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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10 14:21:02

* 낯선 미소, 이름 없는 꽃

화약 연기가 채 가시지 않은 마을의 공기는 매캐했다. 한이준은 거칠게 몰아쉬던 숨을 고르며 제 품 안의 온기를 느꼈다. 린, 그녀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이준의 단단한 가슴 근육 너머로 전달되는 그녀의 가냘픈 심장 박동이 마치 전장의 소음보다 더 크게 귓전을 때렸다.

"이제 괜찮습니다. 상황 끝났어요."

이준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파편에 스친 것인지 그녀의 하얀 뺨에 붉은 핏방울 하나가 맺혀 있었다.

이준은 자신도 모르게 장갑을 벗고 투박한 손가락으로 그 핏자국을 닦아내려다 멈칫했다. 피로 물든 전장의 손이 그녀의 깨끗한 살결에 닿는 것이 송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린은 겁에 질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산조각 난 교실 창문, 엎어진 책상들, 그리고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

그녀는 곧바로 이준의 품에서 벗어나 아이들에게 달려갔다. 아이들을 하나하나 안아주며 다독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이준은 묘한 상실감을 느꼈다. 방금까지 제 품에 머물던 온기가 한여름 밤의 꿈처럼 흩어졌다.

소대원들이 마을 곳곳을 수색하며 베트공의 잔당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이준 역시 부하들을 독려하며 경계 태세를 강화했지만, 시선은 자꾸만 아이들을 챙기는 린에게 머물렀다. 그녀는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 뒤, 다시 이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흙먼지가 잔뜩 묻은 아오자이 자락을 정리하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깜언. 또 고마워요."

이번에는 한국어였다. 서툴고 투박한 발음이었지만, 그녀가 이 짧은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마음을 썼을지 짐작이 갔다. 이준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번졌다.

"한국말을 할 줄 압니까?"

린은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아주 조금 안다는 뜻인 모양이었다.

"조금... 배웠어요. 한국 군인들, 친절하니까."

그녀의 말에 이준은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친절한 군인. 죽이러 온 자들이 아니라 지키러 온 자들로 기억되고 싶다는 욕망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투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사상이 칼날처럼 대립하는 곳이었다.

마을 주민 중 누군가는 낮에는 웃으며 다가오고, 밤에는 죽창을 든다. 그런 불신이 팽배한 전장에서 그녀의 미소는 위험할 정도로 순수했다.

그날 이후, 이준의 일과는 그녀를 중심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주둔지 주변을 순찰할 때면 린의 교실 앞을 지나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졌다. 린 역시 그런 이준을 알아챘는지, 수업 중간에 그를 발견하면 창가에서 작게 손을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어느 날 오후, 이준은 보급품으로 들어온 사탕 몇 알을 챙겨 그녀의 교실을 찾았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사탕을 받아 들었고, 린은 그런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준은 그녀에게도 사탕 하나를 내밀었다.

"이것도 먹어봐요. 단것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린은 사탕을 받아 입에 넣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달아요. 정말... 예뻐요."

맛이 예쁘다는 표현이 생소했지만, 이준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린은 답례로 교실 구석 낡은 병에 꽂혀 있던 이름 모를 야생화 한 송이를 건넸다.

"이건 이름이 뭡니까?"

"몰라요. 그냥... 우리 땅에서 피는 꽃."

이준은 그 보랏빛 작은 꽃을 건네받았다. 거친 군복 주머니에 넣기엔 너무나 연약한 생명이었다.

'이 이름 없는 꽃처럼, 너도 이 전쟁이 끝나면 잊혀야 할 존재일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이준은 고개를 저었다. 한국에 있는 어머니의 얼굴보다, 어쩌면 린의 낯선 미소가 더 선명하게 가슴을 파고들고 있었다. 하지만 평화로운 순간은 길지 않았다. 마을의 촌장이 이준을 찾아와 은밀하게 경고를 남겼다.

"한 병장, 조심하게. 요즘 마을 청년들 몇몇이 보이지 않아. 밤마다 북쪽에서 내려온 자들과 접선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네."

촌장의 눈에는 깊은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공산주의. 그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이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족을 찢어놓고, 이웃을 고발하게 하며, 모든 인간적인 정을 말살시키는 거대한 괴물이었다.

만약 린이 가르치는 아이들의 부모가, 혹은 린 자신이 그들의 위협에 노출된다면. 이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

며칠 뒤, 소대는 야간 매복 작전에 투입되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숨소리조차 죽인 채 숲속에 몸을 숨기고 있을 때였다. 멀리 마을 쪽에서 불길이 솟았다. 이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작전 구역을 이탈할 수 없었지만, 그의 정신은 이미 린의 교실로 달려가고 있었다. 무전기에서는 긴박한 목소리들이 오갔다. 베트공의 소규모 습격조가 마을의 식량 창고와 관공서를 공격했다는 보고였다.

다음 날 새벽, 서둘러 마을로 돌아온 이준은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마을 광장 한복판에 몇몇 주민들이 포박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붉은 완장을 찬 사내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중에는 이준이 사탕을 주었던 아이의 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반동분자들이다! 외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들에게는 오직 죽음뿐이다!"

사내의 외침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이준은 총을 겨누며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소대장이 그의 팔을 잡았다.

"참아, 한 병장. 지금 나서면 민간인 피해가 더 커져. 상부 지시를 기다려야 해."

"하지만 저들은 무고한 사람들입니다!"

이준의 눈에 광장 구석에서 떨고 있는 린이 보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이 강조하는 '평등'과 '해방'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저 피비린내 나는 현장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어제의 이웃에게 총구를 겨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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