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 주는 건 분명 기쁜 일이야. 하지만, 현진아, 나한테 시간 낭비하지 마.” 직설적이면서도 여지를 남기지 않는 단호한 말이었다. 그녀가 현진을 이곳으로 부른 것은 사실 현진을 거절하기 위해서였다. 현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왜... 뭐가 시간 낭비야?” 시연은 차마 현진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있어서 현진은 그저 스쳐 가는 사람일 뿐이라고.그녀는 현진을 거절할 수는 있어도, 상처까지 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 뒤에서 이 대화를 듣고 있던 유건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입가에 미소까지 번졌다. ‘역시 지시연은 저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 하지만 바로 그때, 시연이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왜냐하면,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뭐라고?” 현진은 믿기 힘들다는 듯 물었다. “한 번도 그런 얘기는 들어 본 적 없는데... 그 사람이 대체 누구야? 내가 아는 사람이야? 우리 학교 학생인가?”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모르는 사람이야. 우리 학교 사람도 아니고.” “그, 그런데...” 현진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왜 한 번도 너를 만나러 오지 않아? 그리고 진아도 너에게 남자 친구가 없다고 하던데. 너, 나 떼어내려고 일부러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시연은 순간 할 말을 잃었고, 진아가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짓말 아니야. 다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그 사람과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이야. 진아도 그 사람을 만나본 적 없어.” 시연이 이 말까지 하고 나니, 현진도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래... 그런데, 너 그 사람을 정말 좋아해?” 이 질문이 나오자, 유건도 무심코 몸을 똑바로 세우고 귀를 기울였다. “응, 좋아해.” 시연은 잠시 주저하다가 덧붙였다. “정말 좋아해, 아주 많이.” “아...
SYD호텔. 시연이 이곳에 온 지 벌써 이틀이 지났다. 올해 외과 학술회의가 여기서 열렸고, 시연의 지도 교수인 양석현이 중요한 발표자로 참석했기 때문에, 시연은 지도교수의 발표를 돕기 위해 보조로 따라오게 되었다. 양석현의 발표가 있던 오전 콘퍼런스 일정이 막 끝나자, 양석현 교수는 예정되어 있던 심폐 이식수술을 위해 서둘러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학회 주최 측에 제출한 양 교수의 발표 원고를 아직 돌려받기 전이라, 시연이 남아서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료를 받기로 했다. “서두를 필요 없어.” 양석현은 SYD호텔 호텔의 상품권을 건네며 말했다. “시간이 되면 여기서 좀 쉬다가 와도 괜찮아.” SYD호텔은 다소 외진 곳이었지만, 근처의 자연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다워서 돌아보며 시간을 보낼 만한 곳이었다. 시연은 기쁜 마음으로 양석현이 건네는 상품권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양 교수님.” 먼저 떠나는 양석현을 배웅한 후, 시연은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했다. “이러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데...” 주최 측에서 발표 원고를 돌려받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것 같아, 시연은 짐을 정리하고 체크아웃을 한 뒤, 호텔 로비의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폭풍우가 곧 몰아칠 것 같은 기세였다. 시연은 시계를 보며 콘퍼런스 진행이 생각보다 늦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때 호텔의 정문이 열리며 많은 사람이 시끌벅적하게 동시에 들어왔다. 알고 보니 한 영화 촬영팀이 SYD호텔을 촬영 장소로 섭외해 촬영을 위해 들른 것이었다. 시연은 무심코 촬영팀 스태프들을 쓱 훑어보다가 그들 속에서 장소미를 발견했다. 소미는 훤칠한 미남의 팔짱을 끼고 서 있었는데 며칠간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유건이었다. 유건도 시연을 발견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시연은 미소를 지었지만, 유건은 인상을 찌푸렸다. ‘저 여자는 며칠 사이에 왜
시연이 은범을 친구목록에 추가한 이후, 시연이 처음으로 업데이트한 SNS였다. 은범은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 밤엔 태풍이 올 것 같은데, 시연이 혼자서 SYD호텔에 있다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자, 외투와 핸드폰, 차 키를 챙긴 은범은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은범아, 어디 가니?” 은범을 부른 사람은 그의 어머니 강수희였다. 은범은 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 이제 다 큰 성인이에요. 아직도 어디 갈 때마다 엄마 허락 일일이 받아야 해요?” “그런 뜻이 아니야.” 강수희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날씨가 안 좋아서... 그리고 오늘 저녁에 네 아버지가 네 삼촌들 몇 분을 초대했거든...” 은범은 냉소를 지었다. “몇몇 삼촌들? 그 딸들도 함께 세트로 데려오는 자리이겠죠.” 은범이 귀국한 뒤, 가족은 그에게 이런 방식의 식사 자리를 여러 번 마련했다. 사실, 그것은 선을 보는 것이라고 해야 마땅한 자리였다. 그 아가씨들은 다 강수희가 신중하게 고른, 은범의 부모님이 원하는 며느릿감이었다. 은범은 이런 불편한 상황에 다시 놓이기 싫어 강수희에게 명확히 말했다. “엄마, 다시는 그런 자리 마련하지 마세요. 엄마가 고른 그 여자들,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말하며 그는 무심코 왼쪽 손목을 만졌다. “엄마가 다시 나를 밀어붙이기 전에, 완전히 아들을 잃게 될 준비는 되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고요!” 그 말이 끝나자 은범은 강수희 옆을 지나 현관문을 나섰다. “은범아...!” 뒤에서 강수희의 창백한 얼굴로 균형을 잃을뻔한 몸을 간신히 지탱했다. ‘아들은 여전히 날 원망하고 있어!! 하지만 그때, 정말 내가 잘못한 걸까? 사실, 예전에 은범이 시연과 만나다가 헤어지게 된 것은 바로 강수희가 둘 사이에서 계속 분란을 일으키고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시연과 헤어지고 난 뒤로 은범은 강수희를 원수처럼 여기게
곧 주문한 음식들이 식탁에 가득 놓였다. 시연은 식탁 가득한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그녀가 주문한 야채 듬뿍 얼큰 만둣국만 기다리고 있었다. “만둣국 나왔습니다.” 서빙 직원이 음식을 가져왔다. 시연은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와, 냄새 진짜 좋아요.” 소미가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그 얼큰 만둣국을 자기 앞에 놓았다. “정말 맛있게 보여요. 식욕이 확 돋네요.” 소미는 시연이가 만둣국을 주문한 것을 완전히 잊은 듯했다. 테이블에 음식이 가득했지만, 시연은 그 하나만 주문했을 뿐이었다. 소미는 숟가락을 들어 만두를 하나 떠서 한입 먹었다. “존맛탱이네요!!” 그뿐만 아니라, 국물을 두 모금이나 마셨다. “유건 씨.” 소미는 고개를 들고 유건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음식 맛을 칭찬했다. “이렇게 외진 곳인데도 호텔의 만둣국이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네.” 유건은 이마를 찌푸렸고,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장소미가 일부러 그런가?’ “아!” 소미가 잠시 멈추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시연을 보았다. “미안해요, 지 선생님. 제가 깜빡했네요. 이건 지 선생님이 주문한 거였는데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며, 그릇을 시연 앞으로 다시 밀어 놓았다. “만두 한 개밖에 안 먹었고, 국물도 두 숟가락밖에 안 먹었어요. 거의 손도 안 댄 거나 마찬가지예요.” 소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전혀 공격적인 표정 하나 없이 말했다. “지 선생님, 신경 안 쓰이시죠?” 시연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10년이 넘었는데, 장소미는 언제나 이런 식이야!’ ‘이 모든 세월 동안 내가 입고 쓰던 것들은 언제나 장소미가 남긴 것들이거나, 버린 것들이거나, 중고품이었어!’ ‘이미 지씨 집안과 연을 끊었지만, 장소미는 여전히 이런 방식으로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군.’ ‘예전에 매번 다 참았다고 해서 이번
시연은 유건과 소미를 향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려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여기에서 그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볼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녀는 소파가 있는 라운지로 돌아와 가방에서 초콜릿 캔디를 꺼냈다. 누가 준 캔디였나 잠시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 은범이 준 것임이 떠올랐다. ‘그날 밤, 노은범도 여자 친구와 함께 왔었지...’ 캔디는 배를 채울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에너지를 유지할 정도는 가능했다. 시연은 포장지를 뜯고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바깥에서는 비가 점점 더 세차게 내렸고, 라운지 안쪽도 사방에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밤이 깊어지면서 점점 더 추워졌다. 그때, 유건과 소미가 식당에서 나와 라운지를 지나가다가 소파 한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잠든 시연을 발견했다. 유건은 발걸음을 돌려 곧장 시연에게 다가갔다. 시연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손에는 반쯤 먹다 만 초콜릿이 쥐어져 있었다. “지시연!” 유건은 이유 없이 화가 치밀었다. ‘이 여자, 나와 같이 식사하자는 걸 거부하더니, 이렇게 초콜릿으로 배를 채우고 있어? 말도 안 돼!’ “아!” 시연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유건과 소미가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더 짜증이 났다. 그녀는 눈을 감고 두 사람을 무시하려 했다. “일어나!” 유건은 허리를 굽혀 시연의 손목을 잡았다. 시연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적극적이고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했다. ‘도대체 뭐 하려는 거지? 내가 장소미를 비난했다고 해서 대신 복수라도 하겠다는 거야?’ 시연은 저항하지 않고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이 손 놔요, 안 그러면 소리 지를 거예요. 고 대표님은 상관없겠지만, 여자 친구분은 연예계에 있으니 곤란해질 텐데요.” 그 말을 들은 소미는 유건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유건 씨?” 하지만 유건은 손을 놓지 않았다. 눈을 더 가늘게 뜨고 한층 더 어두운 표정으로 시연에게 말했다
소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 선생님, 차라리 저랑 같은 방을 쓰는 게 어때요? 유건 씨는 밤에 처리할 업무도 있고, 게다가 남자 셋이 함께 한 방에서 자긴 어렵잖아요.” ‘그래, 이 말도 그럴듯한 말이었네.’유건은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때?” 시연은 거절하려던 참이었지만, 소미가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해요.” 시연이 내키지 않는 기색이 드러나자, 유건이 그녀에게 상기시켰다. “네 몸이니까, 잘 생각해서 결정해.” 그 말속에는 배 속 아이를 위해서라도 시연에게 무리하면 안 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점점 날씨가 추워지고 있었고, 라운지에서 밤을 지새운다면 정말로 병이 날 수도 있었다. 시연은 잠시 망설이며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 밤을 참고 견뎌야 할지 고민했다. “네, 그럼 가요.” 소미는 더 다정한 태도로 말했다. “아까는 제가 지 선생님께 잘못했으니, 저에게 사과할 기회를 주세요.” 결국 시연은 동의했고, 소미와 함께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소미는 시연의 팔을 놓고, 속에 담아두었던 의문을 던졌다. “너랑 유건 씨 무슨 관계야? 너, 유건 씨와 너무 가까워지는 거 아니야?” 갑작스러운 소미의 질문에 시연은 놀라 잠시 멈칫하더니,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다는 거야?” 소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 진지하게 묻고 있어. 유건 씨는 신사야. 넌 단지 유건 씨를 치료하고 있는 주치의고! 유건 씨가 널 존중하는 거지. 너 착각하지 마!” “하하하.” 참지 못하고 시연은 크게 웃어버렸다. 소미는 점점 더 화를 내며 말했다. “대체 뭐가 웃기다는 거야?” “어머나.” 시연은 배를 잡고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너 혹시, 불륜 자식 증후군이 있니? 네 엄마가 불륜녀였으니까, 너도 언젠가 네가 ‘불륜녀’가 될까 봐 걱정하는 거야? 하하, 이게 바로 하늘의 뜻이고 순리라는 거구나!” “너
그러나 임신 중에는 잠이 훨씬 많이 쏟아지기 마련이라, 시연은 결국 호텔 라운지 소파 위에서 잠들고 말았다. ... 한밤중, 노은범이 SYD호텔에 도착했다. 그는 소파가 있는 로비의 라운지에서 시연을 발견했다. 시연이 올린 사진을 보며 어느 각도에서 사진이 찍혔는지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시연은 막 잠든 상태였다. 몸을 웅크리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 은범은 조심스럽게 시연 앞에 쪼그려 앉았다.지금 시연를 깨울지 말지 고민이 들었다. ‘그래도 깨우지 않는 쪽이 낫겠어. 그냥 안아서 방으로 데려가야겠다.’ 은범은 시연의 SNS를 보자마자 이미 빈방을 예약해 두었다. 막 안아 들자마자, 시연이 눈을 떴다. 은범은 즉시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 섰고,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시연이 혹시 화를 내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그때 시연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은이야...” 은범은 순간 멍해졌다가, 곧 기쁜 감정이 온몸에 휘몰아쳐 흥분된 목소리로 떨면서 대답했다. “나야, 시연아. 나 여기 있어.” “응.” 시연은 눈을 감으며 안도한 듯 그의 품에 기대었다. 은범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고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때, 시연은 갑자기 눈을 뜨며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노은범?” 그녀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디야?” 지금의 시연은 아까 은범에게 기대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고,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생경한 얼굴로 은범을 대했다. 은범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정신이 돌아와서, 나에게 화내고 있는 건가?’ ‘하지만 조금 전 시연이 잠에서 덜 깼을 때 나를 ‘은이야’라고 불렀어...’실은 조금 전 시연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찾고 의지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큰 위안이었다. 은범은 시은이 자신을 ‘은이야’라는 이름으로 부른 이유가
호텔 주방. “선생님, 주문하신 재료는 모두 준비됐습니다. 더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은범은 재료를 한 번 훑어보고 나서, 친절하게 말했다. “재료들을 잘게 다지고, 속을 만들어주세요. 그리고 반죽은 발효시켜 주세요.” 그는 말하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여기 계신 분들, 제 톡 좀 추가해 주세요. 아내가 특별히 먹고 싶어 해서요.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해서, 작은 성의 표시로 감사 인사 전하고 싶습니다.” “아, 무슨 말씀이세요.” 몇 명의 주방 직원들이 놀라서 톡을 추가하자마자, 은범은 주방에 있던 직원들에게 바로 각각 20만 원씩 송금했다! 주방 직원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는 속으로 기뻐했다. 은범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앞치마를 단단히 맸다. 주방 직원들은 기꺼이 은범을 도와 만둣국에 넣을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 몇 분 전, 유건 역시 주방에 전화를 걸어 만둣국을 주문했다. 그는 시연이 제대로 먹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시연이 배가 고프면, 배 속에 있는 아기까지도 잠을 잘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방에서는 똑같은 답이 돌아왔다. [만둣국을 만드는 셰프가 퇴근했습니다.]유건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지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임신하고 나서 지시연 입맛이 까다로워졌는데...’ ‘방금도 주문한 만둣국을 못 먹고 빵 한 조각만 먹었잖아...’그저 한 그릇의 만둣국인데, 자신이 시연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다는 사실에 유건은 화가 치밀었다. “형!” 정기환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건에게 다가오더니 웃으며 말했다. “저 만둣국 만들 줄 알아요.” ‘응?’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음을 터트렸다. “왜 진작 말 안 했어? 가자!” 유건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정민환까지 끌고 다짜고짜 주방으로 향했다. “형님,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주방, 만둣국 만들러.” 유건 일행이 주방에 도착했을 때, 은범이 막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