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손에 든 케이크 상자를 높이 들고, 이가 갈릴 만큼 이를 악물었다. “내가 이걸 바닥에 내던진다면?” 시연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차가워졌다. 유건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내 케이크예요. 내려놔요.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진심이네. 이 여자, 이렇게까지 신경 쓰다니.’ 유건은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곧 냉소를 띠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나도 장난하는 거 아냐.”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거침없이 손을 휘둘렀다. 퍽! “아!” 시연이 놀란 숨을 삼키자, 눈앞에서 케이크 상자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뚜껑이 벌어지면서 속에 있던 케이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흰 크림과 초콜릿 조각이 여기저기 튀었고, 부드러운 시트가 짓눌려 엉망이 되었다. 조용한 밤공기 속, 충격적인 장면. 민환과 기환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형님이... 형님이 진짜로 케이크를 던졌어?’ ‘이렇게까지 화내는 게 몇 년 만인 거지? ‘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등을 돌렸다. 더 이상 볼 자신이 없었다. 이제 그 케이크는 끝났으니까. 몇 초간의 정적.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린 시연. 그녀는 자신 앞에서 이 모든 것을 저지른 장본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진짜 던졌네요.” 유건은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미친 듯한 기세가 감돌았다. “그래, 던졌어!”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한 정적. 피식- 시연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이 더욱 유건을 자극했다. “웃겨?” 시연을 향한 남자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너도 인정하는 거지? 내가 던진 게 잘한 거라고.” 그 순간, 여자의 목소리가 낮고도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고유건 씨.” 그 눈빛은 마치 붉은 빛이 서린 듯, 이글거렸다. “당신이 할 줄 아는 게, 고작 이런 거예요?” ‘뭐?’ 유건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시연은 멈추지 않았다. “지 사장님
뒤돌아선 유건은 다시 시연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가슴 한복판에서 치밀어 오르는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며, 낮고 거칠게 말했다. “울지 마.” 그는 눈물을 흘리는 시연의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고작 그런 케이크 하나 때문에... 내가 사줄게! 얼마든지 사줄게!” 하지만 시연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유건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것 같았다. 시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한 번도 유건을 보지 않고 앞을 향해 걸었다. 마치, 그가 공기라도 되는 듯. 민환과 기환은 입을 다물고 눈을 감아버렸다. ‘우린 아무것도 못 본 거야.’유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핏줄이 튀어나올 듯한 손가락이 움켜쥔 채, 싸늘한 조소가 입술 끝에 걸렸다. 그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 안 들려?” 그 순간, 여자의 싸늘한 눈빛이 그를 직격했다. 서로가 눈을 마주친 순간, 유건은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사준다고.” 하지만 그마저도, 시연의 차가운 눈빛에 단숨에 부서졌다. 그는 잠시 생각했지만, 도저히 속이 타들어 가는 걸 참을 수 없었다.“너한테 분명히 말했잖아, 앞으로 지동성이 준 돈은 받지 말라고! 물건도 마찬가지야! 그 사람은 나이도 많고, 결혼해서 애까지 있어! 너, 내 말대로 하겠다고 약속했었잖아!” “네, 맞아요.”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건을 올려다보았다.“그때는 당신이 내 남편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다른 남자와 선을 지켜야 했고, 당신의 말도 들어야 했어요.” 그녀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당신... 지금은 나한테 어떤 존재예요?” 유건의 목구멍이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요?” 시연은 피곤한 듯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돈이 많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 다시 사준다 해도...” 그녀는 손목을 살짝 흔들며 덧붙였다. “그건, 더 이상 내가
‘진짜 원하는 거?’유건은 멍하니 얼어붙었다. 희미한 생각이 아른거렸고, 터져 나오려 했다. 지하는 담담하게 친구를 바라봤다.“입으로는 네 전처를 위한다면서, 속으로는 지시연이 어떤 남자와도 가까워지는 걸 못 견뎌 하잖아. 지시연의 눈빛과 말 한마디에 흔들리고 있잖아.” 그리고 잠시 멈추더니 반문했다. “말해 봐,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뭐야?” 유건은 말없이 목울대를 삼켰다. “가자.” 지하는 유건을 춤추는 구역에서 끌어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어서 유건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며 말했다. “술 냄새가 진동하네. 얼음물 좀 마시고 정신 차려.” 유건은 잔을 들었지만 마시지 않았다. 친구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는 시연이를 좋아해. 만약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다면, 시연이의 과거와 아이까지 받아들이고 결혼을 생각하지도 않았을 거야.’ 유건은 눈을 감았다가 뜨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좋아하는 감정보다 책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그건 얼마나 좋아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지하는 술잔을 흔들며 나직이 말했다. “그저 그런 감정이면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기 마련이야. 당연히 그걸 지키려고 책임을 져야 할 이유도 없고.” “하지만 너 자신에게 물어봐. 지시연을 향한 네 감정이 그저 그런 수준인지.” 유건은 깊이 찡그린 채 오래도록 침묵했다. “잘 생각해 봐.” 지하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곤 입맛을 다셨다. “네가 이 상태로 계속 가면, 너도, 지시연도, 장소미도 다 괴로울 거야.” ‘정말 그럴까? 다들 불행해질까?’ 유건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고민하다가, 지하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아 단숨에 들이켰다. “쳇.” 그는 머리가 더 아파져 왔다. “그래서 술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 지하는 한숨을 쉬며 유건을 지그시 바라봤다. “로얄호텔에서의 그날 밤, 널 함정에 빠뜨린 놈은 아직 못 찾아냈어?” 유건은 등을 의자에 기댄 채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하면서, 우주는 조심스럽게 지동성을 쳐다봤다. ‘이 비행기를 사 준 사람이, 이 아저씨였어.’ 우주는 작은 목소리로 시연에게 물었다. “누나, 이 아저씨도 같이 갈까?” 시연은 살짝 미소 지었다. “우주, 이제 다 컸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응.” 우주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중하게 지동성을 초대했다. “아저씨, 같이 날려요!” “그래...” 그 말을 들은 지동성은 말할 수 없이 감격하며 두 손을 꽉 쥐었다. “하지만, 우주야, 난 아저씨가 아니고...”지동성이 무슨 말을 할지 깨달은 시연은 깜짝 놀라 허겁지겁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날카롭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왜 안 돼?” 지동성도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난 너희 아빠야. 우주의 상황을 생각하면, 지금 인정하지 않으면 더 어려워질 거야.” “허.” 시연은 코웃음을 쳤다. “이제 와서 조급해지셨어요? 그럼 이런 생각은 해보셨어요? 그쪽은 그동안 한 번도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어요. 우주의 세상에는 엄마, 아빠가 없어요. 오직 누나뿐이라고요!” “그쪽이 갑자기 아빠라고 하면, 그게 우주한테 얼마나 큰 충격일지 생각이나 해봤어요? 우주는 보통 아이가 아니라고요!!” 그 말에 지동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네 말대로 천천히 하자, 아빠가 기다리마.” ‘동의한다고?’ ‘이렇게 순순히?’ 시연이 가장 놀란 것은, 지동성이 처음으로 마음을 다해 우주를 배려했다는 사실이었다. 지동성은 우주에게 다가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가자. 잔디밭에서 날려 봐야지!” “와!” 우주는 기뻐서 폴짝 뛰었다. “누나! 같이 가!” “응.” 잔디밭에서 우주와 한참을 놀던 지동성은 점심시간이 되자 배달 음식을 시켰다. 포장을 뜯던 시연은 표정을 찡그렸다. “뭐예요? 치킨이에요? 밥을 먹으면 되잖아요.”
사진 속 사람은 젊음이 넘쳤다.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 생기가 얼굴 전체에 퍼져 있었다. 시연이 기억하는 그 얼굴보다 더 젊고, 더 예뻤다. 그 얼굴의 주인은 바로 시연의 어머니, 부명주였다. 그 사진을, 시연은 예전에 지동성의 지갑 속에서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본 것보다 더 새것이었다. 지금 시연의 눈앞에 있는 건 새로 인화한 사진이었다. ‘기분이 좀... 복잡하네.’ 지동성이 부명주를 깊이 사랑했다는 걸, 시연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를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이 왜 바람을 피웠을까?’ ‘사랑하면 그 사람과 관련된 것까지 아끼게 된다고들 하는데...’‘그토록 우리 엄마를 사랑했다면, 나랑 우주한테는 왜 그렇게까지 매정했던 걸까?’ 시연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때, 멀리서 차가 다가왔다. 지동성이 운전하는 차였다. 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지갑을 조용히 닫아 양복 주머니에 넣었다. “시연아, 타.” “네.” 두 사람은 어디에도 들르지 않았다. 각자 오후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지동성은 차를 몰아 시연을 임진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임진아가 살고 있는 아파트 건물 아래, 벤틀리 안. 유건은 운전대를 잡은 채, 옆에 놓인 케이크 상자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하... 나 진짜 답 없다.’유건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 다시 레스토랑에 가서 케이크를 주문했다. 그리고 또 굳이 이걸 시연에게 가져다주러 왔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나니 고민이 됐다. ‘이걸 줘야 해, 말아야 해...?’ 몇 번을 망설이다가, 결국 운전대에서 손을 뗐다. ‘당연히 줘야지. 다른 이유도 아니고, 나 때문에 시연이의 케이크가 엉망이 됐으니 보상은 당연한 거야!’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그는 차에서 내려 케이크를 들고 아파트로 향했다. ...시연이 차에서 내리자, 지동성도 같이 내렸다. “저 혼자 올라가도 돼요.” “어떻게 너 혼자 간다는 거야?”
시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 유건의 얼굴은 웬만한 귀신보다도 더 살벌했으니 말이다. 남자의 새까맣고 뜨거운 눈동자는 마치 그녀를 꿰뚫어 볼 듯했다. “지시연, 꼭 유부남이랑 엮여야겠어?” 시연은 가까이 다가온 유건의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씰룩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야, 이 태도는?’ “내가 말하는 거, 못 들었어?” 유건이 몸을 숙여 다가왔다. 시연을 작은 공간에 가둬버린 듯한 자세. 그리고 남자의 뜨거운 숨결이 여자의 귓가에 닿았다. “그 노친네가 너한테 뭘 줬어? 내가 두 배, 아니... 백 배, 천 배라도 줄게. 그러니까 제발 그만해. 그 노친네랑 다시는 만나지 마. 제발, 지시연, 부탁할게.” 거친 듯, 하지만 거의 애원에 가까운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시연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맑은 눈동자가 차갑게 유건을 올려다보았다. “누구를 만나고 말고는 내 자유예요. 내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줘야 해요?” 그러고는 미간을 좁히며 덧붙였다. “게다가, 그 사람이 나한테 준 건... 당신이 평생 줄 수 없는 거예요.” ‘내가 평생 줄 수 없을 거라고?’그 순간, 마치 수천 개의 화살이 유건의 심장을 동시에 뚫고 지나간 것만 같았다. 지금이 유건에게는 심장이 뭉개지는 듯한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비켜요. 나 들어가야 해요.” 시연은 손을 들어 유건을 밀어내려 했다. 그녀는 유건이 당연히 저항할 줄 알았기에, 그가 쉽게 밀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가볍게 닿았을 뿐인데, 유건은 힘없이 밀려났다. 시연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이 사람, 얼굴이 너무 안 좋은데 괜찮은 걸까?’ 하지만 곧이어 생각이 스쳤다. ‘이 사람이 어떻게 되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녀는 곧장 돌아서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철컥-문이 잠겼고, 문이 닫혔다. 유건은 멍하니 서 있었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것
유건은 마음속 깊이 차오르는 기쁨을 억눌렀다. 그리고 진아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 “시연이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 노은범을 안 좋아한다고?” “어...” 진아는 작게 웅얼거렸다. “정확히는... 더 이상 노은범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최고야. 세상에서 제일 좋은 말이야.’ 이것은 몇 날 며칠을 끙끙 앓던 유건의 귀에 들려온 가장 황홀한 소식이었다. 그는 수천억짜리 계약을 성사시킨 것보다도 더 기뻤다. “이거, 받아.” 그는 들고 있던 케이크를 진아에게 건넸다. “시연이가 좋아하는 거야.” “아, 네...” 진아가 얼떨결에 케이크를 받는 순간, 유건은 몸을 돌려 걸어갔다. 한결 가벼운 발걸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시연이가 왜 갑자기 노은범을 안 좋아한다고 했을까?’ ‘그 사람은 시연이가 꿈에서도 찾던 ‘은이’ 아니었나?’ ‘하진주 때문인 걸까?’ ‘하긴, 그게 뭐가 중요해?’‘어쨌든 그놈이 시연이한테서 완전히 떨어졌다는 게 중요한 거야!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겠어?’ ...진아는 케이크를 들고 집에 들어와, 시연 앞에 내려놨다. “문 앞에서 고 대표님 만났는데... 솔직히 좀 무서웠어... 그분이 나한테 가져가라고 해서... 안 받을 수가 없었어.” “푸흣.” 시연은 진아의 겁먹은 얼굴이 귀여워 피식 웃었다. “받았으면 됐어. 이 케이크 맛있으니까, 우리 같이 먹자.” 이미 받은 것을 이제 와서 거부하는 것도 웃기지 않겠는가?“오! 좋지!” ...다음 날 저녁. 지동성이 다시 시연을 찾아왔다. “저녁은 먹었니?” “네, 먹었어요. 아버지는요?” ‘이 시간에 찾아온 걸 보면... 설마 밥 먹으러 온 건가? 좀 늦은 거 아닌가?’ “응, 먹었지. 고객이랑 같이.” 지동성은 차를 가리켰다. “타. 낮엔 시간이 없었는데,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거든.” “네.” 시연은 별다른 의심 없이 차에 올랐다. “어디 가
‘이게 뭐야, 내가 이렇게 줏대가 없었던가?’ 시연은 속으로 자책했다. ‘내가 원래 하려던 게 뭐였지? 내 걸 되찾는 거잖아. 그런데 이 정도 가지고 놀라서 멍해지다니!’ ‘겨우 아파트 하나일 뿐이야. 고씨 가문에 비하면, 지씨 집안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지만, 이 정도는 큰 거도 아닐 거라고!’ ‘그런데, 왜 갑자기 나한테 이 아파트를 주는 거지?’‘일단 두고 보자. 한 걸음씩 확인하면 되는 거니까.’ “여기면 충분해요.” 시연은 밝게 웃으며, 조금은 딸 같은 애교를 섞어 말했다. “마음에 들어요.” “그래?!” 지동성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기쁜 얼굴로 딸을 잡아끌었다. “여기 와서 보렴. 이 방은 네 드레스룸으로 바꿔줄 생각이야.” “여긴 서재로 꾸밀 거야. 너는 책을 많이 읽으니까 책장도 크게 놓을 거고.” 시연은 지동성이 말하는 걸 들으며 가볍게 웃고, 가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감정 같은 거 신경 끄고, 그냥 재산 문제만 생각하니까 훨씬 편한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동성이 대뜸 물었다. “CA국에 가는 거, ‘웰스’ 쪽에서 연말쯤이 적당하다고 했어.” “네, 맞아요.” “그 전에 직접 가서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면 그래야죠.” “그럼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네. 출국 준비도 시간이 걸리는 법이잖아.” 지동성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여권, 비자, 우리 같이 준비하자.” “좋아요.” 시연은 간단히 동의했다. ...다음 날 오후. 시연은 VIP 병동으로 향했다. 고상훈은 여전히 입원 중이었는데, 그녀는 노인을 자주 찾아뵙겠다고 약속했었다. 병실에 도착했을 때, 고상훈은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시연아!” 시연을 보자, 고상훈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우리 시연이가 날 보러 왔구나! 오늘 날씨가 너무 좋다. 마침 정원에 나가려고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