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한은 속으로 중얼거렸다.‘형수님, 도대체 뭐 하는 거야? 형님을 일부러 약 올리는 건가?’‘형님은 이미 커피 두 잔을 마셨어... 그리고 형님의 표정은...’‘폭발하기 직전이라고!’시간이 지나가고, 해는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었다....수술이 끝났을 때는 이미 오후 5시가 넘었다.“큰일이야!”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시연은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수술실을 나섰다. 그리고 급히 병동으로 가서 핸드폰을 꺼내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지한 씨, 나예요.”[형수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지한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분명 짜증이 묻어 있었다.[왜 안 오셨어요?]“미안해요.”시연은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갑자기 일이 생겨서 연락할 틈이 없었어요.”[지시연.]전화기 너머로 갑자기 목소리가 바뀌었다.지한이 스피커폰을 켜둔 상태에서, 유건이 직접 전화를 받은 것이었다.남자의 목소리는 날카롭고 거칠었다.[어디야? 당장 여기로 와!]“네?”시연은 당황해서 무심결에 물었다.“아직도 가정법원에 있어요?”[당연하지!]남자의 목소리는 더더욱 거칠어졌다.“네가 안 왔는데, 내가 어디를 가겠어?”시연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더듬거렸다.“알았어요,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고, 시연은 부리나케 병원 정문으로 달려 나가 택시를 잡아 가정법원으로 향했다.가는 동안 몇 번이나 시계를 확인했다.‘가정법원이 다섯 시 반까지였나, 여섯 시까지였나?’‘시간이 맞을까?’하지만 예상치 못한 정체로 인해 시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6시를 넘긴 상태였다.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벤틀리 옆에 서 있는 지한이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미안해요!”시연은 달려가며 사과했다.“제가 아니라...”지한은 차를 가리켰다.“형님한테 사과하셔야죠.”“알았어요.”시연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유건의 날카로운 옆모습을 슬쩍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유건 씨...”쿵!갑자기 유건이 몸을 돌려,
이건 유건이 시연에게 처음 한 말이 아니었다.시연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대체 뭘 모른다는 거지?’하지만 오늘은 자기 잘못이었으니, 그가 비꼬아도 할 말이 없었다.시연은 진심으로 사과했다.“늦고, 약속을 어긴 건 내 잘못이에요. 괜히 유건 씨 일까지 미루게 해서 미안해요.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하.”유건은 코웃음을 쳤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네가 부르면 언제든 나와야 하냐고.”시연은 말문이 막혔다.“그런 뜻은 아니었어요.”‘나는 그냥... 장소미를 엄청 신경 쓰는 것 같아서...’‘그게 아니라면, 가정법원에서 이렇게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잖아.’“지한!”유건은 시선을 거두고, 주지한을 노려보았다.“할 말 다 했으면 차에 타. 오늘따라 왜 그렇게 말이 많아?”지한은 순간 몸을 떨며 식은땀을 흘렸다.“네, 형님.”지한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급히 차에 올라탔다.“출발해.”벤틀리는 거침없이 출발했고, 시연에게 남은 건 텅 빈 거리와 매캐한 배기가스뿐이었다.몇 초간 멍하니 서 있다가, 시연은 어깨를 으쓱하고 임진아 집으로 돌아갔다....아파트 입구.진아는 은범을 마주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시연이 없어. 진짜야.”“그럼 언제 돌아오는지 알아?”진아는 고개를 저었다.“몰라, 시연이 프로젝트팀에 들어갔잖아. 너도 알다시피, 임상의 스케줄은 본인이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응.”은범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그는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임진아에게 건넸다.“시연이가 좋아하고 익숙하게 쓰던 것들이야. 대신 전해줘.”“알겠어.”진아는 노은범이 너무 안쓰러워 보여, 마지못해 받아서 들었다.“고마워.”은범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난 병원에 가봐야 해서, 먼저 갈게.”“조심히 가.”...30분 후, 시연이 돌아왔다.진아는 테이블 위의 쇼핑백을 가리켰다.“또
진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예전에는 네가 싸울 수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 지동성이 먼저 손을 내밀었잖아.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지 마.”“하지만...”시연은 여전히 망설였다.“그 사람이 이렇게까지 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그럼 더 좋은 거 아니야?”진아는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그 사람도 원하는 게 있고, 너도 우주와 함께 마땅히 가져야 할 걸 되찾고 싶잖아. 공평한 거래지.”그 말에 시연은 순간 깨달았다.‘역시, 한 발 떨어져 있는 사람의 시선은 더 명확하구나.’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시연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맞아,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네.”“그렇지!”진아는 손을 뻗어 시연의 손을 꼭 잡았다.“네 몫을 찾아와. 그래야 너랑 우주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야.”그러면서 시연의 배를 흘깃 쳐다보았다.“그리고 말이야, 너도 이제 아이를 키워야 하잖아. 네가 당연히 가져야 할 걸 찾으면, 모든 게 해결될 거야.”‘맞아!’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혈관 속의 피가 빠르게 돌며, 가슴이 뛰었다.그리고 처음으로 느껴지는 묘한 기대감과 흥분.그녀는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해볼게.”결정을 내린 후, 시연은 지동성을 위한 생일 선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시장에서 직접 천을 구입해 손수 셔츠를 만들기로 했다.시간이 촉박해 하루 종일 외출도 하지 않고 밤을 새워가며 바느질을 끝냈다....이른 아침, 시연은 준비를 마치고 선물을 들고 집을 나섰다....레스토랑.장미리는 자리에 앉자마자 불만을 터뜨렸다.“고 대표가 리조트를 통째로 빌려서 파티를 열자고까지 했는데...”그녀는 남편을 째려보며 말했다.“당신이 끝까지 반대했잖아요!”“엄마.”소미는 미소를 지으며 가방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아빠가 그러셨잖아요, 그냥 가족끼리 조용히 식사하고 싶다고... 이것도 좋지 않아요? 파티는 다음에 해도 되잖아요.”“하하.”장미리는 기분이 좋아진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
“여보, 당신...!” 장미리는 화가 나서 온몸을 떨며 말을 뱉었다. “그 애가 당신 딸이라니요? 잊지 마세요! 당신이 위기를 넘기고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전부 우리 소미 덕분이라고요!” “그래?” 지동성은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안경을 살짝 밀어 올렸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알고 있어. 로얄호텔에서의 그날 밤, 그건 소미가 아니라 시연이었어.” 이 말에 소미까지 당황했다. “아빠,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해서 뭐 하려고 그러세요?” 장미리는 입술을 핥으며 조금 전의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여보,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설마 고 대표한테 알리기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당신도 알잖아요, 그 애가 우리를 얼마나 증오하는지요! 진실이 밝혀지면 당신한테도 아무런 이득이 없을 거예요! 그리고 이제 와서 어쩌겠다는 건데요? 소미도 당신 딸이잖아요!” “맞아요, 아빠.” 소미도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동성은 묵묵히 그녀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생각 없어. 그저 가족끼리 조용히 밥 한 끼 먹고 싶을 뿐이야.” ‘가족?’ 장미리와 소미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십여 년 동안 외면하던 딸을 이제 와서 가족이라고?’ ‘이상해,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야.’ “아빠.” 소미가 먼저 한발 물러섰다. “오늘은 아빠 생신이니까, 아빠의 말씀에 따를게요.” 그러면서 슬쩍 장미리를 힐끔 바라보더니 덧붙였다. “하지만, 지시연을 아빠의 딸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유건 씨는 줄곧 제가 외동딸인 줄 알고 있어요. 우리가 유건 씨를 속인 게 드러나면 절대 우리한테 좋을 게 없어요.” “맞아요.” 장미리도 딸의 말에 즉시 동조했다. “여보, 소미가 여기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시잖아요. 그리고 시연이가 당신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생각해 보세요. 소미가 고씨 가문에 들어가야 우리도 살 수 있을 거라고요
“그럼, 나중에 식사가 나오면 천천히 먹자.” 지동성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면서 고개를 들고 맞은편의 장미리 모녀를 바라보았다. “시연아, 어머니랑 네 언니한테 인사하렴.” 이 말을 듣자, 시연은 순간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리며 마음속의 불쾌함을 눌러 담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장 여사님, 언니.” “시연아, 왔구나.” 장미리는 얼굴에 가식적인 미소를 띠며 말했다. 겉으론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전혀 웃을 수 없었다. “오랜만이야. 오늘은 너희 아버지 생신이니까, 다 같이 모처럼 좋은 시간 보내자꾸나.”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단 한 번의 불쾌한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하는 장미리. ‘와, 저 부부는 역시 완벽한 짝이라니까? 하나같이 정상적인 구석이 없어.’ 지동성 부부에 비하면, 차가운 얼굴로 앉아 있는 소미가 오히려 솔직해 보일 정도였다. “소미야, 오늘은 아빠 생신이니까, 어쨌든 식사나 제대로 하자.” “좋아요.” 시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 정도 연기라면 나도 할 수 있겠는데?’ “그리고...”소미는 입을 열려다가 멈췄다. 잠시 후 유건 앞에서 자신과 시연이 자매 사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려 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 순간, 낮고 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미 씨.” 울림이 있는 묵직한 저음. 시연은 보지 않아도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직원이 앞장섰고, 유건이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키가 크고, 인상이 또렷한 남자. “유건 씨!” 소미는 즉시 반색하며 다가가 유건의 팔짱을 끼었다. “이떻게 이렇게 일찍 왔어요? 늦을 줄 알았어요.” “일은 다 마무리했고, 지한이가 자리를 지키겠다고 하길래 나는 먼저 나왔어. 지 사장님의 생신인데, 실례할 순 없잖아.” 유건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곧장 시연에게 향했다. ‘시연이?
유건이 가득 찬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동안, 시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지동성을 바라보았다. ‘옛 친구의 딸이라고...?’ ‘이게 ‘내 친아버지’가 말한 ‘가족끼리 함께하는 자리’인 건가?’ 지동성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더니 어색하게 화제를 돌렸다. “시연아, 그리고 고 대표님, 두 사람은...”시연은 애써 눈빛 속 의문을 지우려 했다.‘아, 나를 공식적으로 인정할 생각이 없다는 거구나.’ ‘이제 와서 날 부정하겠다는 건가?’하지만 시연은 구태여 사실을 들춰내고 싶지 않아, 유건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개할 필요 없어요. 고유건 씨는 제 전남편인걸요. 이건 다들 아는 사실이잖아요?” 너무도 직설적인 말. 그 순간, 장미리조차 입을 닫아버렸다. 그러나 시연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제가 ‘소미’를 언니라고 불러야겠네요. 그럼, 고 대표님께서 이제 제 형부가 되시는 건가요?” 그리고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소미를 바라봤다. 미소는 다정하고 부드러웠지만, 그 속엔 날카로운 가시가 숨겨져 있었다. “언니, 이제 제부가 남편이 됐네요. 축하해요.”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아무도 섣불리 말을 잇지 못한 채, 서로를 의식했다. ‘뭐지, 이 어색한 공기는?’ 장미리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얘도, 참...” 지동성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시연아.” 그러나 시연은 시치미를 뗀 채, 천진난만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왜요? 제가 뭐 잘못 말했나요? 축하드린 것도 실수인가요?” 유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어딘가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때 직원이 다가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고 대표님, 모두 도착하셨으니, 이제 식사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유건은 잠시 시연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준비해.” “네, 알겠습니다.” 유건은 의
차가운 얼굴로, 시연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지시연!” 잡을 수 없자, 유건은 이마를 문지르며 급히 뒤따랐다. ...자리에 앉을 때, 지동성은 시연의 옆자리를 챙겼다. 그리고 의자를 직접 빼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자, 시연아. 여기 앉으렴.” “고맙습니다.” 시연은 마치 순순히 따르는 듯,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바로 맞은편에서 강렬한 시선이 꽂혔다. 어쩌면 그렇게 절묘하게 자리를 잡았을까. 유건이 바로 시연 정면에 앉아, 무표정하게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또 시작이네.’ 그러나 시연은 개의치 않고 잔에 물을 따르며 조용히 마셨다. 잠시 후, 직원이 따뜻한 물수건을 가져왔다. “시연아.” 지동성은 친절하게 그것을 펼쳐 그녀에게 건넸다. “조심해라, 뜨거우니까.” “네, 알겠어요.” 시연은 아무렇지 않게 물수건을 받아 들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오버하지?’ 지동성은 한 편의 연극이라도 찍는 듯한 모습이었다. 곧이어 요리가 하나둘씩 나왔다. 오늘따라 지동성은 유난히 시연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지도 않은 과한 배려. “시연아, 어떤 거 먹고 싶니?” 시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솔직히 말해, 이 테이블 가득한 음식 중에서 땡기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볍게 손을 들어 한 접시를 가리켰다. “저거요. 생선찜.” “그래.” 지동성은 생선을 자신의 그릇에 덜어 조심스럽게 가시를 발라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너희 어머니도 생선이나 게 같은 해산물을 아주 좋아하셨단다. 그런데 직접 손질하는 건 귀찮아하셨어. 누군가 다 준비해 주면 누구보다도 잘 먹었지만 말이야.” 다 바른 생선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어 시연의 그릇에 올려주며 말했다. “자, 먹어. 더 발라줄게.” 시연은 잠시 젓가락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식초 있어요?” “식초?” 지동성은 곧바
“아이고...” 결국, 지동성은 버티지 못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술기운에 트림까지 하며 두 손을 연신 흔들었다. “고 대표님, 정말 더는 못 마시겠습니다.” “아, 그래요?” 유건은 아쉬운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쉽네요. 오늘 같은 날, 지 사장님과 한 잔 더 하고 싶었는데...” 그 순간, 시연은 조용히 손을 들었고, 말없이 직원을 불러 따뜻한 물 한 잔을 주문했다. 곧이어 뜨거운 물이 도착하자, 그녀는 지동성 앞에 살며시 밀어 놓았다. “뜨거운 물 좀 드세요. 술기운도 가라앉힐 겸...” “오, 그래. 고맙다.”지동성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컵을 받아서 들었고, 딸을 향한 애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유건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저 두 사람, 정말 부끄러운 줄도 모르나?’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저렇게 티 나게 서로를 챙겨?’ 시선을 돌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장미리와 장소미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하지만 둘의 불쾌함은 유건과는 다른 이유였다. ‘지동성과 지시연의 사이가 저렇게 가까웠다고?’ ‘이거 정말 위험한데...’ “하하...” 억지웃음을 짓던 장미리가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케이크를 잘라야 할 시간이네. 소미야, 가서 아빠랑 같이 잘라보렴.” “네.” 소미는 곧바로 일어나며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런데 지동성이 갑자기 시연을 바라봤다. “시연아, 너도 같이할래?” 순간, 소미의 손끝이 살짝 경직되었다. 그녀의 시선이 시연에게로 향했다. ‘설마, 진짜 같이하겠다고 하진 않겠지?’ 그러나 시연은 태연하게 일어섰다. 더 나아가, 지동성의 팔을 살짝 감싸 안기까지 했다. “그럴까요?” ‘뭐야, 저 태연함은...?’ 소미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동성은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참 착하구나.” 레스토랑 중앙, 서비스 직원이 케이크를 가져왔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