나왔다. 마치 도망치듯. ...촬영장, 휴게실
[확실해? 정말 안 말릴 거야?] 소미는 고개를 숙인 채, 입꼬리를 아주 살짝 말아 올렸다. 여자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안 말려. 기억해 둬, 이번 일은 우릴 통해서 나온 게 아니야.] 조애린의 답장은 금방 도착했다. [걱정하지 마, 알아서 할게.] 핸드폰을 닫은 소미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온몸이 묘하게 가벼워졌다. ‘속이 다 시원해!’ ...지씨 저택 앞에 도착하자, 유건은 여전히 소미를 품에 안은 채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대문을 지나 2층까지 올라갔고, 장미리가 바로 뒤를 따랐다. “고 대표님, 제가 도울게요.” “괜찮습니다.” 유건은 고개를 저으며 소미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불을 당겨 그녀의 몸을 감쌌다. “여사님, 만두 좀 부탁드릴게요. 소미 씨가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아이고, 알겠어요!” 장미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쉽게 나가지 않은 채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저기, 고 대표님... 소미한테 시간을 좀 달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그게... 얼마나 더 필요한 건가요?” “엄마!” 소미가 당황하며 소리쳤고, 잔뜩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만해요!” “아니, 엄마는...” 장미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고 대표님, 우리 소미 배가 점점 불러오고 있는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냐고 묻고 싶어요!” “엄마!” 소미가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이제 그만해요! 유건 씨도 다 생각이 있을 거예요. 너무 몰아붙이지 마세요.” “알았다, 알았어.” 딸에게 면박당하자, 장미리는 마지못해 물러났지만, 떠나기 전에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다 자기를 위한 건 줄도 모르고...” 방 안이 조용해졌다. 소미는 미안한 듯 유건을 바라봤다. “걱정돼서 저러시는 거예요. 너무 신경 쓰지 마요.” “나도 알아.” 유건은 짧게 대답하며 미간이 살짝 찌푸렸다. “요즘 몸이 안 좋으면, 촬영장엔 가
은범은 평소에 거짓말하지 않기에, 시연은 은범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날마다 기다리고, 애타게 바라봤을 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내가 이런 은범이를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야...’ ‘그리고 어떤 말들은 확실히 해야 할 때가 왔어.’ “같이 밥 먹자.” 은범의 얼굴이 환해졌다. “응, 좋아.” 시연은 대충 먹자고 했지만, 은범은 그녀의 입맛에 맞춰 단골집을 골랐다. 은범이 주문한 음식도, 시연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졌다. 음식이 나오자, 시연은 고개를 숙인 채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참기 위해 애써 눈을 깜빡였다. 그때,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화면을 확인하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은범은 두어 초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안 받아도 돼?” “응.” 시연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광고 문자야.” “아...” 지금 시연의 마음은 반가움도, 실망도 아니었다. 은범은 그저 묵묵히 그녀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 “왜 이렇게 늦게까지 밥도 못 먹었어? 그 사람은, 너한테 신경도 안 써?” 그는 이름을 말하진 않았지만, 시연은‘그 사람’이 유건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가 임진아에게 이야기했고, 진성빈도 알게 되었으니, 당연히 은범도 알게 됐을 것이었다. 시연은 밥 한 숟갈을 떴다. “난 애가 아니야, 배고프면 알아서 먹으면 돼.” 은범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니까... 고유건이 정말 신경도 안 쓴다는 건가?’ 사실, 은범은 시연과 유건의 일을 성빈에게 듣고 나서,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내가... 너무 늦었나 봐.’ ‘나는 진작 시연의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졌어야 했어. 하지만 항상 보고 싶은 걸 어떡해?’ 은범은 가슴이 저렸다. “시연아, 그 사람... 너한테 잘해?” 시연은 잠시 행동을 멈추고 충분했지만, 그 몇 초의 침묵이면 충분했다. 은범이 확신에 찬 어투로 물었다. “잘 못 해주지, 맞지?” “왜 그렇게 생각해?” 시연은 고개를 들어
“너 괜찮아?” 시연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흘렀는데, 이건 명백한 저혈당 증상이었다. 그녀는 보통은 배가 너무 고플 때만 발작했지만... ‘오늘은 다르네.’ ‘아마... 임신 때문일지도...’ 은범은 그녀의 체질을 알고 있어서 바로 한 손을 주머니로 넣었다. 곧, 남자의 손끝에 닿은 작은 사탕이 나타났다. 시연은 순간 멈칫했다. ‘아직도 이걸 챙기고 다닌다고?’ “자, 시연아.” 은범은 조용히 포장을 벗기고, 시연에게 내밀었다. 시연은 사탕을 받아 들고 입에 넣었다. 여자의 입안에서 퍼지는 단맛과 달리, 마음은 너무도 씁쓸했다. “좀 괜찮아?” 은범은 여전히 시연을 반쯤 안은 채, 온 신경을 그녀에게 쏟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증상이 비교적 심각했기에 시연도 나아지는 걸 느끼지 못했다.은범은 망설임 없이 바로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병실로 데려다줄게!” 몸이 따라주지 않는 상황에서, 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녀가 은범의 품에 안긴 채 병실 앞에 도착했을 때, 정민환은 병실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져, 말까지 더듬었다. “이... 이보세요! 당장 우리 형수님 내려놔요!” 은범이 날카롭게 노려봤다. “몸이 안 좋아서 걷지도 못하는데, 내려놓으라고요?” “아, 그건...!” 민환은 할 말을 잃었고, 결국 문을 열어주었다. 은범은 지체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저기.” 시연이 힘겹게 손끝으로 보호자 침대를 가리켰다. “응.” 그는 조심스럽게 여자를 내려놓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좀 괜찮아?” “응...” 시연의 목소리는 작았고, 아직 기운이 없어 보였다. 은범은 테이블 위에서 티슈를 뽑아, 그녀의 이마와 뺨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더 필요한 거 있어?” “아니, 됐어...” “괜히 사양하지 마.” 그는 주변을 훑어보다가 깨달았다. ‘그 남자는 여기 없네.’ ‘고유
시연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은범의 말이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유건의 눈빛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여보, 노 사장님이 묻잖아? 대답을 안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아?” 누가 들어도 비꼬는 말투였다. 시연은 굳은 표정으로 은범을 향해 고개를 살짝 들었다. “난 괜찮아. 여기까지 바래다줘서 고마워. 이제 가.” “지시연!” 하지만 은범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짙은 눈매에 어둠이 드리웠다. 시연을 도망가지 못하게 막듯이,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줘. 이 시람과 함께해서... 행복해?” 다시 한번, 시연은 침묵했다. 하지만 은범은 시연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연이는 행복하지 않은 거야.’오랜 시간 함께했던 사람이었기에, 은범은 시연이 행복할 때 어떤 모습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은범은 가슴이 미어졌고, 지금 당장 시연을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도 자신이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연아, 행복하지 않다면... 왜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어?” 그가 손을 놓은 건, 시연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길 수 없는 권력을 상대하고 있는 건 알겠지만...’시연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너까지 날 걱정하면, 더 피곤해져. 늦었으니까 이만 돌아가.” “시연아...” “노 사장님.” 은범이 더 말하려 하자, 이번엔 유건이 끊어버렸다. 유건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속에 감춰진 분노는 차갑게 서려 있었다. “내 아내가 가라고 했잖아요. 못 들었어요?”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며 덧붙였다. “노 사장님, 우리 와이프를 데려다준 건 고맙지만, 계속 옆에 붙어 있는 건... 엄연한 스토킹입니다. 보안팀 부를까요?” 유건은 이런 말을 장난으로 하지 않는다는 걸 은범도 알고 있었다. 결국, 은범은 깊은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시연아, 잊지 마. 난
그 말을 끝으로, 시연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할 말 다 했어요. 이젠 좀 쉬고 싶어요.” 하지만, 유건이 시연을 두고 볼 리 없었다. 그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가볍게 입을 뗐다. “네가 말하는 공평이라는 게 뭔데? 내가 어떤 여자랑 만나든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너도 어떤 남자를 만나든 내버려두라는 뜻이야? 그 남자랑 팔짱 끼고, 다정하게 지내도 된다는 의미냐고.” 시연은 순간 굳었다. ‘내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던가?’ ‘아, 그렇구나.’ ‘이 사람은 애초부터 날 그런 사람으로 봤던 거야.’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유건이 다시 말했다. “안 돼. 난 허락 못 해.”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네 과거는 신경 안 쓰겠다고 했으니까, 정말 신경 안 쓸 거야. 하지만 앞으로는 안 돼. 다시는 그 남자 만나지 마.” 은범이 시연을 바라보던 눈빛, 유건은 그것만 떠올려도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그러나, 시연은 피식 웃었다. “당신은 괜찮고, 난 안 된다는 거예요? 어쩜 그렇게 뻔뻔할 수 있어요?” 그 말을 남기고, 시연은 다시 자리에 누웠다. 훅-하지만 곧바로 유건이 담요를 잡아채 버렸고, 시연은 기어코 포기했다. ‘됐어. 그냥 덮지도 말자.’ “말 다 안 끝났어. 자지 마.” 그 순간, 유건은 두 손이 허리를 감싸며 시연을 거칠게 끌어올렸다. 힘이 실린 손길, 강압적인 태도. “고유건 씨!!!” 시연은 버티려 애쓰며 유건을 밀쳐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 강하게 붙잡았다. “더 말할 거 있어요? 난 할 말 다 했어요. 놓으라고요!!” 그녀가 더 강하게 밀쳐내려 하자, 남자의 손은 더 깊어졌다. 시연은 답답함에 목소리를 높였다. “난 정말 이해가 안 돼요! 장소미는 못 놓겠으면서, 왜 그 사람한테 가지 않는 거예요? 왜 나까지 붙잡아두는 건데요?!” 순간, 유건의 눈빛이 변했다. ‘나 없이 살고 싶은 거야?’ ‘이 여자가 원하는 삶... 그게
“지시연!” 유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연의 손을 꽉 쥐었다. 그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너한테 말하고 있는 거야.” “그래요, 나도 알아요.” 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살짝 올리며 유건을 바라봤다. “내가 당신이 한 말 몇 마디에 감동해서 울컥하고, 기분 좋아서 그 말들 다 들어줄 정도로 철없는 애인 줄 알아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눈동자엔 씁쓸함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나, 진심으로 너한테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어. 진심으로... 너한테...”“하지 마요.” 시연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망설임 하나 없이, 맑고 또렷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마음, 난 안 받을 거예요.”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멎은 듯 조용해졌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유건은 잠시 말이 없다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거절할 줄 알았어. 하지만 시연아, 내가 널 좋아하는 감정은 네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내 의지로도 안 돼.” 유건은 이내 들고 있던 장미꽃을 시연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 막 비행기로 도착했는데, 마음에 들어?” 시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에서... 꽃을 보여주면 내가 감동할 줄 아나 봐?’ 시연은 꽃은 쳐다보지도 않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좋아요.” 유건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아, 기분 상했나 보네. 오늘은 일단 가주는 게 딱 좋겠어.’ “장미 안 좋아해?” 유건은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알았어. 다음엔 다른 꽃으로 할게.” “뭐라고요...?” 시연은 벙찐 얼굴로 유건을 쳐다봤다. ‘지금... 난 그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닌데?’ 그런데 유건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려,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진아에게 장미꽃을 건넸다. “진아 씨, 이거 좀 꽂아줘.” “네? 아, 네...”
유건의 말에 시연은 멍해졌다. ‘뭐...?’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반응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말했잖아요. 장소미 때문에 애쓸 필요 없다고...” “장소미 때문이 아니야!” 유건이 더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급함과 답답함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장소미 얘기 좀 그만해. 지금 내가 함께 있는 사람은 너야. 근데 넌 계속 장소미 얘기만 해?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렇게 해서 날 포기하게 하려고?” ‘포기...?’ ‘무슨 포기?’ 순간 얼어붙은 시연의 가슴 한쪽이 덜컥 내려앉았고,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만해요. 듣기 싫어요.” 시연은 급하게 말을 끊고, 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찾았다. 하지만 열쇠를 꺼내기도 전에, 손목이 따뜻한 손에 붙잡혔다. 유건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날 벌주려고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야? 내가 무슨 마음인 줄 진짜 몰라서 그래?” “내가... 뭘 알아야 하는데요?” ‘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지...?’ ‘설마... 아니겠지.’ “좋아해.” 짧은 세 글자가 공기 속에 맴돌며 터졌다. 순간, 주위가 고요해졌다. ‘지금, 뭐라고 했어?’ 시연은 입술을 벌린 채,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눈동자엔 당혹감과 혼란스러움, 그리고... 약간의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겹쳤다. 유건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지시연. 나 너 좋아해.”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지시연, 내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너야. 내 마음을 너만을 향한다고.”27년 인생, 유건에게 고백이란 건 처음이었다. 얼굴이 빨개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볼 안쪽이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은 분명했다. 그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 떨릴 일이야...?’ ‘이런 게 고백이라는 건가?’ 돈 많고, 능력 있는 고유건 대표도 이 순간만큼은 그냥 연애 초
그날 갑자기 셋이 자리를 뜰 때, 성빈한테는 제대로 설명도 못 하고 나왔다. ‘좀 미안하긴 했는데...’ “아냐.” 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평일이잖아. 성빈이 일하는 날이야. 우리처럼 백수들이랑은 다르지.”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시연은 더 고집하지 않았다. 진아는 시연을 위해 산모 요가 클래스에 함께 들어갔다. 영화는 그냥 그랬다. 극장을 나오자 둘 다 하품만 연발. 밖은 여전히 눈이 펑펑 내리는 G시. “으, 춥다...” 진아는 시연의 팔짱을 끼고, 발을 구르며 입김을 불었다. “우리 샤부샤부 먹자! 얼큰한 걸로!” “평소 가던 데로 가자.” “좋아!” 마침 그 식당은 클럽 근처에 있었다. 클럽 쪽으로 들어서자, 진아가 걸음을 멈췄다. “왜?” 시연은 고개를 돌려 진아가 보는 쪽을 따라 바라봤다. 멀지 않은 곳에서, 클럽 안에서 나오는 성빈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곁엔 젊은 여자가 있었다. 둘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성빈은 여자의 어깨에 여성용 외투를 살포시 걸쳐주고 있었다. 자연스럽고, 세심하고, 약간 고개를 숙인 그 눈빛은... 분명히 다정했다. “진아야.” 시연은 거의 반사적으로 진아의 손을 꼭 잡았다. “응.” 진아는 시선을 거두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봐봐, 오늘 성빈 안 부르길 잘했지. 바쁘잖아, 저렇게.” 시연은 눈썹을 찌푸렸다. ‘성빈이... 연애 안 한다더니. 그럼 저 여자는 뭐지?’ ‘이건 좀 아니잖아?’ 뭔가 기분이 상한 시연은 진아를 살짝 당겼다. “가서 인사나 할까?” “야야...” 진아는 손을 급히 잡아당기며 막았다. “지금 데이트 중이잖아. 우리가 가면 민폐지.” “진아야...” “가자니까!” 진아는 배를 가볍게 감싸며 투정을 부렸다.“나 진짜 배고파 죽겠어. 너는 안 배고파? 얼른! 밥 먹자고.” 결국 시연은 한숨을 쉬며
시연은 예상하지 못했다. 지동성이 그런 걸 물어올 줄은. ‘이제 와서 이런 걸 묻는다고?’ ‘이게 걱정이라고? 참...’ 시연은 코웃음이 나올 뻔했다. ‘죽을 날 다 돼가니까, 양심이라도 생긴 건가? 완전 새사람 된 것처럼 굴고 있네.’ “시연아... 고 대표 좋아하니?” 시연이 침묵하자, 지동성은 조급해졌다. 장미리가 약을 가지러 갔던 참이라. 시간이 얼마 없었다. 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아니요. 안 좋아해요.” ‘예전에 좋아했던 적이 있다고 해도... 그건 그냥 과거일 뿐이야.’ ‘그리고 그런 얘길 굳이 이 사람한테 할 필요도 없어.’ 그녀는 지동성이 쥐고 있는 팔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이제... 가도 될까요?” “응, 그래.” 지동성은 멍한 표정으로 손을 놓았고, 시연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돌아섰다. 멀리서 장미리가 약 봉투를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약국 줄이 엄청 길더라고요.” 장미리는 다가와 지동성을 부축했다. “다 받아왔어요. 이만 가요.” 오늘은 집에 가기 전에, 딸 장소미에게 들를 예정이었다. “그래...” 지동성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장미리에게 이끌려 외과 건물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하지만 머릿속에는 시연의 말만이 맴돌았다. ‘안 좋아해요...’ ...병실 안, 장소미는 수액을 맞으며 누워 있었다. “소미야, 오늘은 좀 어때?” 장소미가 약 봉투를 내려놓으며 병상 옆에 앉았다. “뭐가 어때요?” 소미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맨날 약 바르고, 주사 맞고, 치료받고 있잖아요!” 그러더니 갑자기 거즈로 감긴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근데 봐봐요. 그렇게 해도 맨날 이 모양이잖아요!” “어머, 얘야!” 장미리는 깜짝 놀라 급히 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다 상처 다시 터지면 어떡해? 조심 좀 해.” 지동성도 진정시키듯 말했다.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