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은 고개를 돌려 유건의 손에서 벗어났다.그리고 이불을 댕겨 몸을 감싸고는 다시 등을 돌려 누웠는데, 유건에게 나가라고도 하지 않았고, 남으라고도 하지 않았다.‘나한테 여기서 자라고 허락한 걸까?’ 유건은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갈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그래서 바로 이불 한쪽을 들추고 자연스럽게 들어가 시연을 다시 끌어안았다.그 순간, 시연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이번에는 단숨에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갔다.“멈춰.”유건이 여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는데?”‘만약 ‘소파에서 잘 거예요’라고 말하면...’‘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하지만, 시연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불 가지러 가려고요.”즉, 따로 자겠다는 뜻이었다.유건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고, 여전히 여자를 놓아주지 않았다.“안 돼. 그냥 이대로 자자.”그가 손에 힘을 주자, 시연은 미세하게 눈썹을 찡그렸다. ‘이대로면 내가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데...’결국 유건은 시연을 다시 침대로 끌어당겼고, 여자를 품에 꼭 안았다.두 사람의 몸이 완벽히 밀착됐다. 마치 포개진 숟가락처럼.시연은 남자의 따뜻한 숨결과 강한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었기에, 너무 짜증이 났다. “잘 거면 그냥 자요. 나 좀 놔 줄래요?”“못 놔.”유건은 여자의 목덜미에 입술을 스치듯 대며 말했다. “너 없으면 잠이 안 와.”‘뭐? 진심이야?’시연은 냉소를 지었다.‘여자가 없으면 잠을 못 자는 건가?’ ‘하지만, 그 여자는 내가 아니라 장소미겠지.’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어 올라서 시연은 이를 갈듯 말했다. “놔요!”“싫어.”“사람을 화나게 하는 특별한 재능이라도 있는 거예요? 세상에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있는 건지 궁금할 지경이라고요.” ‘이 남자는 장소미를 잊지 못하면서, 할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나랑 결혼하기로 했어...’‘그럼 적어도, 장소미에 대한 미련이 있더라도 나한테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는 거 아니야?’‘그런데 어떻게 이런 상황
소미의 뒤에는 정기환이 따라오고 있었다.기환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유건의 지시로 아침부터 방 앞에서 대기하다가 소미가 깨어나면 바로 집으로 데려가야 했다. 그러나 소미가 고집을 부리며 유건을 찾아가겠다고 하니, 그도 어쩔 수 없었다.“유건 씨.”하룻밤 푹 쉰 덕에, 소미는 한결 나아 보였다. 정신은 또렷했지만, 화장하지 않아 얼굴이 창백했고, 눈가도 여전히 부어 있었다.“기환 씨를 탓하지 마요. 제가 원해서 온 거니까요. 유건 씨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고, 지 선생님에게도 사과하고 싶었어요. 어젯밤엔 정말 실례가 많았어요.”그러면서 그녀는 안쪽을 힐끔 바라봤다.“혹시 제가 지 선생님을 잠깐 볼 수 있을까요?”소미가 이미 방 앞까지 와 있었기에, 막을 수 없었던 유건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 있어.”소미의 미소가 순간적으로 굳었고, 몇 걸음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럼 지 선생님에게 몇 마디만 하고 갈게요. 오래 머무르진 않을 거니까...”“그래.”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세수를 마치고 나오던 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이른 아침부터 또 같이 다니네?'굳어버린 소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시연이 입은 옷이었다. 그 옷은 남성용 욕실 가운이며 길이가 길어 바닥까지 끌릴 정도였다.누구의 것인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 바로 유건의 것이었다.‘지시연이... 감히?'소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지 선생님, 좋은 아침이에요.”“아, 네.”시연은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얘기 나누세요. 전 옷 갈아입으러 가야 해서요.”그렇게 말하고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소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잠시 기다려야겠네요.”“그래.”“고 대표님.”그때, 직원들이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두고 퇴장했다. “조식 준비되었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네.”“와...!”소미는 다이닝 룸을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아침도 준비됐네요.”그러면서 배를 살짝 문지르며 말했다. “
“확실해?”유건은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우주를 제일 신경 쓰잖아. 우주가 물어보면 어떡할 건데? ‘왜 누나는 매형이랑 같이 안 있어?'라고.”시연이 멍하니 있는 사이, 유건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다이닝 룸으로 끌고 갔다.“나갈 생각하지 말고 같이 아침 먹자. 우주는 조금 있으면 볼 수 있잖아.” 그는 단숨에 시연을 의자에 앉혔다.그리고 마주 보게 된 사람은 소미였다.소미는 방금 한입 베어 문 샤오룽바오를 내려놓고 입을 닦았다.“좋은 아침이에요.”시연은 희미하게 웃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소미의 가식적인 태도에 굳이 반응할 필요는 없었다.묘한 정적이 흘렀다.소미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지 선생님, 어제는 제가 너무 취해서 실례했어요. 방해해서 미안해요. 그냥... 감정 조절이 잘 안됐어요. 이해해 주길 바라요. 아무래도 저랑 유건 씨는...”그리고 말을 잇지 못하고 목이 멘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너무나도 가슴이 아픈 듯한 모습.시연은 묵묵히 소미를 바라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공기가 더더욱 무거워졌다.그때, 유건이 새우장 덮밥을 시연 앞에 밀어 놓고 젓가락을 건넸다.“먹어.”시연은 젓가락을 들고 면을 휘적거리다 미간을 찌푸렸다.“좀 불었네요.”“당신이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어?”유건은 피식 웃었다. 탓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음성에는 따뜻한 기색이 감돌았다.“배고프다길래 빨리 준비해 달라고 했는데, 당신은 왜 이렇게 늦장을 부린 거야? 널 기다리느라 면이 다 불었잖아.” 여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불만스러워하자, 유건은 망설임 없이 면을 가져갔다.“그만 먹어. 새로 만들어 달라고 할게.”“안 돼요.”시연은 단호했다. “음식은 버리면 안 돼요.”그녀는 어릴 때부터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그래서 음식 낭비는 절대 하지 않았다.“낭비는 안 해.”유건은 그런 시연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그래서 면을 자기 앞으로 가져갔다.“이건 내가 먹을게.”“그래요.”“새로 주문해야겠네.”그는
유건은 살짝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응? 하고 싶은 말 있어?”“아니에요...”소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갈게요. 유건 씨, 행복하게 지내요.”그러고는 갑자기 몸을 돌려 빠르게 걸어 나갔다.그녀는 감히 묻지 못했다. 혹시라도 물어봤다가, 다시 유건을 볼 수 없을까 봐.유건은 문 앞에 서서 소미가 멀어질 때까지 지켜봤다. 그리고 조용히 돌아섰다....다이닝 룸.시연은 양념 된 닭구이를 손으로 뜯어 먹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유건의 표정이 한순간에 부드러워졌다.“새우장 덮밥 먹는다며? 안 기다려?”“기다려야죠. 기다리는 동안 우선 다른 걸 먹고 있는 거예요.”시연은 열심히 뜯어먹으며 태연하게 말했다.“걱정 마요. 이거 크기도 작잖아요. 하나 더 먹어도 면은 충분히 먹을 수 있어요.”‘잘 먹는 건 좋은 일이지.'유건은 시연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우리 여보 착하네.”...아침을 다 먹고서야 유건과 시연은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이미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타일리스트, 주얼리 디자이너 등 전문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처음 방문한 주얼리 디자이너가 반지와 액세서리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웨딩 반지는 총 세 개였는데, 웨딩용과 데일리용으로 나눈 시연의 반지 두 개와 남성용 반지 하나였다. 그리고 총 일곱 세트의 주얼리.다이아몬드와 각종 보석으로 된 목걸이, 귀걸이, 팔찌, 반지가 갖춰져 있어 다양한 드레스와 매칭이 가능했다.모두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이었으며,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함을 뽐내고 있었다.“사모님, 시간은 촉박했지만 절대 대충 만들지 않았습니다. 밤을 새워 작업한 덕분에 다행히 일정에 맞출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드실까요?”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생하셨네요. 아주 멋져요.”시연의 담담한 반응에 디자이너는 속으로 긴장했다.‘혹시 사모님이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건가?'유건은 시연의 손을 살며시 잡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마음에 안들어?”“아니에요.”시연은 미소를 머
유건은 시연의 말을 듣고도 아무 반응도 없었고, 단지 조용히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좀 더 분명하게 말해줘.”시연은 한 번 입을 떼자,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당신이 그렇게 장소미를 좋아한다면, 한 번 더 노력해 보는 건 어때요? 할아버지를 설득해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받아들이게끔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도 이 억지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잖아요.”결국, 그녀는 이렇게 억지로 유건과 결혼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순간, 유건의 손이 여자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조였다.시연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유건 씨...?”“미안.”유건은 정신을 차리고 힘을 조금 풀었지만, 여전히 그녀를 안고 있었다.남자의 미소는 여전했지만,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하지만 어떡하지? 난 할아버지를 설득할 수 없어. 그러니까, 당신은 나와 결혼할 수밖에 없어.”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이미 예상했던 답변이었지만, 여전히 실망스러웠다.‘진짜 방법이 없는 걸까? 정말 아무런 가능성도 없는 거야?’“시연아!”그때, 대기실 문이 활짝 열리며 임진아가 소란스럽게 뛰어 들어왔다.그리고 우주도 함께였다.유건은 시연의 뺨을 손끝으로 살짝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당신 친구랑 동생이 왔어. 기분 풀어. 걱정하게 만들지 말고, 응?”“알았어요.”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친구야!”진아는 이미 시연 곁으로 달려와 손을 잡았다.“와! 진짜 예쁘다!”“누나 예뻐!”우주도 신나서 말했다.“이제 뭐 할 차례야?”유건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헤어 스타일링이랑 피부 관리.”“같이하면 안 돼?”“하하, 같이하자.”“와!”진아는 기쁨에 방방 뛰었다.“전신 스파 같은 거야? 나 그런 거 한 번도 안 해봤어!”그녀가 있는 곳은 언제나 밝고 시끌벅적했다....늦은 밤.노은범은 집으로 돌아왔다.강수희가 병을 앓기 시작한 후, 그는 부모님을 돌보기 위해 본가로 들어와 지내고 있었다.‘어머니는 아침에 속이 안 좋다고 하셨는
이 순간, 은범의 머릿속에는 온통 시연뿐이었다.그리고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시연이가 그랬잖아. 우리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거라고... 그것도 영원히.’ ‘그땐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이해가 안 됐지만, 이젠 알 것 같아.’ “하...”은범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하하...”‘시연이가 맞았어. 우리 부모님은 나를 끝까지 놓아주지 않을 거야.’‘그리고 나는, 내가 부모님과 시연이 사이에서 균형을 맞출 수 있다고 착각했지.’ ‘결국, 부모님의 거짓말로 나는 시연이를 잃었어!’‘내일이 바로 시연의 결혼식이라고...’‘내가 부모님을 너무 믿은 탓에, 시연이는 고유건과 결혼하게 된 거라고!!’은범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차가운 공기가 그의 심장까지 얼어붙게 했다.“당신들은 내 사랑을 망쳤고, 내 마지막 신뢰까지 짓밟았어.”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오늘 이 집을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은범아!!!”노은범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돌아서서 뛰쳐나갔다.강수희와 노수철은 다급히 그를 뒤쫓았다.“아들!! 은범아!!”하지만 두 사람이 어떻게 젊고 다리 긴 아들을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흑...”강수희는 남편의 품에 쓰러지듯 안겼다.“어떡해요... 우리 이제 어떡해요...?”...은범은 차를 몰아 곧장 항구로 향했다. 그에게는 단 하나의 생각밖에 없었다.‘제남도로 가야 해! 시연이를 만나야 해!’‘시연이가 고유건과 결혼하는 걸 막아야 해!!’창문을 열지 않았음에도 차 안으로 차가운 바닷바람이 스며들었다.은범의 심장은 타들어 가는데, 몸은 얼어붙는 듯했다.심야라 도로는 한산했고, 은범은 곧바로 항구에 도착했다.하지만 이 시간에는 배가 다 끊긴 상태였다.‘어떡하지?’‘개인 요트?’그는 요트를 산 적이 없었다.은범은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소연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연준아, 나야. 혹시 요트 있어?”[내가 요트 같은 걸 가지고 있을 것 같아?]모든 부자가 요트를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시연아, 시연아...]은범의 목구멍이 막힌 듯 답답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시연의 이름만을 반복해서 부를 뿐.시연도 조용히 들으며 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은이야, 잘 있어.'그리고 2초 후, 먼저 전화를 끊었다. 묵묵히, 아무 말도 없이.진아는 조용히 시연을 살폈다. 친구는 베이스 메이크업을 한 얼굴이었지만, 그 위에는 건조한 흔적뿐이었다.시연은 울지 않았다.왜일까... 이 순간, 진아는 조금 마음이 쓰였다. 시연 때문이 아니라... 은범 때문이었다.시연은 얼굴을 들고 미소를 지었다.“선생님들, 통화 다 끝났어요. 계속해 주세요.”...하객들로 가득 찬 예식장.유건은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때, 주지한이 유건의 뒤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노은범 사장님이 오셨습니다. 입구에서 경비들이 막고 있습니다.”그리고 잠시 망설이더니 덧붙였다.“그런데... 형수님이랑 통화한 것 같습니다.”‘오?’유건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아직도 문 앞에 서 있어?”“네.”그렇다면, 시연은 은범을 만나러 가지도 않았고,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은 것이었다.유건은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계속 지켜봐. 그 외에는 신경 쓰지 말고.”“네.”...오늘은 결혼식을 올리기에 더없이 좋은 길일이었다. G시에서 내려오는 전통에 따라, 유건은 친구들과 함께 사주단자와 혼서를 지참한 중매인을 대동하여 신부의 집을 찾아야 했다.한편, 신부 측에서는 가족과 친지가 모여 이들을 정중히 맞이하고, 집 앞 마당 한가운데 마련된 상 위에 가지고 온 사주단자와 혼서를 올려두게 된다.그러나 유건과 시연의 결혼식은 집이 아닌 제남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러 전통적인 절차를 생략하고, 신랑 측을 대표하여 신랑인 유건이 사람들 앞에서 직접 혼서를 낭독하기로 했다.“첫째, 오늘을 시작으로 신랑 신부 두 사람이 정식으로 인연 맺음을 하늘에 고합니다.”“둘째, 두 가문이 이제 하나 되어 화목하기를 기원합니다.”“셋째, 길러주신 양
유건과 달리, 시연은 잘 알고 있었다. 은범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을 것이었다.왜냐하면 은범은 단 한 번도 시연이 원치 않는 일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그라고 차창 너머로 시연은 은범의 눈빛을 읽었다. 그것은 그녀를 걱정하는 눈빛이었다.문득, 시연은 손을 들어 차창을 내렸다.“시연아!” 유건이 놀라 외쳤다. ‘지금 뭘 하려는 거지?’하지만 시연은 유건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은범이 그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는 순간, 시연의 눈가가 촉촉해졌다.은범의 얼굴선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소리 없이 입을 달싹였다.“시연아.”시연은 눈물 어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입 모양을 만들었다. ‘나... 잘... 지내고 있어.’은범은 그 의미를 이해했다. 가슴이 저리고 아팠고, 시연을 향해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은범이도 내 마음을 알았네...’시연은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든 후,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이어서 살짝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됐어요. 출발하세요.”“네, 사모님.”이제 시연은 ‘사모님’이었다. 그녀의 한마디에 차량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유건은 눈물이 맺힌 시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물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그는 참지 못하고 비꼬듯 말했다.“그렇게 아쉬워?”“고유건 씨.” 시연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전 여자 친구와 끌어안고, 심지어 함께 밤을 보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나는 친구와 멀리서 작별 인사도 못 해요? 사람이 너무 이중적이면 안 되죠.”유건은 순간 말문이 막혔는데, 반박하려다 멈췄다.“내가 언제...”하지만 곧 깨달았다. 자신이 할 말이 없다는 것을.결국 머쓱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건 안았던 게 아니라, 장소미가 취해서 부축해 준 거야.”“흥.”시연은 차갑게 웃었다. “당신은 고 대표님이잖아요. 뭐든 변명할 수 있겠죠.” 유건은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이 턱 막힌 듯했다.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