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휘안아. 너 낯빛이 심각한데. 왜? 할아버지 보내드린 게 계속 마음에 쓰여서 그래?”
휘안과 둘도 없는 절친이자 같은 반 반장인 도준은 다른 친구라면 몰라도 휘안의 표정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다.
이걸 좀 더 다르게 표현하자면 휘안의 사색을 방해하는 일등공신이라는 거고.
“후... 괜찮아. 할아버지 편찮으신 건 워낙 오래되기도 했고 좋은 마음으로 보내 드렸어. 그보다 체리 DM에 마음이 복잡해져서 그렇지.”
“휘안아! 너 또 체리 타령이야?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SNS 펜팔은 범죄라니까. 걔한테 넌 심심풀이 땅콩이라고. 제발 현실을 살아.”
매번 그렇듯 소연은 선과 악이 분명하다.
저와 접점이 없는 체리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못된 말로서 나쁜 아이로 몰아가기.
평소 같으면 소연의 말에 칼같이 대꾸를 했겠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입에 본드라도 발랐는지 입이 쉽게 떨어지지를 않는다.
현재 날씨는 화창해도 현재 기분은 우울함.
정말 그럴까? 나만 이런 마음인 건가?
나만 체리가 실제로 보고 싶은 걸까?
일상에서 무료함을 느끼거나 지치는 매 순간, 체리가 올린 사진들을 찾아보거나 주고받은 메신저들을 찾아보는 건 습관이 된지 오래인데.
그렇게 작은 습관에 불과했던 행동들은 눈덩이마냥 크게 부풀어 제 하루에 안착했다.
남들이 뭐라 해도 체리가 남긴 흔적들을 따라갈 때라면 저는 비로소 편안해졌으니까.
“성소연. 말 좀 예쁘게 해라, 어? 휘안이 얘 할아버지 보내드리고 온 지 얼마 안됐어. 굳이 또 최선에 최선을 다해 시비조로 말해야 해?”
“야, 이도준. 너까지 체리 편드는 거야? 막말로 걔가 우리랑 동갑도 아니고 신분을 속였을 수도 있잖아. 그럼 휘안이 얘만 바보 되는 건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안 그래?”
***
하여튼 제 말투는 생각도 못하고 남의 말투에 쏜살같이 불편함을 느끼는 도준이나.
체리라는 단어만 나왔다 하면 뭐 못 들은 것 들은 거 마냥 길길이 날뛰기 바쁜 소연이나.
다행히 제 옆에서 한 판 붙기 전 교실을 벗어나기 적당한 명분이 들려왔다.
그렇다고 제가 아침 댓바람부터 교무실에 방문하는 걸 선호하는 학생은 아니지만 말이다.
“안녕하세요. 부반장… 아니, 나예린 말 듣고 왔습니다. 선생님께서 저희를 찾으셨다고.”
“어, 그래~ 다행히 일찍들 등교했네.”
낯을 가리고 대외적으로 조용한 성격인 휘안은 담임의 호출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담임이 콕 찍어 저도 도준과 같이 교무실에 들르라 했다니 도준의 반 보 뒤에서 사람 좋은 미소로 목례를 한다는 거였다.
“휘안이는 할아버님 잘 보내 드렸고? 지난주… 그래, 목요일! 아침 조회 끝나고 정신없이 집으로 갔잖아. 선생님도 경황이 없어서 휘안이한테 말을 못 건넨 거 있지.”
“네. 원래 아침 조회 때가 제일 바쁘잖아요. 선생님께서 걱정해주신 덕분에 저희 할아버지 잘 보내드리고 왔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조부상으로 인한 결석은 출석으로 인정되니깐 걱정하지 말라는 거. 그 말 하려고 휘안이 부른 거야. 본인 출석은 본인이 챙겨야지. 다 대학 입시에 직결되잖아.”
아, 이 정도 안내라면 아침 조회 다 끝나고 저만 따로 불러 말해줬어도 그만 아닌가.
굳이 이렇게까지 부를 건 아닌 거 같은데.
보아하니 진짜 이유는 따로 있는 거 같다.
“그리고 도준이! 오늘 우리 반에 전학생이 올 예정이야. 그래서 아침 조회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아. 선생님 대신 이 유인물 좀 들고 가서 애들한테 나눠줘. 휘안이랑 들고 갈 수 있지?”
역시나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분답네.
우리 반에 오는 전학생 소식은 꽤 의외인 게 맞지만 그렇다고 원 플러스 원인 제 심부름꾼 처지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네. 이렇게 두 줄 맞죠?”
“고맙다~ 무거우니깐 편하게들 나눠들어.”
무거우니까 편하게들 나눠들라는데 저희가 들 유인물은 기가 막히게도 높이도 같은 두 줄.
고로 이건 편할 수도 없고 나눠들 수도 없지.
물론 담임 눈에는 안중에도 없겠지만.
그렇게 담임에게 목례를 끝마치고 도준과 얼른 돌아가자는 눈짓을 주고받는데 들어올 때와는 달리 자동문이 된 교무실 문이었다.
“……!”
하얗다 못해 투명한 피부.
칠흑같이 검은 생머리.
어딘가 차가워 보이는 표정.
제가 본 이름 모를 아이의 첫 인상이었다.
리짱: 치잇~ 그렇다면 리짱도 충성! 하타치 리짱도 스물 둘 휘안이를 되찾았다는 거니까.휘안: 그러게. 올해 하타치라는 리짱. 이젠 일본에서도 이자카야에 들어갈 수 있는 나이가 됐다지? 덕분에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율혜랑 하고 싶은 데이트가 끝도 없을 거 같아.리짱: 응. 리짱도 우리 휘안이랑 해보고 싶은 데이트를 많이도 생각해놨어. 우선은 시원한 데이트부터 해볼까? 자, 여기 휘안이 얼음물!휘안이 전문가답게 준비성이 철저한 리짱.아무래도 하타치 리짱은 이 자리에 빈손으로 오기보다 양 손 무겁게 자리하기로 했다지.휘안: 에구구~ 무겁게 텀블러까지 챙겨왔어? 나 진짜 이러면 또 감동 받아서 후웅인데?리짱: 음~ 그건 정말이지 괜찮은데? 언제든 후웅 소리를 내도 좋아. 어쨌든 우리 아기 토끼들은 열사병에 취약하잖아. 특히나 우리 휘안이는 타고나기를 열이 많기도 하고. 따라서 수분 보충은 필수라는 생각에 가져왔다는 거지.휘안: 고마워, 율혜야. 사실 나도 다 기억해. 이렇게 찌는 듯이 더운 날이면 시원한 물을 수시로 마셔줘야 한다고 했잖아. 그럼 어디 우리 율혜가 챙겨온 얼음물을 들이켜 볼까~물론 우리 휘안이도 리짱 전문가였음.참고로 물 마시는 휘안이 목젖을 줌인 하고 줌아웃 하는 카메라 무빙은 수행원1의 촬영 스킬이었음.추후 그 촬영 스킬의 이유를 물어본 결과, 수행원1은 비교적 정적인 무빙보다는 역동적인 무빙을 추구해왔기 때문이라고.정말이지 다시 봐도 현란한 촬영 스킬인지라 리짱 역시 반복 재생하여 붙여넣기로 함.리짱: 응. 휘안이 물 다 마시면 가족들한테 보낼 목적으로 독사진 딱 열 장만 찍어보자. 여기 꽃다발에 토퍼까지 잘 보이게끔 해서 말이야. 참고로 더블 피스 포즈도 환영이야.휘안: 좋지. 더블 피스 포즈는 우리 율혜랑 단 둘이 사진 찍을 때도 취해야겠다. 그니까 사진 여러 장 예쁘게 찍고 얼른 차 타러 가자. 여기 계속 서 있다가는 율혜 얼굴 달아오르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까. 그편은 내가 용납 못해.만기 전역 이력과 상
부대 주차장 쪽의 입구 기준으로 왼쪽.그로부터 열여덟 번째 위치에 자리한 소나무.이 나무는 리짱에게 있어 특별한 나무였어.사시사철 푸르른 모습뿐이라 방명록 하나 걸어놓기에도 이만한 나무가 없어 보였거든.분명 계절의 변화는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데 이 나무만큼은 한 주가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변화라는 단어를 빗겨나갔다는 거거든.물론 이 나무에 대한 특별한 감상평은 오늘 이 순간을 끝으로 더는 이어지지 않을 거야.리짱만의 아기 토끼는 무려 일 년 반씩이나 되는 길고 긴 시간을 이 무섭고도 날선 땅에 할애한 끝에 전역을 명받았다는 입장이거든.그니까 이 후덥지근한 공기 틈을 헤집는 손 선풍기 바람도 에어컨 바람 못지않게 많이도 시원하다는 착각이 든다는 거지.자, 여기까지 잘들 따라오느라 수고했어.이제부터는 앞선 인트로 자막들과 달리 간결한 자막들로 새로운 재미를 더해볼게.민간인 휘안이의 전역 일기, 재밌게 봐줘.리짱: 얘들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휘안이랑 눈이 마주쳤다 싶으면 바로 알려줘야 해. 내가 나눠준 당근을 사정없이 흔들면서 말이야!수행원1: 어우, 걱정도 많으셔라~ 우리 천재 작사가에 월간 화보 장인 지율혜 양. 오늘은 우리 수행원들만 전적으로 믿어보시라니까요.수행원2: 그래. 예린이랑 난 하면 제대로 해. 그니까 앞이나 봐. 그편이 더 이득일 거야.리짱의 보디가드 겸 로드 매니저로서 리짱 곁을 벗어나지 않기로 약속한 두 수행원들.이들은 하루 반나절 리짱을 보필한 대가로 5성급 호텔의 저녁 뷔페 이용권을 받아갔다.그래서 이 같은 사실을 뭐 하러 알리냐고?전혀 무 임금 노동이 아니었다는 뜻이니 이 영상을 감상하는 내내 불편해하지 말라는 거지.리짱: 응. 이제부터는 앞만 바라볼게. 그니까 휘안이를 발견했다 싶으면 카메라 들이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야. 그것이 곧, 너희들을 고용한 목적이니까. 이건 실제 상황이야.수행원1: 알다마다. 글쎄, 촬영 구도까지 싹 다 맞춰놨다니까. 차휘안 나타나면 주저 말고 롤부터 들어가서 표정
사모는 무슨 사모.사랑해, 좋아해 하는 그 흔한 고백 멘트도 아니고 사모란 단어는 어디서 튀어나왔냐고.도준은 뒤죽박죽된 제 머리통을 부여잡고는 목덜미에서부터 열이 달아오르는 기분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내가 뭐 꽃다발을 달래, 편지를 달래. 적어도 생각이란 게 있으면 두 눈 꼭 감고 물음표로 마무리하지는 말았어야지. 어떻게 이런 최악의 멘트를 내뱉지? 이건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야.”“그럼 다시… 아니, 너야말로 지금 네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는 알아? 성소연 네 말대로 나 열흘 후면 입대야. 근데 그 상황 다 알면서도 날 기다려보겠다고? 성소연 네 의지로 날?”“못할 건 또 뭔데! 괜히 핑계대지나 말고 날이나 다시 잡아. 내가 너 일 년 반씩이나 기다려줘야 하는 입장이야. 그거 되새기면서 가능한 빠른 시일 내로 멘트 재정리하라고!”“알, 알겠어!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핑계 댄 적 단 한 번도 없거든. 그니까 딱 기다려. 다른 의미로 소름끼치게 해줄 테니까.”사모보다 더 정중한 표현이라 함은 여사님.물론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간 생각일 뿐이니 많이도 안타까워하며 괘념치는 말아라.글쎄, 어느 한 사람 말대로 정신 줄 부여잡고 휘황찬란한 말을 쏟아내도 모자랄 판국에 또 한 번의 불상사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니까.더욱이 저리도 확고하게 제 고백을 받아줄 마음이 충분하다는 의사의 상대방인 만큼 저도 눈치랄 건 있었으니까.***이리 봐도 동글. 저리 봐도 동글.어젯밤 밤톨 머리로 변신해서는 하루아침 사이 적응이 안 될 법도 하지만 워낙 타고난 두상이 예뻐서인지 자꾸만 손이 가는 휘안이.최근 한 달 사이 캡 모자부터 비니까지 머리에 착용할 수 있는 선물이란 선물은 많이도 받아온 휘안이인데.누군들 이 밤톨 머리 휘안이를 봤다가는 괜한 준 선물이었나 하고 자책하는 이들도 더러 있을 거 같다.무릇 미남이란 헤어스타일의 영향을 받을 수 없는 밤톨 머리가 됐다 한들 잘생긴 이목구비 하나로서 감탄을 이끌어낼 수 있다니 말이다.하지만
리짱이 하타치가 되고 백일은 훌쩍 더 지나야 휘안이 리짱 곁으로 돌아오는 법.따라서 핸드폰 상단 바에는 디데이 알림, 홈 화면에는 군 복무 계산기와 식단표 어플까지 설치해두고 만반의 준비를 다 해놨단다.이 정도면 리짱이 아닌 리짱의 소우주를 일 년 반씩이나 저 멀리 채가는 국방부 측에서 잔뜩 긴장해야 할 차례라는 걸 알리듯 말이다.리짱은 보이는 것 이상으로 아주 집요하고도 철두철미한 자세로 제 시간의 쳇바퀴를 돌려 나갈 예정이었다니까.“그래서 말인데 리짱의 하타치가 벌써부터 기대된다는 거야. 리짱이 하타치를 맞이하면 휘안이가 돌아올 때가 가까워졌다는 뜻이니까.”“그러게. 내후년이면 난 스물 둘. 우리 율혜는 만으로 스물. 그때 되면 쌍으로 브이하고 사진 찍기 딱 좋은 나이겠다. 그치, 율혜야?”“이런, 벌써부터 내후년을 꿈꾸는 더블 피스 포즈를 기획하다니. 그렇다면 리짱 역시 토끼 귀 포즈만 내세울래. 이 더블 피스란 누군가와 같이 해야 시너지가 커지는 법이거든. 따라서 휘안이가 돌아오기까지는 보류하는 게 맞겠어.”당장 저희의 내년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도 상황을 길게 보기로 약속했다.안녕이라는 건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니까.따라서 외부적인 요인에서 기인된 짧은 안녕 후에도 각자의 구역에서 깡과 총을 장착한 채 푱푱 더 뛰어오르기를 일순위로 여겼다는 거지.오직 저희 두 사람만을 꼭 믿은 채 말이다.***저와 비슷한 동선 내에서 한 계절 이상을 오며가며 보게 된 이들이라면 늘 상 해오던 말.제발 이성 말고 감성도 좀 챙겨봐라.하지만 그와 비슷한 질책을 들을 때면 뭐 어쩌라는 거지 하며 웃어넘겼던 기억이 많다.솔직히 저에게 있어 대다수의 사람들은 딱히 중요한 대상도 아닐뿐더러 감정 소비할 대상도 아니었으니까.그렇다면 저에게 있어 이성보다는 감성의 영역을 보다 더 활성화시킬 이들은 누구냐고?나름 한 손이 아닌 두 손 더해 꼽을 수 있다지만 이성 친구만을 기준으로 잡으면 지금으로서는 한 사람뿐일 거 같다.생활 반경이 넓어
제 선택에 의해 입영일자가 결정됐다는 통보가 떨어졌을 때는 오래도록 앓던 이를 빼낸 것 마냥 홀가분한 기분이었다.하지만 막상 하루하루가 지나가니 시작하니 이거 뭔가 대단히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 거지.제가 민간인의 신분을 반납해야 한다고요?아니, 신청한 사람이 제가 맞기는 한데 전산 시스템 내 착오가 생겼을 가능성은 없을까요?현실 수긍과 부정, 그 한가운데의 줄다리기.이래서 사람은 뭐든 겪어봐야 한다고 주변 선배들의 조언을 허투루 들을 게 아니었다.너희가 입학한 올해는 금방이고 떠나갈 거다.그러니 새내기로서 많은 추억을 쌓아두는 게 앞으로의 미래에 대비해 큰 자산이 될 거다.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올해 남들보다 뭘 좀 해봤다고 내세울만한 경력은 짜장 라면 냄새 숱하게 맡아본 게 전부였다.이 이상 더 다이내믹한 삶을 살아내고 싶다?솔직히 군대 말고는 마땅한 선택지가 없었지.그렇게 올해가 다 가기 전 반신반의하며 3차 접수를 진행했다는 건데, 저도 그렇고 휘안도 그렇고 저희 운명이 한 큐에 확정될 줄이야.덕분에 내년부터 내후년 상반기까지는 아예 나 죽었다고 생각하고 몸소 시련과 고난을 받아낼 현역병으로 지내게 생겼다니 말이다.“소안 언니~ 나는 화이트 밀크에 레인보우 스프링클로 했다. 이것 봐! 진짜 예쁘지?”“우와~ 진짜 예쁜데? 근데 민트 초코가 아니라 화이트 밀크? 율혜 민트 초코 먹을 거라고 엄청 기대했잖아. 설마 품절이었어?”“응. 민트 초코가 다 떨어졌어. 그래서 엄청 고민하면서 화이트 밀크를 골랐는데 사장님이 오늘의 추천 토핑을 무료로 주시겠다는 거야. 덕분에 아주 이득이었다는 거지.”“거기 사장님 장사 잘하시네. 안 그래도 요즘 민트 초코가 대세잖아. 민트 초코에 민트 초코 볼 추가하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겠지만 이것도 꽤나 맛있어 보여. 그나저나 초코는 떨어지지 않았겠지? 율혜랑 한 입씩 바꿔먹기로 했는데.”요즘 하도 싱숭생숭할 수밖에 없다는 휘안과 도준의 마음을 위로해줄 달콤한 주전부리 시간.율혜와 휘안은 소안에
흐르는 물에 흙과 같은 이물질을 뽀득뽀득 씻어낸 뒤 유기농 당근을 베어 물자면 단 한 번도 부정적인 감정 따위 느껴본 적 없다는 이.그런 율혜가 길쭉한 당근 스틱을 오도오독 베어 물며 제 분함을 떨쳐내려 안간힘이었다.올해 성인이 된 휘안인 만큼 어디를 가도 계속해서 말이 나왔던 휘안의 복무 계획.그렇게 율혜는 아빠에게 그 시절 군대 이야기를 들려 달라 하는 둥 제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해왔다지만 그럼에도 착잡한 마음을 다 떨쳐내기에는 많이 모자란 준비였다는 거다.휘안의 입영일자가 확정 났던 시기에는 각종 과제 제출일과 기말고사 준비 기간도 맞물려 있던 때라 괜한 걱정은 나중에 미뤄두었지.하지만 막상 종강을 맞이해서 여유로워진 이 시점에서는 그저 복무라는 두 글자에도 분한 감정이 쉽게 밀려오게 된 율혜였다.그리고 휘안은 벌써부터 그런 율혜가 눈에 밟혀서는 제 입대일 전까지 부디 그 여린 마음 한 조각이라도 다치지 않았으면 했다는 거고.“아이고, 내가 혹시라도 군대에서 가서 다쳐 올까봐~ 우리 율혜는 그게 걱정인 거구나. 그래서 분하다는 거고. 그게 납득이 안 됐어?”“응... 휘안이 다치는 거 싫어... 손가락에 조그만 가시가 박혀도 반창고를 붙여줘야 안심이라는 말이야. 근데 휘안이가 군대에 들어가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잖아. 그건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아파올 거라는 말이야.”가정에 가정을 더하다 눈망울부터 울망울망.이내 코끝마저 찡해진 느낌을 감지했는지 율혜는 그제야 휘안이 너른 가슴팍에 기대 제 호흡을 바로 가다듬기 시작했다.“에구구...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 율혜 당근 스틱 흔들다 눈물이 다 나게 생겼네. 그니까 우리 율혜는 혼자서 최악의 상황을 시뮬레이션 돌려보다 말도 못하게 속상해졌다는 거잖아.”제 스스로 휘안의 품에 찾아들었어도 제 당근 스틱은 절대 놓지 않겠다는 고사리 손.휘안은 그 고사리 손 위에 제 손을 덧대고 율혜의 잔머리를 살살 매만져 나갔다.그리고 겨우내 고개를 든 율혜를 확인하고는 율혜의 이마 위로 작은 입맞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