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래도 내가 한 번 만나야 하지 않겠어?”“직접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데. 다 고유건 때문이야. 너무 제멋대로야.”시연은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안고 있던 쿠션을 꼭 끌어안았다.생각하면 할수록 짜증이 치밀었다.“나, 오늘 밤에 여기서 자도 돼?”“완전 좋지!”진아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우리 같이 누워서 실컷 얘기나 하자.”“좋아.”...한편, 건물 아래, 검은색 벤틀리가 천천히 멈췄다.유건은 시계를 들여다봤다. 밤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평소라면 시연이가 잠자리에 들 시간인데...’그는 차에서 내려 핸드폰을 들었고,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올려다본 5층 창문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무슨 일이에요?]“친구랑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어?”유건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낮게 말했다.술기운이 약간 올라온 상태였다.“나 지금 밑에 있어. 데리러 왔으니까 내려와.”[흥...]시연은 콧방귀를 뀌었다.[안 기다려도 돼요. 오늘 밤은 여기서 잘 거니까.]순간 유건의 손이 멈췄고, 미간이 깊게 주름졌다.“무슨 불만이든, 집에 가서 얘기하자. 이렇게 밤새 밖에 있는 건 말이 안 돼.”[뭐가 말도 안 되는데요? 난 여기 있고 싶은데요?] “지시연!!”[지금 화났어요? 그럼 화내요.]시연은 남자의 분노를 무시하며 태연하게 말했다.[당신이 힘으로 밀어붙인다는 건 잘 알지만, 문은 이미 잠겼는데 어쩌겠어요? 부수기라도 할 건가요?] 여기는 아파트 단지였고, 유건이 그런 짓을 할 리는 없었다.시연은 말끝을 흐리며 전화를 끊었다.유건은 핸드폰을 들고 멍하니 섰다.‘지금 뭐야? 그냥 끊는다고?'‘이대로 둘 수는 없어.’이렇게 생각한 그는 바로 계단을 올라 5층으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진아네 집 대문은 물론 내부 현관문까지 굳게 잠겨 있었다.“지시연, 문 열어!”그는 단호하게 문을 두드렸다. 한편, 안에서는 모든 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진아가 조용히 물었다.“열어줄까?”“무시해. 곧 누
“네, 그래요.”진아는 유건의 말에 순간 당황했다.‘집에서 보내온 음식이라니, 직접 가져온 것도 아니고...’“고 대표님.”그녀는 도저히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혹시, 밤새 여기 있었던 거예요?”“응.”유건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봤다.“그리고, 이 사실을 시연이한테 꼭 말해줘.”‘고 대표... 은근히 뻔뻔하시네.'...방 안, 시연은 침대 머리에 기대어 비몽사몽인 상태였다.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벌써 다녀왔어? 이렇게 빨리...”하지만, 그녀가 또렷하게 본 건 진아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었다. 유건도 함께 들어온 것. 그는 태연한 얼굴로 보온 도시락을 테이블에 올려놓더니, 자연스럽게 침대 옆에 앉아 시연의 손을 잡았다.“일어났으면 아침 먹자. 내가 가져다줄까?”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당신, 여긴 왜 있어요?”유건은 대답 대신 진아를 바라봤다.“어...”진아는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시연아, 고 대표님이 밤새 밑에서 기다리셨대.”시연은 순간 멍해졌다.‘밤을 새웠다고? 이해가 안 되네.’“왜요?”“왜긴.”유건은 여자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해 주며 미소를 지었다.“내 와이프가 화나서 집에 안 가겠다고 하는데, 혼자 돌아가면 남자도 아니지.”이 말은, 일반적인 부부 사이에서라면 완벽하게 맞는 말이었다.하지만 시연의 눈엔 두 사람이 보통 부부가 아니었다.‘이 남자, 나를 그렇게까지 사랑하나?'‘이미 본인이 사랑하는 ‘나비 공주’를 찾지 않았나?'시연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빠르게 뛰었다.“멍하니 뭐 해?”유건은 이불을 걷어내고 그녀를 안아 식탁으로 옮겼고, 보온 도시락을 열어 아침을 세팅하며 말했다.“성애 이모님이 아침 일찍 만든 거야. 막 도착했으니 아직 따뜻해. 얼른 먹어.”“당신...”시연은 목이 잠긴 듯했다.“이모님께 부탁한 거예요?”“당연하지.”유건은 피식 웃었다.“나 아니면 누가 하겠어? 어서 먹어. 내가 계란 까줄게.”그는 손수 계란 껍
‘그런 일이 있었어?'시연은 순간 놀랐다. 그녀는 전혀 몰랐다.“보아하니, 고 대표님이 널 많이 아끼는 것 같아.”은범은 부드럽게 웃었다.“시연아, 너도 좋은 사람 옆에서 잘 살아야 해.”“너도 마찬가지야.”그녀는 문득 떠올랐다.“그런데 어제 강울대병원에는 왜 온 거였어? 어디 아팠던 거야?”순간, 은범의 표정이 약간 어색해졌다.하지만 그는 곧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아픈 건 아니고, 그냥 비타민 좀 처방받으러 왔어.”‘비타민?’시연은 며칠 전 그가 약봉지에 넣어둔 수면제를 떠올렸다.‘혹시, 내가 잘못 본 건가?’“그래. 푹 쉬어. 나중에 다시 올게.”“응.”시연이 돌아서자, 유건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나섰다....병실을 나선 후, 시연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고마워요.”“또 내가 싫어하는 말을 하는 거야?”유건이 눈썹을 살짝 들었다.조금 전에 은범이 사업 이야기를 꺼내는 걸 직접 들었으니, 라이벌이긴 해도, 은범이 최소한의 품위는 있는 남자란 걸 인정해야만 했다. “당신이 듣기 싫어도, 난 꼭 말해야 해요.”시연은 단호했다.“당신이 아니었으면, 난 또 은범이한테 빚을 졌을 거예요.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몰랐을 텐데...”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녀가 유건에게 진 빚이 더 커지는 셈이었다.“우린 부부고, 하나니까 그런 말은 필요 없어. 더 말하면 나 화낼 거야.”유건은 일부러 얼굴을 굳히더니, 여자의 손을 잡고 걸음을 재촉했다.시연은 순간 멍해졌다.‘부부는 하나?'‘그 말은, 나랑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건가?’...그동안 고상훈의 몸 상태는 아주 좋아졌다.양회청 교수의 진료 결과, 앞으로 2주 후에도 문제가 없다면 수술 일정을 고려해도 된다는 의견이 나왔다.이 말을 듣고, 시연은 본격적으로 준비에 들어갔다.앞으로의 2주간의 생활 패턴, 식단 등 모든 사항을 주치의 및 담당 간호사와 함께 꼼꼼하게 조율했다.“너무 무리하지 마라.”고상훈은 시연이 너무 신경 쓰는 것 같아 조용히 말했다.
“고 대표님, 너무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오선화는 검사 결과지를 넘기며 말했다.“결과를 보면, 현재 산모와 아이는 모두 건강합니다. 그리고 영양수액의 효과도 좋아서 태아의 성장도 임신 주수에 맞게 진행되고 있습니다.”유건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럼 뭐가 문제라는 거지?’“하지만...”오선화가 보고서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아내분께서 임신 초기에 자주 기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네.”유건의 가슴이 순간 조여 들었다.“현재까지는 큰 이상이 없지만, 임신 후기가 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의사로서 저는 모든 가능성을 설명해야 합니다. 아내분께 직접 말씀드리면 심리적으로 부담을 줄 수도 있어서, 고 대표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겁니다.”유건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세심한 배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 어떤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까?”“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순간, 오선화의 얼굴이 진지해졌다.“최악의 경우, 산모와 아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유건의 눈이 번뜩이며 흔들렸다.“물론, 이는 가장 극단적인 경우이고,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오선화는 손을 저으며 안심시켰다.“저희도 최선을 다해 임신 기간 동안 산모와 태아를 지속해서 모니터링하고 관리할 겁니다. 하지만 가족분들도 함께 협조해 주셔야 합니다.”유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잠시 후, 어렵게 입을 열었다.“알겠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 협조하겠습니다.”“함께 힘을 모아 산모와 아이를 지켜냅시다.”...검진이 끝나고, 시연은 기분이 한층 밝아졌다.유건은 아내의 행복한 모습을 보며 그녀를 감싸 안았다.“그렇게 좋아?”“네.”시연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태아가 임신 주수에 맞게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기쁘게 했다.“나도 기뻐.”유건은 여자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이제는 확연히 불러온 배의 곡선을 느낄 수 있었다.“우리 아기, 잘 자라고 있네. 착한 아기야
오전 11시, 시연은 병원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내일 수술 스케줄을 정리하고 있었다.핸드폰이 울렸고, 시연이 받았다.“여보세요.”[시연 씨!]다급한 간호사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큰일 났어요! 우주가 없어졌어요!]“뭐라고요?”시연은 벌떡 일어나 책상에 손을 짚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없어졌다니, 어떻게 된 거예요?”[오늘 요양병원에서 가을 소풍을 갔잖아요.]그건 시연도 알고 있었다.[화장실에 갈 때도 선생님들이 같이 있었어요. 인원수까지 다 세면서 챙겼는데, 어떻게 된 건지, 나오고 보니 우주가 없어진 거예요!]“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고요? 허!”너무 다급한 나머지, 시연의 말투가 가시처럼 날카로워졌다.“그게 아이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할 말이에요? 그걸 설명이라고 하는 거냐고요!” [죄송해요! 시연 씨, 정말 죄송해요!]하지만 지금, 사과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경찰에는 신고했어요?”[네, 이미 했어요!]“네, 잘하셨어요.”시연은 최대한 침착하려 애썼다. ‘내가 무너지면 안 돼!’‘우주는 나만 믿고 있을 테니까!’그녀는 우주에게 스마트워치를 사줬다. 핸드폰과 연동되어 있어 위치 추적할 수 있었다.위치를 확인하자, 마지막으로 기록된 장소는 소풍 장소의 화장실이었다.‘난 분명히 우주한테 말했어. 잘 때 빼고는 절대 스마트워치를 벗지 말라고.’‘하물며 밖에 있는 상황인데, 우주가 직접 스마트워치를 벗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다면... 누군가 우주의 스마트워치를 강제로 벗기고, 버린 게 분명해!’ ‘위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그렇다면... 우리 우주는 납치된 건가?’‘말도 안 돼!’시연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져 왔다.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우리 우주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설마, 고씨 가문의 원수...? CA국 쪽?‘하지만 그 사람들이 왜 우주를?’‘우리 동생은 고유건의 처남일 뿐인데...’‘하지만, 혹시라도...’더는 생각할 틈도 없
‘지씨 집안 사람들!’이 생각이 시연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설마...’그리고 생각할수록 가능성이 커졌다.시연과 지동성 일가의 원한은 목숨을 위협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며 뿌리 깊은 원한이 되었다. 시연은 갑자기 병원에 있는 지동성을 떠올렸고, 그 병약한 얼굴이 눈앞에 스쳐 갔다.그리고 소미가 몇 번이나 간 청한 간 이식...‘혹시, 나에게서 방법을 찾지 못하자 우주에게 손을 뻗은 건 아닐까?’그녀는 단숨에 자리에서 일어섰다.‘백만 분의 일의 가능성이라도 놓칠 수 없어!’...지씨 저택.소미는 급히 집으로 돌아왔고, 장미리가 보이지 않자, 바로 가사도우미를 불렀다.“우리 엄마는 어디 계세요?”“사모님께서는 뒤쪽 창고에 계십니다.”“네, 알았어요.”소미는 곧장 창고로 향했는데, 밖에서도 장미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자, 우주야, 착하지? 조금이라도 먹어야 해. 안 먹으면 힘이 없어진단다.”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소미는 문을 두드렸다.“누구야?” 장미리의 목소리가 순간 긴장했다.“엄마, 저예요. 문 좀 열어주세요.”잠시 후, 문이 열렸고, 장미리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우리 딸이구나.”그러면서 그녀는 소미의 손을 잡아 안으로 끌어들였다.창고 안은 어두웠고, 낮인데도 불빛이 필요할 정도였다.희미한 주황빛 조명이 공간을 비췄고, 그 분위기는 을씨년스러웠다.소미의 시선이 한 곳으로 꽂혔다.구석에 놓인 작은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우주.소년은 겁에 질려 있었다. 아이는 온몸이 긴장된 채 땅만 바라보고 있었고, 두 손은 꼭 쥔 채 무릎 위에 올려져 있었다.“엄마!”소미는 눈살을 찌푸리며 어머니를 노려보았다.“진짜... 엄마였어요? 대체 왜 그랬어요?”유건에게 우주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는 바로 어머니 장미리를 의심했다.“왜냐고?”장미리는 되려 반문했다.“네 간이 안 맞잖니? 지시연 그 계집애는 끝까지 거부하고. 그러면 남은 선택지는 우주뿐이잖아!”“네?”소미
“뭐?”장미리는 순간 얼이 빠졌다.“너희, 이미 헤어진 거 아니었어? 설마 아직 가능성이 있는 거야?”“네.”소미는 애매하게 대답했다.“정말?”장미리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딸의 손을 붙잡았다.“어서 말해봐. 어떻게 된 거야? 너, 어떻게 한 거야?”“엄마...”...지씨 저택 앞.시연은 정말 오랜만에 이 집을 찾아왔는데, 이미 오래전부터 문과 비밀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오늘 길에 자신이 초인종을 눌러도 지동성 일가가 자신을 들여보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정기환이 있었으니까.기환은 시연의 지시에 따라 차를 집 앞에 세웠다.낯익은 대문을 바라보며 그는 당황했다.‘여기... 장소미네 집 아니야?’‘형수님은 여기 온 이유가 대체 뭐지?’“기환 씨.”시연이 저택 대문 너머를 가리켰다.“담 넘을 수 있죠?”‘그건...’솔직히 이 정도 담장은 기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수고스럽겠지만, 담을 넘어서 문 좀 열어줘요.”“형수님.”기환은 머뭇거렸다.“이거 불법침입 아닌가요? 경찰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시연은 눈썹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했다.“아, 기환 씨도 여기가 어딘지 아나 보네요? 여기가 장소미네 집이라서 망설이는 거죠?” 기환이 순간에 말문이 막혔다.‘우리 형수님... 역시나 똑똑하시네.’“그렇다면...”시연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억지로 기환 씨를 시킬 필요 없겠네요. 내가 직접 넘을게요.”그러면서 소매를 걷어붙였다.“아이고!”기환이 깜짝 놀라 그녀를 붙잡았다.“형수님! 장난하지 마세요! 어떻게 형수님이 담을 넘어요?”결국 그는 체념한 듯 한숨을 쉬고 말했다.“제가 할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고마워요.”기환은 가뿐히 담장을 넘어 문을 열었다. 시연은 아무렇지 않게 발을 들였고,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아니... 시연 아가씨?”가사도우미가 시연을 보자마자 경악했다.“여길 어떻게...?”시연은
“네!”기환은 손쉽게 가사도우미를 제압했다.그녀는 속수무책으로 시연이 창고로 향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다급하게 외쳤다.“사모님! 사모님! 사모님! 으읍...!”하지만 가사도우미의 입은 기환에 의해 막혀버렸다....창고 안.장미리는 소미의 말을 듣고 기분 좋게 웃었다.“생각지도 못했는데, 네가 그런 운을 타고났구나.”그리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보아하니, 하늘의 뜻이야! 하늘이 너랑 고 대표를 갈라놓고 싶지 않으신 거야!”“엄마.”소미는 눈살을 찌푸리며 단호히 말했다.“앞으로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무슨 일이든 저랑 상의하세요.”“알겠어...”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미리는 귀를 쫑긋 세웠다.“어라? 방금 가사도우미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진짜요?”소미는 깜짝 놀라며 다급히 물었다.“설마 지시연이 벌써 온 걸까요?”“그럴 리가 있나? 이렇게 빨리?”“저도 빨리 왔는데, 지시연이 못 올 이유가 있겠어요?” “그럼 어쩌지? 시연이 그 계집애, 쉬운 상대가 아닌데!”“그래서 제가 엄마한테 매번 조심하라고 한 거잖아요!”...갑자기 우주가 반응을 보였다.그는 ‘지시연’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자신의 누나 이름. ‘누나가 나를 찾아왔어!! 누나가 나를 구하러 왔어!!’소년은 벌떡 일어섰다.그리고 187cm의 큰 키로 곧장 문 쪽을 향해 달려갔다.이와 동시에 주먹을 꽉 쥔 채, 끊임없이 외쳤다.“누나! 누나!”장미리와 소미는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장미리는 급히 우주를 붙잡았다.“우주야, 착하지? 어디 가려고? 네 누나는 여기 있잖아.”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소미를 가리켰다.하지만 우주는 소미를 보며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 시선은 낯설고도 두려움이 가득했다.소년은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아니, 아니야! 우리 누나 아니야!”그는 장미리의 팔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소리쳤다.“누나! 누나!”...창고로 향하던 시연은 그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췄다.“우주다!”그녀는 곧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