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노은범은 GP그룹에 갔다. HUA테크는 GP그룹의 요구에 따라 절차를 밟았고, 오늘은 고유건을 만나러 온 날이었다. 유건의 비서가 은범을 작은 회의실로 안내했고, 은범이 막 자리에 앉자 유건이 도착했다. 은범은 일어나 인사했다. “고 대표님.” “노 사장님.” 유건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악수했다. “앉으세요.” 두 사람은 짧은 인사 후 바로 협력에 대해 자세히 논의했다. 유건은 은범의 능력에 매우 만족했고, 바로 계약을 결정했다. “협력하게 되어 기쁩니다.” “저야말로 고 대표님께서 저희를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협력 잘 부탁드립니다.” 관례에 따라 저녁에는 식사 자리가 마련되었다. 유건이 초대했다. “노 사장님, 저녁 식사 같이하시죠?” 은범은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고 대표님의 초대에 감사드립니다만, 잠시 후에 일정이 있어서 오늘 저녁엔 G시에 있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다음에 제가 장소를 정해서 고 대표님을 초대하겠습니다.”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은범이 떠나자마자, 유건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늘은 금요일인데, 노은범이 저녁에 G시에 없다고? ‘CLOUD’는 G시 밖에 있는 곳이야. 시연도 오늘 저녁에 떠난다고 말했는데... 그러니까 이 여자는, 노은범과 함께 놀러 가는 거야?!!!’ 핸드폰이 울리자 유건은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빨리 말해!” 부지하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렇게 거칠게 나올 것까진 없잖아! 누가 너 건드렸어? 저녁에 우리랑 같이 안 갈 거야?] 유건은 불쾌한 기분에 답했다. “너희들이랑 술 마시고 카드 게임하는 게 그렇게 재밌겠냐?” 지하는 웃으며 물었다. [그럼, 고 대표님. 뭐가 재밌는지 말씀해 보시죠?]유건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휴가 가자. CLOUD가 좋겠군.” ... 은범은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시연보다 일찍 도착한 유건 일행은 이미 말을 타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주정빈과 유강석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고, 유건은 시연을 주시하며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를 본 부지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왜 갑자기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말을 타자고 하나 했더니, 알고 보니 여기 우리 고 대표님의 아내가 계시네.” 유건은 지하의 농담에 신경 쓰지 않고,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다 멈췄다. 지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 아내가 방이 없어서 곤란해하는 거 보고도 안 도와줄 거야?” ‘도와주라고?’ 유건의 입술에 미소가 살짝 번졌지만, 곧 자리를 떴다.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옆에 딴 남자가 이미 있지.’ “시연아.” 그때, 은범이 차를 주차하고 시연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시연은 입을 삐죽 내밀며 방을 예약하지 못한 일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걱정하지 마. 작은 문제야.” 은범은 우주를 그녀에게 맡기고 말했다. “내가 해결할게. 걱정하지 마.” 그가 나서자마자, 문제는 금세 해결되었다. 은범은 두 장의 방 키를 들고 시연에게 흔들며 말했다. “다 됐어.” 그는 짐을 들고 설명했다. “내가 VIP 카드가 있어서 사전 예약 없이도 가능해.” 시연이 여전히 입을 삐죽 내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은범은 부드럽게 말했다. “왜 화가 나 있어?” 시연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성빈이도 못 오게 됐어...” 알고 보니 그 일 때문에 화가 난 거였다. “괜찮아.” 은범은 미소 지으며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우리는 우주를 위해 온 거잖아. 우주가 기뻐하는 게 가장 중요해. 나머지는 사소한 문제야.” 시연은 그의 말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미소를 지었다. “응.”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분위기가 훈훈했다. “우주 손 잘 잡고, 방에 짐부터 놓으러 가자.” “그래.” 이 광경을 목격한 지하는 깜짝 놀라며 유건을 쳐
그 순간, 시연은 유건의 눈빛 속에 순식간에 지나가는 감정을 알아차렸다.‘아마 내 착각이겠지.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내가 할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아...’ 유건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뭔데?” 남자의 커다랗고 잘생긴 얼굴이 눈앞에 다가오자, 시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잠시 후,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시선을 고정하고 입을 열었다. “저한테 더 이상 잘해주지 마세요.” 예전에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감정이 오갔던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시연도 한때 잠깐 유건 때문에 흔들렸었지만, 현실이 그녀를 깨우쳐주었다. ‘이 남자는... 장소미 남자 친구야.’‘내가 이혼하지 않는 건 단지 장소미 일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잖아!’ ‘그런데도 만약 내가 이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면, 결국 상처받는 건... 결국 나인데...’ ‘그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야. 그런 실수는 하면 안 돼.’ “뭐라고?” 유건의 미소가 사라지고, 눈빛이 어두워졌다. “무슨 뜻이야?” 시연은 고개를 조금 숙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날 지하철역 입구에서 하려다 못한 말인데요... 오늘 제대로 말할게요. 앞으로 저한테 잘해주지 마세요. 조금이라도요. 저... 저한테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시연의 머리 위에 늘 떠 있다가 언젠가 떨어질 것 같던 위태로운 칼이 드디어 떨어진 듯했다. 비록 자기 몸에 닿아 아프긴 했지만, 더는 그 칼이 떨어질까 늘 불안해하며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는 알 수 없는 해방감도 있었다. ‘나는 받은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이 사람이 계속 나한테 잘해주면 자꾸 이 사람이 장소미의 남자 친구라는 사실을 잊게 되고...’시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왜냐하면, 자꾸 잘해주시면 제가 그 은혜를 꼭 갚아야 할 것 같아서요.” ‘하.’ 유건이 소리 없이 코웃음을 쳤다. ‘갚아? 갚긴 뭘 갚겠다는 거야?’
“뭐?” 유건은 갑자기 몸을 돌려 잔디밭 위의 가녀린 여자를 응시했다. 점점 더 찌푸려지는 남자의 눈썹... ‘진짜 울고 있잖아!’ 그는 뒤에 있던 정기환에게 눈짓했다. “가서 물어봐. 무슨 일인지.” “네, 형님.” ‘젠장!’ 유건의 시선은 은범의 두 손이 시연의 어깨 위에 놓인 모습을 정확히 잡아냈는데, 가슴속 깊은 곳에서 두 갈래의 불길이 치솟는 기분이었다. ...“다 내 잘못이야.” 은범은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얼굴로 말했다. “우주를 잘 봤어야 했는데... 내가 방금 이곳 매니저랑 얘기했어. 지금 우주를 찾고 있다고 했어.” 알고 보니, 아까 시연이 우주와 은범이 한참 뛰어다니는 걸 보고 잠깐 쉬라고 불렀지만, 신나게 놀던 우주는 쉬는 것을 마다했고, 은범이 물 한 모금 마시는 사이에 우주가 사라진 것이다. 시연은 걱정이 가득했지만, 이 일이 은범의 잘못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책하며 말했다. “네 잘못 아니야. 나 때문이야. 우주가 특별한 상황인데도 내가 방심했어. 내가 누나로서 제대로 돌보지 못했어...” 우주는 여느 아이들과는 달랐다. 여기에 지형도 낯설어 시연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여기서 기다릴 수 없어. 나도 찾아볼게!” “시연아!” 은범은 그녀를 막아섰지만, 이내 말했다. “내가 같이 갈게.” “그래, 여러 사람이 함께 찾을수록 더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 ...기환은 곧 상황을 알아내 유건에게 보고했다. “형님, 우리도 같이 찾아야 할까요?” 이 일을 몰랐다면 상관없겠지만, 알게 된 이상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시연의 ‘더 이상 잘해주지 마세요’라는 말이 유건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렇게 말했는데도 이런 상황에서 자기를 돕는 내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겠지.’ 유건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무 말도 하기 전에, 지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걸 묻냐? 잃어버린 게 너희 형님의 처남이라고! 찾는
‘아이를 지울 수 없었던 건, 언젠가 세 식구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핸드폰 벨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유건이 전화를 받으며 짧게 말했다. “곧 도착한다.” 잠시 멈춘 뒤,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노은범에게도 연락해.” [형님, 그게...]기환은 잠시 망설였다. [지하가 분명 이번 기회에 형님이 시연 씨에게 점수를 딸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형님,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요.] 하지만 유건은 참을성이 없었다. “뭐야? 두 번 말해야 알아듣겠어?” [아닙니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전화를 끊고, 유건이 곧바로 마장 뒤편으로 향하고 있을 때, 가는 길에 은범과 마주쳤다. “고 대표님.” 은범은 특유의 차분하고도 점잖은 얼굴로 물었다. “방금 전화, 고 대표님 쪽에서 온 건가요?” “네.” 유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한 후,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대체 무슨 일이야?’ 은범은 더욱 의아했다. ‘고유건이 여기에 왜 있는 거지? 게다가 시연이랑 관련된 일에 이렇게 적극적이라니. 둘 사이가 정말 단순히 환자와 의사 사이가 전부일까?’ ...승마장 뒤편의 인공 숲.지금 우주는 숲속의 바위 위에 갇혀 있었다. 알고 보니, 연을 날리던 중 바람이 너무 강해 연이 숲속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우주는 고집스럽게 연을 찾으러 숲으로 들어갔고, 결국 바위 위에 걸린 연을 발견했다. 문제는 바위 위로 올라가는 건 쉬웠지만, 내려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유건이 도착했을 때, 우주는 연을 품에 안고 바위 위에 앉은 채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래에서는 정민환과 정기환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대치 상태를 이어가고 있었다. “왜 안 끌어내리고 있어?” 유건이 묻자, 민환이 난감한 표정으로 답했다. “형님, 이 아이는 도무지 대화가 안 돼요. 가까이 가기만 해도 소리를 지르면서 발버둥 칩니다. 못 믿
민환과 기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유건을 바라보았다.‘이렇게 가버린다고? 시연 씨가 오기 전에 점수 딸 기회를 이대로 그냥 날려버린다고?’ “노은범 씨.” 유건은 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시연 씨에게 이 일 말하지 마요.” 말을 끝내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입가에는 희미한 쓴웃음이 스쳤다. ‘그 사람... 내게 잘해주지 말라고 했으니까, 굳이 내가 우주를 구한 사실을 알 필요도 없지.’ ...“우주야!”시연은 전화를 받고 급히 달려가던 중 은범을 만났다. 은범의 등에 업힌 우주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시연은 간단히 우주의 상태를 확인하고, 다행히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은범아, 정말 고마워. 이번 일로 괜히 너에게 폐를 끼쳤네.” 은범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준 데다, 예상치 못한 상황까지 자신을 위해서 해결해야 하니까 시연은 은범에게 아주 미안했다. 은범은 입을 열려다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그는 유건에 대한 이야기를 시연에게 하지 않기로 했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시연을 향한 유건의 마음이 단순한 호기심만은 아니란 걸.‘괜히 경쟁 상대를 만들고 싶지 않아.’ 은범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고맙다는 말 할 필요 없어. 하나도 번거로운 거 없었어.” 시연은 우주의 상태에만 신경을 쏟아 은범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 얼른 방으로 들어가자. 우주 씻기고, 깨면 밥도 먹이고 약도 먹여야 하니까.” “그래. 들어가자.” ...‘CLOUD’에서의 시간은 나름 즐거웠다.은범과 시연은 우주를 데리고 ‘CLOUD’에서 하루를 더 머물고, 일요일 저녁이 되자 비로소 시연은 우주를 태산 요양병원으로 데려다주었다. 떠나려는 순간, 우주는 시연의 손을 꼭 붙잡으며 눈망울을 깜빡였다. “우주야, 누나랑 헤어지기 아쉬워? 누나가 다음 주에 또 올게.” “마..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올해 합격통지서는 우편으로 발송됐고, 너희 집 주소로 보냈다던데? 수령인은... 장소미야.”진아는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장소미가 일부러 너를 방해하려고 통지서를 중간에 가로챈 것 같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연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혹시 떨어질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첫 관문부터 장소미한테 발목이 잡힐 줄이야!’ “시연아.” 진아는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면접 시작 시간은 10시야. 아직 시간이 있어.” ‘맞아!’ 시연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여기서 포기할 순 없어. 내 합격통지서를 반드시 찾아야 해.’ 시연은 곧바로 지씨 저택으로 향했다.‘합격통지서를 반드시 되찾아야 해!’ “진아야, 내 자리 좀 비워달라고 말해줘!” “알겠어, 얼른 가!” ...시연은 서두르며 지씨 저택에 도착했다. 문을 열어준 것은 한 가정부였다. “시연 아가씨...” 그녀는 문을 열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시연은 가정부를 차갑게 바라보며 물었다. “내 합격통지서 어디 있어요?” ‘...!’ 가정부는 당황해서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그, 그게... 저는 잘 몰라요...” ‘흥.’ 시연은 가정부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며 속으로 냉소했다. ‘거짓말이야. 이 집안사람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이렇게 함부로 대해. 내가 직접 찾아봐야겠어.’ 시연은 가정부의 대답에 신경 쓰지 않고 이내 2층으로 향했다. 그녀는 공구함에 든 망치를 꺼내 들고 잡동사니 방으로 향했다. “시연 아가씨?!”가정부는 깜짝 놀라며 급히 장미리와 지동성에게 각각 전화를 걸었다. 시연은 가정부의 말을 아예 무시한 채 장소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망치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서랍과 옷장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시연 아가씨,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사모님이 아시면 큰일 나요!” 가정부는 뒤따라오며 만류했지만, 시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몇 분도 지나
“무슨 일이야?” 지동성이 황급히 뛰어오자,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는 아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보, 당신 딸 좀 봐! 여길 이렇게 난장판으로 만들었어! 경찰에 신고할 거야!” 시연은 장미리를 비스듬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침을 뱉어 장미리의 얼굴에 튀겼다. “퉤!” “악...!” 장미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얼굴을 손으로 훑었다. 이내 광분한 듯 소리쳤다. “미쳤어! 이 정신 나간 년이! 너 정말 미쳤구나!” 짝!그 모습을 본 지동성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시연의 뺨을 후려쳤다. “네 어머니한테 당장 사과해! 버릇없이 굴지 마!” 시연은 고개를 살짝 돌렸지만, 맞은 곳에 아프다는 감각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차가운 절망과 끓어오르는 분노가 뒤섞여 온몸을 휘감았다. ‘하하...’ 갑자기, 시연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눈을 부릅뜨고 아버지를 노려보면서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하하... 이 사람들이, 내 모든 것을 망쳤어!!’‘가족, 학업, 사랑까지!! 이 원한은, 천 년이 지나도 풀지 않을 거야!!’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눈물을 닦아내고, 시연은 편지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봉투에 넣은 뒤, 품에 꼭 안았다. “지시연, 너 뭘 가져가는 거야?!!” 지동성이 말을 잇자, 시연은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붙이면서 이를 악물고, 단호하게 말했다. “다 내 물건이에요!!” 그 눈빛에 순간적으로 지동성이 움츠러들었다. 결국, 지동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시연을 막지도 못했다. 집을 나서자마자, 시연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고, 우선 장소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음만 길게 울릴 뿐, 소미는 받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바로 유건의 번호를 눌렀다. 마침 회의 중이던 유건은 핸드폰 화면이 반짝이는 걸 보고 잠깐 멍해졌다. 남자의 손을 살짝 들어 회의 중단을 알린 후, 창가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장, 소, 미, 어디 있어요?]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