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울대학교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시연은 차 문을 열고 내리려 했다. “시연아.” 유건의 잘생긴 얼굴에 약간의 불안함이 비쳤다. “나, 할 말이 있어.” “지시연!” 앞쪽에서 이미 누군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결심한 듯 말했다. “지금은 일하러 가야 하니까, 일 끝나면 그때 얘기 들어줄게요.” 잠시 멈추고 나서 덧붙였다. “그리고, 나도 고유건 씨에게 할 말이 있어요.” 유건의 깊은 눈빛이 순간적으로 밝아졌다. “좋아.”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시연은 차에서 내려 동료들과 함께 부상자의 등록과 이송을 돕기 시작했다. 그녀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유건은 미소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시연이도 나와 같은 말을 하려는 걸까?’ ... 모든 부상자들의 입원 절차가 끝난 후, 시연은 비로소 잠시 쉴 수 있었다. “지 선생님, 어서 가서 식사하세요! 오늘 도시락이 정말 맛있어요!” ‘정말?’ 시연은 웃으며 도시락을 받으러 갔고, 확인해 보니 정말 맛있어 보였다. ‘가을’에서 만든 도시락이었다. ‘G시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 레스토랑인 가을에서 만든 도시락을 외부로 배달하다니, 오늘 병원에서 엄청난 투자를 한 모양이네.’ 밥, 반찬, 그리고 국까지, 모두 개별 포장되어 있었으며 과일도 함께 제공되었으며,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시연은 도시락을 먹으면서 핸드폰을 꺼내 들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에헴!” 첫 번째로 보인 것은 유건이 보낸 메시지였다. [도시락 맛있어?] ‘뭐?’시연은 곧바로 이해했다. 이 도시락은 모두 유건이 시연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그렇지, 병원이 이렇게까지 신경 썼을 리가 없지.’ ‘하지만 고 대표님은 돈이 많으니 어렵지 않겠지.’ [왜 답장 안 해? 아직도 못 쉬고 있나? 바쁜 거야?] [지시연, 네 몸을 항상 먼저 생각해. 너무 무리하지 마!] ‘이 남자는 이미 살짝 화가 난 것
장소미가 고유건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다. “유건 씨, 이 며칠 동안, 저도 많이 생각해 봤어요. 도저히 당신을 포기할 수가 없어요...” 유건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짙은 미간을 찌푸리며 무력하게 말했다. “소미 씨...” 그 두 글자를 들은 시연은 갑자기 뒤돌아서서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기환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시연을 보고 깜짝 놀랐다. 특히 그녀의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았다. “시연 씨, 무슨 일이에요?” 시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지만, 그 웃음은 눈까지는 닿지 않았다. “제가 온 타이밍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고 대표님이 아주 바쁘신 것 같으니, 먼저 가볼게요.” 그녀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다녀간 건 굳이 말할 필요 없을 것 같아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급히 자리를 떠났다. 시연은 이곳에서 한순간도 더 머무를 수 없었다. 불과 몇 분 만에 현실은 그녀에게 잔인하게 알려주었다. 병원에서 서둘러 온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그저 유건과의 애매한 관계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고, 진짜 부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내가 잊었지... 고유건에게는 이미 장소미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내가 지금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품고 있는 몸인데, 고유건이 무슨 이유로 이런 나를 좋아하겠어?’ 시연은 유건의 회사 건물 밖으로 뛰쳐나오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야 눈물이 흐르지 않을 것 같았다. 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유건은 소미를 밀어내며 말했다. “소미 씨, 미안하지만, 지금 내 상황에서 당신에게 아무런 약속도 해줄 수 없어.” 소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졌다. 그녀는 감정이 폭발한 듯 소리를 높였다. “저 정말 기다릴 수 있어요! 유건 씨, 나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예요?” “소미 씨...” “그만 말해요!” 소미는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유건은 시연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유건의 전화를 전혀 받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하자, 시연은 의료팀과 함께 물품을 정리하고, 차에 싣고 출발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원래 그녀는 마지막 차로 떠나려 했으나, 이제 그럴 필요도 없었다. 시연의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유건의 이름을 보자, 시연은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꿨다. 그 순간, 유건은 차를 몰고 병원으로 들어왔지만, 이미 첫 번째 의료 차량이 출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여기 주차하시면 안 됩니다. 중앙 주차장으로 가세요.” 유건은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서둘러 응급실로 향하며 물었다. “지시연 선생님 계신가요?” 접수대의 간호사는 시연과 친분이 있었다. “지 선생님이요? 방금 의료지원 차량과 함께 떠났어요.” “떠났다고요? 언제요?” “저기요!” 간호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출발한 저 차요...”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건은 벌써 달려 나갔다. “시연아! 지시연!” 막 출발한 차량은 병원 문을 막 나섰고, 차의 속도는 아직 빠르지 않았다. 차 안에서는 누군가가 차를 쫓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어? 저 사람 우리 차를 쫓아오는 거야?” “당연하지! 엄청나게 빨리 달리잖아!” “오, 키가 크네. 최소 190cm는 되겠어. 정말 잘생겼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다들 한 번 봐봐. 저 사람은 누구를 쫓아오는 거야?” “맞아, 맞아. 일단 모두 일어나서 누굴 쫓는지 알아보자고. 뭔가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차 안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운전기사도 일부러 속도를 늦췄다. 하지만 시연만은 차에 오르자마자 음악을 틀고 이어폰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차 안의 소란을 전혀 알지 못했다. 차가 병원을 빠져나가 큰길로 들어서려 할 때, 운전기사가
“설마 우리 우주를 위해서?” 시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물론이지.] 은범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와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킬 거야.] 시연은 이 일이 우주에 관한 것인 만큼 더는 따지지 않았다. “그럼 도착하면 전화해.” [알겠어.]전화를 끊고, 은범은 미소를 지었다. 비록 시연이 우주 때문에 연락을 받았을 뿐이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시연이 자신을 의지하게 만들고, 결국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 비는 점점 더 굵어졌다. 진아는 문 앞에 서 있는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쏟아지네.” 그러더니 진아도 궁금한 듯 물었다. “누구 기다리는 거야? 너 정말 남편 기다리는 망부석처럼 보이는데...”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시연이 뒤돌아보며 대답했다. “나 좀 나갔다 올게.” 시연은 1층 공터로 내려갔고, 그곳에서는 은범이 차를 세우고 문을 열고 나오는 중이었다. 시연은 그를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됐어?” 은범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젖어 있었고, 얼굴과 옷에는 진흙이 잔뜩 묻은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은범은 웃으며 대답했다. “오는 길에 타이어가 터져서 타이어를 갈아 끼우느라 이렇게 됐어.” 시연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 내 잘못이야.” “그렇게 말하지 마.” 은범은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진 걸 보고 말렸다. “내가 창우면에 오지 않았다 해도 타이어는 터졌을 거야.” 그는 시연의 뒤를 힐끗 보며 말했다. “나 안으로 들어가도 돼?” “아, 맞다!” 시연은 그를 손짓해 재촉하며 말했다. “어서 들어와!” “그래.” 시연은 그를 따라 2층으로 데려갔다. “여기는 병원 직원 숙소야. 좀 낡고 허름하지만, 화장실이 있으니까 샤워는 할 수 있어.” 말을 나누며 두 사람은 시연의 방에 도착했다. 시연은 문을 열며 말했다. “나랑 진아는 한방을 써.”
문이 열리자, 노은범의 부드럽고 우아한 얼굴이 드러났다. 방금 샤워를 마친 그는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고, 상체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서 있었다. 하체는 시연이 방금 김현진에게서 빌린 널찍한 운동복 바지만 입고 있었다. 유건은 그를 가만히 응시하며,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 대표님.” 은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신 걸 보니, 시연이 찾으러 오셨나 봅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공기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은범은 말했다. “시연이 지금 욕실에 있어요.” 그는 이 말에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남자의 직감으로, 은범도 유건이 시연에게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유건은 단순히 시연의 환자가 아니었어...’ 유건의 얼굴은 무표정하고 차가웠다. 지금 이 상황은 그를 화나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유건은 억누르고 있었다. 그는 그저 낮게 말했다. “시연이 어디 있지? 직접 만나야겠어.” “은범아, 누구야?” 바로 그때, 시연이 나와 은범의 어깨 너머로 이쪽을 보며 걸어왔다. 유건은 은범을 무시하고, 시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유건 씨?” 시연은 놀라며 물었다. “여긴 왜 왔어요?” ‘이 남자는 조금 전까지도 장소미와 함께 있던 게 아닌가? 두 사람이 끌어안고 있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따라와.” 유건은 시연의 손목을 잡고 이끌려 했다. 그러나 은범이 유건을 막아섰다. “고 대표님, 이 손 놓으세요.” 그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퍼져나갔다. 유건은 비웃으며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 시연에게 물었다. “나랑 갈 거야, 말 거야?” 시연은 갈등을 피하기 위해 말했다. “은범아, 고 대표님과 몇 마디만 하고 올게. 걱정하지 마.” 시연이 이렇게 말하자, 은범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놓아주며 당부했다. “만약에 너를 괴롭히면 바로 소리 질러.” “알았어..
GP그룹 회의실. 주지한은 서류 폴더 하나를 펼쳐 유건 앞에 놓았다. 최근 GP그룹에서 추진 중인 프로젝트에 기술 협력 파트너가 필요한데, 현재까지 적합한 후보가 없는 상태였다. 이번에 제출된 것은 두 번째 후보군이었다. 유건은 한눈에 서류를 훑었다. [HUA테크, CEO 겸 총괄 엔지니어, 노은범]유건의 손가락이 ‘노은범’이라는 세 글자를 톡톡 두드렸다. 지한이 말했다. “형님, 노은범은 비록 최근에 귀국했지만, 해외 유학 시절 뛰어난 성과를 냈고, 여러 번 과학 기술상을 수상한 인재입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노은범은 매우 드문 전문가였다. 유건은 사업가이자 남자였다. 사업상의 문제를 감정과 잘 분리했고, 또한 사적인 감정으로 인해 일을 그르치지 않았다. “좋아, HUA테크와 절차를 진행해.” 저녁에 유건은 부지하 등과 술자리 약속이 있었다. 유건은 노은범에 관해 이야기하며 물었다.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있어?” “노씨 가문의 도련님 말이지.” 주정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그거 못 들어봤어? 사람들이 G시 제일 미남이라고 평가했잖아.” 유건의 머릿속에 노은범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유건조차도 은범이 그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지시연은 노은범의 외모에 반한 거야?!’ 유건은 무의식적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답답한 숨을 내쉬었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너 여자냐? 누가 외모 얘기를 물었어?” “그럼 뭘 묻는 건데?” 유강석은 웃으며 말했다. “은범 도련님은 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고, 별다른 나쁜 습관도 없어. 너처럼 남녀 관계도 깨끗하고...” 하지만, 그도 말을 돌려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너는 예전 얘기고, 지금은 본처와 첩을 두 손에 잡고 있는 상태잖아!” 유건은 침묵했다. ‘결국 노은범이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었던 거야?’ ‘좋네.’ ‘지시연도 눈이 멀진 않았고, 원하
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힘차게 두근거리는 심장은 그녀의 진심을 속일 수 없었다. 전혀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얼마 되지 않는 만큼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누군가 시연에게 친절을 베풀면, 그 작은 호의조차도 그녀는 감사하게 여기며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남이 자신에게 베푼 작은 호의를 열 배로 갚으려 했다. ... 강울대학교병원을 나선 시연은 고씨 가문의 본가로 돌아갔다. 고상훈은 매우 기뻐하며 곧바로 유건에게 전화를 걸었고, 시연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며칠 동안 네가 없어서 그런지, 우리 유건이도 뭘 그렇게 바쁜지 하루 종일 얼굴을 못 봤어. 마침 잘 됐어, 저녁에 같이 밥을 먹자.” 그러나 전화를 걸자, 유건은 말했다. [할아버지, 저 바빠서 못 돌아갑니다.] “뭐가 그렇게 바빠?” 고상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을 것 아니냐? 더군다나 시연이가 출장 갔다가 일주일 만에 돌아왔는데...” [할아버지, 회의가 있어서 이만 끊을게요.]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고상훈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런 고얀 것! 정말 무례하군!” “할아버지.” 시연은 속으로 알고 있었다. 유건이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화내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오늘 저녁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할아버지랑 밥도 먹고, 같이 바둑도 두고, 불경도 읽어드릴게요. 괜찮죠?” “좋지, 좋지.” 순식간에 고상훈은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그날 저녁, 유건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시연은 소파에서 눈을 떴다. 그때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고유건이 돌아왔나?’ ‘침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니, 아마 아침에 돌아온 것 같네.’ 물소리가 멈추고, 유건은 욕실에서 나와 곧바로 옷방으로 들어갔다. 마치 그녀를 보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정
유건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빛이 어두워졌다. “맞아. 왜?” “감사해요.” 시연은 그를 바라보며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 감사해요. 어릴 때부터 저에게 잘해준 사람은 거의 없었거든요.” 유건은 가슴속이 찌릿하게 울리며, 그 느낌이 온몸에 퍼졌고, 겨우 입꼬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흥, 그래.” “그런데...” 시연이 무언가 더 말하려 했으나,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현진아? 내 친구 외투가 너에게 있다고? 알았어... 아, 그리고 아직 너한테 고맙단 말도 못 했네. 그날 밤, 내 친구를 위해 침대를 양보해 줘서 고마워. 너무 늦었고, 비까지 쏟아져서 호텔을 못 잡았거든. 너 주사실에서 자느라 아주 피곤했지? 나중에 밥 한번 살게.” 시연은 통화하면서 유건에게 지하철역을 가리키며 자신이 바쁘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고는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뛰어 들어갔다. “천천히 가!” 유건은 그녀가 그 말을 들었는지 확신하지 못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는 결국 올라가고 말았다. ‘이 여자가 결국 나한테 고마워하고, 내 마음을 알고 있었네!’ 게다가, 방금 시연이 전화에서 말한 내용을 유건도 아주 분명히 들었다. ‘그날 밤, 비가 쏟아지던 날, 그건 바로 노은범이 왔던 날이 아닌가?’ ‘이 여자는 노은범과 같은 방에서 자지 않았어!’ ‘이게 뭘 의미하는 거지? 그러니까 노은범은 지시연을 버렸었고, 두 사람은 아직 화해하지 않은 상태이야! 흥!’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마음속 깊이 감추고 있는 생각을 들키지 않으려 했다. 아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 태산요양병원. 은범과 시연은 문 앞에서 서 있었다. 방 안에서는 CA국에서 온 전문가들이 우주를 검사하고 있었다. 시연은 불안한 마음으로 손을 꼭 쥔 채 떨고 있었다. “시연아.” 은범은 시연의 옆에 서서,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