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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作者: 금소
아래층 거실에는 하진석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손님들이 가득했다. 사람들 틈 사이에서 아주 정정해 보이는, 붉은색의 정장을 입은 백발의 노인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거실 중앙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연한 핑크색의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두 노인이 나란히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수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민하윤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다 긴장 때문에 발을 헛디뎌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고 하자 본능적으로 자신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을 붙잡았다.

계단에서 구를 뻔했던 민하윤의 허리를 큰 손이 받쳐주었다. 민하윤은 하도진의 품 안에 쏙 안기게 되었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하도진이 살짝 화가 난 얼굴로 민하윤에게 따져 물었다. 그는 싸늘한 표정을 지으면서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하도진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운을 내뿜었고 겁을 먹은 민하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민하윤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감히 하도진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수많은 손님들이 정원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도진의 뒤에 있는 민하윤을 알아본 것인지 쑥덕댔고 하도진의 할머니는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도진아, 얼른 내려오지 않고 거기서 뭐 하니?”

하도진은 화를 참으며 자신의 품에 안긴 민하윤을 밀어낸 뒤 건방진 모습으로 내려갔다.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뜨거웠다. 그들은 두 사람을 몰래 훔쳐보면서 그들 사이에 수상한 점은 없는지 찾아내려고 했다. 민하윤은 집사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던 것이, 선배의 부탁대로 선물을 들고 파티에 참석한 것이 후회되었다.

민하윤은 천천히 하도진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감을 최대한 지우며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그곳에서 도망칠 생각이었다.

민하윤은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자리에 조용히 숨어서 하진석의 말을 들었다.

하도진은 민하윤이 임신했다는 사실에 여전히 짜증이 나 있었다. 놀랍기도 하고 또 새로운 희망이 생기기도 했다.

하도진은 확실히 불임이었다. 어렸을 때 많이 아픈 적이 있던 하도진은 약을 잘못 먹어 불임이 되었다. 그동안 하도진의 할머니는 손주를 보고 싶어서 불공을 드린다는 핑계를 대며 몰래 의사를 제누오로 보내 하도진의 병을 치료하려고 했다.

그 방면으로 유명한 의사라면 모두 만나 봤었다. 그리고 고은율도 하도진이 약을 꾸준히 먹게끔 그를 설득하기도 했었다.

그동안 하도진은 고은율을 위해 줄곧 해외에서 머물렀었다. 상류층에서는 그것도 하나의 미담이었다.

하도진이 그동안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건 불임이라는 병의 역할이 컸다. 불임 같은 병은 타향에서 치료해야 외부로 말이 새어 나가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도진은 아주 오랫동안 남녀 관계에서 자극을 느끼지 못했으나 민하윤과 보냈던 그날 밤에는 엄청난 쾌락을 느꼈다.

“형, 대체 저 여자랑 무슨 사이야? 위층으로 올라간 지 꽤 됐는데 진짜 그냥 옷만 갈아입은 건 아니지? 형 정말 1초도 아까워하는구나... 저 여자가 그렇게 좋아?”

진호영은 빠르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꺼져.”

“알겠어.”

진호영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는 민하윤을 바라보여 태연한 얼굴로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민하윤은 기민한 감각으로 누군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상대방의 현명함이 느껴지는 눈빛을 마주 보았다. 남자의 시선이 너무도 뜨거운 탓에 민하윤은 불편함을 느꼈다. 사람들 틈 사이에 숨으려고 해봐도 소용없었다.

파티는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선배가 부탁한 일도 끝냈으니 민하윤은 손님들이 하진석을 둘러싸고 웃고 떠들고 있을 때 몰래 파티장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민하윤은 또 다른 싸늘한 시선이 자신에게 닿은 걸 느꼈고 고개를 드는 순간 마침 그와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다. 잠깐 그와 시선을 주고받은 민하윤은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택시에 타고 나서도 민하윤은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심장이 쿵쾅대며 미친 듯이 뛰었다.

낯선 번호로 끊임없이 전화가 걸려 왔다. 민하윤이 몇 번이나 전화를 끊었음에도 상대방은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민하윤은 전화를 받았고 전화 너머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하윤, 지금 당장 돌아와. 어떤 놈이랑 뒹굴다가 애가 생긴 거야? 게다가 하씨 가문 어르신의 생일 파티에서 그런 망신을 당해? 명원의 상류층에 나 민성현의 딸이 결혼하기도 전에 임신했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어. 너는 창피하지 않을지 몰라도 나는 못 참아!”

민하윤은 말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민성현은 민하윤의 아버지면서 상황을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에 가시 돋친 말로 자신의 딸을 공격했고 민하윤은 그런 것에 익숙했다. 이제는 그런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로 계속하여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민하윤은 차분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민하윤은 그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이내 문자가 도착했다.

[네 그 반신불수인 양아버지가 치료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면 당장 집으로 와.]

민하윤은 자기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메모장에 새로운 목적지를 입력한 뒤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힘없이 좌석에 몸을 기대고 무기력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과거의 기억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민하윤은 선택권을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교통사고를 당한 민하윤의 양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유명을 달리했고 양아버지는 반신불수가 되었다. 민씨 가문에서 민하윤을 데려가긴 했지만 그건 민하윤이 바랐던 일이 아니었다.

17살 때, 민하윤은 청소년 음악 경연대회에 나가게 되었고 민하윤의 양부모님은 민하윤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했었다.

당시 두 사람은 꼭 현장에 가서 그녀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겠다고 약속했었다.

“우리 딸은 목소리가 좋아서 꼭 좋은 성적을 따낼 거야.”

“그날 아빠 생선 팔지 않고 엄마랑 같이 우리 딸 노래하는 거 보러 갈게.”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던 그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시장에서 생선을 팔았다. 온종일 생선을 팔다 보니 온몸에서 비린내가 났다. 그래도 그들의 작은 월세방에는 민하윤을 위해 꾸민 귀엽고, 깔끔하고, 아늑한 방이 있었다. 낡고 허름한 월세방과는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대회가 끝날 때까지 그토록 기다렸던 양부모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초조한 얼굴로 달려와 민하윤이 평생 잊지 못할 말을 전했다.

“하윤아, 너희 부모님께서 이곳으로 오시는 길에 교통사고가 났대. 지금 너희 아버님 병원으로 실려 가셨대.”

당시 17살이었던 민하윤은 상을 받고 들떠 있었는데 선생님의 말씀을 이해한 순간 눈앞이 까매지면서 들고 있던 트로피를 그만 놓쳐버렸다. 민하윤은 선생님을 붙잡고 물었다.

“저희 엄마는요? 아빠는 병원에 실려 가셨다면서요. 그러면 엄마는요?”

선생님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너희 엄마께서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어.”

선생님이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지만 민하윤의 귀에는 단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짧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고막을 찔렀고, 온 세상이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민하윤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고 다들 초조한 얼굴로 민하윤에게 다가갔다. 이내 세계가 또 한 번 소란스러워졌다.

그날 이후로 민하윤은 말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양아버지의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하반신이 마비되어 절단 수술이 필요한 상태라 의사 선생님은 민하윤에게 그것은 아주 길고 힘든 여정이 될 것이며 많은 돈이 필요할 거라고 에둘러 말했다.

바로 그때 민하윤의 친부모님이 나타났다.

괴로운 기억만이 가득했던 그해, 민하윤은 민씨 가문으로 돌아왔고 민성현은 민하윤의 유일한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는 민하윤의 양아버지를 좋은 재활병원에서 치료받게 해주었고 24시간 내내 간병인을 붙여주었다.

택시가 멈춰 섰을 때 민하윤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창밖의 호화로운 별장을 바라보는 민하윤의 마음은 절망과 무력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민성현은 민하윤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존재를 볼모로 삼았고, 그 탓에 민하윤은 그에게 반항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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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361화

    하도진은 마이크를 가볍게 두드려 소리가 제대로 나오는지 확인한 뒤, 그대로 입을 열었다.“진호영, 다음에 술 취하면 호수에라도 뛰어들어. 머리 좀 식히게.”“왜요?”진호영은 억울하다는 듯 입을 벌리고 더 따져 묻으려 했지만 보다 못한 송지훈이 곧바로 마이크를 뺏어 갔다.송지훈은 진호영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얌전히 가서 술 깨.”그러고는 진호영의 귀에 바짝 붙어 뭔가를 낮게 속삭였다.그 말을 들은 진호영은 술이 절반쯤 깬 얼굴로 민하윤을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진호영은 입만 벙긋거릴 뿐,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민하윤은 그 자리에 선 채 온몸이 달아오르는 듯했다. 어색함과 민망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송지훈이 방금 진호영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했는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하도진은 민하윤의 마음을 눈치챈 듯 시끄러운 반주 소리 사이로 조용히 물었다.“내 노래 듣고 싶어?”민하윤은 고개를 들어 하도진을 바라봤다.조금 전까지 가슴을 짓누르던 미묘한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민하윤은 조금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노래 듣고 싶은데?”하도진은 민하윤의 손을 잡은 채 다시 소파로 돌아가 앉더니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민하윤의 손끝을 천천히 쓸며 말했다.“네가 골라 봐.”민하윤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도진 씨가 부르는 거면 뭐든 다 돼요.]하도진은 굳이 더 묻지 않았다.그대로 선곡기 앞으로 걸어가 손끝으로 화면을 몇 번 넘겼다. 곧 방 안에는 피아노 선율이 부드럽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하도진은 한 손으로 스탠드 마이크를 쥐었다. 긴 다리는 높다란 의자에 느긋하게 걸쳤고 한쪽 발만 바닥에 댄 채 박자에 맞춰 가볍게 움직였다.순간 룸 안 조명이 확 어두워졌다.오직 한 줄기 흰빛만이 비스듬히 하도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잘생긴 이목구비, 매끈하게 떨어지는 얼굴선, 검고 깊은 눈매가 불빛 아래에서 더 또렷해졌다. 너무 잘생겨서 시선을 떼기 어려울 정도였다.하도진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홍콩 록밴드 출신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360화

    그 순간, 뒤에서 주민혁의 휘파람 소리가 건들거리듯 울렸다.“아, 맞아. 민하윤 씨는 진짜 예쁘네. 방송에 나오는 걸 못 본 건 좀 아쉬워.”그대로 걸음을 멈춘 하도진은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하도진은 몸을 돌려 주민혁의 음침한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하도진은 정말 후회됐다.그때 괜한 인정 따위 베풀지 말아야 했다. 그때 주민혁의 목숨을 살려 둔 게, 결국 자기 발밑에 끝도 없이 터질 지뢰를 묻어 둔 셈이 됐다.그때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 가볍게 하도진의 손끝을 감쌌다.민하윤이었다.민하윤은 고개를 저으며 괜히 상대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주민혁의 얼굴이 순간 굳었고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도 그대로 얼어붙었다.‘도대체 언제부터 둘 사이가 저렇게 가까워진 거야? 민하윤은 하도진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하도진은 민하윤이 놀랄까 봐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겨우 화를 눌러 삼킨 채 민하윤의 손을 잡고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주민혁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복도에 멍하니 서 있었다.서로 바짝 붙어 걷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자, 주민혁은 가슴속에서 질투와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가늘게 찢어진 눈을 가늘게 뜬 채 주민혁은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자신이 민하윤에게 품은 감정이 예전과는 달라졌었다.그런 감정은 원래 하도진이 아끼는 걸 부숴 버리겠다는 목적과 점점 어긋나고 있었다....하도진이 방문을 열자, 진호영이 노래방 기계 옆 의자에 한쪽 발을 올린 채 마이크를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시끄러운 록 메탈 음악에 맞춰 고개를 흔들며 완전히 취한 사람처럼 놀고 있었다.하도진과 진호영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곧장 진호영의 시선은 하도진을 넘어서 뒤에 선 민하윤에게로 옮겨 갔다.순간 진호영 얼굴에 민망함이 번졌고 노래도 그대로 뚝 끊겼다.“왜 멈춰? 계속해.”하도진은 웃음을 겨우 누른 채 손을 들어 보였다.진호영더러 자기들 신경 쓰지 말고 원래 하던 대로 록의 세계에서 마음껏 날뛰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359화

    검은색 마이바흐는 콜드 블루 클럽 앞에 조용히 멈춰 섰다.왼쪽에는 선명한 노란색 페라리, 오른쪽에는 은백색 투톤의 맥라렌 세나가 세워져 있었다.차는 두 대 사이 빈자리에 정확히 멈췄다.기사는 시동을 끄고 먼저 내려 두 사람이 따로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었다.민하윤은 한 손을 문손잡이에 얹은 채, 의아한 얼굴로 옆에 앉은 하도진을 바라봤다.[왜 그래요?]민하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수어를 했다.[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하도진이 너무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민하윤은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민하윤은 영문도 모른 채 손등으로 자기 뺨을 한 번 문질렀다.하도진은 저도 모르게 민하윤의 볼을 가볍게 꼬집듯 만졌다.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저 안에 있는 애들은 다들 좀 제멋대로야. 혹시 누구 때문에라도 불편해지면 바로 나한테 말해.”민하윤은 옅게 웃었다.그러자 민하윤의 볼에는 아주 작고 얕은 보조개가 스쳤다.콜드 블루 클럽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고급 회원제 휴식 공간이었다. 예약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 보안도 철저했고 휴식과 오락이 한데 섞인 상류층 전용 사교 공간에 가까웠다.두 사람은 둥근 아치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눈앞에는 몇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인공 암석이 솟아 있었고 아래쪽 샘에서는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가짜 바위산과 졸졸 흐르는 물길을 돌아서 구불구불 이어진 긴 복도를 지나던 민하윤은 문득 익숙한 실루엣 하나를 스치듯 봤다.민하윤이 다시 확인하려는 순간, 하도진의 목소리가 생각을 끊어 놓았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완전히 넋이 나갔는데?”민하윤은 입술을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아마 잘못 본 걸 거라고 자신을 달랬다. 주민혁 그 변태 같은 남자는 한동안 민하윤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하도진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맨 위층 버튼을 눌렀다.벽에 등을 기대고 선 하도진은 그대로 눈을 감고 잠시 쉬는 듯했다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358화

    민하윤은 재빨리 차창을 내리고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듯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름 모를 꽃향기가 바람에 실려 들어왔다.반면 하도진은 입가를 한 번 핥으며 여운을 음미하듯 웃고 있었다. 얼굴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진짜 변태, 뻔뻔한 강도에 완전 양아치야.’민하윤은 속으로 하도진을 있는 대로 욕했다.하도진은 곁눈질로 민하윤의 얼굴을 훑었다.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삐진 듯 붉어진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괜히 더 기분이 좋아졌다.이런 상황에서 뽀뽀 한 번 더 안 하면 그게 바보였다.천천히 감정을 쌓자고 한 것뿐이지 진짜 하도진더러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 중처럼 살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유 기사님은 역시 베테랑 기사였다. 뒷좌석 분위기가 얼마나 요란하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묵묵히 운전만 했다. 속도도 안정적이었고 차는 거의 흔들림 없이 미끄러지듯 달렸다.하도진은 긴 다리를 포개고 앉은 채, 조금 전 입맞춤의 감촉을 아직도 곱씹고 있었다.그때 뜬금없이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하도진은 고개를 돌려 민하윤을 한 번 보고는 느긋하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그런데 상대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곧바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하도진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한 손으로 민하윤의 귓불을 천천히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응. 안 가.”수화기 너머로 진호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아, 왜? 여긴 분위기 벌써 다 달아올랐는데... 송지훈 그 일벌레도 왔고, 은율 누나도 광고 촬영까지 미뤘어. 근데 형만 안 온다고?”하도진은 얼굴을 굳힌 채 옆 창문을 조금 내렸다. 그러자 바람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난 더 중요한 일이 있어. 안 간다고 했으면 안 가는 거야. 쓸데없는 소리를 할 시간이 없어.”“뭔 중요한 일인데? 형, 주민혁이 주해에서 돌아오자마자 집안 어르신한테 집에 갇혀서 못 나가게 된 거 알아?”“네 형수님이랑 시간 보내느라 몰랐어.”하도진은 미간을 한 번 누르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357화

    하도진은 뒷좌석에 기대앉은 채, 못마땅하다는 듯 쇼핑백 몇 개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아주 정성도 지극하네. 휴대폰이 깨지자마자 바로 새 걸 사다 주다니 말이야.”하도진은 몸을 앞으로 조금 숙였다.“어디 한번 보자. 또 뭘 사 줬어?”하도진이 쇼핑백 안을 들춰보려는 순간, 민하윤이 두 손으로 하도진의 얼굴을 감쌌다.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좁은 차 안 공기가 순식간에 미묘하게 달아올랐다.하도진은 민하윤의 손을 붙잡더니 고개를 기울여 손바닥 위에 입을 맞췄다.눈꼬리를 살짝 올린 채, 하도진은 늘 그렇듯 건성건성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건 무슨 뜻이지? 날 유혹하는 거야?”민하윤은 온몸에 열이 확 오르는 걸 느꼈다.귓불은 새빨개졌고 얼굴이 달아올라 뜨거울 정도였다.하도진은 일부러 민하윤을 놀리고 있었다.관심도 쇼핑백에서 민하윤에게로 완전히 옮겨갔다.하도진의 손끝이 촉촉한 민하윤의 입술을 가볍게 스쳤다.“홍 어르신이 지어 준 한약은 아직도 먹고 있어?”민하윤은 차마 약을 끊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임신 사실을 안 뒤부터 민하윤은 아주 조심스러워졌다. 먹는 것, 쓰는 것 하나까지 전부 신경 썼다. 감히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이 아이는 하늘이 준 선물이었다.민하윤은 처음부터 하도진과 평생 함께 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반드시 하도진의 곁을 떠날 생각이었다.하지만 아이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이제 몇 년 뒤면 민하윤도 서른을 앞두게 될 터였고, 지금은 연봉도 제법 괜찮았으니 아이 하나쯤 충분히 책임질 수 있었다.민하윤은 아이를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이 아이가 하씨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존재라고 여긴 적도 없었다.민하윤은 알고 있었다.자신이 뱃속의 아이를 사랑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그 아이는 민하윤의 아이였다.민하윤의 피와 살로 품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혈육이었다.그런 사랑은 아주 순수했다.어떤 조건도 계산도 붙지 않는 사랑이었다.민하윤이 평생 가장 목말라했던 엄마의 사랑이었다.민하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356화

    이남주는 우유 뚜껑을 따서 민하윤에게 건넸다.“회장님이 왜 갑자기 언니를 보자고 했을까요? 그분은 거의 다 권한을 내려놓으셨잖아요. 주주총회 아니면 은행에도 잘 안 나오시는데요.”민하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기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무슨 얘기 하셨어요?”[별말은 없었어요. 평소에 일이 힘들지 않냐고 물으시고 그냥 몇 마디 나눴어요. 비서한테 식사도 두 사람분 시키라고 하셨는데 회장님 앞에서는 도저히 못 먹겠더라고요.]“그럴 만하죠. 저라도 회장님이 앞에 떡 버티고 있으면 밥 못 먹어요.”이남주는 단번에 민하윤이 왜 이렇게 허겁지겁 먹는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과자 몇 봉지를 더 뜯어 민하윤의 앞으로 밀어줬다.민하윤은 정말 배가 고팠다. 임신한 뒤로 식욕이 부쩍 늘었다. 입덧은커녕 오히려 더 잘 먹게 됐다.태유 은행 본사 건물을 나서자 길가에 임형섭의 차가 서 있었다. 민하윤은 그 자리에 멈춰 한참을 망설이자 임형섭은 쇼핑백 몇 개를 든 채 곧장 다가왔다.“점심때 휴대폰을 회의실에 두고 갔더라. 액정이 왜 그렇게까지 깨졌어? 하도진이 돌아온 거야?”임형섭은 민하윤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도 걱정은 숨길 수 없었다.이건 거의 병에 걸린 정도였다.임형섭은 민하윤을 걱정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이런 관심이 민하윤을 더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임형섭은 멈출 수가 없었다.민하윤을 보지 못하면 미칠 것처럼 속이 타들어 갔고 자꾸만 가까이 가고 싶었고, 또 걱정하게 됐다.민하윤은 쇼핑백들을 내려다봤다.안에는 최신형 휴대폰도 있었고 몸에 좋은 영양제며 건강보조제도 있었고 신발 상자 하나도 들어 있었다.[선배, 저는...]민하윤은 어떻게 이 호의를 거절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깨물었고 수어를 하려던 두 손도 허공에서 멈췄다.임형섭은 억지로 담담한 척 웃었다.“하윤아, 다른 뜻은 없어.”민하윤은 입술을 깨문 채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오른손 엄지를 살짝 아래로 접었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56화

    민하윤은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여러 차례 휴대전화 잠금을 해제하며 대화창을 열었다. 그들의 대화는 아주 오래전에 멈춰 있었다.민하윤은 문자로 하도진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을 용기가 없어 대화창을 끄고 인터넷으로 에스티와 관련된 최신 기사를 검색했다.포털사이트의 인기 기사 중 하나가 민하윤의 이목을 끌었다.[피아니스트 고은율, 소속사의 파렴치한 행위를 폭로하며 에스티 대표 폭행 사건 해명.]민하윤은 서둘러 검색어를 클릭했고 이내 고은율이 SNS에 올린 게시물을 보게 되었다. 고은율은 당시 상황을 정리해서 올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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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빠르게 김옥자의 뒤로 숨었다.“고은율 귀국했어?”김옥자는 미소를 거두며 하도진을 바라보았다.“걔는 너무 교활하고 못됐어. 앞으로는 연락하지 마.”하도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티 나지 않게 옆에 있던 민하윤을 힐끗 바라보았다. 민하윤은 여전히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저녁을 먹은 뒤 그들은 르네 별장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 내내 민하윤은 일부러 하도진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계속 창밖을 바라보았다.“에스티 산하의 엔터에서 파티를 할 예정인데 갈래?”하도진이 넥타이를 잡아당겨 소파 위로 던지면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52화

    “놔.”하도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고 고은율은 그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주 야릇한 자세를 한 채로 시선을 주고받았다.고은율은 술을 얼마나 많이 마신 건지 얼굴은 창백하면서 볼은 빨갰다. 그녀는 몽롱한 눈빛으로 눈을 깜빡이며 하도진을 바라보았다.“도진아, 고마워.”“고은율, 이번에는 내가 도와줬지만 다음에는 어쩔 거야? 내가 늦게 왔으면 그 짐승 새끼들이 무슨 짓을 할 것 같아? 왜 자기를 아낄 줄 몰라?”하도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은율을 바라보면서 일부러 듣기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51화

    하도진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는 품 안의 고은율을 옆에 앉힌 뒤 소매를 걷으면서 긴 다리를 뻗으며 나이를 헛먹은 늙은 남자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하도진은 옆에 놓여 있던 의자를 들어 테이블을 내리쳤다. 굉음과 함께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고 룸 안에 있던 여직원은 상황이 심상치 않자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조금 전까지 거만하던 남자들은 그 순간 술이 확 깨서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뒤로 몸을 숨겼고 겁 많은 매니저는 이미 다리에 힘이 풀려 하도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저 사람들이 은율이를 탐냈어요. 심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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