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5화

작가: 금소
민하윤은 황급히 집사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 긴 복도를 걸었다. 하도진의 본가는 예스러운 느낌이 강했다. 민하윤의 치맛자락이 짙은 갈색의 원목 마루 위를 스쳐 지나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것은 조용한 공간에서 유일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줄곧 말이 없던 집사가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문을 두드린 뒤 몸을 돌려 민하윤에게 말했다.

“깨끗한 옷을 준비해 드렸으니 들어가셔서 갈아입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집사는 복도 끝에서 모습을 감췄다. 민하윤은 이 드레스를 계속 입고 있을 수가 없었기에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떨리는 손으로 살짝 열린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 역시 복도처럼 예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인테리어였다. 텅 빈 방 안에서는 우드 향이 은은히 풍기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방 안쪽에 있는 남자의 옷방에는 흰 셔츠와 정장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고 유리 진열장 안에는 아주 비싸 보이는 손목시계들이 가득했다.

민하윤은 타인의 영역에 무단 침입한 기분이 들어 감히 앞으로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곳은 누가 봐도 남자의 방이었다.

“그 더러워진 옷을 언제까지 입고 있을 거야?”

순간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왔고 민하윤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때 그 남자였다.

하도진은 민하윤의 앞을 가로막고 실눈을 뜬 채로 그녀를 살펴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민하윤은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하도진은 민하윤의 손목을 틀어쥐고 그녀의 예쁜 얼굴부터 시작해 그녀의 평탄한 복부를 바라보았다.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귀신에 홀린 듯이 물었다.

“누구 거야?”

민하윤은 하도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도진을 바라보았다.

하도진은 민하윤에게 서서히 다가가며 그녀를 서랍장 쪽으로 몰아넣었다. 두 사람은 체구 차이가 꽤 컸기에 민하윤은 하도진에게 저항하지 못하고 고집스레 고개를 돌려서 하도진의 거친 호흡과 날카로운 시선을 피했다.

하도진은 큰 손으로 민하윤의 가녀린 허리를 쥐며 힘주어 민하윤을 위로 끌어당겨 서랍장 위에 앉혔다. 하도진은 민하윤을 지긋이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 애냐고.”

뒤늦게 그의 의도를 눈치챈 민하윤은 본능적으로 배를 끌어안고 화가 난 얼굴로 하도진을 노려보았다.

민하윤은 처음부터 끝까지 침묵했고, 참을성이 좋지 않은 하도진은 민하윤의 손목을 문지르면서 말했다.

“대답해.”

더러워진 드레스에서 술 냄새와 캐비어의 비린내가 났다. 절대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역겨운 냄새가 자꾸만 올라와 민하윤은 온 힘을 다해서 하도진을 밀어낸 뒤 도망치듯 욕실로 달려가서 세면대에 엎드려 헛구역질을 계속했다.

하도진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욕실 문에 기대어 있었다. 그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짐작이 갔다. 그날 밤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밤새 마음껏 즐겼었기 때문이다.

하도진은 본능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민하윤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고 담배를 버렸다.

“이런 일로 같잖은 수작 부리려고 하지 마. 너 같은 여자는 그동안 많이 봐왔으니까.”

하도진은 남 일처럼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임신하면 신분 상승할 수 있을 줄 아나 본데 나는 그날 밤 조치를 취했어.”

하도진은 예전에 검진을 통해 불임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싶지 않아 대충 핑계를 둘러댔다.

민하윤은 수도꼭지를 잠근 뒤 거울 속 하도진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금 전 누구 아이냐고 물었던 하도진의 질문을 떠올렸다.

민하윤은 몸을 돌린 뒤 처연하게 웃어 보였다.

[임신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 같은 사람의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하도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인내심이 점점 닳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손짓해도 난 이해하지 못해. 어찌 됐든 아이를 이용해서 신분 상승할 생각은 하지 마.”

평정심을 되찾은 하도진은 진호영이 그날 밤 여자에게 거액의 돈을 주었다고 한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민하윤은 돈을 받고 그와 잠자리를 가졌으면서 다음날 바로 정숙한 척했다.

게다가 갖은 수단을 이용해 하씨 가문 어르신 하진식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여 은근히 그의 눈에 띄려고 했다.

민하윤은 손짓을 멈춘 뒤 방 안에서 종이와 펜을 찾아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얼굴로 글을 썼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쪽한테 매달릴 생각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쪽 아이를 낳을 생각도 없어요.]

서예를 배운 적이 있는 사람처럼 정갈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글씨체였다. 하도진은 종이 위에 적힌 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글씨체는 눈앞의 가녀리고 야윈 민하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하도진은 민하윤이 쓴 글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그것을 대충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옷은 침대 위에 있어. 갈아입고 나와.”

민하윤은 굳이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무겁고 불편한 드레스는 캐비어와 술 때문에 이미 더러워졌기에 민하윤은 하도진이 나간 걸 확인한 뒤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하도진의 본가에는 젊은 여자들이 입을 법한 옷이 많지 않았다. 집사는 하도진 할머니의 뜻에 따라 긴 원피스를 준비했다. 그것은 실력 좋은 디자이너가 손수 만든 원피스였는데 맑은 푸른색이라 색깔도 예쁘고 옷감도 굉장히 좋았다. 그 원피스를 입은 민하윤은 몸매가 돋보였고 아름다웠다.

민하윤은 그 원피스로 갈아입은 뒤 더러워진 옷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벽에 기대어 서 있던 하도진은 인내심이 닳았는지 인기척을 듣고 민하윤을 바라보았다.

하도진은 사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는 민하윤의 일 때문에 심경이 복잡했다.

나른한 자태로 벽에 기대어 선 하도진은 손에 담배를 들고 있었다. 연기 너머로 민하윤의 얼굴과 몸매가 서서히 뚜렷해졌다.

희고 매끄러운 피부, 길고 완벽한 목선, 낮게 묶은 머리, 거기에 푸른색 원피스까지. 하도진의 시선이 민하윤의 가슴을 지나 가녀린 허리, 그리고 마지막에는 얇은 발목에 닿았다.

하도진은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민하윤을 바라보았고, 민하윤은 저도 모르게 더러워진 드레스로 몸을 가렸다.

민하윤의 쑥스러워하는 모습에 하도진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와 함께했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아른아른한 조명 아래, 하도진은 민하윤의 매혹적인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민하윤의 피부, 몸 선 모든 게 또렷하게 떠올랐다.

촉촉한 눈동자와 붉은 입술, 머리에서 나던 좋은 향기, 긴장한 듯한 표정, 하도진의 등을 할퀴었던 손톱, 목에 남았던 깨문 흔적...

하도진의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앞에 원피스를 입고 선 민하윤과 그날 밤 그녀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아주 매혹적이었다.

민하윤은 오랫동안 억눌렀던 하도진의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 사건이 있은 뒤로부터 하도진은 저도 모르게 여자들과 더 거리를 두었다. 그러면서 그날 밤도 술기운 때문에 벌어진 뜻밖의 사고라고 치부했다.

그러나 민하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그의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하도진은 담배를 비벼 끈 뒤 복도에 놓여 있던 비싼 골동품 안에 버렸다. 하도진이 너무 태연하게 쓰레기를 버려 민하윤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저 작은 백자 접시가 귀한 골동품인지, 하도진의 쓰레기통인지 헷갈렸다.

민하윤은 속으로 하도진을 나무라고 있다가 고개를 드는 순간 하도진의 경멸 어린 눈빛을 마주하게 되었다.

“여기는 어떤 수단을 써서 온 거야?”

민하윤은 자신이 태유 은행 신용대출팀을 대표하여 파티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말해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

민하윤은 본능적으로 수화를 하려 했으나 하도진이 짜증을 내며 재촉했다.

“됐어. 내 앞에서 손짓하지 마. 나는 이해 못 하니까. 대신 네가 한 말은 꼭 지켜.”

민하윤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하도진은 덤덤한 눈길로 민하윤의 복부를 힐끗 본 뒤 자리를 떴다.

민하윤은 일부러 거리를 벌리며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 작품을 무료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361화

    하도진은 마이크를 가볍게 두드려 소리가 제대로 나오는지 확인한 뒤, 그대로 입을 열었다.“진호영, 다음에 술 취하면 호수에라도 뛰어들어. 머리 좀 식히게.”“왜요?”진호영은 억울하다는 듯 입을 벌리고 더 따져 묻으려 했지만 보다 못한 송지훈이 곧바로 마이크를 뺏어 갔다.송지훈은 진호영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얌전히 가서 술 깨.”그러고는 진호영의 귀에 바짝 붙어 뭔가를 낮게 속삭였다.그 말을 들은 진호영은 술이 절반쯤 깬 얼굴로 민하윤을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진호영은 입만 벙긋거릴 뿐,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민하윤은 그 자리에 선 채 온몸이 달아오르는 듯했다. 어색함과 민망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송지훈이 방금 진호영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했는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하도진은 민하윤의 마음을 눈치챈 듯 시끄러운 반주 소리 사이로 조용히 물었다.“내 노래 듣고 싶어?”민하윤은 고개를 들어 하도진을 바라봤다.조금 전까지 가슴을 짓누르던 미묘한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민하윤은 조금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노래 듣고 싶은데?”하도진은 민하윤의 손을 잡은 채 다시 소파로 돌아가 앉더니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민하윤의 손끝을 천천히 쓸며 말했다.“네가 골라 봐.”민하윤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도진 씨가 부르는 거면 뭐든 다 돼요.]하도진은 굳이 더 묻지 않았다.그대로 선곡기 앞으로 걸어가 손끝으로 화면을 몇 번 넘겼다. 곧 방 안에는 피아노 선율이 부드럽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하도진은 한 손으로 스탠드 마이크를 쥐었다. 긴 다리는 높다란 의자에 느긋하게 걸쳤고 한쪽 발만 바닥에 댄 채 박자에 맞춰 가볍게 움직였다.순간 룸 안 조명이 확 어두워졌다.오직 한 줄기 흰빛만이 비스듬히 하도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잘생긴 이목구비, 매끈하게 떨어지는 얼굴선, 검고 깊은 눈매가 불빛 아래에서 더 또렷해졌다. 너무 잘생겨서 시선을 떼기 어려울 정도였다.하도진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홍콩 록밴드 출신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360화

    그 순간, 뒤에서 주민혁의 휘파람 소리가 건들거리듯 울렸다.“아, 맞아. 민하윤 씨는 진짜 예쁘네. 방송에 나오는 걸 못 본 건 좀 아쉬워.”그대로 걸음을 멈춘 하도진은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하도진은 몸을 돌려 주민혁의 음침한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하도진은 정말 후회됐다.그때 괜한 인정 따위 베풀지 말아야 했다. 그때 주민혁의 목숨을 살려 둔 게, 결국 자기 발밑에 끝도 없이 터질 지뢰를 묻어 둔 셈이 됐다.그때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 가볍게 하도진의 손끝을 감쌌다.민하윤이었다.민하윤은 고개를 저으며 괜히 상대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주민혁의 얼굴이 순간 굳었고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도 그대로 얼어붙었다.‘도대체 언제부터 둘 사이가 저렇게 가까워진 거야? 민하윤은 하도진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하도진은 민하윤이 놀랄까 봐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겨우 화를 눌러 삼킨 채 민하윤의 손을 잡고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주민혁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복도에 멍하니 서 있었다.서로 바짝 붙어 걷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자, 주민혁은 가슴속에서 질투와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가늘게 찢어진 눈을 가늘게 뜬 채 주민혁은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자신이 민하윤에게 품은 감정이 예전과는 달라졌었다.그런 감정은 원래 하도진이 아끼는 걸 부숴 버리겠다는 목적과 점점 어긋나고 있었다....하도진이 방문을 열자, 진호영이 노래방 기계 옆 의자에 한쪽 발을 올린 채 마이크를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시끄러운 록 메탈 음악에 맞춰 고개를 흔들며 완전히 취한 사람처럼 놀고 있었다.하도진과 진호영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곧장 진호영의 시선은 하도진을 넘어서 뒤에 선 민하윤에게로 옮겨 갔다.순간 진호영 얼굴에 민망함이 번졌고 노래도 그대로 뚝 끊겼다.“왜 멈춰? 계속해.”하도진은 웃음을 겨우 누른 채 손을 들어 보였다.진호영더러 자기들 신경 쓰지 말고 원래 하던 대로 록의 세계에서 마음껏 날뛰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359화

    검은색 마이바흐는 콜드 블루 클럽 앞에 조용히 멈춰 섰다.왼쪽에는 선명한 노란색 페라리, 오른쪽에는 은백색 투톤의 맥라렌 세나가 세워져 있었다.차는 두 대 사이 빈자리에 정확히 멈췄다.기사는 시동을 끄고 먼저 내려 두 사람이 따로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었다.민하윤은 한 손을 문손잡이에 얹은 채, 의아한 얼굴로 옆에 앉은 하도진을 바라봤다.[왜 그래요?]민하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수어를 했다.[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하도진이 너무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민하윤은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민하윤은 영문도 모른 채 손등으로 자기 뺨을 한 번 문질렀다.하도진은 저도 모르게 민하윤의 볼을 가볍게 꼬집듯 만졌다.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저 안에 있는 애들은 다들 좀 제멋대로야. 혹시 누구 때문에라도 불편해지면 바로 나한테 말해.”민하윤은 옅게 웃었다.그러자 민하윤의 볼에는 아주 작고 얕은 보조개가 스쳤다.콜드 블루 클럽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고급 회원제 휴식 공간이었다. 예약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 보안도 철저했고 휴식과 오락이 한데 섞인 상류층 전용 사교 공간에 가까웠다.두 사람은 둥근 아치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눈앞에는 몇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인공 암석이 솟아 있었고 아래쪽 샘에서는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가짜 바위산과 졸졸 흐르는 물길을 돌아서 구불구불 이어진 긴 복도를 지나던 민하윤은 문득 익숙한 실루엣 하나를 스치듯 봤다.민하윤이 다시 확인하려는 순간, 하도진의 목소리가 생각을 끊어 놓았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완전히 넋이 나갔는데?”민하윤은 입술을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아마 잘못 본 걸 거라고 자신을 달랬다. 주민혁 그 변태 같은 남자는 한동안 민하윤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하도진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맨 위층 버튼을 눌렀다.벽에 등을 기대고 선 하도진은 그대로 눈을 감고 잠시 쉬는 듯했다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358화

    민하윤은 재빨리 차창을 내리고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듯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름 모를 꽃향기가 바람에 실려 들어왔다.반면 하도진은 입가를 한 번 핥으며 여운을 음미하듯 웃고 있었다. 얼굴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진짜 변태, 뻔뻔한 강도에 완전 양아치야.’민하윤은 속으로 하도진을 있는 대로 욕했다.하도진은 곁눈질로 민하윤의 얼굴을 훑었다.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삐진 듯 붉어진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괜히 더 기분이 좋아졌다.이런 상황에서 뽀뽀 한 번 더 안 하면 그게 바보였다.천천히 감정을 쌓자고 한 것뿐이지 진짜 하도진더러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 중처럼 살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유 기사님은 역시 베테랑 기사였다. 뒷좌석 분위기가 얼마나 요란하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묵묵히 운전만 했다. 속도도 안정적이었고 차는 거의 흔들림 없이 미끄러지듯 달렸다.하도진은 긴 다리를 포개고 앉은 채, 조금 전 입맞춤의 감촉을 아직도 곱씹고 있었다.그때 뜬금없이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하도진은 고개를 돌려 민하윤을 한 번 보고는 느긋하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그런데 상대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곧바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하도진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한 손으로 민하윤의 귓불을 천천히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응. 안 가.”수화기 너머로 진호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아, 왜? 여긴 분위기 벌써 다 달아올랐는데... 송지훈 그 일벌레도 왔고, 은율 누나도 광고 촬영까지 미뤘어. 근데 형만 안 온다고?”하도진은 얼굴을 굳힌 채 옆 창문을 조금 내렸다. 그러자 바람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난 더 중요한 일이 있어. 안 간다고 했으면 안 가는 거야. 쓸데없는 소리를 할 시간이 없어.”“뭔 중요한 일인데? 형, 주민혁이 주해에서 돌아오자마자 집안 어르신한테 집에 갇혀서 못 나가게 된 거 알아?”“네 형수님이랑 시간 보내느라 몰랐어.”하도진은 미간을 한 번 누르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357화

    하도진은 뒷좌석에 기대앉은 채, 못마땅하다는 듯 쇼핑백 몇 개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아주 정성도 지극하네. 휴대폰이 깨지자마자 바로 새 걸 사다 주다니 말이야.”하도진은 몸을 앞으로 조금 숙였다.“어디 한번 보자. 또 뭘 사 줬어?”하도진이 쇼핑백 안을 들춰보려는 순간, 민하윤이 두 손으로 하도진의 얼굴을 감쌌다.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좁은 차 안 공기가 순식간에 미묘하게 달아올랐다.하도진은 민하윤의 손을 붙잡더니 고개를 기울여 손바닥 위에 입을 맞췄다.눈꼬리를 살짝 올린 채, 하도진은 늘 그렇듯 건성건성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건 무슨 뜻이지? 날 유혹하는 거야?”민하윤은 온몸에 열이 확 오르는 걸 느꼈다.귓불은 새빨개졌고 얼굴이 달아올라 뜨거울 정도였다.하도진은 일부러 민하윤을 놀리고 있었다.관심도 쇼핑백에서 민하윤에게로 완전히 옮겨갔다.하도진의 손끝이 촉촉한 민하윤의 입술을 가볍게 스쳤다.“홍 어르신이 지어 준 한약은 아직도 먹고 있어?”민하윤은 차마 약을 끊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임신 사실을 안 뒤부터 민하윤은 아주 조심스러워졌다. 먹는 것, 쓰는 것 하나까지 전부 신경 썼다. 감히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이 아이는 하늘이 준 선물이었다.민하윤은 처음부터 하도진과 평생 함께 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반드시 하도진의 곁을 떠날 생각이었다.하지만 아이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이제 몇 년 뒤면 민하윤도 서른을 앞두게 될 터였고, 지금은 연봉도 제법 괜찮았으니 아이 하나쯤 충분히 책임질 수 있었다.민하윤은 아이를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이 아이가 하씨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존재라고 여긴 적도 없었다.민하윤은 알고 있었다.자신이 뱃속의 아이를 사랑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그 아이는 민하윤의 아이였다.민하윤의 피와 살로 품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혈육이었다.그런 사랑은 아주 순수했다.어떤 조건도 계산도 붙지 않는 사랑이었다.민하윤이 평생 가장 목말라했던 엄마의 사랑이었다.민하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356화

    이남주는 우유 뚜껑을 따서 민하윤에게 건넸다.“회장님이 왜 갑자기 언니를 보자고 했을까요? 그분은 거의 다 권한을 내려놓으셨잖아요. 주주총회 아니면 은행에도 잘 안 나오시는데요.”민하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기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무슨 얘기 하셨어요?”[별말은 없었어요. 평소에 일이 힘들지 않냐고 물으시고 그냥 몇 마디 나눴어요. 비서한테 식사도 두 사람분 시키라고 하셨는데 회장님 앞에서는 도저히 못 먹겠더라고요.]“그럴 만하죠. 저라도 회장님이 앞에 떡 버티고 있으면 밥 못 먹어요.”이남주는 단번에 민하윤이 왜 이렇게 허겁지겁 먹는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과자 몇 봉지를 더 뜯어 민하윤의 앞으로 밀어줬다.민하윤은 정말 배가 고팠다. 임신한 뒤로 식욕이 부쩍 늘었다. 입덧은커녕 오히려 더 잘 먹게 됐다.태유 은행 본사 건물을 나서자 길가에 임형섭의 차가 서 있었다. 민하윤은 그 자리에 멈춰 한참을 망설이자 임형섭은 쇼핑백 몇 개를 든 채 곧장 다가왔다.“점심때 휴대폰을 회의실에 두고 갔더라. 액정이 왜 그렇게까지 깨졌어? 하도진이 돌아온 거야?”임형섭은 민하윤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도 걱정은 숨길 수 없었다.이건 거의 병에 걸린 정도였다.임형섭은 민하윤을 걱정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이런 관심이 민하윤을 더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임형섭은 멈출 수가 없었다.민하윤을 보지 못하면 미칠 것처럼 속이 타들어 갔고 자꾸만 가까이 가고 싶었고, 또 걱정하게 됐다.민하윤은 쇼핑백들을 내려다봤다.안에는 최신형 휴대폰도 있었고 몸에 좋은 영양제며 건강보조제도 있었고 신발 상자 하나도 들어 있었다.[선배, 저는...]민하윤은 어떻게 이 호의를 거절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깨물었고 수어를 하려던 두 손도 허공에서 멈췄다.임형섭은 억지로 담담한 척 웃었다.“하윤아, 다른 뜻은 없어.”민하윤은 입술을 깨문 채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오른손 엄지를 살짝 아래로 접었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42화

    하씨 가문은 매년 제사를 지냈고 하지선은 매년 제사 전에 귀국하여 가족들을 만났다. 안타깝게도 큰형과 둘째 형은 몇 년 전 병으로 돌아가셨기에 하진석에게는 여동생 하지선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하지선이 귀국하여 그들을 보러 오는 것은 하씨 가문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그렇게 40년이 흐르니 손주들도 모두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룰 나이가 되었다.이번에 하지선은 자신의 가장 어린 손녀 소피아를 데리고 돌아왔다. 소피아는 13, 14살쯤 돼 보였고 이국적인 얼굴에 귀여운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으며 아주 힙한 데님 셋업을 입고 있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40화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하준혁이 하진석을 부축하며 밖에서 들어왔다. 두 부자는 매우 닮았고, 화를 내지 않아도 위엄이 느껴지는 표정도 상당히 비슷했다.채선화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하도진도 꼬고 있던 다리를 내려놓으며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민하윤의 팔을 잡아당겨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하진석은 부축을 받으며 상석에 앉은 뒤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가 마침내 민하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분위기가 살짝 어색했다. 하진석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민하윤은 저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졌다.다행히 하준혁이 나서서 분위기를 풀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37화

    두 인턴은 겁을 먹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중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대리님, 무... 무슨 일이세요?”민하윤은 싸늘한 얼굴로 두 사람을 둘러본 뒤 그들의 사원증을 바라보았다.상대방은 그 점을 눈치채고 두려운 얼굴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사과했다.“대리님, 죄, 죄송합니다... 저희도 다 주워들은 얘기였어요.”이번에 총 여섯 명의 인턴을 채용했는데 그중 두 명은 가장 힘든 영업팀에 배치되어 고객 예금, 대출 등의 업무를 맡았고 나머지 네 명은 신용대출팀으로 배정됐다.민하윤은 두 사람을 불안하게 하려고 일부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35화

    민하윤은 씩씩대면서 수화를 한 뒤 두 손을 축 내려뜨렸다.하도진의 미간이 더 심하게 찌푸려졌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민하윤을 지긋이 바라보았고 그의 시선에 조금 찔린 민하윤은 속으로 투덜댔다.‘보긴 뭘 봐? 수화는 알지도 못하면서.’하도진은 민하윤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어들였다.“나랑 이혼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내가 널 얕봤네.”원래는 이혼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민하윤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수백억의 가치를 지닌 에스티와의 협력 프로젝트를 망쳤으니 임원들은 민하윤을 질책할 것이고 심한 경우 임형섭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작품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