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 어린 시연이, 대체 어떤 고통을 겪으며 살아왔는지.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지동성이었다. 정말 우스운 일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오해를 했던가. 정작 진짜 잘못된 건, 지동성이란 남자가 ‘아버지’라는 이름조차 감당하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것.소미의 말에 일부 과장이 섞여 있을지 몰라도... 지동성이 시연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준 적이 있었을까?아니, 지동성은 자기 자식들에게조차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한 적이 없었다. 딸이 아버지를 그렇게까지 미워하고,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 할 정도라면, 그게 어떤 아버지란 말인가?그리고... 유건의 가슴을 더 서늘하게 만든 건...혹시, 시연이 자신에게 다가온 이유가 정말 소미가 말한 것처럼 ‘복수’였다면?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마음 한편이 쓰디쓴 한약에 담가진 것처럼 저릿하게 아려왔다. ‘그때... 우리가 처음 계약 결혼을 했을 때, 시연이가 이혼을 고집했던 것도... 그 이유였던 걸까?’그땐 단지 무심한 성격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뭔가 숨기고 있던 게 분명했다. 그 숨겨진 이유가, 그토록 잔인한 것이라면......한편, 병실에서는...잠시 눈을 붙이고 난 뒤, 시연은 이제 괜찮다는 듯 스스로 산소호흡기를 뗐다.“시연아!” 하은이 놀라 달려왔다.“왜 벌써 일어났어? 아직 컨디션 안 좋을 텐데, 좀 더 쉬지.”“괜찮아.”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까는 잠시 숨이 가빴을 뿐이야. 지금은 정말 멀쩡해.”하은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억지로 버티는 얼굴은 아니었다.“알겠어. 근데 무리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바로 말해야 해.”“응, 알았어.” 시연은 여전히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그녀가 다른 데 시선을 두고 있을 틈을 타, 하은은 몰래 핸드폰을 꺼내 시연의 모습을 ‘찰칵’ 사진에 담았다.그리고 곧장 유건에게 전송했다.한편, 유건은 메시지 알림을 보고 화면을 터치했다. 사진 속 시연은
“시연이 왔구나. 소개할게.” 양석현 교수는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이쪽은 변이준. 네 선배야. 이준아, 여기는 시연이. 너보다 한참 어린 네 후배지.”“시연 씨, 반가워.” 변이준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시연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선배님, 안녕하세요!” 시연은 들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변이준... 그 이름, 나 들어본 적 있어!’ 양석현의 자랑이자, ‘의대의 천재’라고 불리던 그 이름. 학부 시절에 이미 심장 수술을 집도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강울대뿐만 아니라, 전 의학계에서 손꼽히는 인재.‘진짜 실물을 보게 되다니...!’ 시연이 실습을 시작했을 때, 이준은 이미 해외 연수 중이었다.그런데 그가 1년 만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그녀는 가슴이 벌렁댔다. 이 순간, 직접 만나게 될 줄이야.“왜 그렇게 쳐다봐?” 변이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아, 아뇨... 그냥... 너무 신기해서요. 선배님, 정말 대단하시잖아요!”“오?” 변이준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눈썹을 살짝 올렸다. “시연 씨도 꽤 괜찮던데? 교수님이 그러시던데, 이번 의대생 중에 단독 진료도 보고, 응급 환자도 맡을 수 있는 사람은 시연 씨 하나뿐이라던데?”“에이... 선배님에 비하면 아직 멀었죠...”“그만, 그만!” 양석현 교수가 웃으며 두 사람을 제지했다. “둘 다 내 자랑스러운 제자야. 서로 띄워주기는 그만하라고.”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고 동시에 말했다. “네, 교수님.”“네, 교수님.”“앞으로 잘 지내봐. 이준이는 선배니까 시연이 좀 잘 챙겨주고, 시연은 후배니까 선배한테 많이 배워야 해.”“네, 교수님.” “네, 교수님.” 또다시 이구동성으로 대답이 돌아왔다.“가자, 자리 예약해놨어. 이준이가 점심 사준다니까 시연이도 같이 가자꾸나.” 양석현은 시계를 보고 외투를 챙기며 말했다.“네! 감사합니다, 교수님!”...훌륭한 선배
임신 중기로 접어들면서, 시연의 배는 눈에 띄게 불러왔다. 방광이 눌려서 그런지, 밤에 두세 번은 꼭 깨게 되었다. 그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잠에서 깨자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고유건... 아직도 안 왔어?’ 핸드폰을 집어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1시. 시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유건의 술자리가 잦은 편이긴 해도, 결혼 후 이렇게 늦게까지 집에 안 들어온 적은 거의 없었다. ‘전화해 볼까...?’ 망설이던 그녀는 이내 핸드폰을 내려두었다. 대신 조심스레 방을 나서, 복도를 따라 서재로 향했다. 서재 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문틈 사이로 은은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그 공간은 이 집에서 오직 유건만 드나드는 곳.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일 터였다. ‘이 시간까지 뭐 하는 거야... 자지도 않고.’ 시연은 문고리를 천천히 돌렸다. 사각거리는 조명 아래, 유건은 소파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테이블 위엔 반쯤 비운 와인병과 와인잔. 몸에서는 짙은 술 냄새가 풍겼다. ‘진짜 술꾼 같아...’ 취한 사람을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신 시연은 슬쩍 돌아서려 했다. 그 순간, 손목이 잡혔다.“여보.” 유건은 눈을 떴고,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날 보러 왔네? 걱정됐어? 보고 싶었어?” 그 웃음 속엔 왠지 모를 슬픔이 섞여 있었다. ‘왜... 저런 눈빛이지?’ “이렇게까지 마셨는데, 속은 좀 괜찮아요?” 시연은 코끝을 찌푸리며 물었다. “장소미 일 때문에 그래요? 불안해서...?”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소미의 일이, 유건을 흔들어 놓았을 가능성. “하...” 유건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피식 웃었다. “분위기 한번 잘 망치네.” 여긴 본가고, 둘은 부부였다. 유건이 붙잡은 손도 아내의 손. 그런데 이 타이밍에 시연이 굳이 다른 여자 이야기를 꺼내다니.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시연도 더
유건의 약속을 들은 시연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입을 열었다.“그럼... 사실대로 말할게요.” “처음에 계약 결혼을 수락한 건... 돈 때문이었어요. 우주 치료비가 필요해서.” “그리고 나중에 당신이 장소미의 남자친구라는 걸 알았죠... 이혼을 거부한 건, 복수였어요. 그 여자한테, 그 집안에... 복수하고 싶었어요. 그게 전부예요.”시연의 분홍빛 입술이 천천히 열리고 닫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유건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 ‘정말... 복수였어...’예전에 시연이 병실에서 그랬다. 유건이 누굴 사랑하든, 상관하지 않을 거라고. 그 말이 인제야 명확하게 유건의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그동안... 내가 느낀 시연이의 다정함은... 모두 연기였던 걸까?’‘아니,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까?’유건은 더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표정을 감췄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그런 방식으로 복수한다고? 좀 유치하지 않아?”“그렇죠, 유치하죠.”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하게 웃었다.‘결국 복수는커녕, 나 자신만 구역질 나게 했으니까.’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미안해요.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요. 이혼 안 해준 것도, 당신을 이용한 것도... 그건 분명 내가 잘못한 거니까요.”그 한마디가 유건의 가슴 깊은 곳에 단번에 불을 밝혔다. ‘‘그동안’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지금은... 나에 대한 감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걸까?’유건은 묻고 싶었다. 정말, 정말로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무서웠다.그런 유건의 망설임을 모른 채, 시연은 조용히 물었다.“이제 다 알았으니까... 어쩔 건데요? 이혼할 거예요?”“뭐...?”그 순간, 유건의 표정이 무너졌다.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 해도, 그 질문을 참을 수는 없을 터였다.‘이혼? 또 이혼? 이혼이 무슨 일상 대화야?’‘조금만 감정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면, 두 번째도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시연은 진심으로 무서웠다. 그리고... 또...‘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지...?’뭔가 꽉 막힌 듯한 느낌, 그리고 불쾌한 통증. 혹시 또 쓰러지기라도 할까 두려워진 시연은, 조용히 방으로 돌아가 누웠다. 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유건과 나눴던 대화가 계속 맴돌았다. 특히 복수 때문에 이혼을 거부했다는 말. 그 말은 진심이었다.깜깜한 어둠 속, 시연은 가슴에 손을 얹고 속삭였다. “그렇지만... 결국, 난 지키지 못했어.” ‘난... 마음이 움직였으니까.’‘사랑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좋아하게 돼버렸어.’ ‘내가 만든 덫에 내가 걸려든 거야. 자업자득이지.’그날 밤, 유건은 끝내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식탁에서 아침을 챙겨 먹었지만, 여전히 유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출근했나...?’ ‘어제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 두통도 없나 보네. 진짜 대단한 체력이다.’시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가방을 둘러매고 현관을 나섰다. 역시나 정기환이 대기 중이었다.“형수님.” 기환은 운전석에서 시연을 힐끔힐끔 보며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다.“왜요...?” 시연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할 말이라도 있어요?”“아니요... 그게...” 기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저한테 궁금한 거 없으세요?”“네...?” 시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없는데요? 왜요, 제가 뭘 물어야 하죠? 무슨 질문을 기다리는 거예요?”‘뭐야, 이건 또 무슨 희한한 대화야...’“아, 아니요... 그냥요. 하하.” 기환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조용히 운전대를 잡았다.강울대병원에 도착하자, 시연이 병동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기환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핸드폰을 꺼냈다. ‘이걸... 형님한테 뭐라고 보고해야
노은범이었다.“시연아.”시연보다 먼저, 은범이 담담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응, 오랜만이야.” 딱히 오래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은범은 또 눈에 띄게 말라 있었다. 매번 마주할 때마다, 그는 더 말라가고 있었다.‘왜 이렇게... 보기만 해도 마음이 복잡하지...?’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시연의 감정. 그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은범은 심재규 쪽을 힐끗 보더니, 늘 그렇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교수님이랑 아는 사이야. 근처에 볼일 있어서 잠깐 들른 거고. 이제 나가려던 참이었어.”‘정말 그게 다일까? 아니야, 분명 날 보러 온 거잖아.’하지만 시연은 굳이 그 사실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 그럼... 내가 배웅해 줄게.”“응, 좋아.” 두 사람은 마치 친구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함께 별산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은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배로 향했다. “많이 나왔네.”“응, 이제 슬슬 티 나기 시작했어. 4개월 지나고부터 눈에 띄더니,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 느낌이야.”“그래... 참 좋다.” 은범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문득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잘 지내? 그 사람은... 너한테 잘해줘?”시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든, 나쁘든... 이젠 내 몫이야. 너까지 이런 얘기 들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 너... 상태도 안 좋은데.’정문 앞에 다다랐을 때, 은범은 걸음을 멈췄다. “여기까지만 데려다줘. 곧 우주 수업이 끝날 시간이잖아. 이만 돌아가.” “응, 잘 가.”“잘 있어.”시연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은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온 후에도, 우주는 아직 수업 중이었다....심재규는 시연을 보자 바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오늘이 마침 노 사장님의 진료 날이었어
햇살은 눈부시게 쏟아졌고, 하늘은 한 점 구름 없이 맑았다. 농구 코트 위, 남자들의 구호와 땀방울이 어우러진 뜨거운 풍경 속, 관중석의 친구들이 장난스럽게 소리쳤다.“은범이 파이팅!” “은범이, 잘생겼다!”“오늘은 구경꾼도 많네! 은범아, 여자애들이 저렇게 많은데 한 명도 눈에 안 들어와?” “야야, 우리 은범이 여자 친구 있잖아.”“아, 그냥 농담이지 뭐... 여기, 여자 친구는 안 왔잖아?”“저기 ‘법대 퀸’, 너 좋아한 지 꽤 됐지? 아빠가 대형 로펌 대표래. 솔직히 네 여친보다 집안이 몇 배는 좋잖아. 솔직히 말해봐, 흔들리지도 않아?”“그래, 시대가 변해도, 결국은 ‘분수에 맞는 집안’이 최고잖아.”“야, 그만해.” 은범이 결국 참지 못하고 수건을 내팽개쳤다. “끝나고 밥도 없어. 다들 꺼져.”“뭐야?!”“오늘 은범이의 한턱 기대했는데...”“야야, 시연이 얘기 꺼낸 너 때문이야! 은범이가 시연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서 그러냐?”“오늘의 죄인은 너로 정했다!”농구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정리할 때쯤, ‘법대 퀸’이라 불리는 여대생이 다가왔다. 손에 시원한 음료를 든 채, 수줍은 미소를 띠며.“은범아, 이거...”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범은 그녀를 스치듯 지나쳐 버렸다. 남자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하고 있었다.등에 백팩을 멘 채, 린넨 원피스를 입고 햇살을 받으며 다가오는... 시연.“우리 여친 왔네!”“흥!” 시연은 콧소리를 흘리며, 은범의 시선을 따라 ‘법대 퀸’을 슬쩍 훑었다. “내가 좀... 타이밍이 안 좋았나 보네?”‘질투 날 수밖에 없잖아. 저렇게 예쁘고, 잘 어울리데...’“무슨 소리야! 나, 이제 막 경기 끝났어. 못 봤지? 나 아까 진짜 멋있었어.” 은범은 웃으며 시연의 손을 잡았다.그제야 시연도 입꼬리를 올렸다. “물 마실래?”시연이 내민 물병을 보자 은범이 반갑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는 장난스럽게 손을 뒤로 뺐다.“이건 그냥 물이야
차가운 면도날이 혈관을 스쳤다. 피가 터지듯 솟구쳤다.은범은 미동도 없이 그 광경을 바라봤다. 점점 창백해지는 얼굴. ‘이상하다... 오히려... 편안해.’ ‘이대로 피가 다 빠지면, 이제... 끝이겠지.’그는 서서히 의자에 앉았다. 팔을 세면대 안으로 걸치고, 마치 아무 일 없는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해방이란 게 있다면, 이런 거 아닐까?’‘죽음은 단지 긴 수면일 뿐이야.’ ‘두렵지도 않아...’그리고 점점 몸이 식어갔다.은범의 의식이 아득해지고, 생각은 흐릿해지고 있었다.그때, 어디선가 급한 발소리, 그리고 울먹이는 목소리.“은범아! 은범아!!”강수희였다. 피범벅이 된 아들의 손목을 보는 순간, 그녀는 그대로 무너졌다.“으아아악... 은범아...!”어머니의 얼굴 위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재빨리 떨리는 손으로 겨우 핸드폰을 꺼내 119를 눌렀다.“제발요, 제 아들이에요! 지금 피를 너무 많이 흘려요...” “여기... 제발, 빨리 와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제발...!!”...병원.“어떻게 된 거야?! 은범이는...!” 노수철이 숨을 헐떡이며 응급실로 뛰어들었다.“아직 수술 중이에요...” 강수희의 눈은 완전히 부어올랐고, 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우리 은범이가 왜...”“이모.” 조용히,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진성빈이었다. 은범과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가장 가까운 친구.“성빈이?” 노수철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삼촌.” 성빈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말, 싫어하실 거 알아요. 하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어요.” 강수희는 얼굴을 찡그리며 겨우 물었다. “무슨 말이든... 해줘, 제발.”“네...” 성빈은 잠시 말을 고르다, 이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이모, 은범이... 심각한 우울증 환자예요.”“뭐...?” 강수희와 노수철은 동시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