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6화

Author: 금소
아래층 거실에는 하진석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손님들이 가득했다. 사람들 틈 사이에서 아주 정정해 보이는, 붉은색의 정장을 입은 백발의 노인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거실 중앙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연한 핑크색의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두 노인이 나란히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수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민하윤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다 긴장 때문에 발을 헛디뎌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고 하자 본능적으로 자신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을 붙잡았다.

계단에서 구를 뻔했던 민하윤의 허리를 큰 손이 받쳐주었다. 민하윤은 하도진의 품 안에 쏙 안기게 되었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하도진이 살짝 화가 난 얼굴로 민하윤에게 따져 물었다. 그는 싸늘한 표정을 지으면서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하도진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운을 내뿜었고 겁을 먹은 민하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민하윤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감히 하도진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수많은 손님들이 정원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도진의 뒤에 있는 민하윤을 알아본 것인지 쑥덕댔고 하도진의 할머니는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도진아, 얼른 내려오지 않고 거기서 뭐 하니?”

하도진은 화를 참으며 자신의 품에 안긴 민하윤을 밀어낸 뒤 건방진 모습으로 내려갔다.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뜨거웠다. 그들은 두 사람을 몰래 훔쳐보면서 그들 사이에 수상한 점은 없는지 찾아내려고 했다. 민하윤은 집사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던 것이, 선배의 부탁대로 선물을 들고 파티에 참석한 것이 후회되었다.

민하윤은 천천히 하도진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감을 최대한 지우며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그곳에서 도망칠 생각이었다.

민하윤은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자리에 조용히 숨어서 하진석의 말을 들었다.

하도진은 민하윤이 임신했다는 사실에 여전히 짜증이 나 있었다. 놀랍기도 하고 또 새로운 희망이 생기기도 했다.

하도진은 확실히 불임이었다. 어렸을 때 많이 아픈 적이 있던 하도진은 약을 잘못 먹어 불임이 되었다. 그동안 하도진의 할머니는 손주를 보고 싶어서 불공을 드린다는 핑계를 대며 몰래 의사를 제누오로 보내 하도진의 병을 치료하려고 했다.

그 방면으로 유명한 의사라면 모두 만나 봤었다. 그리고 고은율도 하도진이 약을 꾸준히 먹게끔 그를 설득하기도 했었다.

그동안 하도진은 고은율을 위해 줄곧 해외에서 머물렀었다. 상류층에서는 그것도 하나의 미담이었다.

하도진이 그동안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건 불임이라는 병의 역할이 컸다. 불임 같은 병은 타향에서 치료해야 외부로 말이 새어 나가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도진은 아주 오랫동안 남녀 관계에서 자극을 느끼지 못했으나 민하윤과 보냈던 그날 밤에는 엄청난 쾌락을 느꼈다.

“형, 대체 저 여자랑 무슨 사이야? 위층으로 올라간 지 꽤 됐는데 진짜 그냥 옷만 갈아입은 건 아니지? 형 정말 1초도 아까워하는구나... 저 여자가 그렇게 좋아?”

진호영은 빠르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꺼져.”

“알겠어.”

진호영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는 민하윤을 바라보여 태연한 얼굴로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민하윤은 기민한 감각으로 누군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상대방의 현명함이 느껴지는 눈빛을 마주 보았다. 남자의 시선이 너무도 뜨거운 탓에 민하윤은 불편함을 느꼈다. 사람들 틈 사이에 숨으려고 해봐도 소용없었다.

파티는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선배가 부탁한 일도 끝냈으니 민하윤은 손님들이 하진석을 둘러싸고 웃고 떠들고 있을 때 몰래 파티장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민하윤은 또 다른 싸늘한 시선이 자신에게 닿은 걸 느꼈고 고개를 드는 순간 마침 그와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다. 잠깐 그와 시선을 주고받은 민하윤은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택시에 타고 나서도 민하윤은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심장이 쿵쾅대며 미친 듯이 뛰었다.

낯선 번호로 끊임없이 전화가 걸려 왔다. 민하윤이 몇 번이나 전화를 끊었음에도 상대방은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민하윤은 전화를 받았고 전화 너머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하윤, 지금 당장 돌아와. 어떤 놈이랑 뒹굴다가 애가 생긴 거야? 게다가 하씨 가문 어르신의 생일 파티에서 그런 망신을 당해? 명원의 상류층에 나 민성현의 딸이 결혼하기도 전에 임신했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어. 너는 창피하지 않을지 몰라도 나는 못 참아!”

민하윤은 말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민성현은 민하윤의 아버지면서 상황을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에 가시 돋친 말로 자신의 딸을 공격했고 민하윤은 그런 것에 익숙했다. 이제는 그런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로 계속하여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민하윤은 차분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민하윤은 그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이내 문자가 도착했다.

[네 그 반신불수인 양아버지가 치료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면 당장 집으로 와.]

민하윤은 자기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메모장에 새로운 목적지를 입력한 뒤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힘없이 좌석에 몸을 기대고 무기력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과거의 기억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민하윤은 선택권을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교통사고를 당한 민하윤의 양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유명을 달리했고 양아버지는 반신불수가 되었다. 민씨 가문에서 민하윤을 데려가긴 했지만 그건 민하윤이 바랐던 일이 아니었다.

17살 때, 민하윤은 청소년 음악 경연대회에 나가게 되었고 민하윤의 양부모님은 민하윤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했었다.

당시 두 사람은 꼭 현장에 가서 그녀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겠다고 약속했었다.

“우리 딸은 목소리가 좋아서 꼭 좋은 성적을 따낼 거야.”

“그날 아빠 생선 팔지 않고 엄마랑 같이 우리 딸 노래하는 거 보러 갈게.”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던 그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시장에서 생선을 팔았다. 온종일 생선을 팔다 보니 온몸에서 비린내가 났다. 그래도 그들의 작은 월세방에는 민하윤을 위해 꾸민 귀엽고, 깔끔하고, 아늑한 방이 있었다. 낡고 허름한 월세방과는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대회가 끝날 때까지 그토록 기다렸던 양부모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초조한 얼굴로 달려와 민하윤이 평생 잊지 못할 말을 전했다.

“하윤아, 너희 부모님께서 이곳으로 오시는 길에 교통사고가 났대. 지금 너희 아버님 병원으로 실려 가셨대.”

당시 17살이었던 민하윤은 상을 받고 들떠 있었는데 선생님의 말씀을 이해한 순간 눈앞이 까매지면서 들고 있던 트로피를 그만 놓쳐버렸다. 민하윤은 선생님을 붙잡고 물었다.

“저희 엄마는요? 아빠는 병원에 실려 가셨다면서요. 그러면 엄마는요?”

선생님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너희 엄마께서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어.”

선생님이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지만 민하윤의 귀에는 단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짧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고막을 찔렀고, 온 세상이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민하윤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고 다들 초조한 얼굴로 민하윤에게 다가갔다. 이내 세계가 또 한 번 소란스러워졌다.

그날 이후로 민하윤은 말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양아버지의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하반신이 마비되어 절단 수술이 필요한 상태라 의사 선생님은 민하윤에게 그것은 아주 길고 힘든 여정이 될 것이며 많은 돈이 필요할 거라고 에둘러 말했다.

바로 그때 민하윤의 친부모님이 나타났다.

괴로운 기억만이 가득했던 그해, 민하윤은 민씨 가문으로 돌아왔고 민성현은 민하윤의 유일한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는 민하윤의 양아버지를 좋은 재활병원에서 치료받게 해주었고 24시간 내내 간병인을 붙여주었다.

택시가 멈춰 섰을 때 민하윤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창밖의 호화로운 별장을 바라보는 민하윤의 마음은 절망과 무력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민성현은 민하윤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존재를 볼모로 삼았고, 그 탓에 민하윤은 그에게 반항할 수가 없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801화

    그 말에 채선화는 눈이 순간 반짝이더니 두 손까지 모은 채 감격한 얼굴로 물었다.“또 생겼어? 언제?”하도진은 입꼬리를 살짝 당겼다.“아직 아무것도 없어요.”그러고는 태연하게 덧붙였다.“그래도 저는 계속 노력 중이죠.”채선화는 아무리 그래도 평생 학생들을 가르쳐 온 지식인이었다.아들이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는 건 도저히 적응이 안 됐다.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라 손만 내저었다.“됐어. 됐으니까 얼른 올라가.”정월대보름 무렵, 구준오가 사람들을 불러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사람들이 거의 다 모였을 때쯤 하도진이 민하윤의 팔을 잡고 느지막이 들어왔다.진호영은 목을 빼고 뒤를 살피다가 두 사람뿐인 걸 확인하고는 실망한 얼굴을 했다.“우리 두 조카는?”하도진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민하윤의 의자를 빼 주며 말했다.“보고 싶어?”“잘됐네. 마침 집에 있던 산후 도우미가 휴가라 사람이 좀 부족한데 네가 가서 봐.”그러자 진호영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하도진은 자리에 앉은 뒤 구준오를 비스듬히 바라봤다.구준오는 입에 담배를 문 채 심심한 듯 라이터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하도진의 서늘한 시선을 느낀 구준오가 손을 멈추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왜?”하도진은 아무 말 없이 구준오의 입에 물린 담배만 바라봤다.구준오는 담뱃갑을 하도진의 앞으로 툭 던졌다.“피우고 싶으면 말하지. 남자끼리 뭘 그렇게 빙빙 돌아.”구준오는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재를 털었다.“이거 순한 편이야. 네 입에는 안 맞을 수도 있지만.”하도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꺼.”구준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지만 일단 담배를 비벼 껐다.직원에게 손짓해 창문까지 열어 환기하게 한 뒤 몸을 뒤로 기대며 장난스럽게 물었다.“우리 하 대표님, 왜 그러세요? 담배도 꽤 자주 피우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렇게 바뀌었어?”하도진은 태연하게 물을 한 모금 마셨다.그러고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끊었어.”“뭐라고?”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800화

    “도진 씨...”민하윤은 쉰 목소리로 멍하니 하도진을 밀어내려 했다.“안에 하지 마요...”하도진은 고개를 숙여 민하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그러더니 간절한 눈으로 바라봤다.“우리 딸 하나 낳자.”민하윤은 결국 온몸에 힘이 빠져 더는 저항하지 못했다.한참 뒤에야 하도진이 아까 내년에는 세뱃돈을 더 많이 받을 방법이 있다고 한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깨달았다.두 사람 모두 완전히 지쳐 버렸을 때쯤 아래층도 차츰 조용해졌다.하도진은 민하윤을 품에 안고 함께 창밖을 바라봤다.교외의 밤하늘에는 아직도 화려한 불꽃이 끊임없이 터지고 있었다.눈부시게 아름답고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래서 더없이 아름다웠다....설날 아침.침실 문 밖에서 일정한 박자로 쿵쿵 소리가 났다.전날 너무 늦게 잠든 민하윤은 불만스럽게 웅얼거리며 옆에 누운 하도진을 발로 한번 찼다.하도진의 눈가에 웃음이 서서히 번졌다.하도진은 민하윤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고 이불 밖으로 드러난 하얀 어깨에도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다시 이불을 잘 덮어 줬다.하지만 문밖의 소음은 계속됐다.상대는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쿵쿵거리며 시끄럽게 굴었다.하도진은 눈을 감았다 떴다.누구의 짓인지 이미 뻔했다.아침부터 가사 도우미들이 이렇게 눈치 없이 굴 리는 없었다.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워낙 개방적인 분들이라 두 사람의 침실 쪽에 함부로 오지도 않았고 부부끼리 함께 있을 때는 더더욱 방해하지 않았다.민하윤은 칭얼거리듯 소리를 내며 아예 머리를 이불 속에 파묻었다.소음이라도 조금 덜 들으려는 모양이었다.하도진은 대충 홈웨어 바지를 걸치고 흰 티셔츠를 입었고 화가 치미는 걸 꾹 누르며 굳은 얼굴로 문을 열었다.문 앞에는 두 꼬마가 붕붕카에 올라타 있었다.짧은 다리를 바닥에 열심히 굴리자 차가 조금씩 앞으로 움직였다.아까부터 들리던 쿵쿵 소리는 다름 아니라 두 녀석이 붕붕카를 몰고 와 문을 들이받은 소리였다.“엄마, 일어나... 해가 엉덩이까지 떴어!”주주는 짧은 다리를 바쁘게 굴렸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799화

    새해가 되자 민하윤은 세뱃돈을 받느라 손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하도진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침대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돈을 세는 아내를 바라봤다.하도진은 돈에 눈이 반짝이는 민하윤의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다.“돈이 그렇게 좋아?”하지만 민하윤은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설날인데 괜히 하도진과 말다툼할 생각은 없었다.평소에는 어른들이 주는 돈을 선뜻 받기도 애매했지만 명절만큼은 마음 편히 세뱃돈을 받을 수 있었다.게다가 올해는 두 아이 덕분에 유난히 세뱃돈 봉투가 많았다.하나같이 두툼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예 통 크게 주주와 연이 앞으로 각각 통장까지 하나씩 만들어 줬다.하도진이 혀를 차며 말했다.“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네. 침까지 흘리겠어. 난 당신이 이렇게 돈 좋아하는 사람인 줄은 예전엔 몰랐는데...”민하윤은 놀림을 받아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실실 웃으며 말했다.“이게 말로만 듣던 돈 세다가 손 아픈 기분인가 봐요.”하도진은 침대에 앉아 아무 봉투나 두어 개 집어 안을 훑어봤다.축하 문구는 거의 비슷했다.하회주, 하명연 어린이의 건강한 성장과 행복, 새해의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이 가득했다.하도진이 두툼한 봉투 두 개를 집어 민하윤 앞에서 일부러 흔들었다.“근데 이거 당신한테 준 거 맞아? 아무리 봐도 우리 두 아들의 세뱃돈 같은데...”민하윤은 바로 눈을 흘기며 봉투를 낚아챘다.“뭘 몰라서 그래요. 제가 잠깐 대신 보관해 주는 거예요. 대신 보관이라고요. 설마 제가 몰래 써 버리기라도 하겠어요?”하도진은 피식 웃더니 눈을 반쯤 가늘게 뜨고 팔을 베개 삼아 침대에 드러누웠다.민하윤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돈부터 감쌌다.“어라, 거기 눕지 마요. 일어나요.”하도진은 눈꺼풀만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그렇게 돈을 좋아하면서 내가 준 카드는 왜 한 번도 안 써? 내가 사 준 가방이랑 옷, 보석은 왜 밖에 하고 나간 적도 없지?”민하윤은 입술을 삐죽이며 시선을 내렸고 작게 중얼거렸다.“너무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798화

    모임 장소는 어른들이 모두 좋아하는 명원식 요리 전문점으로 정했다.구준오가 서른 명이 앉을 수 있는 대형 원탁이 놓인 룸을 예약했고 각 집안 어른의 입맛과 먹지 못하는 음식까지 미리 확인해 메뉴도 주문해 두었다.사람들이 하나둘 도착했고 가장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송지훈과 구이현, 꾸꾸 세 식구였다.송지훈은 이제 누가 봐도 능숙한 아빠였고 어딜 가든 아들 일은 전부 자신이 챙겼다.송지훈이 유모차를 밀고 들어오자 구이현은 행복한 얼굴로 그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몇 달 된 아기는 한창 뽀얗고 통통해서 가장 귀여울 때였다.어른들은 너도나도 꾸꾸를 안아 보겠다며 나섰다.송씨 가문과 구씨 가문 어른들은 아직 사돈이 된 게 완전히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구이현의 어머니와 시어머니는 서로 양보하며 한차례 실랑이까지 벌였다.“외할머니가 안아 볼게요.”“아니에요. 친할머니가 안을게요.”송씨 가문의 어른들은 손자가 엄마 성을 따라 구씨가 된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애초에 구씨 가문에 미안한 마음이 있던 터라 아이의 이름이 구경운으로 정해진 뒤에도 오히려 송지훈에게 몇 번이고 당부했다.“이현이에게 평생 잘해.”구이현은 어린 나이에 자기들의 가문으로 시집와서 이렇게 건강하고 통통한 손자까지 낳아 주었으니 엄마 성을 따르는 것쯤은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반대로 구씨 가문은 처음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금지옥엽 키운 딸이 열 살도 넘게 차이 나는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앞날이 창창했던 발레리나의 길까지 내려놓고 일찍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렸으니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하지만 사람은 오래 지켜봐야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는 법이었다.송지훈은 나이가 좀 많다는 것만 빼면 흠잡을 곳이 없었다.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성격도 반듯했다.무엇보다 구이현의 까다로운 성격과 철없는 투정까지 조건 없이 받아 줬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잘해 줬다.송지훈은 어른들에게 효도했고 아내를 존중했다.심지어 꾸꾸의 출생 신고를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797화

    하도진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본가에 들어설 때까지도 그런 미소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주주와 연이는 요즘 할 줄 아는 말이 점점 많아졌다.두 아이는 작은 머리를 맞댄 채 거실에 쪼그려 앉아 증조할아버지가 새로 들인 앵무새를 구경하고 있었다.“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앵무새는 초록빛이 감도는 화려한 깃털을 가졌고 부리 주변에는 선명한 붉은빛이 돌았다.앵무새는 반짝이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제법 사람 흉내를 내 말도 따라 했다.연이는 깔깔 웃으며 따라 외쳤다.“새야, 안녕.”그러다 뒤를 돌아봤다가 아빠가 한쪽 무릎을 꿇고 엄마의 신발을 벗겨 주는 걸 발견했다.연이는 곧장 쪼르르 달려가 민하윤의 손을 잡고 새장을 가리키며 자랑했다.“새! 새!”민하윤은 아들을 안아 올려 볼에 뽀뽀하고는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무슨 새?”“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앵무새가 새장 안 횃대 위를 왔다 갔다 하며 사람만 보면 영리하게 외쳤다.“안녕하세요!”하지만 두 아이의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몇 분 놀더니 금세 앵무새를 거실에 내버려두고 가사 도우미에게 딸기를 씻어 달라고 졸랐다.저녁 식탁에서는 김옥자가 두 아이의 생일 이야기를 꺼냈다.나이가 들수록 집안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게 좋다며 이번에는 호텔에서 제대로 생일잔치를 열자고 했다.민하윤은 어른의 호의를 무안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 생각을 말릴지 고민하고 있었다.그때 하도진이 갑자기 식탁 아래로 손을 뻗어 민하윤의 왼손을 잡았다.민하윤은 살짝 당황해 하도진을 흘겨보며 손을 빼려고 했다.하지만 하도진은 턱을 아주 조금 들어 김옥자 쪽을 한번 바라봤다.의미는 너무나 분명했다.민하윤은 얼굴을 찌푸리다가 곧바로 알아차렸고 더는 손을 빼지 않고 하도진이 잡은 채로 내버려뒀다.그때 하도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할머니, 애들이 아직 얼마나 됐다고 벌써 호텔까지 잡아서 생일잔치를 해요? 별로 상관도 없는 사람들 잔뜩 불러 놓고 괜히 번거롭기만 하잖아요.”말투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796화

    10분 뒤, 이남주는 자기 몫으로 받은 선물 상자를 안고 민하윤의 사무실로 들어왔다.“저 새해 연휴 끝나고 일주일 휴가 냈어요. 본가에 좀 다녀오려고요.”그러면서 과일 상자를 내려놓았다.“이 과일들 품질 꽤 괜찮던데... 부장님이 가져가서 두 아들한테 주세요.”민하윤은 할 말을 잃었다.‘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텔레파시인가...’그때 이남주가 물었다.“그런데 왜 저를 부르셨어요?”민하윤은 멋쩍게 웃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이남주는 한참을 웃더니 허리까지 제대로 펴지 못했다.“저는 예전에 쌍둥이 부모들이 왜 그러는지 진짜 이해 못 했거든요.”“똑같이 생긴 애가 둘이나 있는데 굳이 똑같은 옷, 똑같은 신발을 사 주잖아요. 남들이 구별할까 봐 그러는 줄 알았어요.”이남주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덧붙였다.“이제는 좀 알 것 같네요.”민하윤은 말하자면 눈물 없이는 못 듣는다는 얼굴로 연신 고맙다고 했다.“그러면 사양 안 하고 받을게요. 고마워요.”...하도진은 민하윤을 데리러 은행 근처까지 와 있었다.잠시 뒤 민하윤에게 전화가 왔다.차를 좀 더 가까이 세우고 직접 건물 안으로 들어와 달라는 부탁이었다.하도진은 바로 빈정거리듯 말했다.“애틋한 선배가 떠났으니 이제야 나도 사람들 앞에 내놓을 생각이야?”예상대로 전화기 너머에서 민하윤의 욕 한마디가 날아왔다.민하윤은 전화를 끊고 과일 상자 몇 개를 어떻게 엘리베이터까지 옮길지 고민했다.그때 서용우가 먼저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그는 눈치도 빨라 곧바로 과일 상자를 들어 엘리베이터 안까지 옮겨 줬다.민하윤은 고맙다고 인사하며 근황을 물었다.젊고 밝은 성격의 서용우는 조금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부장님, 저 지난주에 고객팀 팀장으로 승진했어요. 월급도 15퍼센트 올랐고요.”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서용우는 과일 상자를 밖까지 옮겨 준 뒤 택시까지 불러 주려고 했다.“괜찮아요. 저를... 데리러 온 사람이 있어서요.”민하윤이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