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6화

Author: 금소
아래층 거실에는 하진석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손님들이 가득했다. 사람들 틈 사이에서 아주 정정해 보이는, 붉은색의 정장을 입은 백발의 노인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거실 중앙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연한 핑크색의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두 노인이 나란히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수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민하윤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다 긴장 때문에 발을 헛디뎌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고 하자 본능적으로 자신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을 붙잡았다.

계단에서 구를 뻔했던 민하윤의 허리를 큰 손이 받쳐주었다. 민하윤은 하도진의 품 안에 쏙 안기게 되었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하도진이 살짝 화가 난 얼굴로 민하윤에게 따져 물었다. 그는 싸늘한 표정을 지으면서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하도진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운을 내뿜었고 겁을 먹은 민하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민하윤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감히 하도진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수많은 손님들이 정원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도진의 뒤에 있는 민하윤을 알아본 것인지 쑥덕댔고 하도진의 할머니는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도진아, 얼른 내려오지 않고 거기서 뭐 하니?”

하도진은 화를 참으며 자신의 품에 안긴 민하윤을 밀어낸 뒤 건방진 모습으로 내려갔다.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뜨거웠다. 그들은 두 사람을 몰래 훔쳐보면서 그들 사이에 수상한 점은 없는지 찾아내려고 했다. 민하윤은 집사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던 것이, 선배의 부탁대로 선물을 들고 파티에 참석한 것이 후회되었다.

민하윤은 천천히 하도진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감을 최대한 지우며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그곳에서 도망칠 생각이었다.

민하윤은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자리에 조용히 숨어서 하진석의 말을 들었다.

하도진은 민하윤이 임신했다는 사실에 여전히 짜증이 나 있었다. 놀랍기도 하고 또 새로운 희망이 생기기도 했다.

하도진은 확실히 불임이었다. 어렸을 때 많이 아픈 적이 있던 하도진은 약을 잘못 먹어 불임이 되었다. 그동안 하도진의 할머니는 손주를 보고 싶어서 불공을 드린다는 핑계를 대며 몰래 의사를 제누오로 보내 하도진의 병을 치료하려고 했다.

그 방면으로 유명한 의사라면 모두 만나 봤었다. 그리고 고은율도 하도진이 약을 꾸준히 먹게끔 그를 설득하기도 했었다.

그동안 하도진은 고은율을 위해 줄곧 해외에서 머물렀었다. 상류층에서는 그것도 하나의 미담이었다.

하도진이 그동안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건 불임이라는 병의 역할이 컸다. 불임 같은 병은 타향에서 치료해야 외부로 말이 새어 나가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도진은 아주 오랫동안 남녀 관계에서 자극을 느끼지 못했으나 민하윤과 보냈던 그날 밤에는 엄청난 쾌락을 느꼈다.

“형, 대체 저 여자랑 무슨 사이야? 위층으로 올라간 지 꽤 됐는데 진짜 그냥 옷만 갈아입은 건 아니지? 형 정말 1초도 아까워하는구나... 저 여자가 그렇게 좋아?”

진호영은 빠르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꺼져.”

“알겠어.”

진호영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는 민하윤을 바라보여 태연한 얼굴로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민하윤은 기민한 감각으로 누군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상대방의 현명함이 느껴지는 눈빛을 마주 보았다. 남자의 시선이 너무도 뜨거운 탓에 민하윤은 불편함을 느꼈다. 사람들 틈 사이에 숨으려고 해봐도 소용없었다.

파티는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선배가 부탁한 일도 끝냈으니 민하윤은 손님들이 하진석을 둘러싸고 웃고 떠들고 있을 때 몰래 파티장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민하윤은 또 다른 싸늘한 시선이 자신에게 닿은 걸 느꼈고 고개를 드는 순간 마침 그와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다. 잠깐 그와 시선을 주고받은 민하윤은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택시에 타고 나서도 민하윤은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심장이 쿵쾅대며 미친 듯이 뛰었다.

낯선 번호로 끊임없이 전화가 걸려 왔다. 민하윤이 몇 번이나 전화를 끊었음에도 상대방은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민하윤은 전화를 받았고 전화 너머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하윤, 지금 당장 돌아와. 어떤 놈이랑 뒹굴다가 애가 생긴 거야? 게다가 하씨 가문 어르신의 생일 파티에서 그런 망신을 당해? 명원의 상류층에 나 민성현의 딸이 결혼하기도 전에 임신했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어. 너는 창피하지 않을지 몰라도 나는 못 참아!”

민하윤은 말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민성현은 민하윤의 아버지면서 상황을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에 가시 돋친 말로 자신의 딸을 공격했고 민하윤은 그런 것에 익숙했다. 이제는 그런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로 계속하여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민하윤은 차분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민하윤은 그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이내 문자가 도착했다.

[네 그 반신불수인 양아버지가 치료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면 당장 집으로 와.]

민하윤은 자기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메모장에 새로운 목적지를 입력한 뒤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힘없이 좌석에 몸을 기대고 무기력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과거의 기억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민하윤은 선택권을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교통사고를 당한 민하윤의 양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유명을 달리했고 양아버지는 반신불수가 되었다. 민씨 가문에서 민하윤을 데려가긴 했지만 그건 민하윤이 바랐던 일이 아니었다.

17살 때, 민하윤은 청소년 음악 경연대회에 나가게 되었고 민하윤의 양부모님은 민하윤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했었다.

당시 두 사람은 꼭 현장에 가서 그녀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겠다고 약속했었다.

“우리 딸은 목소리가 좋아서 꼭 좋은 성적을 따낼 거야.”

“그날 아빠 생선 팔지 않고 엄마랑 같이 우리 딸 노래하는 거 보러 갈게.”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던 그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시장에서 생선을 팔았다. 온종일 생선을 팔다 보니 온몸에서 비린내가 났다. 그래도 그들의 작은 월세방에는 민하윤을 위해 꾸민 귀엽고, 깔끔하고, 아늑한 방이 있었다. 낡고 허름한 월세방과는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대회가 끝날 때까지 그토록 기다렸던 양부모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초조한 얼굴로 달려와 민하윤이 평생 잊지 못할 말을 전했다.

“하윤아, 너희 부모님께서 이곳으로 오시는 길에 교통사고가 났대. 지금 너희 아버님 병원으로 실려 가셨대.”

당시 17살이었던 민하윤은 상을 받고 들떠 있었는데 선생님의 말씀을 이해한 순간 눈앞이 까매지면서 들고 있던 트로피를 그만 놓쳐버렸다. 민하윤은 선생님을 붙잡고 물었다.

“저희 엄마는요? 아빠는 병원에 실려 가셨다면서요. 그러면 엄마는요?”

선생님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너희 엄마께서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어.”

선생님이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지만 민하윤의 귀에는 단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짧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고막을 찔렀고, 온 세상이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민하윤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고 다들 초조한 얼굴로 민하윤에게 다가갔다. 이내 세계가 또 한 번 소란스러워졌다.

그날 이후로 민하윤은 말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양아버지의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하반신이 마비되어 절단 수술이 필요한 상태라 의사 선생님은 민하윤에게 그것은 아주 길고 힘든 여정이 될 것이며 많은 돈이 필요할 거라고 에둘러 말했다.

바로 그때 민하윤의 친부모님이 나타났다.

괴로운 기억만이 가득했던 그해, 민하윤은 민씨 가문으로 돌아왔고 민성현은 민하윤의 유일한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는 민하윤의 양아버지를 좋은 재활병원에서 치료받게 해주었고 24시간 내내 간병인을 붙여주었다.

택시가 멈춰 섰을 때 민하윤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창밖의 호화로운 별장을 바라보는 민하윤의 마음은 절망과 무력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민성현은 민하윤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존재를 볼모로 삼았고, 그 탓에 민하윤은 그에게 반항할 수가 없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575화

    다음 날 아침, 하도진은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잠에서 깼다.습관처럼 침대 옆을 더듬어 민하윤을 끌어안으려 했지만 하도진은 허공만 감쌌다.민하윤은 머리를 다 말린 뒤 욕실에서 나와 하도진을 한 번 보고는 곧장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하도진은 몇 초 멍하니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그러고는 기억이 끊기기 전의 장면들이 뒤늦게 떠올랐다.하도진은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와 드레스룸 문틀에 기대섰고 목을 한 번 가다듬더니 낮게 물었다.“내 잠옷은 네가 갈아입혀 준 거야?”민하윤은 이미 흰색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상태였다.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서면서도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하도진을 공기처럼 무시하고 지나쳐 갔다.“어디 가?”하도진은 차가운 목소리로 민하윤을 붙잡았고 미간을 찌푸린 채 손을 뻗어 앞을 막았다.“오늘 말 똑바로 하기 전까지는 어디도 못 가.”민하윤은 차갑고 잔잔한 눈빛으로 하도진을 올려다봤다.요염할 만큼 예쁜 얼굴인데도 감정의 물결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민하윤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휴가가 끝났어요. 은행에 출근하려고요.”“왜?”하도진은 민하윤을 훑어보았다.눈매는 날카로웠고 볼 한쪽은 살짝 붉게 부어 있었다.두 사람은 말없이 마주 섰다.잠시 정적이 흐른 뒤, 민하윤은 입술을 눌러 다물었다가 깊게 숨을 들이켰다.“이제는 출근해도 될 것 같아서요. 제가 맡고 있는 리스크관리부 S급 프로젝트도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요.”하도진은 전날 술에 취해 이후 기억이 거의 끊겨 있었다.하도진은 민하윤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내가 어젯밤에 너한테 너무 심한 짓이라도 했어?”“아니요.”하지만 하도진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그럼 내가 심한 말을 한 거야?”민하윤은 재빨리 하도진을 한 번 흘겨보며 대답했다.“아니요.”“너 설마 짐 싸고 집을 나가려는 거야?”하도진의 시선이 민하윤의 손에 들린 가방으로 떨어졌다.안에는 간단한 세면도구와 갈아입을 옷이 들어 있었다.민하윤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574화

    하도진은 진호영을 한 번 힐끗 보더니 말했다.“그래. 잊지 말고 꼭 보내.”그날 식사 분위기는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하도진은 얼굴이 굳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민하윤에게 새우를 까 주고 반찬을 덜어 주고 생선 가시를 발라 주는 걸 멈추지 않았다.덕분에 민하윤의 앞 접시는 금세 음식이 수북해졌다.민하윤도 은근히 심술이 났기에 하도진이 직접 깐 새우는 그대로 놔두고 먹지 않았고 덜어 준 반찬과 발라 준 생선도 끝내 입에 대지 않았다.하도진은 민하윤을 한 번 흘겨봤지만 민하윤은 하도진의 시선조차 모르는 척했다.남자들은 잔을 주고받으며 서로 술을 권했고 하도진도 기분이 상해 있던 탓에 남이 따라 주는 술을 마다하지 않고 다 마셨다.호텔을 나설 때쯤에 하도진은 이미 취해 있었다.일행은 차를 나눠 타고 하나둘 자리를 떴다.하도진은 뒷좌석에 기대앉아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민하윤만 바라봤다.“날 좀 달래 줘.”하지만 민하윤은 일부러 못 들은 척했고 시선은 앞만 보고 있었다.운전석의 기사님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백미러로 슬쩍 뒤를 살폈다.좁은 차 안은 술 냄새로 가득했고 아무리 냉방을 세게 틀어도 하도진의 속에서 치미는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다.“하윤아, 날 좀 달래 달라고 했잖아.”하도진은 짜증이 난 듯 손을 뻗어 민하윤의 목덜미를 감쌌다.그러더니 그대로 자기 품으로 민하윤을 끌어당겼다.민하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두 손으로 하도진의 가슴을 밀어냈다.“도진 씨, 진짜 왜 그래요? 유치원생도 아니고 왜 꼭 달래 줘야 해요? 왜 제가 달래야 하는데요? 먼저 표정을 구긴 건 도진 씨잖아요.”하도진은 싸늘한 표정으로 짓더니 그대로 입을 맞췄다.지금 하도진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하윤이의 입부터 막아야겠어... 듣기 싫은 말만 골라 하는 이 입을 말이야.’민하윤은 입맞춤에 힘이 풀려 손발이 맥없이 늘어졌다.하얀 얼굴에는 수상할 만큼 붉은 기운이 번졌고 숨이 가빠지면서 셔츠 단추 몇 개도 어느새 풀려 있었다.그 순간,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573화

    백누리는 딱히 진호영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표님의 친구이니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그래서 진호영이 무슨 말을 하든 하나하나 받아 주긴 했다.“우리 둘 카톡 있잖아요. 예전에 제가 몇 번 연락했는데 다 씹더라고요?”“아, 그랬나요? 촬영 들어가면 단톡방이 너무 많아서요. 아마 문자가 밑으로 밀려서 못 봤나 봐요.”“그러면 다음에 따로 한 번 볼 수 있어요? 다른 뜻은 없고 그냥 제 생각에는 누리 씨랑 잘 맞을 것 같아서요.”“좋죠. 기회 되면 그러죠. 그런데 요즘은 진짜 바빠요. 계속 촬영 중이라서...”백누리는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온 사람답게 적당히 받아넘기는 데는 도가 텄다.진호영 같은 이런 도련님 스타일은 잠깐 신선해서 찔러 보다가도 금방 흥미를 잃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조금만 지나면 진호영은 바로 흥미를 잃을 거라고 생각했다.대충 화장을 고친 백누리는 고개를 돌려 민하윤에게 물었다.“근데 우리 아직 누구를 기다리는 거야? 왜 이렇게 음식이 안 나오는 거지?”그 말을 듣고서야 민하윤도 아직 사람이 다 안 왔다는 걸 떠올렸다.민하윤은 휴대폰 잠금을 풀고 임형섭에게 문자를 보냈다.[선배, 도착하셨어요? 룸 번호 보냈어요.]그러자 임형섭은 거의 바로 답했다.[하윤아, 미안해. 가다가 살짝 사고가 났어. 오늘 저녁은 아무래도 못 갈 것 같아. 날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그러자 민하윤은 눈꺼풀이 작게 떨렸고 신중한 얼굴로 핸드폰을 두드렸다.민하윤은 옆에 있는 하도진의 얼굴이 서늘해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문자를 했다.손이 잠깐 멈췄다가 민하윤은 결국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네. 그러면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다음에 또 봬요.]그러자 임형섭 쪽에는 계속 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떠 있었다.민하윤은 표정이 점점 굳어졌고 그 순간 결이 선명한 손가락이 불쑥 뻗어 민하윤의 휴대폰을 가져갔다.“아...”민하윤은 고개를 들었다가 하도진의 새까맣고 깊은 두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그제야 뒤에 하려던 말도 목구멍 안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572화

    “네?”민하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몸이 옆으로 쓱 밀렸다.하도진은 민하윤이 앉아 있던 의자를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왜 이렇게 멀리 앉아?”민하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하도진을 봤다.“제가요?”민하윤은 그저 살짝 백누리 쪽으로 기울어 앉았을 뿐이었다.‘뭐가 그리 멀다고 그러는 거야.’왼쪽에는 하도진, 오른쪽에는 백누리가 있었다.설령 딱 가운데 정중앙에 앉는다 해도 하도진은 또 백누리의 편만 든다고 투덜댔을 게 분명했다.“멀어. 하윤아, 친구 때문에 남편을 홀대하는 행동은 좀 그만하면 안 될까?”하도진은 민하윤의 손바닥을 가볍게 꼬집듯 쥐고는 몸을 조금 뒤로 기대며 백누리 쪽을 바라봤다.“대표님, 안녕하세요.”백누리는 직장인의 태도를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었다.하루 종일 촬영하고 온 상태에서도 활짝 웃으며 와인잔을 들어 먼저 대표인 하도진에게 건배를 청했다.그러자 하도진도 꽤 성의 있게 잔을 부딪쳐 줬다.“됐어요. 그렇게까지 딱딱하게 굴지 마세요. 원래 저는 누리 씨의 스타일도 아니잖아요.”“헤헤. 네, 감사합니다. 대표님.”진호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식간에 자신이 대화에서 밀려난 기분이 들어서 괜히 심술이 났다.게다가 진호영은 집에서 오냐오냐 자랐기에 성격도 좀 있었고 말도 거칠었다.“어이, 여기는 태양도 없는데 선글라스까지 끼면 사람은 보이나요?”백누리는 웃는 듯 안 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어이”라는 호칭 하나로 백누리는 기분이 확 상했다.그래서 백누리는 못 이기는 척 선글라스를 벗었다.룸 안 조명이 정면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백누리는 잠깐 눈을 찡그렸다.그러자 화장기 없는 백누리의 얼굴이 그대로 모두 앞에 드러났다.백누리는 금세 조명에 적응했고 완벽한 사교용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 저는 백누리예요. 다들 만나서 반가워요.”구준오와 송지훈은 백누리를 한번 훑어보고는 예의상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고 이내 시선을 거뒀다.백누리는 속으로 몹시 아쉬웠다.백누리는 자신이 남자 보는 눈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571화

    구준오는 얼굴이 굳어 있었다.괜히 입 가벼운 진호영한테 말해 줬다 싶어 눈빛으로라도 당장 진호영의 입을 막아 버리고 싶었다.원래 진호영의 입이 가벼운 건 알았지만 아까는 진짜 말해 주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구이현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단호하게 부인했다.“아니거든... 오빠, 괜히 이상한 말 지어내지 마.”구준오는 달래듯 구이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알았어. 근데 이 테이블에 있는 남자들하고는 다 좀 거리를 둬. 오빠 말 좀 들어. 이 자식 중에 멀쩡한 놈은 단 하나도 없어.”민하윤은 휴대폰을 뒤집어 테이블에 놓았다.배가 고파 어지러울 지경이었지만 잠깐 당황한 얼굴의 어린 구이현을 흘끗 한 번 바라봤다.민하윤은 주머니에서 초콜릿 하나를 꺼내 포장을 뜯어 허기를 달래려 했다.그런데 다음 순간, 누군가가 그걸 가로채가 버렸다.하도진의 손은 참 곱게도 생겼다.하도진은 친구들과 웃으며 대화를 이어 가면서도 자연스럽게 포장을 대신 벗겨 줬다.“배고파?”하도진은 미간을 찌푸렸다.창백해진 민하윤의 얼굴이 영 마음에 걸렸다.민하윤은 고개를 저었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아니요. 그냥 저혈당이 온 것 같아서 그래요. 괜찮아요.”그러자 하도진은 바로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고 미리 음식을 주문하기 시작했다.“갈비찜, 생선탕...”하도진은 메뉴판을 빠르게 넘기며 줄줄이 메뉴를 불렀다.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한번 쭉 둘러봤다.“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각자 시켜.”진호영은 손을 번쩍 들어 직원을 자기 쪽으로 부르더니 메뉴판 사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이거, 이거, 이거, 그리고 이것도... 전부 빼고 나머지는 다 하나씩 주세요.”직원은 잠깐 멍해졌다가 방금 적어 놓은 메뉴 몇 개를 다시 줄줄이 지워 버렸다.“너 미쳤어? 그렇게 시켜서 다 먹기나 하겠어?”구준오는 진호영을 한 번 노려본 뒤, 고개를 돌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맵지 않은 메뉴 몇 가지를 더 추가했다.그런데 직원이 의아하다는 듯 대답했다.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570화

    “방금 룸 안에서 주웠어.”송지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 사이 거리가 워낙 가까워서 꼭 사람 마음을 홀리는 것처럼 들렸다.“이현아, 아직도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 이제 걔는 다른 여자랑 혼인신고까지 했는데 이제 좀 포기할 수 없겠어?”송지훈은 연한 파란 셔츠에 회색 니트를 겹쳐 입고 있었다.깨끗하고 단정해서 대학생처럼 보였지만 몸에 밴 지적인 분위기가 너무 짙어서 구이현은 그런 ‘모범생’ 타입이 늘 조금 어려웠다.구이현은 고개를 저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아직은... 많이 힘들어요.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도진 오빠의 삶에 제가 끼어들 일은 없어요.”송지훈은 구이현을 가만히 바라봤다.목울대를 한 번 굴리더니 오랫동안 마음속에 눌러 두었던 말을 끝내 삼켰다.구이현은 고개를 들어 송지훈을 바라보면서 물었다.“제 비밀은... 지켜 주실 거죠?”그러다가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또렷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오빠.”그러자 송지훈은 티슈를 내밀었다.“응. 눈물 닦고 일단 들어가자. 다들 아직 기다리고 있어.”구이현은 코를 훌쩍이며 대답했다.“네.”송지훈이 물었다.“예전에는 왜 네 오빠한테라도 한번 부탁해 보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도진의 가까이 있으면 기회도 먼저 잡을 수도 있었잖아.”하지만 구이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제 오빠는 절대 안 받아들일 거예요.”송지훈은 고개를 돌려 구이현을 바라봤다.“왜?”“저랑... 도진 오빠는 10년 8개월이나 차이가 나요. 오빠는 제가 그렇게 나이 많은 남자랑 만나는 걸 절대 허락 안 할 거예요.”말한 사람은 별 뜻 없이 한 말이었지만 듣는 사람 마음에는 다르게 들렸다.송지훈은 씁쓸하게 웃으며 걸음을 멈췄고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그럼 너는? 너도 나이 차이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생각해? 상대가 너보다 나이가 많이 많아도 괜찮아?”구이현은 의아한 얼굴로 뒤돌아봤다. 그러더니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저는 나이 차이를 별로 신경 안 써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