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원하는 거?’유건은 멍하니 얼어붙었다. 희미한 생각이 아른거렸고, 터져 나오려 했다. 지하는 담담하게 친구를 바라봤다.“입으로는 네 전처를 위한다면서, 속으로는 지시연이 어떤 남자와도 가까워지는 걸 못 견뎌 하잖아. 지시연의 눈빛과 말 한마디에 흔들리고 있잖아.” 그리고 잠시 멈추더니 반문했다. “말해 봐,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뭐야?” 유건은 말없이 목울대를 삼켰다. “가자.” 지하는 유건을 춤추는 구역에서 끌어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어서 유건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며 말했다. “술 냄새가 진동하네. 얼음물 좀 마시고 정신 차려.” 유건은 잔을 들었지만 마시지 않았다. 친구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는 시연이를 좋아해. 만약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다면, 시연이의 과거와 아이까지 받아들이고 결혼을 생각하지도 않았을 거야.’ 유건은 눈을 감았다가 뜨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좋아하는 감정보다 책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그건 얼마나 좋아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지하는 술잔을 흔들며 나직이 말했다. “그저 그런 감정이면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기 마련이야. 당연히 그걸 지키려고 책임을 져야 할 이유도 없고.” “하지만 너 자신에게 물어봐. 지시연을 향한 네 감정이 그저 그런 수준인지.” 유건은 깊이 찡그린 채 오래도록 침묵했다. “잘 생각해 봐.” 지하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곤 입맛을 다셨다. “네가 이 상태로 계속 가면, 너도, 지시연도, 장소미도 다 괴로울 거야.” ‘정말 그럴까? 다들 불행해질까?’ 유건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고민하다가, 지하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아 단숨에 들이켰다. “쳇.” 그는 머리가 더 아파져 왔다. “그래서 술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 지하는 한숨을 쉬며 유건을 지그시 바라봤다. “로얄호텔에서의 그날 밤, 널 함정에 빠뜨린 놈은 아직 못 찾아냈어?” 유건은 등을 의자에 기댄 채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하면서, 우주는 조심스럽게 지동성을 쳐다봤다. ‘이 비행기를 사 준 사람이, 이 아저씨였어.’ 우주는 작은 목소리로 시연에게 물었다. “누나, 이 아저씨도 같이 갈까?” 시연은 살짝 미소 지었다. “우주, 이제 다 컸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응.” 우주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중하게 지동성을 초대했다. “아저씨, 같이 날려요!” “그래...” 그 말을 들은 지동성은 말할 수 없이 감격하며 두 손을 꽉 쥐었다. “하지만, 우주야, 난 아저씨가 아니고...”지동성이 무슨 말을 할지 깨달은 시연은 깜짝 놀라 허겁지겁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날카롭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왜 안 돼?” 지동성도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난 너희 아빠야. 우주의 상황을 생각하면, 지금 인정하지 않으면 더 어려워질 거야.” “허.” 시연은 코웃음을 쳤다. “이제 와서 조급해지셨어요? 그럼 이런 생각은 해보셨어요? 그쪽은 그동안 한 번도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어요. 우주의 세상에는 엄마, 아빠가 없어요. 오직 누나뿐이라고요!” “그쪽이 갑자기 아빠라고 하면, 그게 우주한테 얼마나 큰 충격일지 생각이나 해봤어요? 우주는 보통 아이가 아니라고요!!” 그 말에 지동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네 말대로 천천히 하자, 아빠가 기다리마.” ‘동의한다고?’ ‘이렇게 순순히?’ 시연이 가장 놀란 것은, 지동성이 처음으로 마음을 다해 우주를 배려했다는 사실이었다. 지동성은 우주에게 다가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가자. 잔디밭에서 날려 봐야지!” “와!” 우주는 기뻐서 폴짝 뛰었다. “누나! 같이 가!” “응.” 잔디밭에서 우주와 한참을 놀던 지동성은 점심시간이 되자 배달 음식을 시켰다. 포장을 뜯던 시연은 표정을 찡그렸다. “뭐예요? 치킨이에요? 밥을 먹으면 되잖아요.”
사진 속 사람은 젊음이 넘쳤다.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 생기가 얼굴 전체에 퍼져 있었다. 시연이 기억하는 그 얼굴보다 더 젊고, 더 예뻤다. 그 얼굴의 주인은 바로 시연의 어머니, 부명주였다. 그 사진을, 시연은 예전에 지동성의 지갑 속에서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본 것보다 더 새것이었다. 지금 시연의 눈앞에 있는 건 새로 인화한 사진이었다. ‘기분이 좀... 복잡하네.’ 지동성이 부명주를 깊이 사랑했다는 걸, 시연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를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이 왜 바람을 피웠을까?’ ‘사랑하면 그 사람과 관련된 것까지 아끼게 된다고들 하는데...’‘그토록 우리 엄마를 사랑했다면, 나랑 우주한테는 왜 그렇게까지 매정했던 걸까?’ 시연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때, 멀리서 차가 다가왔다. 지동성이 운전하는 차였다. 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지갑을 조용히 닫아 양복 주머니에 넣었다. “시연아, 타.” “네.” 두 사람은 어디에도 들르지 않았다. 각자 오후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지동성은 차를 몰아 시연을 임진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임진아가 살고 있는 아파트 건물 아래, 벤틀리 안. 유건은 운전대를 잡은 채, 옆에 놓인 케이크 상자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하... 나 진짜 답 없다.’유건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 다시 레스토랑에 가서 케이크를 주문했다. 그리고 또 굳이 이걸 시연에게 가져다주러 왔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나니 고민이 됐다. ‘이걸 줘야 해, 말아야 해...?’ 몇 번을 망설이다가, 결국 운전대에서 손을 뗐다. ‘당연히 줘야지. 다른 이유도 아니고, 나 때문에 시연이의 케이크가 엉망이 됐으니 보상은 당연한 거야!’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그는 차에서 내려 케이크를 들고 아파트로 향했다. ...시연이 차에서 내리자, 지동성도 같이 내렸다. “저 혼자 올라가도 돼요.” “어떻게 너 혼자 간다는 거야?”
시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 유건의 얼굴은 웬만한 귀신보다도 더 살벌했으니 말이다. 남자의 새까맣고 뜨거운 눈동자는 마치 그녀를 꿰뚫어 볼 듯했다. “지시연, 꼭 유부남이랑 엮여야겠어?” 시연은 가까이 다가온 유건의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씰룩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야, 이 태도는?’ “내가 말하는 거, 못 들었어?” 유건이 몸을 숙여 다가왔다. 시연을 작은 공간에 가둬버린 듯한 자세. 그리고 남자의 뜨거운 숨결이 여자의 귓가에 닿았다. “그 노친네가 너한테 뭘 줬어? 내가 두 배, 아니... 백 배, 천 배라도 줄게. 그러니까 제발 그만해. 그 노친네랑 다시는 만나지 마. 제발, 지시연, 부탁할게.” 거친 듯, 하지만 거의 애원에 가까운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시연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맑은 눈동자가 차갑게 유건을 올려다보았다. “누구를 만나고 말고는 내 자유예요. 내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줘야 해요?” 그러고는 미간을 좁히며 덧붙였다. “게다가, 그 사람이 나한테 준 건... 당신이 평생 줄 수 없는 거예요.” ‘내가 평생 줄 수 없을 거라고?’그 순간, 마치 수천 개의 화살이 유건의 심장을 동시에 뚫고 지나간 것만 같았다. 지금이 유건에게는 심장이 뭉개지는 듯한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비켜요. 나 들어가야 해요.” 시연은 손을 들어 유건을 밀어내려 했다. 그녀는 유건이 당연히 저항할 줄 알았기에, 그가 쉽게 밀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가볍게 닿았을 뿐인데, 유건은 힘없이 밀려났다. 시연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이 사람, 얼굴이 너무 안 좋은데 괜찮은 걸까?’ 하지만 곧이어 생각이 스쳤다. ‘이 사람이 어떻게 되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녀는 곧장 돌아서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철컥-문이 잠겼고, 문이 닫혔다. 유건은 멍하니 서 있었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것
유건은 마음속 깊이 차오르는 기쁨을 억눌렀다. 그리고 진아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 “시연이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 노은범을 안 좋아한다고?” “어...” 진아는 작게 웅얼거렸다. “정확히는... 더 이상 노은범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최고야. 세상에서 제일 좋은 말이야.’ 이것은 몇 날 며칠을 끙끙 앓던 유건의 귀에 들려온 가장 황홀한 소식이었다. 그는 수천억짜리 계약을 성사시킨 것보다도 더 기뻤다. “이거, 받아.” 그는 들고 있던 케이크를 진아에게 건넸다. “시연이가 좋아하는 거야.” “아, 네...” 진아가 얼떨결에 케이크를 받는 순간, 유건은 몸을 돌려 걸어갔다. 한결 가벼운 발걸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시연이가 왜 갑자기 노은범을 안 좋아한다고 했을까?’ ‘그 사람은 시연이가 꿈에서도 찾던 ‘은이’ 아니었나?’ ‘하진주 때문인 걸까?’ ‘하긴, 그게 뭐가 중요해?’‘어쨌든 그놈이 시연이한테서 완전히 떨어졌다는 게 중요한 거야!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겠어?’ ...진아는 케이크를 들고 집에 들어와, 시연 앞에 내려놨다. “문 앞에서 고 대표님 만났는데... 솔직히 좀 무서웠어... 그분이 나한테 가져가라고 해서... 안 받을 수가 없었어.” “푸흣.” 시연은 진아의 겁먹은 얼굴이 귀여워 피식 웃었다. “받았으면 됐어. 이 케이크 맛있으니까, 우리 같이 먹자.” 이미 받은 것을 이제 와서 거부하는 것도 웃기지 않겠는가?“오! 좋지!” ...다음 날 저녁. 지동성이 다시 시연을 찾아왔다. “저녁은 먹었니?” “네, 먹었어요. 아버지는요?” ‘이 시간에 찾아온 걸 보면... 설마 밥 먹으러 온 건가? 좀 늦은 거 아닌가?’ “응, 먹었지. 고객이랑 같이.” 지동성은 차를 가리켰다. “타. 낮엔 시간이 없었는데,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거든.” “네.” 시연은 별다른 의심 없이 차에 올랐다. “어디 가
‘이게 뭐야, 내가 이렇게 줏대가 없었던가?’ 시연은 속으로 자책했다. ‘내가 원래 하려던 게 뭐였지? 내 걸 되찾는 거잖아. 그런데 이 정도 가지고 놀라서 멍해지다니!’ ‘겨우 아파트 하나일 뿐이야. 고씨 가문에 비하면, 지씨 집안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지만, 이 정도는 큰 거도 아닐 거라고!’ ‘그런데, 왜 갑자기 나한테 이 아파트를 주는 거지?’‘일단 두고 보자. 한 걸음씩 확인하면 되는 거니까.’ “여기면 충분해요.” 시연은 밝게 웃으며, 조금은 딸 같은 애교를 섞어 말했다. “마음에 들어요.” “그래?!” 지동성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기쁜 얼굴로 딸을 잡아끌었다. “여기 와서 보렴. 이 방은 네 드레스룸으로 바꿔줄 생각이야.” “여긴 서재로 꾸밀 거야. 너는 책을 많이 읽으니까 책장도 크게 놓을 거고.” 시연은 지동성이 말하는 걸 들으며 가볍게 웃고, 가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감정 같은 거 신경 끄고, 그냥 재산 문제만 생각하니까 훨씬 편한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동성이 대뜸 물었다. “CA국에 가는 거, ‘웰스’ 쪽에서 연말쯤이 적당하다고 했어.” “네, 맞아요.” “그 전에 직접 가서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면 그래야죠.” “그럼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네. 출국 준비도 시간이 걸리는 법이잖아.” 지동성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여권, 비자, 우리 같이 준비하자.” “좋아요.” 시연은 간단히 동의했다. ...다음 날 오후. 시연은 VIP 병동으로 향했다. 고상훈은 여전히 입원 중이었는데, 그녀는 노인을 자주 찾아뵙겠다고 약속했었다. 병실에 도착했을 때, 고상훈은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시연아!” 시연을 보자, 고상훈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우리 시연이가 날 보러 왔구나! 오늘 날씨가 너무 좋다. 마침 정원에 나가려고
‘침착해, 냉정함을 유지하자고.’ 유건은 스스로 되뇌었다. 핸드폰을 집어 던진 걸 빼면, 그는 지금 아주 냉정했다. 이어서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고, 주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짧고 간결하게 말했다. “지시연이 해외로 나갈 가능성이 있어. 여행사 쪽을 알아봐. 어디로 가는지.” [네, 형님.]전화를 끊은 후, 유건은 한층 더 냉정을 되찾았다. 곧장 병실의 간병인을 불렀다. “당장 치워.” 산산조각 난 핸드폰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 그리고 아주 작은 이익을 제시했다. “곧 네 계좌로 돈이 들어갈 거야.” 간병인은 금방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네, 고 대표님! 안심하세요.” ...잠시 후, 시연이 고상훈을 휠체어에 태운 채 병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손자를 보자마자, 아직도 화가 난 듯한 고상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손녀 같았던 시연을 손에서 놓친 손자가 밉다는 그 표정. 하지만 시연은 이들 조손간의 감정 문제에 끼어들고 싶지 않고, 책가방을 들어 올리며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할아버지, 저 먼저 갈게요. 다음에 또 올게요.” “그래, 그래. 우리 시연이가 최고야.” 고상훈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유건을 향해 매서운 눈빛을 날렸다. “넌 뭐 하러 왔어? 내가 널 보고 싶어 할 것 같아?” “나가!!” ‘흥.’ 유건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할아버지가 일부러 나한테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 같아.’ ‘그럼 나도 그 기회를 잘 써야겠지.’ 그때 시연이 책가방 옆 주머니를 더듬었다. “어?” 그리고 살짝 찡그린 눈썹. “핸드폰이... 어디 갔지?” “시연아, 왜 그래?” 고상훈이 시연의 미묘한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뭐 잃어버렸니?” “네.”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제 핸드폰이 없어졌어요.” “고장 난 게 아니라, 아예 사라졌다
‘뭐야, 이거...?’ 유건은 순간적으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뭔가 말하려는 찰나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더니, 그대로 멈춰버렸다. 덜컹-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불이 꺼졌다. “꺄악!” 시연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유건 씨?” 암흑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 여기 있어.” 여자의 불안이 전해지기도 전에, 따뜻한 팔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익숙한 온기. 오랜만에 맡는 상쾌한 페퍼민트 향. 유건은 시연을 단단히 안고, 턱을 그녀의 정수리에 가만히 기댔다. “괜찮아, 전력 문제인 것 같으니, 금방 복구될 거야.”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하면서도, 나지막하고 차분했다. ‘정말 그럴까?’ 시연은 불안했다. 엘리베이터 사고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수도 없이 봤지만, 이렇게 직접 겪는 건 처음이었다‘드라마에서는 늘 기적처럼 구조되지만... 현실은 다를 수도 있잖아?’ “언제쯤 사람들이 올까요...? 우리 그냥 여기서 계속 기다려야 해요?” 여자의 작은 몸이 유건의 품속으로 조금 더 파고들었다. 그는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무서워?” “당신은 안 무서워요?” “당연히 안...” “꺄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툭, 아래로 떨어졌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자유낙하. “아니, 아까 괜찮을 거라면서요!!!” 시연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떨렸다. ‘이렇게 떨어지면... 그냥 자유낙하랑 다를 게 없잖아?!’ ‘이대로 충격까지 더해지면, 진짜 죽을 수도 있는 거 아냐?!’ 훅-그 순간, 유건이 시연을 번쩍 안아 올렸다. 여자의 작은 몸이 남자의 가슴에 바짝 밀착되었다. “움직이지 마.” 시연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이 자세... 너무 이상한데...’ “가만히 있어.” 남자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 “네가 움직이면 배 속에 있는 아이한테 충격이 갈 수도 있어.” 그 말 한마디에, 시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시연!” 유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연의 손을 꽉 쥐었다. 그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너한테 말하고 있는 거야.” “그래요, 나도 알아요.” 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살짝 올리며 유건을 바라봤다. “내가 당신이 한 말 몇 마디에 감동해서 울컥하고, 기분 좋아서 그 말들 다 들어줄 정도로 철없는 애인 줄 알아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눈동자엔 씁쓸함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나, 진심으로 너한테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어. 진심으로... 너한테...”“하지 마요.” 시연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망설임 하나 없이, 맑고 또렷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마음, 난 안 받을 거예요.”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멎은 듯 조용해졌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유건은 잠시 말이 없다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거절할 줄 알았어. 하지만 시연아, 내가 널 좋아하는 감정은 네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내 의지로도 안 돼.” 유건은 이내 들고 있던 장미꽃을 시연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 막 비행기로 도착했는데, 마음에 들어?” 시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에서... 꽃을 보여주면 내가 감동할 줄 아나 봐?’ 시연은 꽃은 쳐다보지도 않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좋아요.” 유건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아, 기분 상했나 보네. 오늘은 일단 가주는 게 딱 좋겠어.’ “장미 안 좋아해?” 유건은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알았어. 다음엔 다른 꽃으로 할게.” “뭐라고요...?” 시연은 벙찐 얼굴로 유건을 쳐다봤다. ‘지금... 난 그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닌데?’ 그런데 유건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려,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진아에게 장미꽃을 건넸다. “진아 씨, 이거 좀 꽂아줘.” “네? 아, 네...”
유건의 말에 시연은 멍해졌다. ‘뭐...?’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반응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말했잖아요. 장소미 때문에 애쓸 필요 없다고...” “장소미 때문이 아니야!” 유건이 더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급함과 답답함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장소미 얘기 좀 그만해. 지금 내가 함께 있는 사람은 너야. 근데 넌 계속 장소미 얘기만 해?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렇게 해서 날 포기하게 하려고?” ‘포기...?’ ‘무슨 포기?’ 순간 얼어붙은 시연의 가슴 한쪽이 덜컥 내려앉았고,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만해요. 듣기 싫어요.” 시연은 급하게 말을 끊고, 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찾았다. 하지만 열쇠를 꺼내기도 전에, 손목이 따뜻한 손에 붙잡혔다. 유건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날 벌주려고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야? 내가 무슨 마음인 줄 진짜 몰라서 그래?” “내가... 뭘 알아야 하는데요?” ‘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지...?’ ‘설마... 아니겠지.’ “좋아해.” 짧은 세 글자가 공기 속에 맴돌며 터졌다. 순간, 주위가 고요해졌다. ‘지금, 뭐라고 했어?’ 시연은 입술을 벌린 채,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눈동자엔 당혹감과 혼란스러움, 그리고... 약간의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겹쳤다. 유건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지시연. 나 너 좋아해.”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지시연, 내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너야. 내 마음을 너만을 향한다고.”27년 인생, 유건에게 고백이란 건 처음이었다. 얼굴이 빨개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볼 안쪽이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은 분명했다. 그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 떨릴 일이야...?’ ‘이런 게 고백이라는 건가?’ 돈 많고, 능력 있는 고유건 대표도 이 순간만큼은 그냥 연애 초
그날 갑자기 셋이 자리를 뜰 때, 성빈한테는 제대로 설명도 못 하고 나왔다. ‘좀 미안하긴 했는데...’ “아냐.” 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평일이잖아. 성빈이 일하는 날이야. 우리처럼 백수들이랑은 다르지.”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시연은 더 고집하지 않았다. 진아는 시연을 위해 산모 요가 클래스에 함께 들어갔다. 영화는 그냥 그랬다. 극장을 나오자 둘 다 하품만 연발. 밖은 여전히 눈이 펑펑 내리는 G시. “으, 춥다...” 진아는 시연의 팔짱을 끼고, 발을 구르며 입김을 불었다. “우리 샤부샤부 먹자! 얼큰한 걸로!” “평소 가던 데로 가자.” “좋아!” 마침 그 식당은 클럽 근처에 있었다. 클럽 쪽으로 들어서자, 진아가 걸음을 멈췄다. “왜?” 시연은 고개를 돌려 진아가 보는 쪽을 따라 바라봤다. 멀지 않은 곳에서, 클럽 안에서 나오는 성빈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곁엔 젊은 여자가 있었다. 둘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성빈은 여자의 어깨에 여성용 외투를 살포시 걸쳐주고 있었다. 자연스럽고, 세심하고, 약간 고개를 숙인 그 눈빛은... 분명히 다정했다. “진아야.” 시연은 거의 반사적으로 진아의 손을 꼭 잡았다. “응.” 진아는 시선을 거두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봐봐, 오늘 성빈 안 부르길 잘했지. 바쁘잖아, 저렇게.” 시연은 눈썹을 찌푸렸다. ‘성빈이... 연애 안 한다더니. 그럼 저 여자는 뭐지?’ ‘이건 좀 아니잖아?’ 뭔가 기분이 상한 시연은 진아를 살짝 당겼다. “가서 인사나 할까?” “야야...” 진아는 손을 급히 잡아당기며 막았다. “지금 데이트 중이잖아. 우리가 가면 민폐지.” “진아야...” “가자니까!” 진아는 배를 가볍게 감싸며 투정을 부렸다.“나 진짜 배고파 죽겠어. 너는 안 배고파? 얼른! 밥 먹자고.” 결국 시연은 한숨을 쉬며
시연은 예상하지 못했다. 지동성이 그런 걸 물어올 줄은. ‘이제 와서 이런 걸 묻는다고?’ ‘이게 걱정이라고? 참...’ 시연은 코웃음이 나올 뻔했다. ‘죽을 날 다 돼가니까, 양심이라도 생긴 건가? 완전 새사람 된 것처럼 굴고 있네.’ “시연아... 고 대표 좋아하니?” 시연이 침묵하자, 지동성은 조급해졌다. 장미리가 약을 가지러 갔던 참이라. 시간이 얼마 없었다. 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아니요. 안 좋아해요.” ‘예전에 좋아했던 적이 있다고 해도... 그건 그냥 과거일 뿐이야.’ ‘그리고 그런 얘길 굳이 이 사람한테 할 필요도 없어.’ 그녀는 지동성이 쥐고 있는 팔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이제... 가도 될까요?” “응, 그래.” 지동성은 멍한 표정으로 손을 놓았고, 시연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돌아섰다. 멀리서 장미리가 약 봉투를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약국 줄이 엄청 길더라고요.” 장미리는 다가와 지동성을 부축했다. “다 받아왔어요. 이만 가요.” 오늘은 집에 가기 전에, 딸 장소미에게 들를 예정이었다. “그래...” 지동성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장미리에게 이끌려 외과 건물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하지만 머릿속에는 시연의 말만이 맴돌았다. ‘안 좋아해요...’ ...병실 안, 장소미는 수액을 맞으며 누워 있었다. “소미야, 오늘은 좀 어때?” 장소미가 약 봉투를 내려놓으며 병상 옆에 앉았다. “뭐가 어때요?” 소미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맨날 약 바르고, 주사 맞고, 치료받고 있잖아요!” 그러더니 갑자기 거즈로 감긴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근데 봐봐요. 그렇게 해도 맨날 이 모양이잖아요!” “어머, 얘야!” 장미리는 깜짝 놀라 급히 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다 상처 다시 터지면 어떡해? 조심 좀 해.” 지동성도 진정시키듯 말했다.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