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광수는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고개를 숙여 시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시연의 체취를 맡으며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만족스러운 듯 입가를 비틀었다. “음... 좋군. 아주 좋아.” 늙은 남자의 시선은 마치 진귀한 보물을 보는 듯 반짝였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진광수는 손가락 끝으로 시연의 뺨을 어루만지며, 낮고 끈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천천히 하면 돼. 어차피 넌 결국 내 것이 될 테니까... 후후, 제대로 맛보게 해주지.” 듣기만 해도 역겨워 속이 뒤집힐 것 같은 음담패설. 시연은 속으로 외쳤다. ‘어떡하지? 오늘 밤... 정말 벗어날 방법이 없는 거야?’ “시연아, 한 번만 맛보자. 응?” 불쾌한 입김이 얼굴 가까이 다가오더니, 굴곡진 주름투성이 얼굴이 시연의 눈앞으로 바짝 붙었다. 순간, 그녀에게 본능적인 공포가 밀려왔다. “싫어! 살려주세요! 제발,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아, 오지 마! 안 돼!” 여자는 죽어라 소리쳤다. “닥쳐!” 진광수는 화들짝 놀라며 시연의 입을 거칠게 틀어막았다. 시연의 비명이 너무 컸다. 비록 이곳이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이라 해도, 이 정도면 밖에서도 들릴 지경이었다. 시연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녀는 말을 듣기는커녕 더욱 저항하며 고개를 흔들자, 진광수는 조급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근처에 있던 수건을 집어 시연의 입에 쑤셔 넣었다. “으으...!” 여자의 비명이 단번에 막혔다. 진광수는 헐떡이며 땀을 훔치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뭐야,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장미리가 준 약... 효과가 좋다더니, 왜 가만히 있질 않지?” ‘...뭐?’ 시연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 모든 게... 장미리 짓이라고?’ ‘그렇다면 애초에 나에게 줄‘우리 엄마의 유품' 같은 건 없었고.’ ‘나를 이곳으로 유인해 오려고 쓰는 미끼에 불과했어!’ ‘나는... 나는 어쩜 이렇게 바보 같을 수 있을까...’ 시연에게는
지한 일행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동시에 고유건의 앞을 막아섰다. “형님! 이러다 진짜 사고 납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던 남자가, 지금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은 소름 끼칠 정도였다. “맞아요, 형님! 이런 쓰레기한테 이 정도까지 손을 더럽힐 필요 없어요!” 하지만 그런 말에도 유건의 얼굴엔 여전히 감정이 없었다. 그러자 정기환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형님! 시연 씨가 좀 이상해요. 계속 ‘이상한 소리’를 내던데...” 시연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유건의 눈빛이 변했다. 발을 거두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세게 걷어찼다. “으악!” 세 사람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시연 씨가 제일 효과적이네.’ “시연아.” 유건은 몸을 돌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고, 시연을 덮고 있던 재킷 한쪽을 젖혀 손발의 결박을 풀어주었다. “괜찮아?” 기환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다. 시연은 확실히 이상했다. 얼굴이 붉어지고, 입을 벌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목말라... 너무 목이 말라...” 그러면서 시연은 무의식적으로 유건의 품에 몸을 기댔다. 여자의 몸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그 순간, 유건도 깨달았다. 자기 몸에 남아 있던 약기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는 걸. 그저 시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잊고 있었을 뿐. 그런데 지금... 여자의 열기와 향기에 자극받아 유건의 몸이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유건의 혈관 속 피가 미친 듯이 돌고, 근육이 달궈졌다. 마치 불 속에 서 있는 듯했다. 그러자 유건은 망설임 없이 시연을 담요째 안아 들고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지한아, 방 잡아.” “네, 형님.” 상황을 본 세 사람은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했다. 곧 방이 준비되었고,
유건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가늘게 떨리는 시연의 속눈썹을 바라보며 웃음을 참았다.“시연아, 일어나.”“음...”시연은 마치 이제 막 그의 부름에 깬 듯 천천히 눈을 떴다. 흔들리는 눈빛, 정면으로 유건을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그녀는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입술을 우물거리며 망설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깼으면 세수하고 준비해. 할아버지가 집에서 우리 기다리고 계셔.”“네.”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움직이지 않자 재촉했다.“나 옷 갈아입어야 하니까 나가요.”그 짧은 말 두 마디에 여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유건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나를 부끄러워하는 걸까? 어젯밤 일도 있었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레?’‘봤을 뿐만이 아니라...’‘응, 입술도 포개었고... 그리고 또...’그러나 그는 순순히 일어나 문쪽으로 향했다. “알았어, 나간다.”유건은 문을 닫으면서 틈 사이로 시연이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그는 작게 웃었다. ‘이렇게 부끄러워해?’‘그런데 이 여자, 예전에 다른 남자와도 이랬을까?’그는 갑자기 가슴 한가운데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쯧,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네.’유건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이제 지시연에게 마지막 남자는 나야!’‘이제부터 시연이 내 곁에 있는 한, 다른 남자는 감히 시연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할 거니까.’‘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나는 여자의 과거는 묻지 않는 사람이니까.’‘나도 그런 사소한 걸 따지는 시시한 남자가 아니니까.’...옷을 갈아입으면서 시연은 자신의 몸이 개운하다는 걸 깨달았다. 따로 씻을 필요도 없었다.희미한 기억 속에서도 분명했다. 즉, 어젯밤에 끝난 후 유건이 시연을 욕실로 안아가 직접 씻겨줬다는 것.시연은 주먹을 꼭 쥐었다.‘고유건은 틀림없이 세심하고 배려심이 깊지만, 이 남자는 내...’옷을 다 갈아입고 방을 나서자, 유건이 보온병을 시연에게 건넸
차 안은 숨 막힐 듯 고요했다.유건은 감정을 지운 얼굴로 시연을 바라봤다.‘이 여자, 내 속을 긁어놓으려고 태어난 거야?’‘예전엔 결혼하기 싫다고 하니 화를 내고, 이제는 막상 결혼하려고 하니 또 화를 낸다?’남자의 냉랭한 태도에 시연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내가 더 이상 신경 안 쓰기로 했으면 됐잖아. 대체 뭐가 문제야?’“지시연.”유건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삼키며 막 입을 열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고상훈이었고, 유건과 시연에게 서둘러 돌아오라는 전화였다.[어디쯤이냐? 밥 먹으러 온다며?]“할아버지, 거의 도착했어요.”유건이 전화를 끊을 때쯤, 차는 이미 본가 정문 앞에 도착했다.유건의 눈빛이 깊어졌고, 목소리는 한층 차가웠다. “일단 식사부터 하자.”“네, 알겠어요.”...오늘 고상훈의 기력은 제법 좋아 보였다. 최근에는 식욕도 돌아온 듯했다.유건과 시연은 고상훈과 함께 식사를 마쳤고, 식사 후 시연은 고상훈이 약을 챙겨 먹는 것까지 확인했다.이후 유건과 고상훈이 따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시연은 혼자 방으로 돌아왔다.어젯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 시연의 몸이 축 늘어졌다.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 기대자마자 곧 깊은 잠에 빠졌다.시연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미 창밖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그녀는 벌써 일곱 시가 넘은 것을 핸드폰으로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그 순간, 방 문이 열렸다. 시연이 고개를 들자, 유건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깼어?”“네.”유건은 불을 켰고, 방 안이 환해졌다.시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알람 맞추는 걸 깜빡했네요. 할아버지 배고프시겠어요.”“움직이지 마.”유건이 그녀의 어깨를 눌러 다시 소파에 앉혔다. “일어나지 않아도 돼. 할아버지 식사도 하셨고, 약도 드셨어.”“아, 다행이에요.”시연은 안도하면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유건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배 안 고파?”유건의 질
시연은 여전히 유건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입술을 꼭 다물고 말없이 고민하다가 겨우 입을 뗐다.“당신도 알잖아요... 내 일...”그녀가 말하는 건, 자신의 ‘깨끗하지 못한’ 과거였다.‘그때 고유건이 얼마나 나를 경멸했는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유건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는 시연을 원했다.“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는 법이야. 네가 그렇듯이, 나도 있어. 그러니, 이제 서로 빚진 거 없어. 그러니까 우리도 이제 더 이상 서로를 탓하지 말자.”“아니에요. 우리는 달라요.”시연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여자의 행동이 유건의 화를 돋웠다. 그는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뭐가 다르다는 거야?”“나... 내 아이...”시연은 두 손을 아랫배 위에 올렸다.‘아. 말하는 건 바로 이것이었어?’유건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하며 표정은 단호하고 진지했다.“지시연, 잘 들어. 이 말은 단 한 번만 할 거야.”“오늘부터 내가 이 아이의 아버지야. 나는 생부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아. 그리고 너도 다시는 내 앞에서 그 얘기를 하지 마.”시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빈 듯, 그저 멍하니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동의해?”유건은 그녀를 깊이 응시하며 눈빛에는 긴장과 함께 알 수 없는 기대가 스며 있었다.“나...”“싫다고 하면 안 돼.”시연이 입을 떼려는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끊었다.그리고 다음 순간, 유건은 한 손으로 시연의 뒷머리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턱을 받쳐 올리더니, 눈을 감고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깊고도 길게 이어진 입맞춤.서로의 숨결이 얽히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귓가에 선명히 울렸다.시연은 점점 힘이 풀려, 유건의 품에 푹 안겼다.유건도 시연을 품에 꼭 안으며, 손가락 끝으로 여자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는 낮고 거친 목소리로 속삭였다.“말해. 동의한다고.”“...그래요.”시연은 마치 홀린
“뭐라고요?”시연은 눈을 크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유건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우린 이미 합법적인 부부야. 결혼식 준비도 진행 중이고, 너도 직접 동의도 했어. 같이 자는 게 이상해?”“아, 아니... 그건 맞죠.”시연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그러면 침대에서 함께 자자.”유건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아직 할 일이 좀 있어서 서재에 다녀올게. 먼저 자.”“아... 네.”시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불안했다.유건이 방을 나가자, 시연은 침대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그녀는 이 침대에서 자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유건과 함께 자는 건...‘우린 이미 가장 가까운 관계까지 나아갔어. 그런데 같이 잠드는 게 아직도 부담스럽다고?'‘내가 아직도 현실감이 없었는데, 정말 그 사람과 진짜 부부가 되는 거야?’‘근데... 갑자기 왜 이러지?’‘어젯밤 때문인가, 아니면 할아버지 때문인가?’시연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꽤 오래 뒤척였지만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에 시연은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남자의 발소리가 다가왔다. 그리고 옷장을 여는 소리가 나더니, 남자는 곧 욕실로 향하는 소리.또한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그 사람이... 샤워하는구나.'갑자기 물소리도 멈추고, 다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이어서 이불이 살짝 들리며, 침대가 남자의 무게로 내려앉았다.그 순간, 따뜻한 팔이 시연의 허리를 감쌌다.시연은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움직이지 않았다.그러나 유건은 만족하지 않은 듯 여자를 조금 더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그러고 나서 그는 시연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술을 가져갔다.“유건 씨...”시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조용히 불렀다. “그러지 마요...”“왜 안 돼?”남자의 저음이 낮게 울리며 가벼운 웃음이 섞였다.“그냥 뽀뽀야. 걱정하지 마, 오늘은 안 건드릴게.”그러면서 유건은 시연의 턱을 잡아 돌리고는 입술
시연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고유건이 이제부터 내 아이가 이제 자신의 아이라고 말했어.’시연은 순간 숨이 막히며 고개를 숙였다. 마치 잘못이라도 한 듯.“참나.”유건은 그녀의 손을 쥐고 부드럽게 주무르며 말했다. “한마디 했다고 삐치기야? 내 잘못이네, 너무 단도직입적이었지. 언제 시간 돼?”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실습이 거의 끝나서 이번 주는 비교적 한가해요. 그래도 병원은 나가야 해요.”“좋아.”유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면 병원 도착하면 전화할게.”“네, 알았어요.”아침 식사 후, 유건은 시연을 강울대학교병원까지 태워다 주었다. 직접 차에서 내려 외과 건물 앞까지 데려다주었다.“여기까지면 됐어. 가봐.”시연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요.”유건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점심 잘 챙겨 먹어.”시연은 그가 이렇게까지 세심한 사람이었나 새삼스러웠다.‘이렇게까지 챙기는 거 보니, 모든 여자한테 다 이러는 건가?'‘예를 들면, 장소미...’순간적으로 기분이 가라앉았으니,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어요.”“그러면 간다.”“네.”남자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시연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틀 전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으니까.‘모든 것이 나에게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아. 깨고 싶지 않은...’...강울대학교병원에서 회사로 가는 길.유건은 일정표를 확인하며 주지한에게 지시했다. “지한아, 점심시간 좀 비워둬.”“네, 형님. 무슨 일정 있습니까?”“응, 촬영장에 좀 가야겠어.”...오전 내내 촬영을 한 장소미는 지쳐 있었다. 감독이 컷을 외치자마자 조애린이 반짝이는 눈으로 다가와 속삭였다.“고 대표님 오셨대.”“유건 씨?”소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진짜?”“거짓말이겠어? 어서 가봐. 기다리시잖아.”“응, 금방 갈게!”소미는 의상을 손에 들고 서둘러 휴게실로 향했다.그날 밤 이후로 그녀는 유건과
유건은 미간을 찌푸리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나는 시연이와 함께 하고 싶었지만, 그 이유는 시연이가 아니라, 나 자신 때문이었지.’유건은 목울대를 한 번 움직이고 담담히 말했다. “내 문제야.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어.”책임감 있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소미의 마음은 조금도 위로받지 못했다.그녀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래요. 유건 씨의 문제예요. 그러면 제가 받은 약속은요? 아무 설명도 없이 이대로 끝낸다고요? 이유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아요?” 유건은 잠시 침묵했다가 얇은 입술을 떼었다. “설명할 게 없어. 미안해.” ‘배신은 배신이야. 변명할 수 없을 땐 결국 미안하다고 끝내는 거니까.’소미는 숨이 막히는 듯 유건을 바라보며 시야가 흐려졌다. “그래서... 우린 이걸로 끝이에요?” “응.” 유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서며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내가 너에게 잘못했어. 네 미래는 내가 책임질게. 네가 결혼할 때까지는 반드시 널 보호할 거야.”그는 말을 마치고 잠시 소미를 바라보다가 눈을 돌렸다. 소미는 고개를 돌려 눈을 감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세요.”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그래. 그러면 갈게.” 유건은 조용히 몸을 돌려 대기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순간, 소미는 온몸을 주체할 수 없이 떨기 시작했다. 눈엔 붉은 분노의 빛이 가득했다.‘내가 단 한 걸음만 더 가면 곧 고유건의 아내가 될 수 있었는데... 지시연! 네가 감히 중간에 끼어들어?’‘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깟 어려서 맺은 정혼 약속 때문에?’ ‘웃기지도 않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난 절대 이렇게 끝내지 않을 거야.’ ‘지시연은 지동성의 친자식이었지만, 결국 지씨 집안에서도 내쫓긴 신세잖아!’ ‘결국 난 지지 않아. 질 수 없어.’“소미야.” 문이 열리며 조애린이 들어왔다. 그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