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이 문손잡이를 잡고 살짝 당기려던 찰나, 뒤에서 다가온 유건이 팔을 뻗더니 ‘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다시 닫아버렸다. 남자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시연의 머리 위를 감쌌다. “그래, 진료받을게. 대신 같이 가자.” “뭐라고요?” 시연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요?” “지시연!” 유건의 미간에 분노가 깊게 드리워지며 얇은 입술이 꽉 다물어졌다. “넌 내 아내야. 당연히 내 옆에 있어야지.” “그래요, 난 당신 아내예요. 하지만...” 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차분한 눈빛으로 말했다. “근데, 당신 그 상처... 나 때문에 입은 거 아니잖아요. 내 남편이 다른 여자 때문에 다쳤는데, 그걸 왜 내가 책임져야 하죠?” “당신!” “아, 맞다...” 시연은 무심한 표정으로 웃음을 더했다. “이젠 내가 당신을 돌볼 생각이 없으니까, 돈이 많은 당신은 간병인을 쓰면 되잖아요. 한 명으로 부족하면 두 명을 쓰고...”“지시연!” 유건의 얼굴은 새까만 먹물처럼 굳어버렸다. 그리고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이라는 게 있어! 장소미는 나 때문에 다쳤어! 그런 사람을 안 돌보면... 나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어?” “나, 돌보지 말란 말은 안 했어요.” 시연은 억울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오히려 돌보라고 했잖아요. 옆에 있어 주라고요. 진심이에요.” “그럼 왜 이러는데? 왜 이렇게 구는 거야?” “내가 뭘요?” 시연은 허탈한 듯 웃었다. “난 그냥, 당신의 선택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거잖아요. 나도 내 선택을 했을 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이해돼요?”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싸늘하게 웃었다. “네 선택? 명목상 부부?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개소리라고요?” 시연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제안, 처음 꺼낸 사람이 누군지 잊었어요?” 유건은
유건은 능력 있고, 잘생기고, 집안까지 완벽하며, 시연에게도 잘했다. 시연이 그런 사람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꾸만 이성을 놓고, 실수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제, 시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는 정신 차려야 해.’ ‘그리고 이제 나는, 정말 푹 자야 해...’ 그녀는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더 이상 잘못된 감정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밤새 깊은 잠을 잤다. 시연이 눈을 떴을 때, 팔이 묘하게 무거웠다. 아파서가 아니라, 눌린 느낌. 그리고 고개를 숙여보니, 유건이었다. 그가 침대 옆에 앉아, 시연의 손을 꼭 잡은 채, 팔에 머리를 얹고 잠들어 있었다. ‘어쩐지 무겁더라.’ 그녀는 이 남자가 언제 왔는지, 왜 이러고 있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고, 알 필요도 없었다. 시연은 팔을 힘껏 빼보려 했지만, 여자와 남자의 힘 차이는 너무 컸다. “유건 씨.” 시연은 더 이상 뵈는 게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나요. 팔 저려서 미치겠으니까.” “응...?” 유건은 곧바로 눈을 떴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여자의 팔을 풀어줬다. “여보, 일어났네.” ‘그건 나도 알지.’ 시연은 유건의 의미 없는 말에 대꾸하지 않고, 침착하게 침대 옆 호출 벨을 눌렀다. 곧 간호사가 들어왔다. “사모님, 일어나셨네요. 세수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몸이 훨씬 나아졌어요. 퇴원하고 싶어요.” “그렇군요. 그럼 주치의한테 여쭤볼게요.” “네, 부탁해요.” 간호사가 나가고, 시연은 곧장 침대에서 내려왔다. 유건이 그 뒤를 따랐다. “벌써 퇴원하게? 하루쯤 더 쉬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시연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욕실로 들어가, 철컥-남자의 코앞에서 문을 잠갔다. 유건은 멈칫했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손잡이를 잡아보았지만,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어쩔 수
시연의 어투는 담담했다. 하지만 유건의 귀에는, 그 말투가 기묘하게 비꼬는 듯 들렸다. 그는 애초에 굳이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반복되는 비아냥은 도저히 넘길 수가 없었다.“내가 팔을 다친 건, 다 너 때문이야!”“네?” 시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정말요...?”“그래!” 유건은 당황했다. 무언가에 쫓기듯 설명하려 들었다.“그때 나는...”“그만해요.” 시연은 그의 말끝을 잘랐다.“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계속 말할래요?”유건은 움찔했다. 차가운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왠지 모를 무력감이 밀려왔다. ‘말해봤자, 뭐가 달라지겠어.’“그래, 안 할게. 가자.”그렇게 그는 시연의 손을 잡고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고씨 가문의 본가였다.본가에 도착하니, 집 안에는 왕성애만 있었다. 고상훈이 입원 중이라 이호민은 병원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고, 집안일은 왕성애가 맡고 있었다.거실에 들어서자 시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모님, 수고스러우시겠지만, 객실 하나 정리해 주세요.”“네...?” 왕성애가 잠시 멈칫하며 유건을 바라봤다. 그런데 유건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놀란 눈치였다. 이 얘기는 금시초문인 듯했다.“객실은 왜?”“내가 써야 하니까요.” 시연은 얕게 웃으며 일부러 천천히 말했다. “이모님, 제 배가 점점 불러오고 있어서 고유건 씨랑 따로 자는 게 편할 것 같아요. 부탁드릴게요.”“지시연!” 유건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왕성애를 힐끔 보더니, 낮게 말했다. “이모님, 먼저 들어가 계세요.”“아, 예예...” 왕성애는 분위기를 눈치채고 재빨리 자리를 떴다.유건은 시연을 끌고 2층으로 올라가, 침실 문을 닫았다. 눈빛에 분노가 가득했다.“도대체 너, 뭐 하자는 거야? 어?”“왜 소리를 질러요?
“그래?” 유건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말투는 싸늘했다. “그깟 걸로 죽진 않을 거야.”‘이젠 아프다고 유세네.’‘이러면 내가 물러설 줄 알았나?’ 시연은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죽어요.”유건은 움찔하며 눈빛이 갈라졌다. “여보!”“왜 그렇게 쳐다봐요?” 시연은 싸늘하게 눈을 흘겼다. “나 때문에 다친 거예요? 내 앞에서 불쌍한 척은 왜 해요?” 이 말을 끝낸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정말 죽기라도 하면, 장소미는 슬퍼서 엉엉 울 거예요. 어쩌면... 장소미도 따라 죽을지 모르죠.” 그러고는 조롱 섞인 미소로 덧붙였다. “그렇게 되면 너무 좋겠네요. 완전 비극 속의 연인 같지 않아요? 사랑하는 사람과 저승까지 함께 간다니... 축하해요.” “지시연!!” 유건의 얼굴은 순식간에 시퍼레졌고, 눈은 타오르듯 번뜩였다. “진심이야? 너, 진짜 날 미치게 만들고 싶구나?!”“당신 마음대로 생각해요” 시연은 더 이상 말 섞을 의지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왕성애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119 좀 불러주세요. 저 상태로 놔두면 열 때문에 곧 의식 잃을 거예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지시연!!” 하지만 계단을 몇 걸음 오르기도 전에... 쿵! 시연의 뒤에서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 이어 왕성애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도련님!”시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왕성애가 얼굴이 사색이 되어 울먹였다.“사모님... 이제 어쩌죠?”“119 부르세요! 지금 당장이요!”“네, 네!”곧 119가 도착했고, 구급대원들이 유건을 들것에 실었다.“가족 분도 함께 타세요.” 구급대원이 말하자, 왕성애가 시연을 슬쩍 바라봤다. “사모님...?”“전 안 갈 거예요.”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이모님, 너무 걱정 마세요. 의사랑 간호사가 잘 돌볼 거예요.”그 말만 남기고, 시연은 진짜로 등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유건은 지한의 말을 들을수록 짜증이 치밀었다. “뭐 하러 왔냐? 할 말 없으면 나가.”딱 봐도 발끈한 상태였다. 지하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받아쳤다. “좀만 기다려봐. 사과 아직 덜 깎았거든.”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천천히 말했다. “근데 말이야, 진짜 어떻게 할 건데?”“뭘 어떻게 해?” 유건은 째려보듯 눈을 흘겼다. ‘뭔 헛소리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지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시연 씨가 화내는 거, 솔직히 이해돼. 너는 정말 과거를 다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장소미만 문제였으면 말을 안 해. 근데 지금은 나비 공주 일까지 겹쳤잖아? 그 사람은 네가 몇 년이나 마음에 품어온 첫사랑이야. 그런 감정을, 진짜 시연 씨를 위해 놓겠다고?” 그 말에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과를 다 먹은 지하는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생각해 봐. 만약 못 놓겠으면, 친구로서 한마디만 할게. 시연 씨, 그냥 놔줘.”이 말을 끝으로 돌아서려던 지한을 유건이 불러 세웠다. “지하야.”“응?”유건은 진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혼할 생각 없어. 시연이랑 헤어질 마음도 없고.”지하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웃었다. “오케이. 알았어. 내가 도와줄 게 있으면 말만 해.”...밤이 되자, 시연은 임진아와 저녁을 약속했다. 고상훈이 병원에 있기에 집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기에, 마침 잘 됐다 싶어 외식을 포기하고 배달 음식을 시켰다. 진아의 자취방엔 이미 샤부샤부, 꼬치, 치킨까지 전부 세팅되어 있었다. 진아는 닭날개를 오물거리며 말했다.“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 아니, 아예 집에 가지 마. 그 두 사람은 그냥 묶어놔야 해. 세상에 나와서 민폐나 끼치고 말이야...”“응, 그래.” 시연은 소리 없이 웃으며 소고기 완자를 입에 넣었다.그때, 또 한 번 초인종이 울렸다.“이번엔 밀크티다!” 진아는 닭날개를 내려놓고 손을 닦으며
“됐거든요! 저 남자 친구 있어요!”“뭐...?” 지하는 순간 멍해졌다.그 틈을 타, 진아는 드디어 자기 밀크티를 낚아채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잠깐만!” 지하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 사람, 누군데?”“누가요?” 진아는 한 박자 늦게 그 질문의 의미를 깨달았다. ‘아, 남자 친구 말하는 거구나.’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었다.“누구긴 누구겠어요? 부 대표님도 아는 사람이죠. 진성빈이요!!”‘진성빈...? 아, 그놈!’ “쳇.” 지하는 혀를 차더니, 손을 놓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러더니 갑자기 진아의 집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하지만 입으로는 계속 중얼댔다. “그 어린애? 취향 진짜 별로네.”“뭐라고요?!” 진아는 깜짝 놀라며 지한을 노려봤다. “성빈이가 뭐 어때서요? 그리고... 잠깐...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누가 들어오래요?! 당장 나가라고요!!!”하지만 지하는 전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진아는 다급히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나가라니까요! 못 들었어요?!”지하는 여자의 손을 내려다봤다. ‘오? 얼굴은 통통한데 손가락은 엄청 가늘잖아?’ ‘얼굴에 있는 건 그냥 젖살이었네.’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목 안이 간질거려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진아 씨, 지금... 나한테 손댔잖아. 책임져야지.”“뭐, 뭐라고요?!” 진아는 흠칫 놀라며 다급히 손을 뗐다.“푸하하하하!!!” 지하는 또다시 박장대소했다. ‘아, 진짜 너무 재미있다니까? 미치겠네.’하지만 그는 자기가 왜 왔는지를 기억하고, 더는 장난치지 않고 안으로 걸어갔다.테이블 쪽에 있던 시연이 샤부샤부 국물에서 고기를 건져내며 말했다.“진아야, 너 아까 배달원한테 뭐라고 했어? 잘생겼다고? 넌 진짜 잘생긴 얼굴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린다니까...”‘오? 얘 꽃미남 수집가였어?’지하는 고개를 숙여 진아를 쳐다봤다. 진아는
지하는 병실 문을 두어 번 상징적으로 두드렸다.“유건아, 나 들어간다.”문을 열고 시연을 휙 끌고 들어갔다.“사람 데려왔다!”곧장 침대 앞으로 가서 손을 놓자, 시연은 앞으로 확 밀렸다.“꺅...”발이 헛디뎌 중심을 잃은 시연은 침대로 고꾸라졌다. 넘어질까 봐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고, 본능적으로 기대버린 사람은, 유건이었다.유건은 기다렸다는 듯 단번에 그녀를 안아 올렸다. “괜찮아?” 그리고는 지하를 노려보며 말했다.“행동 좀 조심해! 시연이는 임신 중이라고!”지하는 눈썹만 슬쩍 올리고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난 이만 간다.” 그렇게 말하며 손을 흔들고 돌아서려다가, 문득 다시 뒤를 돌아 시연을 가리켰다.“아, 맞다. 시연 씨, 밥 먹다 말고 따라온 거라 아직 배고플 거야.”그 말을 끝으로 그는 진짜로 나갔다.복도엔 정민환과 정기환이 좌우로 서 있었다. 마치 병실 수호신처럼.그들은 지하를 보자 바짝 서며 인사했다.“지하 도련님.”“응.” 지하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따 형수님이 좀 날뛸 텐데, 잘 보고 있어. 절대 도망 못 가게.”“네, 도련님.”“그럼, 수고들 해.”...병실 안.시연은 유건 품에서 빠져나가려 팔을 밀었다. 하지만 유건은 꽤 단단히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도... 와줬네?”‘뭐래...?’ 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하... 그 말, 당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 않아요?”“내가 어떻게 왔는지, 당신이 모를 리 없잖아요?”그녀는 손목을 들어 유건의 눈앞에 들이댔는데, 하얀 팔목에 붉게 남은 자국이 선명했다.지하는 손이 워낙 거칠었는데, 시연에게 사심이 없기에 더더욱 거침없었다. 하지만 이런 시연의 손을 본 유건은 마음이 아주 아팠다. 유건은 시연 손목을 조심스레 감싸 쥐고 쓰다듬었다.“많이 아파? 약이라도 바를까? 내가 지한한테 약국 좀...”“됐어요.”그는 한 손만 자유로
“안 되는 거예요?”시연은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수저를 들었다.“알겠어요. 난 당신과 달리 입맛에 안 맞는 식사 한 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바로 반찬을 집은 후, 죽을 떠먹으며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그녀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자 유건은 차마 말을 끊지 못하고, 평소처럼 말없이 반찬을 덜어주었다.밥 먹을 땐 말이 없는 법이라 시연은 금세 배를 채웠다.오히려 유건은 그녀 챙기느라 두어 숟갈밖에 못 먹었다.입을 닦은 시연이 고개를 들어 말했다.“이제 가도 돼요?”유건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시연을 자극할 수 없어 조심스레 팔로 그녀를 감쌌다.“여기서 나랑 같이 있으면 안 돼?”‘같이 있긴, 뭐가 좋아서...’시연은 눈을 굴리며 대꾸했다.“여긴 잠 자기 불편하거든요.”보호자 침대를 가리켰다.“너무 작아요. 나, 요즘 뒤척임이 심해졌단 말이에요.” 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밤에 잠들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보호자 침대는 안 돼.”유건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내 침대는 넓으니까 충분히 잘 수 있을 거야. 네가 뒤척여도 내가 안고 잘 테니까, 떨어질 걱정은 없어.” 두 사람이 같이 자자는 얘기였다.시연은 잠시 멍해졌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들은 것처럼, 피식 웃음이 터졌다.“내가 뭐라고 말했길래, 아직도 우리가 한 침대에 누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유건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당황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이었다.하지만 화를 낼 수도 없었다.시연의 말투를 따라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내가 언제 허락했길래, 네가 방을 나가서 자는 게 당연한 줄 아는 거야?”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팽팽한 신경전.“나 말싸움하려고 온 거 아니에요.”시연은 황당하다는 듯 잘라 말했다.“어쨌든 난 당신이랑 같이 안 잘 거니까... 못 나가게 할 거면, 난 여기 소파에서 밤새 앉아 있을 거예요.”그 눈빛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타협은 없다는 듯.결국, 유건이 물러섰다.“좋아, 같이 자자고 안 할 테니까 나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