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밤 10시, 로얄호텔.지시연이 7203호 로얄 스위트룸의 호수를 확인했다.‘여기구나.’그 순간,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지동성이 보내온 문자 메시지였다. [시연아, 네 새엄마가 네가 진 사장을 잘 모시기만 하면, 바로 네 동생의 치료비를 주겠다고 약속했단다.]이 문자 메시지를 읽은 시연의 창백한 얼굴에 무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미 신경이 마비되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듯했다. 아버지는 재혼한 후, 시연과 동생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심지어는 계모가 10여년간 두 남매를 가혹하게 학대하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의식주를 마련해주지 않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때리고 욕하고 비난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지금까지 벌인 학대로도 모자라, 사업상의 빛 때문에 딸 시연이 남자랑 잠자리를 가지게 하다니...시연이 응답을 하지 않자, 지동성과 새엄마 장미리는 동생 지우주의 치료비를 빌미로 그녀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시연의 동생 우주는 자폐증을 앓고 있어서 치료를 멈출 수 없었다.호랑이도 자기 새끼는 건들지 않는 법이거늘... 지동성은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었다!시연은 동생 우주를 위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시연이 방문 앞에 선 채 깊은숨을 들이마셨고, 이내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그녀가 문고리를 살짝 돌리자, 스르륵 문이 열렸다. 방 안은 조금의 불빛도 없이 어두컴컴했다. 시연은 눈썹을 찌푸린 채 더듬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진 사장님, 저예요. 어...”갑자기 길고 우락부락한 팔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더니 벽으로 밀쳤다. 벽에 부딪힌 시연은 등에서 통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바로 이때, 남자의 거친 숨결이 순식간에 그녀를 휘감기 시작했다.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며 손으로 시연의 목을 조여왔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머릿속이 멍해진 시연은 이것이 도통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몰라요...” 그 남자는 시
시연이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을 때, 머리가 반쯤 벗겨진 뚱뚱한 중년 남자가 거실 소파에 앉은 채 장소미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작 별거 아닌 연예인 주제에 날 무시해?! 내가 너랑 결혼해 주겠다는데도 날 밤새워 기다리게 한 거냐고!” 소미는 간신히 굴욕을 참아냈다. ‘이 진 대머리가 이런 핑계로 여자를 농락한 게 어디 한두 번이야? 설령 저 사람이 정말 결혼을 원한다고 할지라도, 여자 입장에서 그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누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어?’‘하... 내가 얼마나 재수가 없었길래 저 남자의 눈에 띈 거야?’‘부모님께서는 나를 아끼는 마음에 지시연한테 대신 가라고 하셨지만...’‘지시연이 도망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장미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진 사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아이가 철이 없어서 그런 거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 지동성도 설설 기며 말했다. “맞습니다, 화 푸십시오, 진 사장님.”“화를 풀라고?”진광수는 분노를 삼킬 수 없었다.“웃기는 소리! 장소미 씨가 원하지 않는 이상, 나도 억지로 할 생각은 없어! 그냥 파산하고 감옥에 갈 준비나 하는 게 좋을 거야!” 몸을 일으킨 그가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가려다가 시연과 정면으로 부딪쳤다.진광수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느 집 계집애길래 이렇게 예쁜 거지?’ 시연은 화장기가 없는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청아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탄력 있는 피부를 뽐내고 있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짙은 이목구비를 가진 전형적인 미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가씨는 누구?”시연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진 사장이구나.’ ‘어젯밤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그 남자가 훤칠한 키에 탄탄하고 힘 있는 근육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어. 눈앞의 이 사람은 절대 아니었단 말이지!’ ‘우리 우주를 위해서 존엄과 순결을 바쳤는데... 상대를 잘못 찾았던 거야?’ ‘하긴... 지금 생각해 보니까 어젯밤의 그
“고 대표님.”진광수가 갑자기 행동을 멈추었는데, 상업계에 관련된 사람이라면 고유건을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유건은 진광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눈물을 줄줄 흘리는 장소미를 응시하였다.‘저 여자가 바로 어젯밤에 내 품에서 간드러지게 신음하던 여자라는 거지...?’그가 갑자기 손을 들어 거센 힘으로 진광수를 바닥에 뒤집어엎었다. “으악!”진광수가 갑자기 피가 잔뜩 문득 이빨 하나를 뱉어냈다. 이 광경을 본 지동성의 일가족은 겁에 질려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유건은 얇은 입술로 조롱의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그의 말투는 얇고 예리한 칼날 같았다.“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진광수는 처절한 모습으로 땅에 엎드려 입을 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고 대표님, 정말이지 장소미 씨가 고 대표님의 여자인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건드린 적도 없지만요. 정말입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그의 말을 들은 유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미를 바라보았다.“확실해요?”소미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네, 확실해요...”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고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진광수가 헐레벌떡 저택을 뛰어나갔다. 지동성 일가가 분분히 서로를 마주 보던 찰나, 유건이 허리를 숙여 소미를 일으켜 세웠다.그는 부드러운 손끝으로 소미의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주었다. “왜 울어요? 겁낼 거 하나도 없어요.”“내가 있으니까 아무도 소미 씨를 건드릴 수 없을 거예요.”약간은 허스키하고 저음인 목소리를 들은 소미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저를 아세요?”“어젯밤에...”이 말을 뱉는 유건의 말투는 아주 부드러웠다.“로얄호텔 7203호실, 소미 씨와 나, 이제 알겠어요?”‘어젯밤?’‘로얄호텔?’‘나와 이 남자?’ 지동성 일가는 말이 막힐 정도로 놀랐다.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동시
시연은 유건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결혼은 장난이 아니었다.그녀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죠? 그냥 어르신을 잘 설득해 보시는 게...”하지만 시연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유건이 말했다. 그는 안색이 변하지 않은 채 평온한 어투를 유지하고 있었다. “계약 결혼 조건으로 보상도 해줄게요, 돈으로요.” ‘금전적인 보상을 하겠다고?’멍해진 시연은 차마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우리 우주는 아직도 치료비를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고씨 저택을 찾아간 이유였지.’ 시연이 흔들린다는 것을 알아차린 유건이 계속해서 말했다. “지시연 씨가 원하는 대로 드릴게요.” 시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게 할게요.” 눈을 흘기는 유건의 눈동자에는 차가운 조롱이 서려 있었다. ‘고작 돈 때문에 결혼을 결심하다니, 정말 보잘것없는 여자잖아?’‘하지만 오히려 좋아, 앞으로도 다루기 쉬울 테니까.’ “그럼 합의서는 내가 준비할게요. 내일 아침, 신분증과 필요한 서류를 들고 구청으로 오세요!”“네.”이튿날 아침, 시연은 구청 입구에서 유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밤새 잠을 잘 자지 못했기 때문에 유건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 머리가 멍한 상태였다.하지만 바로 그때, 유건이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을 본 시연이 억지 미소를 지었다. “고유건 씨.”하지만 유건은 시연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얼른 따라와요!”“아, 네.”절차는 빠르게 끝났는데, 혼인관계증명서를 손에 쥔 지시연은 왠지 마음이 복잡했다. ‘생존을 위해 몸을 파는 것도 모자라서, 결혼까지 하다니...’ 구청의 입구에는 차 두 대가 세워져 있었다. 유건이 뒤에 있는 차를 가리키며 말했다.“타요, 기사님이 집까지 데려다 줄 거예요.” 그는 곧장 앞에 있는 차로 향했다. “형수님.”주지한은 지시연에게 다가가 카드 한 장을 건네주었다. “형님께서 주신 겁니다.”‘바라던 바
비틀거리던 시연은 하마터면 똑바로 서지 못할 뻔했다. 방금 고상훈의 검사를 마친 의사가 유건을 향해 말했다.“고 대표님, 오셨습니까. 고 어르신께서는 아무 문제가 없으십니다만, 조금 허약하셔서 충분한 영양 섭취와 휴식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어르신께서 자극받지 않도록 주의하시고, 좋은 기분을 유지하도록 하셔야 한다는 겁니다.”의사는 이 말을 마치고 병실을 떠났다.고상훈은 반쯤 누워서 손을 흔들었다.“유건아, 그리고 시연아, 너희는 오늘 혼인신고를 했잖니... 행복한 신혼 밤을 보내지는 못할망정, 이 할아버지를 보러 오면 어쩌겠다는 게야.”“어르신.” 시연이 손에 땀을 쥐며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고상훈이 조금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아직도 나를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게야? 그리고, 대체 뭐가 죄송하다는 게야?” “저는...”유건이 그녀의 손목을 거세게 쥐었다.“할아버지께서 아직 입원 중이신데, 저희 두 사람이 행복한 신혼 밤을 즐길 수 있겠어요. 그리고 시연 씨는 할아버지의 뜻을 어길 수밖에 없어서 죄송하다는 거고요.” 시연은 매우 놀랐다.‘왜 나의 민낯을 폭로하지 않으려는 거지?’ “하하, 역시 시연이는 참 착한 아이구나.” 고상훈이 활짝 웃었다.“얼굴 봤으니 됐다. 의사 선생도 괜찮다고 했고... 여기에는 의사 선생과 간호사들이 있을 테니, 너희는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거라. 너희 둘만 괜찮다면 나는 너무 기쁘단다. 유건아, 오늘은 네가 좀 주동적으로 행동하려무나.” “네, 할아버지, 그럼 푹 쉬세요.”시연의 손을 잡은 유건이 병실을 나섰다. 하지만 다정한 모습은 잠시일 뿐, 유건은 병실을 나오자마자 시연을 뿌리쳤고, 두 손가락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충분한 안정이 필요하시니까 당분간은 사실을 숨기는 게 좋겠어.” ‘할아버지께서 결혼을 종용한 여자가 이런 여자였다는 걸 알게 되신다면, 당장이라도 화병이 도지고 마실 거야.’ 유건이 말하지 않아도 시연은
병실 안.우주는 환자복을 입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이미 국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그뿐만 아니라 머리카락과 얼굴에도 밥반찬과 국물이 묻어 이목구비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중년의 간병인이 숟가락을 들어 우주의 입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먹어! 빨리 먹으라니까?! X신 같은 놈, 입도 못 벌리다니! 이 개돼지만도 못한 X! 아...” 갑자기 머리카락이 힘껏 뒤로 당겨진 그녀가 돼지 울음소리 같은 소리를 내었다. 그녀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어떤 정신 나간 새X야?! 너, 내가 누구인지 알아?!” “허, 당신이 누군데요?!”눈이 빨갛게 달아오른 시연은 온몸에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당신이 뭔데 내 동생을 때려?! 입만 열면 천박한 말을 내뱉는 주제에 왜 어린아이를 괴롭히냐고! 이 아이의 가족이 다 죽고 없는 줄 아는 거야?!” 시연이 더욱 팽팽하게 머리카락을 잡아당기자, 그 간병인은 두피가 벗겨질 것 같았다. “아파, 아프다고! 이거 놔!”간병인은 전형적으로 약자를 업신여기고 강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벌벌 떨며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그래요, 잘못했어요, 잘못했다고요!” 시연은 손을 놓으며 간병인을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닥치는 대로 도시락을 들고 간병인의 입에 음식을 쑤셔 넣었다. “당신, 이렇게 억지로 먹이는 거 좋아하잖아? 당신도 당해봐!” “아, 아...”철제 숟가락은 간병인의 입을 거의 베어버릴 지경이었다. 간병인은 말하지 못하고 손짓으로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연이 어떻게 그녀를 가만히 둘 수 있겠는가. 찰싹!시연이 손을 들어 간병인의 뺨을 한 대 때렸다.“방금 내 동생을 이렇게 때렸지? 때리니까 속이 시원했니? 그런데 어쩌지? 이제 내가 배로 돌려줄 건데!” 찰싹, 찰싹, 찰싹!몇 번의 따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간병인이 숨을 채 고르기도 전에 시연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가자, 당장 병원장님을 만나야겠으니까!”“안 돼요, 제발!
강렬한 직감을 느낀 시연이 되돌아가자, 지씨 저택 앞에는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곱게 한 장소미가 나와 있었다. 차 문이 열리고, 차에서 내린 고유건이 손에 든 꽃다발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붉은색의 아름다운 장미는 남자의 열정적인 사랑을 대신하는 듯했다. “너무 예뻐요.” 꽃다발을 받은 소미가 환하게 웃으며 유건의 팔을 잡았다. 유건은 신사처럼 차 문을 열어 소미를 조수석에 태웠고, 그렇게 두 사람은 지씨 저택을 떠났다. 차가 지나가자, 등을 돌린 시연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듯했다.‘장소미가 오늘 밤에 있다던 중요한 약속이 고유건과의 약속일 줄이야!’ ‘고유건은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 말했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던 거야?’ ‘게다가 그의 여자 친구가 장소미인 거고?!’ ‘장소미한테 고유건 씨 같은 남자 친구가 있다는 걸 알면, 지씨 일가는 꿈에서도 웃음이 나겠지?’‘그런데 어쩌지? 내가 먼저 알게 되었는걸.’ ‘이건 하늘이 내게 준 기회나 다름없어!’ 시연이 말없이 두 손을 꼭 쥐었다.‘왜 지씨 일가는 잘만 사는데, 나랑 우주는 진흙 속에서 발버둥 쳐야만 하는 거야?!’‘절대 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두지 않을 거야!’ 가로등 아래, 시연의 그림자가 매우 길게 뻗어져 있었다. ...나무 식탁 위의 촛불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고급 도자기 식기, 은으로 된 나이프와 포크는 어느 것 하나 정교하지 않았고,병풍 뒤에서는 악단이 잔잔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유건과 소미는 마주 앉아 있었는데, 유건이 먼저 소미에게 와인 한 잔을 따라 주었다.“상황이 좀 달라져서 곧바로 이혼할 생각이에요. 절차는 이틀 후에 진행할 것 같아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올린 소미의 눈동자에서는 기쁨의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녀는 곧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흘리려 했다. 유건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왜 울어요? 기분이 안 좋은 거예요?” “아니요.”소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울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려고 애썼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