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고 대표님이 나랑 비닐랩 사이로 키스하겠다는 거야?’ 하은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시연이가 바로 옆에 있는데...’ 그녀는 거절해야 할 것 같으면서도, 아쉽고, 복잡한 마음에 괜히 기대까지 되고 있었다. “고...” 하은이 어렵게 입을 열려는 순간. “여보.” 유건이 불쑥 시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둘 다 6번이야.” 시연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아니거든요?” 시연은 진심으로 억울해하며 번호표를 유건에게 내밀었다. “나는 9번이에요.” “거짓말.” 유건은 힐끔 보더니, 능청스럽게 말했다. “이거 딱 봐도 6번인데? 못 믿겠으면 애들한테 물어봐.” 그러면서 태연하게 번호표를 테이블 위에 툭 던졌다. 주변 친구들도 상황 파악은 했지만, 서로 눈치를 보다 결국 하나같이 말했다. 이 타이밍엔 모두 ‘고 대표님’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맞아, 6번이야.” “응, 완전 6번이지.” “...”하은은 이를 꽉 물고, 자신의 번호표를 조용히 접어 가방 속에 넣었다. ‘왜 하필...’ “자, 줘봐.” 유건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손을 내밀었고, 눈치 빠른 혜수가 재빨리 비닐랩 판을 건넸다. “여보, 게임 룰은 지켜야지.” “우와...” “키스! 키스!” “...”동기들은 완벽하게 분위기를 띄웠다. “받아.” 유건은 비닐랩 판을 시연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당신이 들고 있어. 난 그냥 얼굴 쪽에 살짝 키스할게. 약속해. 빨리, 다 기다리잖아.” ‘이 상황, 못 빠져나가.’ 시연은 잠깐 망설였지만, 결국 비닐랩 판을 받아서 들었다. “절대 말 바꾸지 마요!” 시연은 매섭게 유건을 노려봤다. “약속할게.” 유건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는다. 이 사람... 그래도 기본은 지키는 사람이니까.’ 시연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비닐랩 판을 얼굴 앞에
시연은 얼굴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평소에 쉽게 얼굴이 붉어지는 편도 아닌데, 지금은... ‘주변에 다 내 동기들인데!’ “고유건 씨! 지금 제정신이에요?” 시연이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여보.” 유건은 술기운인지, 아니면 진심이 터져 나온 건지, 시연의 손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남자의 거친 숨결과 술 냄새가 시연의 얼굴을 덮쳤다. “나 무시하지 마. 나 싫어하지도 말고, 응?” 그러면서 유건은 시연의 손을 자신의 왼쪽 가슴에 가져다 댔다. “만져봐. 여기, 아파 죽겠어.” ‘이 인간, 미쳤어... 진짜!’ 시연은 당혹감과 분노로 머리가 새하얘졌다. “손 놔요!” 시연은 얼굴이 뜨겁게 타오르는 걸 느끼며 버둥거렸다. 이미 주변 동기들의 은근한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아 진짜 죽고 싶다...’ 하지만 유건은 여전히 똑같은 자세로, 같은 말만 반복했다. “여보, 나 좀 봐줘. 여기 아프다고...” 그때, 물을 들고 돌아온 하은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그 속엔 어딘가 모르게 질투 섞인 감정도 스쳤다. “고 대표님, 그리고 시연아.” 예전에 의대 학생회장을 했던 남학생이 다가와서 둘을 불렀다.“저쪽에서 게임을 하는데, 같이 가볼래?” “좋아!” 시연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 얼른 유건을 밀쳐내며 대답했다. 게임이고 뭐고 상관없었다. ‘이대로 이 인간 옆에 있다간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아.’ “그럼 다 같이 가자.” “응.” 시연이 소파 쪽으로 가자, 주변 동기들이 눈치껏 자리를 비켜줬다. 하지만 유건은 여전히 시연 옆에 딱 붙어 앉아 있었다.팔을 벌려 시연을 둘러싸듯 감싸며, 그 누구도 근처에 앉을 엄두도 내지 못하게 했다. 유건은 시연만 바라보며 낮게 물었다. “무슨 게임이야? 진실게임? 벌칙 게임? 한심해서 못 하겠네.” ‘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심지어 유
“그래?” 시연은 고개를 들어 겨우 한 번 쓱 주변을 둘러봤다. 유건은 몇몇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다들 술잔을 들고 있었고, 유건은 거절할 생각도 없는 듯 하나하나 받아 마시고 있었다. “쳇...” 하은이 시연을 힐끔 보며 말했다. “시연아, 고 대표님... 너 엄청나게 아끼는 거 티 난다?” 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너도 느꼈어?” “누가 봐도 알겠는데?” 하은은 약간 질투 섞인 목소리로 웃었다. “고 대표님이 GP그룹 대표야. 갓 졸업한 우리 같은 애들 앞에서 저렇게 체면까지 내려놓을 이유가 뭐겠어? 다 너 때문이지.” ‘그럴싸하네...’ 시연은 괜히 찜찜해졌기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사실 시연은 유건이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신경 쓰는 게 싫었다. 아니, 꽤 거슬렸다. “잠깐 앉아 있어. 난 먹을 거 좀 가져올게.” 하은이 활기차게 일어섰다. “내가 다녀올게.” “아냐, 넌 그냥 있어. 혹시라도 배 아프면 어쩌려고.”이미 벌떡 일어난 하은을 보며, 시연은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이 모임은 뷔페 형식이라 음식은 셀프였고, 노래방이나 당구도 같이 즐길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은이 양손에 쟁반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고마워.” 시연은 무심하게 한쪽 쟁반을 보며 말했다. “근데... 너 엄청나게 배고팠어?” 쟁반에는 음식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아니.” 하은이 피식 웃었다. “이건 고 대표님 거야.” 그녀는 또 다른 쟁반을 가리켰는데, 이미 조금 먹은 흔적이 보였다. “이게 내 거고.” ‘아...’ 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 어딘가가 묘하게 답답했다. ‘내가 예민한 걸까? 자세히 보면... 하은이, 고유건한테 꽤 신경 쓰는 것 같은데?’ ‘고유건, 이 남자... 괜히 인기가 많은 타입이네...’ 시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음식에만 집중했다. “여보.” 조금 후, 유건이 다가왔다.
유건은 순간 깨달았다. ‘또 괜히 오해한 거야?’ 그리고 슬쩍 레오를 쳐다봤다. 레오는 오히려 예의 바르게 웃으며 고개까지 끄덕였다. 유건은 본능적으로 레오를 다시 훑어봤다. ‘대체 이 아저씨는 뭐야? 시연이 주변에 이런 사람 있었나? 처음 보는데.’ 바로 그때, ‘청운각’ 문이 열리고 시연이 어떤 남자 동료와 함께 나왔다. “레오 선생님.” 레오가 곧장 앞으로 다가갔다. “이쪽이 레오 선생님입니다.” “반갑습니다.” 둘은 불어로 대화를 나눴다. 유건은 불어를 따로 배우지 않아서, 몇 마디 단어만 간신히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그렇게 몇 마디 주고받은 뒤, 레오와 남자 동료는 청운각 룸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시연은 함께 들어가지 않았다. ‘아... 시연이가 다리 놔준 거였구나.’유건은 이제야 대강 상황을 파악했지만, 이제 와서 뭐라고 변명할 기회가 없었다. ‘내가 또 혼자 난리 친 거네.’ 시연은 ‘청운각’을 떠나 ‘청파각’ 쪽으로 걸어갔다. 유건은 조용히, 죄지은 사람처럼 시연 뒤를 따라갔다. ‘어떻게 사과하지...’ 그때, 엘리베이터가 기회를 줬다. 타자마자 유건은 시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 너무 긴장해서 그랬어. 저 아저씨가 네 팔 붙잡은 거 보고... 질투 났어.” “질투요...?” 시연은 어이없어 웃으면서도 짜증이 섞였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데요? 배가 이렇게 나왔는데, 누가 나를 좋아해요?” “왜 안 좋아해?” 유건은 단호하게 받아쳤다. “우리 결혼할 때도 너 배불뚝이였잖아. 그런데도 난 상관없었어.” 그 말은 사실이었다. “진심으로 좋아하면, 황제도 과부랑, 형수랑, 심지어 며느리랑도 결혼한다잖아. 배 나온 거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순간, 시연은 얼어붙었다. ‘이 사람... 이런 말까지 한다고?’ 그리고 심장이 덜컥거렸다. 그냥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유건의 이 말이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
유건은 레오의 손목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손 놔요.” 유건의 몸에서는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레오는 그런 유건을 경계하며 시연을 지키듯 그녀를 뒤로 감췄다. “당신 누구예요? 시연 씨를 다치게 하지 마시죠.” 하지만, 유건은 레오의 말이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뭐라는 거야,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그래도 레오가 쉽게 손을 놓지 않겠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좋아요. 안 놓겠다 이거죠?” 유건은 싸늘하게 웃으며 천천히 오른손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시연이 놀라서 황급히 유건을 붙잡았다. “고유건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유건의 얼굴엔 먹구름처럼 어두운 기운이 드리웠다. “이 남자는 누구야? 왜 너를 데리러 온 건데?” 물론, 유건은 오늘이 시연의 동창회 날인 걸 알고 있었다. 시연이 직접 얘기해주진 않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시간을 비워서 같이 가려고 했다.그렇게 급히 달려온 유건과 달리, 시연은 연락 한번 없이 다른 남자와 동창회에 가려 했다. 게다가... 레오는... 아무리 봐도 꽤 나이 들어 보였다. ‘원한 게 결국 이런 거야?! 설마, 저런 아저씨랑 동창회에 가겠다는 거야? 무슨 사이길래?” 유건은 점점 화가 치밀고, 서글픔까지 몰려왔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지시연, 너 눈은 어디에다 두고 다니냐? 나 같은 건 싫고, 저런 아저씨는 괜찮아? 저 인간, 네 아빠뻘이야!” ‘뭐야...?’ 이 상황, 시연에게는 너무 익숙했다. 유건이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게 누구든, 다른 남자가 시연의 옆에 있으면 바로 오해하고 화를 냈다. “그만해요!”시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예전의 그녀는 그냥 넘어가겠지만, 이젠 유건이 자신에게 참견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차가운 눈빛으로 유건을 쏘아보며 말했다. “진짜 지긋지긋해요. 더 이상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마요. 제발!!”
유건의 말은 분명 옳았다. 하지만 시연의 얼굴에는 차가운 웃음만 맴돌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입술을 달싹였다. 유건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그래요.” 시연은 더 이상 숨기지 않기로 했다. 솔직히 장소미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 않았다. 괜히 꺼냈다가는, 자신이 마치 질투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괜히 신경 쓰는 사람처럼 보이기 싫어.’ 하지만 유건이 먼저 화두를 꺼냈다. 그래서 시연도 정면으로 부딪치기로 했다.“당신은 지금 포인트를 잘못 짚었어요. 난 우리가 이혼하기로 한 그 순간부터, 난 당신이 장소미한테 미련이 있건, 없건 전혀 신경 안 쓰게 됐어요.” 유건의 호흡이 순간 멎었고, 검은 눈동자 속에 짙은 어둠이 빠르게 번져갔다. 하지만 시연은 멈추지 않았다. “난 정말 이해가 안 돼요. 당신, 장소미를 사랑했다면서요? 그럼, 지금 이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데... 깨진 걸 다시 붙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잖아요. 아끼고, 잡아야죠.” “난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유건은 주저 없이 고개를 저었다. “단 한 번도.” “그래요.” 시연은 담담하게,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대답했다. ‘예전엔 애써 외면했지.’ ‘당신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예전엔 그런 생각 안 했겠죠. 당신이 얼마나 양심적인 사람인데... 결혼한 이상,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진 않았겠죠.” ‘하지만, 지금은 달라.’ 시연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어요. 그때 반대하던 할아버지도, 이제 허락했잖아요. 그러니까...” 시연은 눈을 크게 뜨고, 또렷하게 말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도 돼요.” ‘이제는, 아무도 당신을 탓하지 않을 거야.’ 시연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밤, 유건이 억지로 술을 들이켜던 모습을. 얼마나 결혼이 싫었고, 얼마나 장소미를 포기할 수 없었는지를. 시연은 눈을 깜박이지 않고 유건을 바라
건강검진은 공복 상태에서 진행해야 해서, 아침 일찍 서둘러야 했다. 지금 시각은 겨우 9시를 조금 넘긴 정도. 9시 반도 안 됐다. 시연이 괜히 핑계를 대며 거절할까 봐, 유건은 시연 대신 우주를 공략했다. “우주야, 뭐 먹고 싶어? 매형이 사줄게.” “히히.” 우주는 시연을 힐끔 쳐다보며, 웃음기를 감추지 못했다. “햄버거! 치킨!” 이런 우주를 보자, 유건과 시연은 ‘천재 소년’도 어쩔 수 없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런 건 건강에 안 좋아.” 하지만 우주는 영리했다. 누나랑 다투지 않고, 슬쩍 불쌍한 눈빛으로 유건을 바라봤다. ‘이 귀여운 걸 내가 어떻게 거절해...’ ‘게다가, 지금은 내 편인데...’ 유건은 부드럽게 웃었다. “괜찮아, 매형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결국 셋은 ‘셀레스트’로 향했다. ‘햄버거도 치킨도, 넓게 보면 다 서양 요리잖아.’ 햄버거나 치킨은 원래 메뉴판에 없는 메뉴였기에, 유건은 메뉴판 따윈 보지 않고 곧장 주문했다. 주방엔 미슐랭 스타 세프들이 가득하니, 햄버거나 치킨쯤이야 뚝뚝 만들 수 있을 터였다. 곧 테이블에 음식이 차려졌다. 우주는 두 손을 모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매형 최고!” 시연은 여전히 그런 음식에 관심이 없어서 담백한 빵과 베이컨, 계란을 따로 시켰다. 유건은 조심스럽게 시연의 빵에 스프레드를 발라주고, 계란 위에는 후추와 로즈 솔트를 솔솔 뿌렸다. “먹어.” 우주가 보는 앞이라, 시연은 버럭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저 할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근데 왜 이렇게 목이 막히는 거야.’ ‘입맛이 없네.’ 아침을 먹고 나니, 슬슬 시간이 애매해졌다. 별산장은 시내와 거리가 꽤 멀다. 유건은 고민 없이 민환을 호출했다. “우주는 민환이랑 같이 가고...” 시연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시연아, 넌 내 차 타. 집까
“네?” 시연은 유건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그냥 만나는 김에 말하면 되잖아요? 어차피 매일 장소미 보는데...” 그 말에, 유건은 숨이 턱 막혔다. ‘그래, 매일 장소미를 보긴 해. 하지만...’ ‘네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건 싫어.’ 시연의 한마디는, 마치 유건을 장소미 쪽 사람처럼 선을 그어버린 것 같았다. ‘우린 부부야. 장소미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더 가까운 사이인데.’ 유건은 답답한 마음에 입을 열었다. “시연아, 나랑 장소미는...” 하지만 ‘장소미'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시연은 얼굴을 찌푸렸다.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표정이었다. “나 화장실 좀...” 시연은 짧게 말하고, 가방을 최예민에게 건넸다. “가방 좀 부탁해요.” “네, 사모님.” 유건은 가늘게 눈을 좁히며 시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구나.’ ‘이렇게까지 나를 밀어내야겠어?’ “고 대표님?” “왜요?” 최예민이 조심스럽게 부르자, 유건은 심기가 불편한 탓에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딱딱해졌다. 우주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말했다. “매형, 누나 핸드폰 울려!” “그래?” 우주를 보며 살짝 표정을 풀고, 유건은 시연의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모르는 이름이 떠 있었다. 별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 여보세요...] 상대방은 남자였다. 유건은 즉시 경계심을 세웠다. “누구세요? 이건 제 아내 핸드폰입니다. 지금 곁에 없어요.” 목소리에 자연스레 소유욕이 잔뜩 묻어났다. 상대 남자는 황급히 말을 바로잡았다. [아, 네! 혹시 고 대표님이신가요?]남자는 금방 눈치를 챘다. 고씨 가문의 결혼식이 조용했어도,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걸 모를 리 없었다. [안녕하세요, 고 대표님. 저는 지시연 씨의 대학 동기입니다.]‘지시연 씨'라는 딱딱한 호칭이, 유건의 마음을 조금은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래
“밖은 추워. 우주야 얼른 타.” “응!” 우주는 힘차게 대답하고 차에 올라탔다. 차는 강울대병원으로 향했다.이른 아침이지만, 건강검진 센터는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시연은 미리 예약해 뒀고, 병원 소속 의사였기에, 우주를 데리고 직원 전용 통로로 이동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시연은 유건에게 말했다. “당신까지 들어올 필요 없어요. 나랑 최 선생님이면 충분해요.” “알겠어.” 유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기다릴게.” 그러면서 최예민에게도 당부했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 줘요.” “걱정하지 마세요, 고 대표님.” 대기실은 왁자지껄했다. 귀를 찢는 소음 속에 앉아 있으려니, 유건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시연이만 아니면, 이런 데서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는데...’ “유건 씨.”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장소미가 간병인이 이끄는 휠체어에 탄 채 다가오고 있었다. 유건은 곧바로 얼굴을 굳혔다. “여긴 왜 왔어?” 시연은 미리 신신당부했다. 장미리나 장소미, 우주 앞에는 절대 나타나지 말라고... 우주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되었으니 말이다. 장소미도 그 뜻을 알기에 급히 말했다. “우주가 안으로 들어간 거 보고 온 거예요. 우주한테 상처 주려고 온 거 아니에요. 우주도 내 동생이니까요...” 유건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눈썹을 좁게 모았다. “설마 시연이가 우주 데리고 안 올까 봐 걱정한 거야?” “걱정할 필요 없어. 시연이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야. 한번 말하면, 반드시 지켜.” 그 말에, 소미는 속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사람, 이렇게까지 지시연 편을 들다니...’ ‘지시연을 너무 잘 아는 거야? 아니면... 누구보다 믿고 있는 거야?’ 소미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알아요. 그냥... 엄마가 너무 긴장해서... 한번 보고 가면 엄마도 안심할 것 같아서요.” “됐고.” 유건은 딱 잘라 말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