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을 팔던 그 마트 말이야, 주인 부부가 우리나라 분들이더라.” 유건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아내가 임신 중이라 입맛이 없다고 했더니, 사모님이 자기도 임신했을 때 그랬다고 하시더라고. 그러면서 이 방법을 알려주셨어.”‘그랬구나.’ 시연은 조용히 들으면서, 비 오는 깊은 밤, 유건이 낯선 사람에게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제 아내가 임신 중이라...’ 순간, 가슴이 이상하게 따뜻해졌다. 그리고 묘하게 간질거렸다. 이때, 고요한 공간에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시연은 반사적으로 유건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핸드폰을 들고 한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이곳은 조용했고, 거리도 좁았다. 그는 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낮췄지만, 그래도 몇 마디는 들렸다. “응, 아직 Y국이야.” ‘여기가 Y국이었어?’ 시연은 고개를 숙이며,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직 이틀 정도 더 있어야 해. 걱정하진 말고.” “너도... 몸조심해.” 유건은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부드러운 목소리. 그 따뜻한 배려. 장소미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알겠어, 가서 이야기하자.” 전화를 끊고, 유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멈춰 섰다. 조금 전까지 온기가 가득했던 식탁.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아직 따뜻한 밥과 생선이 그대로인데, 그걸 먹던 사람은 사라졌다. ...다음 날 새벽.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각. 6시가 되기 전. 주지한이 도착했다. 정민환과 정기환도 함께였다. 그들은 차 두 대를 타고 왔다. 유건은 Y국을 떠날 때 급하게 비행기를 예약했기에, 한 번에 네 장을 구하지 못해서 결국 유건과 지한이 먼저 오게 되었다. 이른 시각, 노부부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유건 일행은 떠나야 했다. 유건은 직접 노부부에게 인사하러 갔다. “그동안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저희를 데리러 온 사
민환과 기환은 다 특수부대 출신이라 두 사람의 감각이 틀릴 리 없었다. 유건은 미간을 좁혔다. ‘CA국이라... 대체 어떤 놈들이길래 나를 몇 번이나 쫓고 위협하고도, 또 뭔가를 하려는 거지?’ “형님...” 그때, 뒷좌석에서 기대어 자고 있던 시연이 살짝 움직였다. “그만.” 유건은 순간적으로 민환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더 말하지 마. 지금은 안 돼.’ 민환도 즉시 눈치를 챘다. “네.”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뒷좌석에서, 시연은 단순히 몸을 조금 뒤척였을 뿐이었다. 다행히, 깊이 잠든 듯 보였다. 유건은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 깼네. 다행이다.’ ‘그리고... 애초에 이 지저분한 일들은 시연이가 알 필요도 없어.’‘하지만... 시연이가 이 사실을 알면 날 걱정해 주려나?’ 사실, 시연은 처음부터 깨어 있었다. 유건과 민환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누군가 고유건을 해치려는 건가?’ 그녀의 머릿속에, 과거 유건이 칼에 맞아 병원에 실려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그저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했다. 시연은 재벌가의 발이 넓을 거라 생각했다.‘하긴, 고유건의 능력을 생각하면 그 살인범은 이미 법의 심판을 받았을 거야.’ 그런데, 아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그 배후를 찾지도 못한 거야?’이 사실은 아주 충격적이었다. ...날씨는 맑았고, 이동하는 내내 별다른 문제 없이 ‘웰스'에 도착했다. 주지한이 있었기 때문에 협상 관련된 부분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연 일행은 담당자의 안내를 받으며 시설을 둘러보았다. ‘웰스’는 업계에서 손꼽히는 교육 기관이었다. 여기서 배출된 인재들은 다양한 첨단 산업에 기여해 왔다. “이 학생 말이에요.” 책임자인 30대의 여성은 최근 사례를 소개했다. “우주군처럼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아이였어요. 하지만 지금은 무려 8개 연구소에서 합
차 안의 분위기가 점점 무거워졌다. 도시로 들어설 무렵, 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님, 형수님을 먼저 내려드릴까요?” ‘당연한 걸 왜 묻지?’유건은 이런 질문 전혀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연이 먼저 거절했다. “아니에요.” “일단 유건 씨가 머무는 숙소로 가요. 괜히 집까지 돌아갈 필요 없어요. 그리고 저는, 병원에 좀 들러야 해요.”지동성은 아직 입원 중이었다. 그래서 시연은 아버지를 그냥 두고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웰스'에서 본 것들, 들은 것들을 그녀는 직접 전해야 했다. 그게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으니까. 유건의 미간이 본능적으로 좁혀졌다. 그는 반대하고 싶었다. “시연아...” “약속했잖아요.” 그녀는 유건의 의도를 미리 읽고, 단호하게 말했다. 유건이 ‘웰스’까지가 마지막이라고 했으니, 이제부터 두 사람은 갈 길이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유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리고 쓴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마치 쓴 약을 삼킨 것처럼.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어렵게 말했다. “그래, 약속 지킬게.” 그러고는 민환에게 지시했다. “앞 사거리에서 내려줘.” “네, 형님.” 차가 멈추고, 시연이 내렸다. 문을 닫고, 그녀는 유건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가요.” 시연은 ‘잘 가’라고 했고, ‘다시는 보지 말자'라고는 하지 않았다.때로는 ‘다시는 보지 말자’는 말보다, 더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 ‘잘 가’라는 말이었다.언젠가 다시 볼 수도 있지만, 이제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미. 그렇게 덤덤하게 마무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픈 법이었다.“그래. 잘 가.” 유건은 아주 작게, 입술을 겨우 움직이며 읊조렸다. 차가 움직였다. 그는 거울을 통해, 시연이 점점 작아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마치 심장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느낌. ‘아... 나는 정말로
시연은 곧바로 핸드폰을 집어 들고 유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그는 받지 않았다. 이어서 곧바로 주지한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역시, 같은 결과. 아무도 받지 않았다. 시연의 이마 한가운데 주름이 깊게 잡혔다. ‘불길해.’ 그녀는 손가락을 깨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닐까?’ ‘그런 게 아니라면, 내 전화를 안 받을 리가 없잖아.’ ‘어떻게 해야 하지? 전화를 계속 거는 건 의미가 없잖아.’ ‘그저 앉아서 속만 태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야.’ ‘망설일 필요가 없겠어.’이렇게 생각하자, 시연은 핸드백을 챙겨 곧장 Mavis호텔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길을 가는 내내 심장이 쿵쿵거리면서 불안감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리고 직접 그곳을 마주했을 때,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Mavis 호텔의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짙은 연기가 솟구쳤고, 불길은 마치 성난 짐승처럼 하늘을 향해 타올랐다. 사람들의 비명, 소방차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 모든 것이 뒤엉켜 있었다. 시연은 필사적으로 평정을 유지하려 했다. ‘지금 내가 이성을 잃으면 안 돼.’ 그녀는 손에 쥔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유건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여전히 연결되지 않았다. ‘제발, 제발...’ 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하지만, 그 기도는 닿지 않는 듯했다. 시연이가 핸드폰을 천천히 내렸다. 심장이 조여오는 느낌이었다. ...호텔 주변에는 이미 통제선이 쳐져 있었다. 경찰과 보안 요원들이 사람들을 통제하며 대피를 돕고 있었다. 시연은 사람들 속에서 호텔 직원을 찾았다. 그리고, 금발의 한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호텔 유니폼을 입은 직원. 그녀는 서둘러 다가가, 그 남자 직원의 팔을 붙잡았다. “실례합니다. 혹시 호텔 직원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다행이네요!” “제 친구들이 이 호텔에 묵고 있었어요. 혹
간호사는 손에 든 명단을 빠르게 넘겨보며 말했다. “병원으로 이송된 환자들은 체크 표시가 되어 있어요. 그런데 Cem 씨는... 체크 표시가 없네요.” 즉, 유건은 아직 여기에 있다는 뜻이었다. “감사합니다!” 시연은 손에 힘을 주며 간절히 물었다. “혹시... 구급차 안을 볼 수 있을까요? 제 친구가 있을지도 몰라서요.” “네, 가능합니다.”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응급 구조 중이니 방해하지는 말아 주세요.” “네, 물론이죠! 정말 감사합니다!” 이곳에는 혼란과 슬픔이 가득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절망과 비통함이 교차하는 공간. 시연은 가슴이 조여드는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구급차 하나하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딜 봐도 유건은 없었다. ‘이상해! 간호사 명단에 없다면, 여기 있어야 하는데.’ ‘혹시, 기록이 잘못된 걸까?’ ‘그것도 아니면 이미 병원으로 이송된 걸까?’ 그때 옆을 지나가는 두 사람이 있었다.젊은 여자애가 중년 여성을 부축하고 있었던 것. 엄마와 딸인 것 같고, 딸은 간신히 눈물을 참으며, 어머니를 위로하고 있었다. 시연의 귀에 스친 모녀의 대화가 있었다. “엄마, 아빠는... 우리의 곁을 떠났어. 이제 받아들여야 해...” “아냐... 아직 아냐...” “엄마...” “...”시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실례합니다.” 눈을 뜨자, 조금 전 시연과 스친 젊은 여자애가 말을 걸어왔다. “네?” 여자애의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혹시 가족을 찾고 계세요?” “네.” “만약 병원에도 없고, 구급차에도 없다면...” 그녀는 조용히 남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보세요.” 그곳은 다른 곳보다 더욱 깊은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 말을 끝맺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자애가 의미하는 바를. 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시연의 심장이 조여들었다. 너무 아파서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낮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사라질 수 있지?’ ‘이 사람은... 우선 나부터 호텔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어.’‘하지만, 나 거절했어.’ ‘만약 내가 그게 마지막 순간이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야.’‘좀 더... 좀 더 이야기를 나눴을 텐데...’ “아니야, 아니야...” 시연은 흐느끼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야! 몇 마디 더 나누는 것으로는 부족해!’ ‘고유건은... 아직 너무 젊잖아!’‘아직 가야 할 길이 멀고, 고유건을 기다리는 인생도 있는데...’‘그리고, 할아버지...’‘고유건은 외아들이고, 고씨 가문의 유일한 손자잖아!’ ‘할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견딜 수 없으실 거야.’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여기 오지 않았다면, 고유건은 죽지 않았을 거야!’ ‘그 사람은 CA국에 올 이유가 없었는데, 나 때문에 온 거잖아!’ “고유건! 당신 바보야?” 시연은 흐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왔어...? 우리 이미 끝난 사이잖아... 난 당신 책임이 아니라고...” “엉엉...” 여자의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며, 작은 구덩이가 파일 듯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후회해도... 아무리 울어도...’‘고유건이라는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한편, 구급차 옆에서 정민환은 억지로 들것에 눕혀지고 있었다.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형님, 진짜 이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에요. 저 혼자 걸을 수 있다고요.” “그게 말이 돼?” 유건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이 꼴이 돼놓고, 멀쩡하다고?” 민환의 머리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팔에는 응급처치를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다리에 난 부상으로 인해, 바지는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래서 당장 정밀 검사
유건의 마음속은 의문과 충격으로 뒤죽박죽이었다.‘이게 대체 뭐지?’ 시연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근데 시연이 앞에 놓인 들것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왜 저 사람을 보고 이렇게 울고 있는 거냐고!’‘근데 내 이름을 부르고 있잖아...’‘설마 시연이가 저 시신을 나라고 착각한 건가?’ 쿵, 쿵! 유건의 가슴이 요동쳤다. 이어서 명확하게 깨달았다. ‘시연이는 폭발 소식을 듣고 여기까지 왔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사람을 나라고 착각한 것 같아.’ ‘그리고, 지금... 나를 잃었다고 생각하며 울고 있는 거라고!’ ‘맞아, 틀림없어!’ 유건은 알고 있었다. 이런 감정을 느껴선 안 된다는 걸. 하지만, 이내 기쁨이 번졌다. 그리고 작은 불씨처럼 시작된 감정이 순식간에 커져 버렸다. 마치 온몸이 뜨거운 불길에 휩싸인 듯했다. 그는 심호흡하며, 애써 차분하게 걸음을 옮겼다. “지시연.” 시연의 몸이 굳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들것 위로 향했다. ‘잘못 들었을 거야. 너무 슬퍼서, 이제는 환청까지 들리는 걸 거야.’ 그녀가 멍하니 있자, 유건은 다시 한번 부드럽게 불렀다. “시연아, 나 여기 있어.” 시연의 등이 떨렸다. 그리곤, 천천히,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여자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금이 가듯, 무너져 있던 마음이 다시 이어지듯. “고유건 씨!!??” 시연이 정말 믿을 수 없었다. ‘환영일 거야.’‘그 사람은 분명 죽었는데.’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직접 확인해야겠어!’ 그녀는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무릎을 꿇고 있던 탓에 다리가 저렸다. 게다가, 오랜 시간 감정이 격해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다시 무릎을 꿇었다. “아...!” 이번엔, 바닥에 그대로 부딪혔다. “시연아!” 유건이 바로 뛰어들었다. 여자를 감싸 안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뭐가 그렇게 급해?
시연이 기절한 이유는 절대 키스 때문이 아니었다. 병원에 도착한 후, 의사가 그녀를 진찰했다. “감정 기복이 너무 심했나 봅니다. 임신 중이라 체력도 약해져 있는데, 너무 심하게 울어서 가벼운 탈수 증상까지 왔어요.” “감사합니다.” 병실. 시연은 링거를 맞고 있었다. 유건은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침대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시연이는 나를 좋아해!’‘어느 정도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적어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게 아닌 건 확실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그렇게까지 울 순 없으니까.’ “시연아.” 그는 조심스레 여자의 손을 감쌌다. 그리고 낮게 속삭였다. “너, 나를 아주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 그때, 병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주지한이었다. “무슨 일이야?” “형님.” 지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민환이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고, 다행히 다리에는 큰 이상이 없습니다. 가서 보시겠어요?” 이는 유건이 직접 지시한 일이었다. 민환이 수술실에서 나오면 곧바로 보고하라고. 지시가 없었다면, 지한은 유건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을 터였다. “물론 형님이 안 가셔도 괜찮습니다. 저랑 기환이가 있을 테니까, 형님은 형수님 곁에 계셔도 됩니다.” 그러나, 유건은 이미 시연의 손을 놓고 일어나고 있었다. ‘민환이가 나를 위해 목숨까지 걸었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가자.” “네, 형님.” 지한은 코끝이 찡해졌다. 민환, 기환, 지한은 유건과 주종 관계였지만, 유건은 셋을 친구이자 형제처럼 대했다. 그래서 세 사람도 유건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다. 지한과 유건이 병실을 떠나자, 시연은 조용히 눈을 떴다. 사실, 그녀는 이미 깨어 있었다. 하지만, 유건과 마주하기가 두려워, 그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는지. 시연은 그동안 감정을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