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말해봐.”유건은 시연이가 어떻게 변명할지 들어보고 싶었다.“있잖아요, 생각해 봤는데, 우주를 결혼식에 참석시키지 않는 게 좋겠다고 결론 내렸어요.”그녀는 평온하게 말했지만, 유건의 가슴속에는 거센 폭풍이 몰아쳤다.그는 화가 치밀어 올라 비웃음을 내뱉었다.“왜?”“너무 번거로워서요.”시연은 거울을 보며 스킨케어를 하면서 대답했다.“번거롭다고?”유건은 냉소적으로 웃었다.“내가 모든 걸 다 준비한다고 했잖아. 넌 신경 쓸 필요 없고,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되는데?”그는 시연이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며 상대방을 뚫어지게 바라봤다.시연은 잠시 침묵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미 결정한 일이에요.”그녀는 심지어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이제 나를 상대하는 것조차 귀찮은 거야?’유건은 분노로 인해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그는 손을 뻗어 시연의 손을 잡아 멈추게 했다.“네 유일한 가족인 동생, 내 처남이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건, 내가 네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을 가치가 없다는 뜻이야?”시연은 유건이 이렇게까지 흥분할 줄 몰랐다.그래서 깜짝 놀라 손을 빼내며 눈살을 찌푸렸다.“그런 뜻이 아니라, 우주를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에요. 우주의 상태가 결혼식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어요.”“이유가 뭐야?”유건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이유?’시연도 점점 짜증이 치밀어 올라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진짜 몰라서 묻는 거예요? 오늘 상황, 못 봐서 그래요? 장소미의 팬들이 날 어떻게 몰아세웠는지...?”“난 할아버지와 약속했어요. 반드시 결혼식을 치를 거라고요. 난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요.”“하지만 우주는 다르다고요! 만약 그 애가 기뻐하며 결혼식에 왔다가 비슷한 상황을 겪으면 어떻게 해요? 내 동생은 상처받을 거예요!”시연의 눈가가 촉촉해지며 코끝이 시큰해졌다.“우주는 아직 어린아이예요. 그리고 내 동생은... 남들과 다르다고요. 그런 상황을 감당할 수 없을 거예요.”결국, 문제는 오후의 사건이었다.유건
시연은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과 결혼하겠다고 할아버지와 약속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모든 걸 당신한테 넘긴 건 아니에요. 난 여전히 내 자존심과 생각을 가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이 말을 마친 뒤, 시연은 더 이상 유건을 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갔다.유건은 속이 답답해져 셔츠의 단추를 풀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했다. 하지만 여전히 답답함이 가시지 않았다....깊은 밤, 11시.이미 늦은 시간이었지만, 시연은 여전히 서재에 있었다.유건은 태블릿을 내려놓고 짙은 한숨을 쉬었다. 결국 그는 결심하고 서재로 향했고, 문 앞에 서서 노크했다.비록 원래 자신의 서재였지만, 요즘 들어 시연이 더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들어와요.”문을 열고 들어가니, 시연은 책에 집중한 채 고개도 들지 않았다.아까의 말다툼 때문인지, 유건은 어색하게 말했다. “늦었어, 이만 자야지.”“몇 시예요?”시연은 핸드폰을 보고 중얼거렸다. “벌써 11시네요.”유건이 다시 입을 열기 전에, 그녀가 먼저 말했다.“당신 먼저 자요. 난 조금 더 여기 있어야 해요.”유건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이 시간이면 충분히 늦었는데, 뭘 기다리라는 거야?”사실 시연은 임신 후로 일찍 자는 습관이 있었다. 이렇게 늦게까지 깨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유건은 의심스러웠다. “나 때문이야? 아직도 화났어?”시연은 놀란 듯 그를 쳐다봤다.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유건은 짜증과 무력감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지시연, 기분이 나빴다면, 그 자리에서 말했어야지! 그 여자애들을 용서하지 말라고! 괜히 집에 돌아와서 내내 날 신경질적으로 대할 필요 없잖아! 자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해.”그는 말을 마치고 홱 돌아서 나가버렸다.시연은 어이없어하며 입을 벌렸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헛웃음을 지었다.“정말... 어이없네.”그날 밤, 시연은 침실로 돌아
알고 보니, 두 명의 중년 여성은 어제 그 두 여자의 어머니들이었다. ‘장소미의 말에 따르면, 그 두 여자가 경찰에 끌려갔다는 거야? 신고한 사람은 고유건이고?’앞뒤를 조합한 시연은 희미하게 웃었다. ‘진짜 골치 아픈 일이네.’그녀는 사실대로 말했다. “신고한 건 내가 아니야. 사람 잘못 짚었어.”그러고는 자리를 뜨려 했지만, 소미가 시연을 붙잡고 단호하게 말했다.“신고한 게 아니면, 유건 씨를 부추긴 거지? 그 여자애들은 정말 장난이었어. 눈이 달렸 있으면 그 정도는 보일 텐데, 굳이 경찰에 넘길 필요가 있었어?” ‘눈만 달려 있으면 보였을 거라고?’시연은 어처구니없어 웃었다. “미안하지만, 난 시력이 아주 좋아. 그게 장난인지도 몰랐고.”“너...!”장소미는 순간 말문이 막혀 얼굴이 굳었다.그때, 두 중년 여성도 눈치를 보더니 갑자기 퍽 하고 무릎을 꿇었고, 울면서 애원했다. “사모님, 제발요! 아이들이 철이 없었어요! 한 번만 살려주세요!”곧바로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저희가 무릎 꿇고 빌게요!”“이게 무슨 일이야?”시연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의사, 간호사, 심지어 환자들까지 모두 놀랐다.소미는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말했다.“저렇게까지 비는데도 안 봐주는 거예요? 너무 독한 거 아니에요?”순식간에 도덕적 압박이 시연에게 가해졌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한층 무거워졌다.“도대체 무슨 일이지?”“좀 불쌍하네.”“저 선생님한테 어떻게 했길래 감옥까지 가야 하는 거지?”사람들은 오직 두 어머니의 절박한 모습만 보고, 시연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알지 못한 채 그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시연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소미가 일부러 일을 키웠다는 걸 알지만, 이런 저급한 수법엔 대응하기 어려웠다.“일단 돌아가. 그 일은 유건 씨와 상의해 볼게.”“그게...”두 중년 여성은 장소미를 바라보며 도움을 청했다.소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약속까지 한 마당에, 거짓말하진 않겠지?”
시연은 인내심을 유지하며 별다른 설명 없이 말했다. “어머니들이 나를 찾아왔어요.” [응?]유건은 비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귀찮게 그런 짓을 했다고?] 시연은 장난칠 기분이 아니어서 단호히 말했다. “그 여자애들을 그냥 풀어줘요.” [안 돼.] 아무 생각 없이,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너는 늘 말과 행동이 다르잖아. 지금 놔줬다가 나중에 네가 나를 상대로 무슨 문제를 일으킬 줄 알고?] ‘내가 문제를 일으키다니...’ 시연은 핸드폰을 꽉 쥐며 얼굴에 긴장이 번지는 것을 느꼈고, 순식간에 폭발해 버렸다. “고유건 씨, 인제 그만 좀 소란 피워요!” 유건은 잠시 멈칫하며, 목소리가 조금 허스키해 채 애매하게 물었다. [뭐라고?] 시연은 냉소를 띤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똑똑한 사람이 그것도 몰라요? 내가 기분이 안 좋은 이유는 당신이 장소미를 향해서 그런 거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늘 아무 상관 없는 사람한테 화풀이해요. 그게 무슨 소용 있는데요?” [화풀이?]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팽팽해졌다.[날 그렇게 생각해?] 시연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고, 다시 한번 냉소 섞인 웃음을 띠었다. “미안해요. 내가 자만했어요. 나를 장소미와 비교하면 안 됐어요. 장소미는 당신 마음속의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미안하지만, 그 여자애들을 그냥 풀어줘요.” [지시연!] 핸드폰 너머로도 발끈 끓어오르는 남자의 분노가 전해졌다. [네 말이 맞아. 난 기분이 안 좋으니까 누군가에게 화풀이해야 해. 그러니까 그 여자애들은 그냥 감방 안에서 조용히 있으면 된다고!] 이 말을 끝으로 유건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여보세요?” 시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했으나, 유건은 이미 전화를 끊어버린 후였다.“여보세요?” 핸드폰을 쥔 채, 시연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두 마디 말이 오고 가자,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렸다.유건이 그 여자애들을 놓아주지 않는 이상, 그 두 어머니는 또 병원에 와
안에 있는 여자를 보고, 시연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장소미가 아니었다.하지만 그 여자, 시연도 좀 낯이 익었다.드라마나 예능을 거의 보진 않지만, 그녀가 연예인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다만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장소미 말고 고유건한테 다른 여자가 있었던 건가?’유건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었고, 여배우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시연이 들어서자, 세 사람의 여섯 개의 눈이 서로를 향했다.여배우는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 대표님...”유건은 그녀를 보지 않고, 시연을 똑바로 바라봤다. “뭐 하러 왔어?”이미 온 이상, 시연은 중간에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당신을 보러 왔어요.”“나를?”유건은 몸을 뒤로 기대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말해봐, 무슨 일인데?”그가 무슨 일인지 모를 리는 없을 테니, 이렇게 묻는 건 명백히 시연을 곤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방금 자신이 이 남자를 건드린 터라, 시연도 순순히 넘어갈 리가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강아지는 털을 반대로 쓰다듬으면 안 되니까, 조심스럽게 다뤄야 해.’ 시연은 해맑게 미소 지었다. “같이 밥 먹어요, 네?”유건은 그녀를 따라 미소 지으며, 입가의 곡선마저 똑같이 흉내를 냈다.“싫은데?”유건이 여배우를 가리켰다. “마침 약속이 있어. 이분과 같이 먹을 거야.”여배우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고 대표의 지목을 받자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다.시연을 힐끗 보며, 살짝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미안하지만, 제가 고 대표님과 선약이 있어서요.”말을 마치자, 유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걸쳤다. 그러고는 곧장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안 따라올 거야?”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물론, 시연은 그를 따라나섰고, 곧바로 지하 주차장까지 따라왔다.민환과 지한이 대기 중이었다.두 사람은 문을 열어두고 유건을 기다렸다.그런데 시연을 발견한 두 사람은 순간 얼어붙었다.유건은 신사적인 태도로 여배우를 보며 말했다. “먼저 타세요.”
BLUE.도착하자마자, 시연은 깨달았다.유건이 여배우를 데리고 온 이유가 있었다.이곳은 술자리였다. 비즈니스 회식이나 연회뿐만 아니라, 남자들은 술자리에서 더 많은 거래를 논의하곤 했다.각양각색의 남자들과 각양각색의 여자들.하지만 차이가 있든 없든, 공통점 하나는 여자들이 다들 분위기를 잘 맞추고, 술도 잘 마신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시연은 그 분위기에서 확연히 안 맞았다.‘난 애초에 술을 못 마시는데...’지금은 몸 상태가 안 되지만, 임신 전에도 한 잔이면 끝이었다.유건과 함께 자리에 앉자, 시연은 단숨에 모든 시선의 중심이 되었다.첫째, 그녀는 유건이 데리고 온 여자였고,둘째, 이곳에 온 여자들은 모두 화려하게 화장하고,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만큼은 아무런 치장 없이, 베이지색 롱 원피스를 입고, 심지어 어깨에는 백팩까지 메고 있었다. 그야말로 대학생 같았다. 남자들은 슬쩍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고 대표님, 저런 스타일이 취향인가?’ ‘하지만 확실히 청순하고 예쁘긴 하네.’‘...’“꼬마 아가씨.”누군가 시연에게 술을 따라주며,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긴장하지 마, 다들 즐기러 온 거잖아? 한잔해.”가득 채워진 술잔을 보며, 시연은 고민에 빠졌다.‘마셔야 하나?’유건이 여배우를 데리고 오지 않은 걸 보면, 시연을 곤란하게 만들 심산인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술은 피할 수 없는 건가?’시연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고유건은 나쁜 놈이긴 해도, 내 배 속의 아이를 배려해 줬어.’‘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이지. 이제 나를 증오하는 건가?’‘아무래도... 나를 장소미와 함께하는 시간을 방해한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시연은 유건이 고상훈을 미워할 수 없으니, 그 모든 분노를 자신에게 돌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지. 그냥 마시고 바로 화장실 가서 토하면 되니까.’시연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손을 뻗어 술
“별거 아니에요.”“별거 아니라고?”유건은 전혀 믿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시연의 핸드폰을 낚아챘다.“왜요? 돌려줘요!”시연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하지만 남자는 키도 컸기에, 팔만 살짝만 들어도 그녀는 전혀 닿을 수가 없었다.유건은 한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누르며, 다른 한 손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시간이 짧아 아직 자동 잠금이 걸리지 않아서 그는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인터넷 검색 화면에는 ‘이연우’에 대한 정보가 떠 있었다.남자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 속에, 불꽃이 튀었다.‘질투 안 난다고?’‘안 난다면서 몰래 이연우를 검색했다고?’‘이 여자, 겉과 속이 다르네. 입만 살아서!’유건은 피식 웃으며 시연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질투 나면 질투 난다고 솔직하게 인정해. 별거 아니잖아.”시연은 그가 완전히 오해했다는 걸 알고, 어이없었다.‘그냥 궁금해서 찾아본 건데...’‘이연우가 무슨 제2의 장소미라도 되나? 질투할 상대라도 되면 몰라.’그녀가 해명하지 않자, 마치 동의라도 한 듯 보여 유건의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그는 시연을 다시 자리로 끌어앉히고, 그녀의 접시를 힐끗 내려다보았는데, 자신이 자리를 비우기 전과 똑같았다.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맛없어?”“네, 맛없어요.”BLUE는 원래 음식이 목적이 아니라, 술자리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음식이 맛없을 수밖에 없었다.“그럼 먹지 마.”유건은 여자의 손에서 젓가락을 빼앗고, 냅킨을 들어 그녀의 입가를 가볍게 닦아주었다. 그러고는 시연의 백팩을 집어 들었다.“어디 가요?”“맛없다며. 그럼 제대로 된 곳에서 먹어야지.”...장소를 옮긴 곳은 ‘영복루’이었다.커다란 중식 원형 테이블 위로, 시연의 앞에 다양한 요리가 쌓였다. 심지어 작은 전골냄비까지 준비되어 있었다.전골은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있었고, 유건은 그녀를 위해 직접 재료를 넣어 익히고 있었다.그리고 적당히 익은 음식을 건져내고, 소스까지 곁들여 시연의 그릇에 올려주었다.“맛있어?”“네
결국 시연은 타협했고, 결혼식 당일 우주가 참석하는 것을 허락했다.우주의 예복을 보내주려던 차에, 유건이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시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도 가려고요?”“그렇게 놀랄 일인가?” 유건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제대로 처남을 만나지도 못했네. 결혼 전엔 꼭 만나봐야지.”이유는 충분히 합리적이었으니, 시연은 거부할 수 없었다.두 사람은 우주의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누나를 보자마자 우주는 기뻐하며 손을 꼭 잡고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유건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생각보다 똑똑해 보이네.’‘역시 천재 소리를 들을 만한 아이야.’“누나?”우주는 유건을 발견하고 누나에게 눈으로 물었다.시연이 소개하기도 전에 유건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안녕, 난 고유건이야. 네 누나의 남편, 즉 네 매형이 될 사람이야. 곧 결혼할 거야.”“매형?”우주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누나를 바라봤다.“우주야.”시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차분하게 설명했다.“매형이라는 건, 앞으로 누나랑 함께 살면서...”“그리고 누나와 함께 널 아껴줄 사람이기도 하지.” 유건이 말을 덧붙였다.“아...”우주는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 듯했지만, 유건을 위아래로 유심히 살폈다.그러다 갑자기 손가락으로 유건을 가리키며 외쳤다.“아!!”“왜 그래?” 시연이 이마를 찌푸렸다.“마술사 형!”우주는 갑자기 신이 나서 소리치며 환하게 웃었다.‘이 아이... 설마 아직도 내가 도와준 그 일을 기억하고 있나?’유건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가 기억하고 있구나. 대단한데?”시연은 어리둥절했다. “지금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마술사 형이라니? 전에 만난 적 있어요? 왜 난 몰랐죠?”그 일이라는 것은 전에 유건이 우주를 찾아 헤맸던 것이었다. ‘우리 처남은 역시 똑똑해! 기억력도 보통이 아니야!’유건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우리만의 비밀이야. 미안하지만, 말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
“시연아!”유건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시연을 그대로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눈을 떼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 눈동자에는 걱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어디 아파? 또 불편해?”시연은 눈을 꼭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또야... 이 어지러운 느낌...’ ‘눈앞이 자꾸 흔들려...’세상이 좌우로 출렁이는 듯한 익숙하면서도 낯선 어지럼증이 다시 찾아왔다. “시연아?”아무런 대답 없는 시연에 유건의 불안은 점점 커졌다.“조금만... 잠시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잠깐 기다리자고? 이 상태에서 어떻게 기다려?’유건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고, 두 팔로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며 말했다.“기다릴 수 없어. 병원 가자.”시연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유건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재빨리 차로 향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그가 평소 신뢰하던 사설 산부인과였다.예약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오늘 밤 근무는 오선화 교수였다. 시연은 검진실 침대에 누워 있었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유건 앞에 오선화가 나타났다.그녀는 양팔을 가볍게 감싸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유건을 훑었다.“어머, 고 대표님. 그렇게 바쁜 분이 오늘은 웬일이세요?”그 말투에는... 분명한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유건은 바로 기억해 냈다. 며칠 전, 오선화 교수에게 전화가 온 적 있었다. 하지만 당시 시연과 냉전 중이던 그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땐 감정이 너무 엉켜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그리고 바로 표정을 차분히 가다듬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교수님, 지난번 연락하셨을 때 못 받아서 죄송합니다.”“됐어요.”오선화는 쿡 웃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고 대표님이 사과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고 대표님의 아내와 아이에게 해야죠.” ‘그게 무슨 뜻이지?’유건은 직감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그 말의 속뜻을 읽으려는 듯,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교수님, 돌려 말하지 마시고... 솔직히 말씀해 주
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 맑고 커다란 눈엔 어딘가 천진난만한 분위기가 맴돌았다.“여기 오자고 한 건 당신이니까, 오늘 당신이 사는 거죠?”“응...?”유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당연하지. 근데 왜 그런 걸 물어?”“그냥 확실히 해두려고요.”시연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고는 아직 옆에 있는 직원 눈치를 보며 작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앞으로 나 혼자선 이런 데 못 올 거예요. 오늘 제대로 배 채우고 가야죠.”그 말에 유건의 손이 잠시 멈칫했고, 표정도 살짝 굳었다.‘앞으로 못 온다니, 왜 이렇게 쉽게 선을 긋는 거야?’“아냐, 네가 먹고 싶으면 언제든 데려올게.”그가 조용히 말했다.“말이라도 고마워요.” 시연은 웃었지만,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근데... 굳이 다시 데려오진 마요. 혹시 장소미가 알게 되면...? 아마 속이 터져라 질투하겠죠? 그건 당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에요.”‘또 장소미...’미간을 살짝 떨던 유건이 입을 열었다.“시연아, 우리 일이랑 다른 사람은 아무 상관 없어.”“네?”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유건을 바라봤다. 곧 이해한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결국, 장소미 편을 들겠다는 거네. 우리 관계가 여기까지 온 게 그 사람 때문은 아니라는 뜻... 그래, 알아. 다 내 탓이지 뭐.’“나도 장소미를 탓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 이혼하는 건... 애초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잖아요. 나도 잘 알고 있어요.”유건의 시선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게... 네가 알고 있는 전부라고?’‘아니야, 사랑... 없었던 건... 너 하나뿐이었어.’그때, 직원이 음식 카트를 밀며 들어왔다.“고 대표님, 사모님, 실례하겠습니다.”테이블 위에 따뜻한 음식이 하나둘 차려졌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시연은 코끝을 찌푸리며 군침 도는 표정으로 말했다.“먹어.”유건은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고, 곧장 시연이 접시에 반찬을 덜어줬다.직접 국
병가를 낸 김에, 시연은 아예 집에서 푹 쉬기로 마음먹었다. 임신 후반기인 만큼, 몸 상태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곤란했다. ‘지금은 무리하지 말고, 그냥 자는 게 제일 좋은 휴식이지.’그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히 요기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낮에도 마찬가지. 계속 잠을 자던 시연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무렵에서야 속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커튼을 젖히자, 창밖엔 눈이 이미 멎어 있었다. 하지만 풍경은 오히려 더 쓸쓸하고 차가워 보였다.‘배고프다...’그 순간, 시연은 문득 컵라면이 당겼다. ‘가끔 한 번쯤은 괜찮겠지. 너무 자주만 아니면...’이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달걀도 있고 채소도 조금 남아 있었다. 적당히 끓여 먹기 딱 좋은 상태.그녀가 준비를 시작하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유건이었다.“여보세요?”[집이야?]“네, 왜요?”[나 지금 네 아파트 1층이야. 올라갈게.]“알겠어요...”시연은 별다른 거절 없이 대답했다. ‘이혼 관련해서 정리하러 온 거겠지.’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 벨이 울렸다.문을 열자, 카멜색 롱코트에 같은 톤의 머플러를 두른 유건이 서 있었다. 워낙 잘생긴 얼굴에 깔끔한 옷차림이라, 말 그대로 ‘탑모델’ 그 자체였다.“들어와요.”시연은 돌아서며 말했다.“슬리퍼가 큰 게 없네요. 그냥 양말 신고 들어와도 돼요. 집이 따뜻해서 안 추울 거거든요.”유건은 조용히 거실 소파에 앉았고, 시연은 부엌에서 물을 따라왔다.“여기... 물이에요.”유건에게 컵을 건네며 덧붙였다.“따뜻한 물이에요. 당신 위 약하잖아요. 더군다나 요즘 추워서 찬물 마시면 안 돼요.”순간 눈빛이 흔들린 유건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말했다.“날 걱정하는 거야?”시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마실 거예요, 말 거예요?”그 표정을 눈치챈 유건은 바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마실게.”조용한 공간에, 컵을 탁 놓는 소리가 났고 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
“할아버지, 또 올게요.”시연은 조용히 인사한 뒤 고개를 숙였다.“그래, 그래. 우리 착한 아가.”고상훈은 인자한 미소로 시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시연은 단 한 번도 유건을 보지 않았다. 그저 고상훈에게 인사를 끝내고 곧장 병실 밖으로 돌아섰다.“시연아...”유건이 본능적으로 뒤따르려는 순간, 고상훈의 낮고 묵직한 한마디가 방 안을 가르며 울렸다.“멈춰라!”“넌, 무슨 자격으로 쫓아가냐?”“할아버지...”유건의 발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혼란스러웠다. 머릿속도, 가슴도 엉망이었다.‘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왜 하필 지금... 할아버지는 이렇게까지...?’“따라가지 마.”고상훈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긴말을 내뱉은 뒤의 피로감이 얼굴에 역력했다.그는 유건을 바라보며 말했다.“넌 네 아이가 너처럼 자라길 바라는 거냐? 커서도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살아가길 원해?”유건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쪼여 드는 듯했다. 숨이 막혔고, 가슴 한가운데가 찢기는 기분이었다.‘나처럼...?’그 말은 유건에게 치명적이었다. 고상훈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반드시 해야 할 말이기에 던졌다.“한 가지만 약속해라.”고상훈은 더 이상 차가운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친, 마지막 당부처럼 낮고 느린 말투였다.“그 여자 연예인? 좋다, 네가 좋다면 만나라. 나도 더 이상 참견하지 않으마. 하지만 내 눈앞엔 절대 데리고 오지 마. 우리 집안엔 한 발짝도 들이지 마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절대로.”‘너는 선택했고, 나는 그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대신, 내 마지막 자존심만은 지킬 거다.’그 말이 끝나자, 고상훈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인제 그만 가봐. 피곤하구나. 쉬어야겠다.”유건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목은 뜨겁고, 가슴은 무겁고, 머릿속은 멍했다.‘나는 지금, 모든 걸 잃은 건가?’...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시연을 따라 병실을 나섰다. 배가 많이 불러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