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하도진이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기운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게나.”민하윤은 아무리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달라질 건 없었다. 민하윤은 하도진이 민하윤의 손목을 잡아 이끄는 대로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문턱을 넘자마자 두 사람의 시선을 확 빼앗았다. 서재라기보다 진료실에 가까웠다. 커다란 책장에는 한의학 고전과 약리학 서적이 빼곡했고, 벽에는 혈 자리 그림이 가득 붙어 있었다. 책상 위엔 이미 써 둔 처방전이 수북했다.큰 통유리창 하나가 방 한 면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는데 방향이 별장 대문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었다.백발의 노인은 눈빛이 또렷했고, 기세도 전혀 꺾이지 않았다. 귀도 밝고 눈도 맑아 보였다. 홍수철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하도진을 노려봤다.“자네가 기어이 나를 다시 불러들이지만 않았어도, 내가 어쩌다 이렇게 바빠지겠나. 어디서 소문이 샜는지, 문 앞에 선물 들고 오는 사람들에, 맥 짚어 달라 약 달라 조르는 사람들에... 요즘은 매일 두 시진씩 침까지 놓고 있다네. 예전 연구원 다닐 때보다 더 바쁘니...”하도진이 웃으며 능청스럽게 받았다.“바쁘신 게 아니라, 홍 어르신께서 원래 마음이 약하셔서 그래요. 아픈 사람들의 고통을 못 참고 결국 다 받아 주신 거잖아요. 선물은 죄다 돌려보내고, 진료비랑 약재비만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어르신은 원래 그런 분이면서 꼭 인정은 안 하시죠. 마음이 정말 돌처럼 단단하셨으면 애초에 이렇게까지 안 하셨을 텐데요.”말 몇 마디에 얼굴이 풀린 홍수철이 허허 웃었다.“자네는 참 말도 예쁘게 하는군... 그런 말재주로 이렇게 예쁜 아내를 얻었나 보지?”민하윤은 말은 못 해도 눈치만큼은 빨랐다. 방금 말 속에 깔린 뉘앙스를 바로 알아차리고 허리를 살짝 굽혀 정중히 인사했다.“그렇게까지 예의 차릴 것 없네. 앉게나.”홍수철은 한결 누그러진 얼굴로 민하윤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봤다.민하윤은 책상 옆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민하윤 씨의 상태는 대충 들었네. 한의학은 망문문절이라 하지. 손
민하윤은 그 자리에 멍하니 굳었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하도진은 자신이 감정이 격해졌다는 걸 깨닫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빗물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고, 우산은 기울어진 채로 이번에는 민하윤 쪽으로 더 많이 기울어 있었다.하도진은 민하윤을 위해 우산을 받쳐 든 채, 쏟아지는 빗속을 함께 걸었다. 별장의 안뜰엔 이름 모를 약초들이 심겨 있었고, 은근한 한약 냄새가 비에 섞여 퍼졌다.처마 아래에는 물기가 조금 묻은 마른 약초 한 광주리가 놓여 있었다. 하도진이 우산을 접어 긴 우산을 벽에 기대어 두자, 우산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민하윤은 잠깐 망설이다가 젖어 드는 약초를 손으로 갈라 한쪽으로 밀고, 대나무 광주리를 벽 쪽으로 옮겨 남은 약초가 더 젖지 않게 했다.하도진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복도 아래에서 말없이 민하윤을 바라봤다. 민하윤은 피부가 유난히 뽀얗고, 손목뼈가 가늘었다. 구불구불한 머리카락 한 올이 휘어진 눈썹을 가볍게 가렸고, 카키색 트렌치코트에 물빛 긴 바지, 흰 하이힐, 단정한 차림이 오히려 민하윤의 몸매를 더 또렷하게 살렸다. 움직임은 가볍고, 분위기는 묘하게 문학적이었다.하도진은 순간 넋을 놓고 보고 말았다.명원시 재벌 가문의 도련님들에게는 예쁜 여자가 넘쳤다. 미대의 어린 학생들, 스튜디오의 모델들, 애매하게 뜨고 애매하게 잊히는 여배우들... 심지어 그들이 드나드는 곳에는, 얇은 유니폼을 입고 룸을 오가는 여자들도 수두룩했다.하도진은 예쁜 얼굴을 가진 여자들을 너무 많이 봐 왔다. 그런데도 누구도 민하윤만큼 예쁘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얼굴선에, 수정처럼 투명한 두 눈, 그리고 무엇보다 고집과 단호한 표정이 가장 선명했다.민하윤은 바닥 틈에서 기어 올라온 난초처럼 역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생명력이 있었다.하도진은 어떤 여자에게도 이렇게 오래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자꾸만 시선이 가고, 또 보게 됐다. 희고 긴 목선, 곧게 뻗은 다리... 그러다 보면 마음속에
‘설날에 할머니가 언급했던 그 산부인과 명의라는... 그 사람일까?’하지만 아이를 못 갖는 게, 어찌 민하윤의 문제일 수 있단 말인가.“얌전히 협조해.”하도진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손을 뻗어 민하윤의 손끝을 건드리려 했다.딱 그 순간, 민하윤이 움찔하며 손을 확 빼버렸다. 하도진의 말이 속을 뒤집어 놓았다. 얌전히 협조하면, 하씨 가문 어른들이 바라던 대로 아이를 낳아 대를 잇게 해 줄 수 있다는 뜻인가?[제가 왜 협조해요? 우리 둘 중 대체 누가 아픈데요?][병원에 가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당신이에요.]민하윤이 고집스레 눈을 치켜들며 수어로 쏘아붙였다.하도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처음에는 이해 못 한 듯 어리둥절하더니, 이내 뭔가를 깨달은 얼굴로 서서히 굳었다. 감정이 읽히지 않는 어둡고 가라앉은 눈빛이었다.하도진은 민하윤이 무슨 뜻으로 저 수어를 했는지 바로 알아들었다.“민하윤, 난 계속 참고만 있을 만큼 인내심이 크지 않아.”하도진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민하윤이 왜 아직도 풀리지 않았는지, 심지어는 은근히 자신에게 그 방면에서 문제가 있다는 듯 떠보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하도진은 이 일을 위해 꽤 많은 걸 감수했다. 유명한 한의사는 몇 년 전에 본가로 내려가 조용히 쉬고 있다는 소문만 떠돌았고, 하도진은 인맥을 거쳐 겨우 주소를 알아냈다. 하도진은 관계를 동원하고, 체면도 내려놓고, 몇 달을 공들여 한의사의 마음을 얻었다. 결국 그 노인은 설이 지나고 명원시로 올라가 민하윤을 봐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그러면... 더는 참지 말아요. 어서 이혼...]민하윤이 수어로 그렇게 마무리하려던 찰나, 하도진은 그녀의 팔을 잡아 끊어냈다.하도진이 거칠게 민하윤을 끌어안았다.“내가 말했지. 그 단어, 다시는 네 입... 아니, 네 손에서라도 듣기 싫다고.”하도진의 거친 숨결이 민하윤의 귓가에 닿았다. 방금까지의 다정한 척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눈빛은 매섭고 차가웠다.민하윤은 순식간에 하도진의 품에 갇혀 어쩔 줄 몰랐다
[아마 사람을 착각하신 것 같아요.]민하윤이 수어로 또박또박 말했다. 겉으로는 침착했지만 속은 괜히 불안했다.백누리의 매니저는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사람인데도 눈앞에서 조용하고 단정한 민하윤이 수어로 대화하는 걸 보자 순간 아쉬움이 스쳤다.‘저렇게 예쁜데 말을 할 수 없다니...’하지만 그 감정은 딱 한순간이었다. 나은지는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표정을 추슬렀고 얼굴에는 깔끔한 미소를 지었다.“그럼 제가 잘못 봤나 보네요. 정말 예쁘시네요. 제가 업계에서 본 여자 연예인들 못지않아요. 미인은 다 비슷하게 닮았다더니... 맞는 것 같네요.”“언니 말이 맞아...”백누리는 마지못해 하고 대답하더니 얌전히 나은지를 따라 흰색 밴에 올라탔다.민하윤은 그 자리에 서서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걸 느꼈다. 차가 골목 끝으로 사라질수록 방금까지 완벽하게 유지하던 표정이 스르르 무너졌다. 요염한 얼굴 위로 비웃음이 떠올랐다.정말 어이없게도 하도진의 몇 마디에 또 흔들릴 뻔했다.민하윤은 다시 표정을 정리한 뒤, 앱으로 택시를 불렀다.그때, 검은색 벤틀리 한 대가 조용히 길가에 멈춰 섰다. 뒷좌석 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차 안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셔츠에 은테 안경, 깔끔하게 손질한 헤어스타일의 남자가 깊은 시선으로 곧장 민하윤을 꿰뚫어 봤다.날카로운 시선에 민하윤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왜 답장 안 해?”하도진이 안경을 벗으며 차 문을 열었다.민하윤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도진의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 길게 뻗은 다리, 거의 완벽함에 가까운 비율이 맞춤 수트에 더 선명히 드러났다.‘왜 차에서 내리는 거지?’민하윤은 아무 말 없이 하도진을 바라봤다. 검은 셔츠 소매가 살짝 걷혀 있었고, 팔에는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하도진은 왼손으로 차체를 짚고 몸을 숙여, 오른손으로 문을 잡아 주었다. 묘하게 신사적이고, 또 다정한 척했다.“추워. 얼른 타.”하도진은 예전보
백누리는 찔리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난 지금도 나름 만족하거든. 너무 뜬 것도, 인기가 너무 없는 것도 아니니 얼마나 좋아? 가끔 작품 하나 하고, 일 없을 땐 집에 박혀 있고, 가끔 가족들이랑 여행도 가고. 그 정도면 괜찮지 않아?”나은지는 코웃음을 쳤다.“백누리, 너도 이 업계에서 오래 일 했잖아. 신인으로 들어온 고은율 좀 봐. 성장 속도가 로켓이야! 너도 걔처럼 하 대표님의 기분만 잘 맞춰 줬어도 난 네가 뭘 먹든, 뭘 하든 눈감아 줬을 거야.”나은지는 민하윤을 처음 보는 얼굴이라, 백누리의 일반인 친구쯤으로 단정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말도 가리지 않았다.백누리는 종이봉투 안에서 고소한 냄새가 올라오는 꼬치를 힐끗거리며, 속을 긁듯 툭 내뱉었다.“흥! 난 하 대표님의 7년이나 사귄 전 여친도 아닌데. 나도 하 대표님의 빽을 좀 잡고 싶지. 근데 그게 잡히겠어?”나은지가 단호하게 받아쳤다.“네가 진짜 잡을 수 있었으면 지금 이 꼴이겠냐? 고은율은 회사 들어온 지 1년도 안 됐는데 설날 특집 무대까지 올라가잖아. 집안일만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는 네가 갔을 것 같아? 꿈 깨. 하 대표님이 고은율의 앞길이 트이게 하려고 돈을 얼마나 쏟아붓는지 알아? 여주 자리까지 박아 넣어 줬어.”나은지는 숨도 안 쉬고 이어갔다.“지금 이 예능도 회사가 가장 힘주는 프로젝트야. 홍보를 시작하자마자 화제성이랑 조회수 벌써 플랫폼 1위 찍었잖아. 넌 진짜 돈 벌려고 이걸 하는 줄 알아? 다 고은율의 인기를 올리려고 판 깔아 준 거야.”백누리는 단어 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 순간, 백누리의 얼굴이 확 굳었다.“언니... 그럼 올해 설날 특집 무대는 내가 고은율의 자리를 뺏은 거야? 아니면... 고은율이 안 한다고 해서 내가 들어간 거야?”나은지는 결국 이를 악물고 못을 박았다.“맞아. 그래서 다른 연예인들은 몇 달 전부터 리허설 돌리는데, 네가 통보받을 때는 설 직전이었잖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민하윤은 조용히 그
임형섭의 낮고 자석 같은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흘러왔다. 임형섭은 부정하지 않았다.백누리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올렸다. 가방 안에 넣어 둔 계약서를 힐끗 보더니 입꼬리를 비틀며 일부러 놀렸다.“하, 그럼 소문이 그냥 소문만은 아니었네요?”임형섭은 말싸움할 기분이 아니었다. 숙취에 절어 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임형섭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다가 화면에 뜬 발신 표시를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백누리 씨, 하윤이는요? 옆에 있어요?”백누리는 전화를 민하윤에게 툭 넘기며 일부러 목소리를 키워 수화기 쪽으로 말했다.“옆에 있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직접 하세요.”“하윤아...”임형섭은 말이 목에 걸린 듯 머뭇거렸다.“별일은 아니고. 나... 당분간 휴가 들어가. 그 예능 찍어야 해서.”임형섭은 숨을 한 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 신용대출 부서를 맡았잖아. 예전처럼... 처리 안 되는 일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물어봐.”수화기 너머로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임형섭은 시선을 떨군 채 조용히 덧붙였다.“난 네 능력은 믿는데... 사람 마음은 모르는 거니까, 네가...”민하윤이 화면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대답 대신 짧게 신호를 보낸 셈이었다.임형섭은 더는 못 이어가겠다는 듯 숨을 깊게 들이켰다.“그래. 나도 할 일이 있어서... 끊을게.”임형섭은 통화를 끊고, 켜진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똑같은 숫자 두 줄이 나란히 떠 있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던 시간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새벽 한 시.어젯밤 임형섭은 민하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시간은 1분 30초였다.‘저 1분 30초 동안,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지?’찬물로 샤워를 한 임형섭은 정신을 차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당장이라도 민하윤을 보러 가고 싶어 차 키를 집었다가 문 앞에 멈춰 섰다.휴대폰을 들어 문자 대화 창에 몇 글자를 쓰고, 지우고, 또 썼다.결국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흰색 승합차가 길가에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