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시연은 수술이 있었다. 요즘 식욕도 좋아지고, 잠도 잘 자니 컨디션이 최상이었다. 문제 될 게 없었다.프로젝트팀의 수술은 늘 긴 시간이 걸렸다.시연의 핸드폰은 탈의실 사물함 안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다.결국, 그 전화는 해외에 있는 유건에게 다다랐다.[여보세요. 고 대표님.]유명한 산부인과에서 온 전화였다.“무슨 일이에요?”[고 대표님, 사모님께서 정기 검진을 받으셔야 하는데, 이미 예약일을 이틀이나 넘기셨습니다. 연락이 닿지 않아, 언제 오실 수 있는지 다시 조정하려고 합니다.]‘이런 일이 있었다고?’유건은 미간을 문질렀다.“알겠어요. 내가 전달할게요.”전화를 끊고, 유건은 바로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역시나, 응답이 없었다.‘바쁘겠지. 아마 수술 중일 거야.’크게 신경 쓰지 않고, 그는 메시지를 작성했다.[병원에서 전화가 왔어. 언제 시간이 되는지 연락 달래.]보내고 나서도 답장은 없었다. 유건은 그녀가 일이 끝나면 볼 거라 생각하며 넘겼다. 그리고 곧이어 미팅 일정이 있어, 준비를 마치고 출발했다....그 시각, 수술실에서 큰일이 벌어졌다.시연은 손 씻는 공간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그녀는 막 수술을 마친 뒤, 가운을 벗고 손을 씻던 중이었다. 그리고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행히 시연은 병원 내에서 즉시 응급조치를 받았다.진아가 도착했을 때, 시연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마에 살짝 긁힌 상처 외에는 큰 이상이 없었다.그녀는 눈을 뜨자, 울고 있는 진아와 눈이 마주쳤다.시연은 깜짝 놀랐다.“뭐야, 나... 죽기라도 한 거야?”“야!”진아가 친구를 째려보며 성질을 냈다.“그런 말 하지 마! 나 진짜 놀랐다고!”시연은 피식 웃었다.“내 잘못이야? 울지 마. 나중에 진성빈이 알면, 또 내가 널 괴롭혔다고 할 게 뻔해.”“친구야.”진아는 볼을 부풀리며 입술을 삐죽였다.“선생님이 그러는데, 네가 갑자기 기절한 건... 아마 배 속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크대. 나 너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어.”오선화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그렇다고 좋다고 할 수도 없지. 아직 초기인데, 앞으로 여섯 달 이상 남았잖아. 이렇게 관리하다간 위험해질 수도 있어. 겁주려는 게 아니라, 진짜 조심해야 해.”임신은 원래부터 큰 고비였다. 과거에는 출산 자체가 생사를 오가는 일이었다.지금은 의료기술이 발달했지만, 임신 중 겪어야 할 어려움은 여전히 존재했다.“교수님, 어떻게 하면 될까요? 시키시는 대로 할게요.”진아는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오선화는 진아를 한 번 쳐다보더니 더 심기가 불편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왜 친구가 너를 데리고 온 거야? 네 남편, 고 대표는? 그 아이, 두 사람의 아이잖아?”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원래부터 고유건과 상관없는 아이야.’“아기가 임신 주수보다 작아.”오선화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빠르게 설명을 덧붙였다.“영양 수액을 맞는 게 좋겠어. 몸 상태를 더 지켜보는 게 필요해.”영양 수액은 저렴한 치료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시연은 ‘고유건 대표의 예비 아내’였기에, 비용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만약 유건이 알게 된다면, 아이 상태가 좋지 않다는 사실에 가만히 있겠는가?그러나 시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저... 당장은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교수님.”오선화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영양 수액은 몸에 전혀 해가 없어. 아이에게도 좋고.”“알아요.”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남편이 없으니까, 돌아오면 상의한 뒤 결정할게요.”그럴듯한 이유였다.오선화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다음 검진 때 다시 보자.”병원에서 나와, 진아는 시연의 팔을 잡았다. 입술을 꽉 깨물자 눈물이 핑 돌았다. 참고 또 참았지만, 결국 터졌다.“고유건한테 말할 거야?”“왜 말해?”시연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이 아이, 그 사람의 아이도 아니잖아.”진아는 말문이 막혔다.“그럼 너희 둘,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유건이 생각하기 지금 시연은 강울대에 있거나 강울대병원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별 문제는 없을 터였다.그는 너무 급하게 떠났으니, 돌아온 후에는 시연에게 한마디 전하는 것이 도리였다.그러나, 시연은 단호했다.“당신 혼자 가요. 난 안 갈게요. 아침에 이미 다녀왔어요. 지금은 할 일이 있어서, 다 끝나면 할아버지 뵙고 집에 갈 거예요.”그녀의 말을 듣고, 유건은 잠시 침묵했다.‘정말 바쁜 걸까, 아니면 나를 피하는 걸까?’잠시 고민하던 그는 조용히 물었다.[나한테 화난 거야?]시연은 피식 웃었다.“내가 화낼 이유라도 있어요?”그녀는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일 때문이었잖아요. 나도 이해해요. 화낼 이유도 없어요. 나도 바쁘니까, 이해해 줘요. 할아버지께서 많이 기다리시니까, 어서 가봐요. 난 끊을게요.”[그래.]통화가 끝난 후, 유건은 핸드폰을 쥔 채 얼굴을 반쯤 가렸다.‘시연이가 말하는 대로 하는 게 맞겠지...’‘현재 상황을 감안하면, 시연이가 아무런 소란 없이 차분하게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니까.’...VIP 병실에서 유건은 고상훈과 짧게 안부를 나눴다.고상훈은 손자에게 당부했다.“예복 맞추는 건 서둘러야 해. 그리고 결혼식 전에, 너랑 시연이는 제남도에 다녀와야 해.”결혼식 과정 점검을 위해, 일종의 리허설을 진행해야 했다.이번 결혼식은 최대한 조용히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고씨 가문의 위상을 생각하면 최소한의 격식은 갖춰야 했다.“알겠습니다.”유건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이 가라앉았다.‘내 아이를 잃은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새로운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니...’VIP 병동을 나서며 시간을 확인했는데, 아직은 이른 시각이었다.그는 먼저 예복을 맞추러 가기로 했다.출발 전, 유건은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나 예복 맞추러 가려고.”[네.]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아무 말이 없었다.‘끝이야?’유건은 핸드폰을 꼭 쥐며 말했다.“바쁘지 않으면 같이 갈래?”‘신부한테 신랑의 예복이 적절한지
시연은 제안했다.“아니면, 절차를 문서로 정리해서 달라고 하세요. 그대로 따르면 실수할 일도 없을 거예요.” “지시연.”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갑게 끊겼다.유건의 냉랭한 얼굴이 보였다.시연은 침을 삼켰다.“안 돼요?”“하...”유건은 냉소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더 대충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결혼식도 대신해 줄 사람을 찾는 건 어때?” 이 말에는 날카로운 비아냥이 묻어 있었다.시연은 그걸 알아차렸고,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반박했다.“고유건 씨도 나랑 같은 마음인 거 아니에요?”유건은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난 대충하고 싶어요.” 시연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너무 이기적으로 굴지 마세요.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잖아요. 할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이 결혼 자체가 없었을 거라는 걸...”“서로 원치 않는 결혼이잖아요. 그냥 형식적인 거고, 난 이미 동의했으니까 협조할 거예요.”“그냥 번거로워서 제안한 거였어요. 당신이 싫다면 철회할게요. 그렇게 화낼 일은 아니잖아요.”여자의 말에 유건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시연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 결혼은 유건에게도 단순한 절차일 뿐이었다.시연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게요. 일정은 내가 조정하면 되고요.”유건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이었다.몇 초 동안 서 있다가, 그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 나갔다....제남도 방문 날짜는 모레로 정해졌다.출발 전에, 유건과 시연은 오후 4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점심시간, 시연은 임진아와 함께 식사하기로 했다.요즘 식욕이 아주 좋아졌지만, 이날은 예상외로 입맛이 없었다.“왜 그래?”진아가 시연의 안색을 살폈다.“어디 아파?”“응.”시연은 숨기지 않았다. 아침부터 아랫배가 은근히 당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오전 내내 나아지지 않았다.“진아야, 나 병원에 좀 가야 할 것 같아.”진아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밥이고 뭐고 필
시연이 제남도에 가야 한다는 사실에 진아는 몹시 걱정했다.“고유건한테 사실대로 말하면 안 돼?”시연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내 아이야. 그 사람에게 사실을 알릴 의무는 없어. 괜히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 게 좋겠어.”“시연아...”진아는 시연을 꼭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만약 몸이 안 좋으면 바로 전화해! 무슨 일이 있어도 꼭!”“응, 알겠어.”...오후 4시, 유건이 도착했다.시연은 병원 앞에서 정확히 기다리고 있었고, 차가 멈추자마자 스스로 문을 열고 올라탔다.차에 타자마자 아무 말 없이 구석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유건은 그녀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피곤해?”“네.”시연은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무리하면 안 돼. 일도 하고, 시험 준비도 하고... 몸부터 챙겨야지. 프로젝트팀은 잠시 쉬는 게 어때?”이 말을 듣자마자 시연은 즉시 눈을 떴다.“괜찮아요. 그냥 오늘 좀 피곤할 뿐이에요.”그녀는 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 기회 자체는 유건 덕분에 주어진 것이었고, 지금은 ‘고유건 아내’라는 타이틀 덕에 팀원들이 별말 없이 받아주고 있었다.‘하지만 내가 언제까지 ‘고유건의 아내’일 수 있을까?’‘내가 지금 프로젝트팀에서 빠진다면, 나중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그만둘 수 없었다.유건은 단순한 제안이었을 뿐이었다. 시연이 일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건 잘 아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상대방이 거절하자, 유건도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네 몸이니까, 네가 제일 잘 알겠지.”시연은 안도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두 사람은 배를 타고 제남도로 향했다.제남도는 G시에 속한 해안 관광지로, 결혼식은 섬 내 최고급 호텔인 소관 호텔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호텔 측에서는 미리 일정을 비워, 호텔 전체를 고씨 가문의 결혼식 장소로 사용할 준비를 마쳤다. 요트가 선착장에 도착하자, 호텔에서 준비한 차량이
유건은 손을 흔들어 매니저에게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고 대표님, 사모님. 두 분이 먼저 상의하세요.”매니저는 눈치 있게 자리를 떴다.유건은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임진아 말고 친한 친구 또 있어? 같은 과에서 친한 사람 있었던 것 같은데.”몇 초 동안 고민하던 시연은, 남자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설마, 나한테 들러리를 세우겠다는 거예요?”“당연한 거 아니야?”유건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네가 들러리 수를 정하면, 나는 거기에 맞춰서 진행할 거고...”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아까 말했잖아요. 들러리는 필요 없다고요.”‘들러리가 왜 필요하지?’‘진아 같은 성격이면, 와서 울기만 할 텐데.’유건은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지난번엔 내가 형식적으로 결혼식을 치르는 걸 비난하더니.’‘지금 보니까 나보다 더 무심하잖아?’ ‘결혼식을 해야 한다면 최소한의 절차는 따르는 게 일반적이야. 하지만 지시연은 그것조차 대충 넘어가려고...’‘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어.’“알겠어. 네가 원하는 대로 해.”유건은 결혼식 진행표를 두드리며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우주는 어떻게 할 거야?”“네?”시연은 놀라며 유건을 바라봤다. 그가 우주까지 신경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예상 밖이었다.‘진아도 초대하고 싶지 않은데, 우주도 당연히 안 부르겠지!’ 시연이 생각하기에 우주는 이제야 점점 세상을 이해하는 나이였다. 결혼식에서 불필요한 말을 듣거나 상처를 받으면, 지금까지 진행한 치료가 모두 헛수고가 될 수도 있었다.그녀의 속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유건은 이를 눈치채고 냉소를 지었다.“우주를 결혼식에 초대할 생각조차 안 했다고?”시연은 차분하게 대답했다.“네, 난 우주를 부를 생각이 없어요.”그녀가 직접 인정하자, 유건은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대체 뭐지?’그는 우주가 시연의 유일한 가족이니, 결혼식 날 우주가 누나를 업고 웨딩카로 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리 내지 마!”“알았어요.”시연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너, 고유건의 아내지?”“네.”시연은 인정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고유건 때문인가?’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아, 고유건의 생명을 위협하는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 아이! 몇 개월이야?”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사람, 고유건에 대해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어. 내가 임신한 것까지 알고 있으니까.’“4개월이에요.”오늘까지 정확히.“좋아!”청소부는 흡족한 듯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리고 시연의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다.그리고 손바닥에는 한 장의 수건이 있었다.하지만, 청소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시연은 이미 냄새를 맡았다.그녀가 의사로서, 냄새에 민감했다. ‘수건에서 강한 에테르 냄새가 나!’그 수건이 얼굴에 닿는 순간, 시연은 숨을 참았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힘없이 쓰러졌다.청소부는 시연을 받아서 들고 신속하게 그녀의 입에 테이프를 붙였다. 이어서 준비한 밧줄로 그녀의 손과 발을 단단히 묶었다.그리고 시연이 들고 있던 가방을 구석에 내던졌다.마지막으로, 시연을 청소용 카트 아래의 수납공간에 밀어 넣고 커튼으로 덮었다.모든 과정이 계획된 듯 매끄럽게 진행됐다....시연은 눈을 떴다. 하지만 사방이 깜깜했다. 몸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그녀는 조금 전 숨을 참아 마취제를 들이마시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척한 건 도망칠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이 청소부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아이에 관해서 물었는데, 그렇다면 목표는 아이인가?’‘하지만 왜?’스스로 답을 찾기 어려웠다.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었다.‘도망쳐야 해. 무조건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야 해. 침착하자. 당황하면 안 돼.’...그 시각, 화장실에 도착한 유건은 텅 빈 공간을 보고 얼굴이 굳었다.직원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사모님께서 그냥 여기저기 둘러보고 계신 걸지도...?”매니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순식간에 소란이 일었다.청소부로 위장한 사람은 순간 얼어붙었다.‘뭐야? 저 여자는 분명 에테르를 마셨을 텐데? 어떻게 뛰어내릴 수 있었지?’‘마취제도 안 통한다고?’“빨리 보안팀 불러!”누군가 다가와 시연을 부축하며 물었다.“괜찮아요? 납치범은 어디 있죠?”그때, 유건이 달려오고 있었다. 멀리서도 이 소란을 한눈에 알아차렸다.그리고 그 순간,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연을 발견했다.호텔 보안팀도 즉시 현장에 도착했다.“고 대표님!”유건은 그들을 한 번 쳐다보더니 차갑게 명령했다.“멍하니 서 있을 시간 없어. 당장 잡아!”“네!”“도망가지 마!!”청소부는 이를 악물고 도망치기 시작했다.그러나 그는 혼자였다. 숨어 있을 때는 유리했지만, 대놓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멈춰!”유건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고, 곧장 시연에게 다가갔다.사람들을 밀어내며 시연의 입을 막고 있던 테이프를 단숨에 찢어냈다.“이봐, 당신은 누구야?”한 아주머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제 아내입니다.”아주머니는 순간 멈칫하다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잘 좀 챙겨요! 아내가 납치당할 뻔했잖아요!”유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그는 묵묵히 시연의 손과 발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조금만 더 늦었다면...조금만 더 늦었다면, 유건은 숨이 멎을 뻔했다.시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유건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어디 다친 데 없어?”이 자세 때문에, 시연은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혀야 했다.“안 다쳤어요. 근데...”“근데 뭐?”유건은 긴장하며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어디 안 좋아?”그는 조금 전 시연이 청소 카트에서 구르며 떨어지는 걸 직접 보았다.시연의 눈꺼풀이 점점 내려갔다.“너무 피곤해요... 잠이 와요.”잠시 후, 유건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마치 부서지기 쉬운 도자기를 다루듯 조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