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한이 서둘러 말했다. “바로 사람들을 보내겠습니다.” “잠깐, 나도 같이 갈게.” 지하도 다시 시연을 찾으러 나갔고, 그렇게 해서 시작된 수색은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시연의 흔적은 없었다. 유건은 링거를 다 맞추고도 답답함이 해소되지 않았지만, 더는 병실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정민환을 데리고 강울대 후문 쪽으로 향했다. ...차 안. 민환이 지한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응, 확인했어. 우리가 겹쳐서 찾지 않도록 이동할게.” 전화를 끊은 민환은 고개를 돌려 말했다. “형님, 지금까지 확인된 숙소들은...” 하지만, 유건은 듣고 있지 않았다. “형님?” “저기 봐.” 유건의 시선이 길 건너를 향해 있었는데, 민환도 그 시선을 따라가며 고개를 돌렸다. 바로 임진아가 보였다. 진아는 한 여학생과 함께 있었는데, 둘은 가벼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손에는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 “뭐가요?” “임진아가 저렇게 태평할 리가 없어.” 유건의 눈이 날카롭게 좁혀졌다. ‘제일 친한 친구가 사라졌는데, 임진아의 태도는 너무 평온하잖아?’ ‘임진아와 시연의 사이를 생각하면, 절대 저런 반응이 나올 수 없어.’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 ‘하지만, 임진아의 집이 아니라면? 시연이를 어디에 숨겼을까?’ 그때, 유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에 서 있던 여학생에게 향했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누구였더라?’ 기억력이 좋은 그는, 머릿속을 빠르게 되짚었다. ‘병원! 맞아!’ ‘저 여학생, 시연이랑 같은 과에서 실습하던 여학생이야.’ ‘내가 전에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스쳐 지나가며 본 적이 있어.’ “허.” 유건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민환아.” “네, 형님.” “저 여학생 기숙사 방 번호 알아봐.” “네?” “지금 당장.” 이제야 실마리가 풀렸다.
아주 좁은 기숙사에는 벽 쪽으로 침대가 나란히 두 개 놓여 있고, 그사이에는 작은 책상이 하나 있었다. 그걸로 끝. 더 이상 공간은 없었다. 오래된 기숙사에는 에어컨조차 없었지만, 날씨는 미친 듯이 더웠다. 천장에 매달린 낡은 선풍기가 끽끽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지만, 바람이라고 할 만한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물병과 컵이 있었는데, 컵에 물을 따른 유건이 아무리 둘러보아도 기숙사에서 벌꿀을 찾지 못했다. 그는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꿀은 어디 있죠?” 침대에 등을 돌리고 누워 있던 시연이 움찔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굼뜬 움직임.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였네. 정말 고유건이 여기까지 찾아왔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유건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틀 정도 못 본 사이에 또 더 말랐네.’ 그는 하은을 힐끔 봤다. “아, 꿀이요?” 하은이는 재빨리 알아차리고 부리나케 벌꿀을 찾아 컵에 짜 넣었다. 그리고 공손히 내밀었다. “고마워요.” 유건은 짧게 인사를 건넨 후 자연스럽게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시연을 한 팔로 끌어안았다. ‘땀범벅이잖아...’ 시연은 순간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빼려 했지만 그녀는 힘이 없었다. 유건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곤, 꿀물을 한 모금 마셔 봤다. “딱 적당한 온도네.” 그리곤 컵을 시연의 입가에 가져갔다. “마셔. 천천히.” 조심스럽고도 다정한 남자의 손길. 하은은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조용히 도시락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고 대표님, 시연이가 아직 밥 못 먹어서 이걸 사 오던 참이었어요.” “그래요? 수고했어요.” 품위 있는 감사를 건네는 남자의 태도에 시연은 꿀물을 반쯤 마시고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더는 안 마실래요.” 유건은 컵을 치우고, 그대로 그녀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그는 안의
“네?” 하은의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하은은 놀라 허둥대며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고 대표님! 시연이는 제 친구인데, 제가 당연히 돌봐야죠...” “빨리 알려줘요.” 유건은 귀찮다는 듯 단호하게 잘랐다. “말 안 해도 찾아낼 수 있으니까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학생이 시연이를 챙기는 게 정말 고마워서 그런 거니까 받아주고요.” “아... 네.” 하은이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아니에요. 갈게요.” ...기숙사 건물 밖. 유건은 걸음을 멈추고 건물을 한 번 올려다봤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지한을 향해 낮게 말했다. “지금 당장 처리할 게 있어.” “알겠습니다, 형님.” ...기숙사 안. 하은이는 방을 들락날락하며 정신없이 움직이느라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도착하는 배달 상자들... 전부 다 유건이 보낸 거였다. 책상 위는 이미 가득 찼기에, 결국 다른 짐들을 치워야 할 지경이었다. 음식, 생활용품, 필요한 건 전부 다 옮겨야 했다. “일단 밥부터 먹자.” 하은은 도시락을 여는 순간, 진한 냄새가 퍼졌다. 딱 적당한 온도... 하은은 밥그릇을 챙겨 시연을 부축했다. “조금이라도 먹어 봐.” “응.” 시연은 일부러 굶지는 않았다. 한눈에 봐도 성애 이모의 손맛이었으니 말이다. “꺅!” 갑자기 하은이 비명을 질렀다. “뭐야?” 시연이 고개를 들었다. 하은은 핸드폰을 부여잡고 있었다. “무슨 대형 이슈라도 떴어?” “아니, 그게 아니고!” 하은은 말을 더듬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곳엔 하은의 계좌에 5천만 원이 입금되었다는 알림이 떠 있었다.순간, 시연의 손이 멈췄다. “이게 뭐야?” 하은은 침을 삼켰다. “고 대표님이, 나한테 보낸 거래... 널 돌봐준 거에 대한 감사라는데... 이건 너무 많잖아!” 여자의 말끝이 떨렸다. ‘이건... 장난이 아니야...
502호에 가장 먼저 에어컨이 설치되었고, 바로 옆 방들도 차례로 공사가 진행됐다. 어수선했던 소음이 점점 멀어지며 구경하던 학생들이 하나둘 흩어지자, 하은은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녀는 침대 쪽으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며, 씨익 웃었다. “꿀물 좀 마실래? 고 대표님이 보내준 무첨가 최고의 국내산이야. 한 잔 타 줄게.” “응, 고마워.” 시연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하은은 찻잔에 꿀물을 타서 건넸다. 그리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한껏 즐기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와, 진짜 시원하다!” 시연은 말없이 컵을 내려다보며 한 모금 삼켰다. “시연아.” 하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 대표님, 너한테 진짜 잘해 주는 거 같아. 이렇게까지 하는 거 보면.” 시연은 잠시 망설였지만, 작게 중얼거렸다. “돈이 많잖아.” “아, 참.” 하은은 눈을 반쯤 감고 한숨을 쉬었다. “돈이 많은 건 맞지. 근데 돈 많다고 다 이렇게 해? 돈 아까워하는 부자들도 널리고 널렸어.” 그러더니 툭, 시연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한번 잘 생각해 봐. 뭐, 나는 그냥 하는 말이야.”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다.솔직히, 그녀는 확실히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 여자는 없을 테니 말이다. 시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톡 알림이었는데, 유건에서 온 톡이 하나 떴다. [이제 좀 시원해?] 시연은 한참 동안 가만히 화면을 바라봤는데, 답장하진 않았다. 잠시 후, 또 유건에서 온 톡이 왔다. [편하게 쉬어. 내가 미처 생각 못 한 게 있으면, 네 친구한테라도 전해줘.] 시연은 핸드폰을 내려놓은 후, 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 순간, 그녀는 두려워졌다. ‘고생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하지만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건, 감당하기
“주지한 씨죠?” 하은은 다급하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제발, 고 대표님께 전해주세요! 시연이가 아주 아파요. 강울대학교병원에 가야 하는데, 제가 못 업겠어요!”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지한의 목소리가 순간 팽팽하게 긴장됐다. [고마워요, 친구분.] “별말씀을요!” 전화를 끊자마자, 하은은 급히 사탕 하나를 까서 시연의 입에 넣었다. “일단 이거 물고 있어. 고 대표님이 금방 올 거야!” 시연은 너무 지쳐서 고개를 끄덕일 힘도 없었기에, 그냥 눈만 천천히 깜빡였다. 하은은 시연의 곁을 한순간도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친구의 식은땀을 닦아주며 지켜봤다. ...그 시각. 지한이 전화를 받을 때, 유건은 수액을 맞고 있었다. 그는 회사 일로 종일 병원에 있지도 못했기에, 그제야 겨우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형님.” 지한은 망설임 없이 보고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제가 갈 테니까 형님은 수액부터...”그는 끝까지 말할 수 없었는데, 유건이 이미 바늘을 뽑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유건의 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형님!” 지한이 다급하게 티슈를 뽑았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를 닦으며 단호하게 물었다. “차는 준비됐어?” “예.” “그럼 가자.”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유건은 이미 병실 문을 나서고 있었다. ...10분도 채 안 돼서, 유건은 기숙사 앞에 도착했다. 밤늦은 시간. 기숙사 출입 문제를 고려해, 지한이 미리 기숙사 관리실과 조율을 끝마쳤다. “형님, 들어가도 됩니다.” 관리실 선생님은 문을 열어줬고, 유건은 거침없이 502호로 향했다. “고 대표님, 오셨...” 하은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유건은 이미 침대 옆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으응...” 시연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힘없는 신음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유건의 가슴이 세게 죄어들었고 숨이 턱 막혔다. 그는 곧장 몸을
강울대학교병원, VIP 병실. 시연이 혹시라도 깨어나 도망칠까 걱정돼서, 유건은 그녀를 자신의 병실로 데려왔다. 그리고 바로 내과 담당의를 호출했다. “다행히 큰 문제는 아닙니다.” 진료를 마친 의사가 차트를 넘기며 말했다. “이번에는 치료를 중단한 탓에 그런 거니까, 수액 이틀 정도 맞으면 괜찮아질 겁니다.” 유건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고,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천천히 물었다. “앞으로도 치료를 계속 받아야 하나요?” “지금 당장은 장담할 수 없지만...” 의사는 현실적으로 답했다. “초기에는 크게 악화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치료를 마친 후에도 주기적인 체크와 모니터링은 필수입니다.” 유건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수고 많으셨어요.” “별말씀을요, 고 대표님.” 의사가 나가고, 유건은 조용히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시연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임신으로 이렇게 고생하는 걸 보니 장소미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장소미 또한 앞으로 시연처럼 합병증이 생길 수도 있을 터였다. 유건은 더 이상 선택을 미룰 수 없었다.왜냐하면, 지금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결국 모두에게 상처만 남기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유건도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몇 시간 후. 시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순간,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깨달았다. ‘여긴... 고유건의 병실이야.’ 그리고 유건은 바로 옆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동식 수액 거치대가 옆에 놓여 있고, 남자의 왼손에는 수액 라인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오른손으로는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또한 남자 앞에는 노트북이 켜져 있었고, 틈틈이 타자를 치며 업무를 보고 있었다. ‘진짜... 전형적인 워커홀릭이네.’ 그 순간, 시연은 자기가 유건의 침대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민망해졌다. ‘고유건은 소파에서 자고, 나는 침대에서 잤다?’ 왠지 미안해졌기에, 그녀는 팔을 짚고 천천히
“이번 일... 정말 미안해.” 유건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사실, 유건도 이 정도의 사과로는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것은 꼭 해야 할 말이었다. ‘...?’ 시연은 순간 멍해졌지만, 곧 깨달았다. ‘아, 그 일.’ 솔직히 말해서, 시연이는‘괜찮다’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유건이가 자신에게 했던 행동을 떠올리면, 아직도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왜 그렇게 나한테 못되게 굴었어요?” 책망. 원망. 그리고... 서운함. 시연의 모든 감정이 섞인 말을 듣자, 유건의 눈빛이 흔들렸다.시연의 그 한마디가, 가슴을 세게 쥐어짜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맞아.” 그는 인정했다. “내가 나쁜 놈이었어.” 그리고 말을 잇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글자, 한 글자, 마치 한숨처럼, 유건은 말했다. “이제부터...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야.” “네?” “아니.” 유건은 스스로를 비웃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 자체가... 더 이상 없을 거라고.” 남자의 말이 점점 더 흐트러졌다. 시연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건이가 다시 한번 자기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긴장했다. “시연아.” 남자는 잠시 숨을 삼켰다. “우리, 더는 같이 살 수 없을 것 같아.” 쿵-그 순간, 시연은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뭐?’ 그녀는 오랫동안 유건을 바라봤고, 불안하게 되물었다. “더 이상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게... 그럼, 이제 내가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녀는 일부러 ‘헤어지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연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유건과 시연의 관계는, 항상 유건이 주도했다. 그래서 유건이 원하지 않는 이상, 시연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바로 지금, 유건이 엄청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유건은 목이
유건의 품에 안긴 채, 시연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굳힌 채, 남자를 안아주는 일 없이, 그저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있었다. 그러다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요. 유건 씨의 사과, 받아줄게요.” 그 짧은 한마디. 하지만 그 속엔 수많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 순간, 유건은 천천히 시연을 놓아주었다. 비록 계속 시연을 끌어안고 싶었지만, 유건은 그럴 자격이 이제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다. “...위자료 관련해서, SKY전원주택단지의 그 집의 명의는 네 앞으로 넘길 거야. 그리고 현금, 기타 부동산도 정리해서...” “하...” 시연이는 남자의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유건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거야?” “미안해요.” 시연은 입술을 다물고, 조금 얌전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내가 위자료를 받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거든요.” 그녀는 한숨을 쉬며,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안 줘도 돼요. 우리, 사랑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그녀는 분명히 ‘계약 결혼’이라는 말을 사용하려는 듯했다. “아니야.” 유건이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말은 하지 마.” 그는 낮고 깊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네가 받아야 할 몫이야. 그냥 받아 줘.” ‘그리고 우리 사이는 이미 거래 관계가 아니었잖아.’‘다 내가 잘못했어.’남자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해서, 시연은 더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넘겼다. “알았어요. 받을게요.”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시연이는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어디 가?” 유건은 반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조심스럽게 떨쳐내고, 자연스럽게 한 걸음 물러난 후 말했다. “여긴 유건 씨의 병실이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