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는 진아의 손바닥을 살짝 오므려주며, 웃음 속에 묵직한 기운을 담았다.“잘 챙겨. 잃어버리면... 날 찾기 힘들어질 테니까.”...밤이 더 깊어졌다.진아는 조수석에 기대 깊이 잠들어 있었다.지하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운전대에 몸을 기댄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그가 진아를 안 지 벌써 3년. 처음 만났을 때, 진아는 아직 볼살이 빠지지 않아 앳된 인상이었는데, 지금은 턱선이 뚜렷해지고, 얼굴이 훨씬 성숙해졌다.지하는 천천히 허리를 펴고 몸을 기울였다. 손을 들어 여자의 옆머리를 살짝 쓸어 넘기고, 고개를 숙여 조심스럽게 입술을 맞췄다.진아가 깨지 않자, 마음속 갈증은 오히려 더 커졌다. ‘조금만 더...’그 순간, 창밖에 사람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지하는 흠칫 놀라며 몸을 떼고, 차 밖의 사람을 노려봤다.“도련님.”재명이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모시러 왔습니다.”“하...”지하는 짧게 비웃었다.“참 빨리도 왔네? 참 기가 막히게 타이밍 맞춰서.”재명은 어리둥절했다.“도련님, 제가 왔어야 하는 건가요, 말았어야 하는 건가요?” ‘혹시... 좋은 분위기 깨버린 건가?’“무슨 일이에요?”진아는 깊이 잠들지 못한 탓에, 인기척에 눈을 비비며 깼다.“지하 씨, 사람 온 거예요?”“응.”진아를 보자 지하의 얼굴에 서린 짜증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물 한 병을 꺼내 건네며 말했다.“차 바꿔 타고 G시로 가자.”“네, 좋아요.”진아는 여전히 반쯤 꿈속인 듯, 차에서 내려 지하의 품에 반쯤 안겨 걸었다.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지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기분이 꽤 좋았다....며칠 뒤.유건이 시연에게 확실한 소식을 전했다.“약 구했어. M국에서 승낙했대.”시연은 놀람과 기쁨이 뒤섞인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이렇게 빨라요?”“빠르면 안 돼?”유건은 조이를 품에 안고 이유식을 주며 말했다.“네가 그랬잖아. 목숨이 걸린 일은, 1초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맞아요.”시연은 눈가가
“어?”“빨리!”지하가 다급해졌다. 진아가 더 망설이기 전에, 억지로 등을 돌려세우더니 그녀를 번쩍 업었다. 그리고 그대로 앞으로 달렸다.처음엔 진아도 좀 민망했다.“그냥 내려줘요.”“저 사람한테 발목 잡히자고?”진아가 뭐라 반박하려던 순간,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멍! 멍멍!”눈이 커진 진아는 지하의 어깨에 올려둔 두 손을 본능적으로 꽉 움켜쥐었다.‘이게 무슨 소리야?’“진아 씨!”지하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표정을 지었다.“개 짖는 소리도 못 알아들으면서 날 놀린 거야?” “당연히 개 짖는 건 알아요!”진아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근데... 왜 개 짖는 소리가 나요? 그리고 이 소리... 엄청 사납잖아요!”“사냥개야!”지하는 숨을 고르며 달리면서도 설명을 이어갔다.“몰라서 그래? 여기 주인이 키우는 거야, 경비용으로! 우리 잡으러 오는 거라고!”“뭐라고요? 그... 그럼 어떡해요?”“어떡하긴.”지하가 헛웃음을 흘렸다.“지금 달리고 있잖아?”“아...!”진아는 지하의 등을 툭툭 치며 외쳤다.“그럼 더 빨리요!”“멍! 멍멍!”개 짖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진아는 겁이 덜컥 나서 다그쳤다.“빨리요! 더 빨리! 저 개 완전 사나워요, 사람 물겠다니까요!”“예, 임 선생님!”진아는 못 참고 뒤를 돌아봤다.주인은 아직 조금 뒤에 있었지만, 그 개는 이미 주인보다 훨씬 앞서 달려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닿을 거리였다.‘큰일이야... 잡히겠어!’“돈!”지하는 진아를 업은 채 숨이 가쁘게 말했다.“내 정장 바지 주머니에 지갑 있어! 현금 좀 들어있어!”“알았어요!”진아는 몸을 숙여 지갑을 꺼냈다.‘이게 조금 있는 거야? 한 뭉텅이잖아?’“내 신분증이랑 카드만 빼고, 현금은 지갑째로 던져!”현금만 던져서는, 멀리 날아가지 않는다.“아, 알았어요!”진아는 재빨리 신분증을 챙기고, 몸을 뒤로 틀어 팔을 힘껏 휘둘렀다. 지갑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딱 사냥개 근처에 떨어졌다.사냥개
“쯧쯧.”지하가 비웃으며 말했다.“너무 불쌍하네. 하나 만들어 줄게.” 한가하기도 하니, 진아를 달래며 시간을 보내려는 생각이었다. 그는 시냇물로 조금 전 복숭아를 두었던 돌을 깨끗이 씻었다.그러고는 복숭아씨를 적셔서 그 위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양면을 평평하게 갈아 구멍을 뚫었고, 진아가 손을 다치지 않게 복숭아씨의 거친 부분까지 조심스럽고 매끄럽게 다듬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구한 가느다란 나뭇가지로 복숭아씨를 깨끗이 파냈다. 드디어 복숭아씨로 만든 호루라기가 완성되었다. “자.”지하가 손을 뻗어 진아에게 건넸다.“해 봐. 할 수 있겠어?” 그녀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니에요?”그러고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복숭아씨 호루라기를 입에 가져다 댔다.“이렇게요?”“응.”지하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그렇게.” “히히.”진아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불어볼게요.” “그래.”진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복숭아씨에 바람을 불었다.순간, 귓가에 맑고 길게 울리는 휘파람 소리.꽤 큰 소리였다. 놀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불었어요. 처음으로요!”“재밌지?”지하는 이 기회를 틈타 진아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가지고 놀아. 진아 씨한테 줄게.” “좋아요!”푹 빠진 진아는 복숭아씨를 들고, 여러 번 연달아 불었다. “하하...”시냇물 소리와 어우러지는 그녀의 웃음소리는 지하의 가슴에 일렁이는 울림을 남겼다. “진아 씨.”그는 한참 망설이다가 진아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미소를 거두진 않았다. 남자는 뜨거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여자 친구가 되어줄래?” ‘뭐?’순간, 진아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고, 당황스러운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다. 지하가 진아의 곁에 머문 이유도 이런 결과를 바라서였으니까. “부 대표님.” 곰곰이 생각하던 진아가 솔직히 말했다.“지금 받아들이면, 부 대표님한테
“가자.”지하는 슬쩍 진아를 끌고 제방 아래로 내려갔다.그러고는 복숭아밭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나머지, 진아는 두 사람이 열 손가락을 꼭 맞잡은 걸 알아채지 못했다.오히려 무의식적으로 그를 두 손으로 잡아당기기도 했다. 지하가 그 모습에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왜 자꾸 그렇게 봐요?”진아가 그의 시선을 느끼고 의아해했다. “진아 씨 본 거 아닌데?”지하는 애써 웃음을 참았다.“주변을 살피는 거야. 주인이 올지도 모르잖아.” 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겁나면 훔치지 말아야죠!”“이미 여기까지 왔잖아.”지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진아 씨는 망을 좀 봐줘. 그래야 내가 집중할 수 있지.” “네...”진아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답한 후에야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꼭 복숭아를 훔쳐야만 하나?’ ‘좀 굶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난 시연이처럼 저혈당이 오는 체질도 아닌데.’하지만 이미 늦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복숭아밭 안으로 들어섰고, 지하는 두 눈을 반짝이며 신이 나 있었다. 이제 와서 멈추진 않을 터였다. “대박, 이 복숭아 진짜 잘 익었다!” 지하는 진아의 손을 놓고 서서히 다가갔다.키 큰 그가 손을 뻗자, 낮게 달린 복숭아에 바로 닿았다.그는 곧장 하나를 따더니 진아를 향해 물었다. “무슨 복숭아 좋아해?”“달콤한 복숭아는 다 좋아해요.”“딱이네.”지하가 웃으며 말했다.“여기 복숭아 다 달콤하고 맛있어.” 그러고는 말하는 동안 복숭아를 몇 개 더 땄다. 한편, 진아는 여전히 겁이 나서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그만하세요, 그만!” “알았어.”지하가 복숭아를 한 아름 안은 걸 보자, 그녀는 더욱 얼굴을 찌푸렸다.‘저 비싼 실크 셔츠, 또 망가지는 거 아니야?’ 진아는 급히 손짓했다.“이리 주세요. 제가 들게요.” ‘어차피 내 옷은 저렴하니까 더럽혀져도 괜찮아.’ “안 돼.”지하가 몸을 피하며 말했다.“복숭아는 털이 많아. 닿으면 옷
진아의 손은 정말 예뻤다. 길고 새하얀 손가락에 골격도 균형이 잡혀 있었다.직업상 네일아트를 하지 않아 손톱은 단정하고 깨끗했고, 둥글고 건강하게 잘 다듬어져 있었다. 지하는 침을 한 번 삼키며, 그녀의 손을 맞잡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았다. “돌아가서 맛있는 거 사 줄게.”“네.”진아가 느긋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저, 그런 거 사양할 성격 아니에요. G시의 부 대표님이 얼마나 통 큰 사람인지, 구경 좀 해야겠어요.” “실망시키지 않을게.”두 사람은 한바탕 웃으며 얘기한 후, 출발했다. 진아가 신신당부했다.“너무 빨리 달리지 마세요. 해도 졌고, 길도 험해요. 조심해야 해요.” “그래.”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그도 느긋하게 가고 싶었다. 그래야만 진아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질 테니까. 하지만, 한참을 가던 중, 갑자기 급제동이 걸렸다. “왜 그래요?”어렴풋이 잠들었던 진아가 놀라며 깼다. 순간, 지하는 눈살을 찌푸렸다.“가서 보고 올게.” 그는 차를 살펴보며 생각했다.‘설마, 차가 고장 난 건 아니겠지?’ 하지만, 가장 두려운 일은 현실이 되곤 한다.차는 정말 고장 난 것이었다. “왜 그래요?”진아도 차에서 내렸다.지하는 두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허탈하게 말했다.“문제가 생겨서 시동이 안 걸려.” “네?”순간, 진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이렇게 비싼 차도 문제가 생겨요?” “임 선생님.”지하가 어깨를 으쓱였다.“차도 기계니까 고장 날 수 있죠.”“아.”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그럼 이제 어쩌죠?” 하필 이럴 때 고장이 나다니. 주변은 허허벌판이었고, 앞뒤로 마을도 가게도 없었다. 호텔은커녕 여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지하는 얼굴을 찡그렸다.“사람 불렀어. 차도 견인해야지.” “그럼 몇 시간은 걸리겠네요?”“어, 그렇지.”지하는 민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아의 환심을 사러 왔다가,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망신은 둘째치고,
진아는 어쩔 수 없이 또 멈추었다.차가 멈추자, 지하가 빠르게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왜 그래요?”진아는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 “진아 씨.”지하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돌아갈 때, 내가 데리러 올게, 알았지?” 순간, 진아는 멍해졌다.출장을 왔으니, 당연히 병원 차를 타고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데리러 온다니, 무슨 뜻이지?’ 그녀는 대답을 망설이며 입을 다물었다. “많이 생각할 거 없어.”지하가 낮은 웃었다.“그냥 데리러 오고 싶어서 그래. 부담 갖지 말고, 진아 씨 하고 싶은 대로 해.”그는 다시 몸을 돌려 차에 올랐다. 이번엔 다시 돌아오지 않고 멀어져갔다. 하지만, 진아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며칠 후, 진아는 출장 업무를 모두 마쳤다.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짐을 다 챙기고 떠날 준비를 했다. 캐리어를 밖으로 끌고 나가자, 병원에서 보내온 차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지하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일 거야.’ ‘아니면... 오려고 했는데 다른 일이 생겼나?’‘하긴, 상장기업 대표가 한가할 리 없지.’ “임 선생님, 차에 짐 실어드릴까요?” 진아가 대답하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지하였다. 그녀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지금 가는 중이야. 아침에 일이 좀 생겨서 출발이 늦었어. 아직 출발한 거 아니지?]‘뭐라고?’ 진아는 아직 떠나지 않았지만, 곧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안 와도 돼요.”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병원 차가 와있어요. 이거 타고 가면 돼요.” [안 돼.]지하가 다급하게 말했다.[곧 도착해. 정말이야! 최대 10분!]‘10분?’‘그럼 거의 다 온 거잖아?’‘이제 와서 그냥 가라고 하면, 너무 매정한 거겠지?’“그럼...”진아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겠어요. 조금 더 기다릴게요.” [그래!]지하는 너무 기뻐했다.[금방 갈게.]“아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