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예전에는 네가 싸울 수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 지동성이 먼저 손을 내밀었잖아.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지 마.”“하지만...”시연은 여전히 망설였다.“그 사람이 이렇게까지 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그럼 더 좋은 거 아니야?”진아는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그 사람도 원하는 게 있고, 너도 우주와 함께 마땅히 가져야 할 걸 되찾고 싶잖아. 공평한 거래지.”그 말에 시연은 순간 깨달았다.‘역시, 한 발 떨어져 있는 사람의 시선은 더 명확하구나.’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시연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맞아,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네.”“그렇지!”진아는 손을 뻗어 시연의 손을 꼭 잡았다.“네 몫을 찾아와. 그래야 너랑 우주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야.”그러면서 시연의 배를 흘깃 쳐다보았다.“그리고 말이야, 너도 이제 아이를 키워야 하잖아. 네가 당연히 가져야 할 걸 찾으면, 모든 게 해결될 거야.”‘맞아!’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혈관 속의 피가 빠르게 돌며, 가슴이 뛰었다.그리고 처음으로 느껴지는 묘한 기대감과 흥분.그녀는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해볼게.”결정을 내린 후, 시연은 지동성을 위한 생일 선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시장에서 직접 천을 구입해 손수 셔츠를 만들기로 했다.시간이 촉박해 하루 종일 외출도 하지 않고 밤을 새워가며 바느질을 끝냈다....이른 아침, 시연은 준비를 마치고 선물을 들고 집을 나섰다....레스토랑.장미리는 자리에 앉자마자 불만을 터뜨렸다.“고 대표가 리조트를 통째로 빌려서 파티를 열자고까지 했는데...”그녀는 남편을 째려보며 말했다.“당신이 끝까지 반대했잖아요!”“엄마.”소미는 미소를 지으며 가방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아빠가 그러셨잖아요, 그냥 가족끼리 조용히 식사하고 싶다고... 이것도 좋지 않아요? 파티는 다음에 해도 되잖아요.”“하하.”장미리는 기분이 좋아진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
“여보, 당신...!” 장미리는 화가 나서 온몸을 떨며 말을 뱉었다. “그 애가 당신 딸이라니요? 잊지 마세요! 당신이 위기를 넘기고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전부 우리 소미 덕분이라고요!” “그래?” 지동성은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안경을 살짝 밀어 올렸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알고 있어. 로얄호텔에서의 그날 밤, 그건 소미가 아니라 시연이었어.” 이 말에 소미까지 당황했다. “아빠,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해서 뭐 하려고 그러세요?” 장미리는 입술을 핥으며 조금 전의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여보,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설마 고 대표한테 알리기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당신도 알잖아요, 그 애가 우리를 얼마나 증오하는지요! 진실이 밝혀지면 당신한테도 아무런 이득이 없을 거예요! 그리고 이제 와서 어쩌겠다는 건데요? 소미도 당신 딸이잖아요!” “맞아요, 아빠.” 소미도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동성은 묵묵히 그녀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생각 없어. 그저 가족끼리 조용히 밥 한 끼 먹고 싶을 뿐이야.” ‘가족?’ 장미리와 소미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십여 년 동안 외면하던 딸을 이제 와서 가족이라고?’ ‘이상해,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야.’ “아빠.” 소미가 먼저 한발 물러섰다. “오늘은 아빠 생신이니까, 아빠의 말씀에 따를게요.” 그러면서 슬쩍 장미리를 힐끔 바라보더니 덧붙였다. “하지만, 지시연을 아빠의 딸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유건 씨는 줄곧 제가 외동딸인 줄 알고 있어요. 우리가 유건 씨를 속인 게 드러나면 절대 우리한테 좋을 게 없어요.” “맞아요.” 장미리도 딸의 말에 즉시 동조했다. “여보, 소미가 여기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시잖아요. 그리고 시연이가 당신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생각해 보세요. 소미가 고씨 가문에 들어가야 우리도 살 수 있을 거라고요
“그럼, 나중에 식사가 나오면 천천히 먹자.” 지동성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면서 고개를 들고 맞은편의 장미리 모녀를 바라보았다. “시연아, 어머니랑 네 언니한테 인사하렴.” 이 말을 듣자, 시연은 순간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리며 마음속의 불쾌함을 눌러 담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장 여사님, 언니.” “시연아, 왔구나.” 장미리는 얼굴에 가식적인 미소를 띠며 말했다. 겉으론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전혀 웃을 수 없었다. “오랜만이야. 오늘은 너희 아버지 생신이니까, 다 같이 모처럼 좋은 시간 보내자꾸나.”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단 한 번의 불쾌한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하는 장미리. ‘와, 저 부부는 역시 완벽한 짝이라니까? 하나같이 정상적인 구석이 없어.’ 지동성 부부에 비하면, 차가운 얼굴로 앉아 있는 소미가 오히려 솔직해 보일 정도였다. “소미야, 오늘은 아빠 생신이니까, 어쨌든 식사나 제대로 하자.” “좋아요.” 시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 정도 연기라면 나도 할 수 있겠는데?’ “그리고...”소미는 입을 열려다가 멈췄다. 잠시 후 유건 앞에서 자신과 시연이 자매 사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려 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 순간, 낮고 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미 씨.” 울림이 있는 묵직한 저음. 시연은 보지 않아도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직원이 앞장섰고, 유건이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키가 크고, 인상이 또렷한 남자. “유건 씨!” 소미는 즉시 반색하며 다가가 유건의 팔짱을 끼었다. “이떻게 이렇게 일찍 왔어요? 늦을 줄 알았어요.” “일은 다 마무리했고, 지한이가 자리를 지키겠다고 하길래 나는 먼저 나왔어. 지 사장님의 생신인데, 실례할 순 없잖아.” 유건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곧장 시연에게 향했다. ‘시연이?
유건이 가득 찬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동안, 시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지동성을 바라보았다. ‘옛 친구의 딸이라고...?’ ‘이게 ‘내 친아버지’가 말한 ‘가족끼리 함께하는 자리’인 건가?’ 지동성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더니 어색하게 화제를 돌렸다. “시연아, 그리고 고 대표님, 두 사람은...”시연은 애써 눈빛 속 의문을 지우려 했다.‘아, 나를 공식적으로 인정할 생각이 없다는 거구나.’ ‘이제 와서 날 부정하겠다는 건가?’하지만 시연은 구태여 사실을 들춰내고 싶지 않아, 유건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개할 필요 없어요. 고유건 씨는 제 전남편인걸요. 이건 다들 아는 사실이잖아요?” 너무도 직설적인 말. 그 순간, 장미리조차 입을 닫아버렸다. 그러나 시연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제가 ‘소미’를 언니라고 불러야겠네요. 그럼, 고 대표님께서 이제 제 형부가 되시는 건가요?” 그리고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소미를 바라봤다. 미소는 다정하고 부드러웠지만, 그 속엔 날카로운 가시가 숨겨져 있었다. “언니, 이제 제부가 남편이 됐네요. 축하해요.”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아무도 섣불리 말을 잇지 못한 채, 서로를 의식했다. ‘뭐지, 이 어색한 공기는?’ 장미리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얘도, 참...” 지동성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시연아.” 그러나 시연은 시치미를 뗀 채, 천진난만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왜요? 제가 뭐 잘못 말했나요? 축하드린 것도 실수인가요?” 유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어딘가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때 직원이 다가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고 대표님, 모두 도착하셨으니, 이제 식사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유건은 잠시 시연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준비해.” “네, 알겠습니다.” 유건은 의
차가운 얼굴로, 시연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지시연!” 잡을 수 없자, 유건은 이마를 문지르며 급히 뒤따랐다. ...자리에 앉을 때, 지동성은 시연의 옆자리를 챙겼다. 그리고 의자를 직접 빼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자, 시연아. 여기 앉으렴.” “고맙습니다.” 시연은 마치 순순히 따르는 듯,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바로 맞은편에서 강렬한 시선이 꽂혔다. 어쩌면 그렇게 절묘하게 자리를 잡았을까. 유건이 바로 시연 정면에 앉아, 무표정하게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또 시작이네.’ 그러나 시연은 개의치 않고 잔에 물을 따르며 조용히 마셨다. 잠시 후, 직원이 따뜻한 물수건을 가져왔다. “시연아.” 지동성은 친절하게 그것을 펼쳐 그녀에게 건넸다. “조심해라, 뜨거우니까.” “네, 알겠어요.” 시연은 아무렇지 않게 물수건을 받아 들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오버하지?’ 지동성은 한 편의 연극이라도 찍는 듯한 모습이었다. 곧이어 요리가 하나둘씩 나왔다. 오늘따라 지동성은 유난히 시연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지도 않은 과한 배려. “시연아, 어떤 거 먹고 싶니?” 시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솔직히 말해, 이 테이블 가득한 음식 중에서 땡기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볍게 손을 들어 한 접시를 가리켰다. “저거요. 생선찜.” “그래.” 지동성은 생선을 자신의 그릇에 덜어 조심스럽게 가시를 발라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너희 어머니도 생선이나 게 같은 해산물을 아주 좋아하셨단다. 그런데 직접 손질하는 건 귀찮아하셨어. 누군가 다 준비해 주면 누구보다도 잘 먹었지만 말이야.” 다 바른 생선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어 시연의 그릇에 올려주며 말했다. “자, 먹어. 더 발라줄게.” 시연은 잠시 젓가락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식초 있어요?” “식초?” 지동성은 곧바
“아이고...” 결국, 지동성은 버티지 못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술기운에 트림까지 하며 두 손을 연신 흔들었다. “고 대표님, 정말 더는 못 마시겠습니다.” “아, 그래요?” 유건은 아쉬운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쉽네요. 오늘 같은 날, 지 사장님과 한 잔 더 하고 싶었는데...” 그 순간, 시연은 조용히 손을 들었고, 말없이 직원을 불러 따뜻한 물 한 잔을 주문했다. 곧이어 뜨거운 물이 도착하자, 그녀는 지동성 앞에 살며시 밀어 놓았다. “뜨거운 물 좀 드세요. 술기운도 가라앉힐 겸...” “오, 그래. 고맙다.”지동성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컵을 받아서 들었고, 딸을 향한 애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유건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저 두 사람, 정말 부끄러운 줄도 모르나?’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저렇게 티 나게 서로를 챙겨?’ 시선을 돌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장미리와 장소미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하지만 둘의 불쾌함은 유건과는 다른 이유였다. ‘지동성과 지시연의 사이가 저렇게 가까웠다고?’ ‘이거 정말 위험한데...’ “하하...” 억지웃음을 짓던 장미리가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케이크를 잘라야 할 시간이네. 소미야, 가서 아빠랑 같이 잘라보렴.” “네.” 소미는 곧바로 일어나며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런데 지동성이 갑자기 시연을 바라봤다. “시연아, 너도 같이할래?” 순간, 소미의 손끝이 살짝 경직되었다. 그녀의 시선이 시연에게로 향했다. ‘설마, 진짜 같이하겠다고 하진 않겠지?’ 그러나 시연은 태연하게 일어섰다. 더 나아가, 지동성의 팔을 살짝 감싸 안기까지 했다. “그럴까요?” ‘뭐야, 저 태연함은...?’ 소미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동성은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참 착하구나.” 레스토랑 중앙, 서비스 직원이 케이크를 가져왔다
“엄마!” 장소미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장미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엄마가 떠준 스웨터는 사랑이 담긴 선물이잖아요. 그건 돈 주고도 못 사는 거라고요. 아빠, 그렇죠?” “하하, 그럼.” 지동성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당연하지.” 그는 만족스럽게 딸이 건넨 시계를 받아서 들었다. “네가 고른 시계, 아빠도 정말 마음에 드는구나. 고맙다, 우리 딸.” “별말씀을요. 아빠가 좋아하시면 그걸로 충분해요.” 이제 남은 건 유건의 차례였다. 그가 준비한 선물은 작은 상자 하나. 소미가 기대감에 차서 상자를 열어보았다. “뭘 준비한 거예요? 꽤 자그마한 것 같은데... 또 시계인 건 아니겠죠? 저랑 겹칠까 봐서 걱정이네요.” 유건은 짧게 웃으며 말했다. “직접 열어 보면 알 수 있을 거야.”뚜껑을 여는 순간, 반짝이는 자동차 키가 나타났다. “헉...!” 소미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반짝였다. “이건...?” “볼보야.” 유건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우와!” 장미리가 즉시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띠며, 손뼉을 살짝 모았다. “고 대표님, 그건 너무 큰 선물 아닌가요?” 그녀는 곁눈질로 지동성을 바라보았다. ‘보라고요, 우리 딸이 이렇게 좋은 남자를 만났어요.’ “우리 소미, 정말 잘 키웠죠? 이렇게 멋진 사위를 얻었으니까요!” 그 말은 소미를 칭찬하는 듯했지만, 사실상 유건을 띄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 대표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이 다 기쁘네요.” “별말씀을요.” 유건은 짧게 대꾸했지만, 표정은 한결같이 무덤덤했다. 한편, 시연은 그 모든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시계, 자동차... 참, 다들 부럽다.’ 이런 자리에서, 그녀는 확실히 너무 초라했다.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합해도 겨우 2만 원이 될까 말까 하는 수준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는 차
선물을 다 건넨 후, 시연은 아까 남겨둔 케이크를 다시 들었다. 평소에 입맛이 없는 편이었지만, 이상하게 오늘의 케이크는 꽤 맛있었다. 그녀가 조용히 스푼으로 접시 바닥을 긁어 크림까지 깔끔하게 먹어 치우자, 지동성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맛있어?” “네, 꽤 맛있네요.” 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많이 남았어.” 지동성은 바로 다시 한 조각을 잘라 그녀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온화하고 자상한 목소리. “천천히 먹어. 남은 것도 많으니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유건은 그 광경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그렇게 맛있어?’ 그녀가 그토록 즐겁게 먹는 걸 보니, 케이크에 무슨 황금이라도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유건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계속 시연에게 머물자, 곧 그것을 눈치챈 소미의 마음이 싸늘해졌다. ‘뭐야? 저 남자... 지시연을 보고 있는 거야?’ ...식사는 길어졌고, 끝났을 때는 어느덧 밤 9시가 넘었을 때였다. 유건과 지동성 모두 술을 꽤 마셨다. 그때, 지동성이 갑자기 말했다. “시연아, 내가 데려다줄게. 밤늦게 혼자 가는 건 위험해.” 그 말을 듣자, 장미리는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 사람? 갑자기 왜 이러지?’ ‘10년이 넘도록 관심도 없던 사람이 갑자기 보호자라도 되는 것 마냥...’ 그녀는 못마땅한 얼굴로 남편의 팔을 붙잡았다. “여보, 당신 술 마셨잖아요. 운전도 못 하면서...” “괜찮아.” 지동성이 손을 저었다. “대리운전 부르면 돼.” “그럼 대리가 데려다주면 되겠네요?” “그건 안 돼.” 지동성은 단호했다. “대리는 낯선 사람이잖아.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 장미리는 황당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세상에 범죄자만 가득한 것도 아니고...” ‘이 사람, 정말 왜 이래? 너무 갑작스러운 관심인데...’‘이런 식으로 지시연과 가까워지는 건, 절대 나와 소미에게 좋은 일이 아니야.’ 시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