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린의 시선이 숨어 있던 이준과 마주쳤다. 그녀의 눈은 간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제발 도와달라고, 이 광기를 멈춰달라고. 이준은 무력감에 치를 떨었다. 군인으로서의 규율과 사나이로서의 끓는 피가 충돌했다.
결국 그날 몇몇 주민들이 소리 소문 없이 끌려갔다. 광장에 남은 것은 흩어진 붉은 흙과 주인을 잃은 신발 한 짝뿐이었다. 밤이 되자 린은 이준을 찾아 주둔지 외곽으로 왔다. 그녀의 아오자이는 여기저기 찢겨 있었고, 얼굴은 초췌했다.
"한... 도와주세요. 그들이 다시 올 거예요. 다음은 저일지도 몰라요."
린이 이준의 옷깃을 잡고 매달렸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준은 그녀를 품에 안아 체온을 나누어 주었다.
"가지 마세요, 린. 내가 당신을 지킬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은 약속이자 선언이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이방인 병사는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해진 여인을 위해 기꺼이 지옥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린은 이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포성이 들리지 않는 밤이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미 가장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전쟁,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시작이었다. 이준은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어두운 숲 너머를 응시했다. 그곳에는 붉은 눈을 번뜩이는 사상의 괴물들이 숨죽인 채 다음 사냥감을 노리고 있었다.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없을지도 몰라.'
불안한 예감이 엄습했지만, 이준은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이 가냘픈 여인을 지키지 못한다면, 자신이 총을 든 이유조차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베트남의 우기는 슬픔처럼 끈적거렸고, 붉은 대지는 피와 섞인 빗물을 삼키며 신음하고 있었다. 이준과 린, 두 사람의 운명은 그렇게 폭풍 전야의 고요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 정글의 그림자 아래서
베트남의 정글은 낮에는 증기를 뿜어내는 가마솥이었고, 밤에는 만 개의 눈을 가진 거대한 짐승이었다. 한이준은 야간 매복을 마치고 복귀하는 길에 눅눅한 안개 사이로 비치는 이른 새벽의 빛을 응시했다.
군복은 이미 땀과 이슬에 절어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고, 어깨를 짓누르는 단독군장의 무게는 오늘따라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이 안개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수풀 사이로 이름 모를 새들이 울어댔다. 그 소리조차 누군가의 신호일지 모른다는 강박이 그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한국의 산야는 이토록 적대적이지 않았다. 고향의 숲은 지치면 등을 내어주는 포근함이 있었지만, 이곳의 숲은 외지인의 생명을 호시탐탐 노리는 칼날과 같았다.
기지로 돌아가는 길목, 이준은 잠시 대열에서 떨어져 마을 외곽의 작은 개울가로 향했다. 어제 기습의 흔적이 아직 가시지 않은 마을은 죽은 듯 고요했다.
그때, 물기를 머금은 공기 사이로 은은한 향기가 섞여 들었다. 화약 냄새도, 썩어가는 낙엽 냄새도 아닌, 아주 맑고 깨끗한 비누 향기였다.
그곳에는 린이 있었다. 그녀는 개울가 바위에 앉아 피 묻은 천 조각들을 빨고 있었다. 어제 부상당한 주민들을 치료할 때 썼던 붕대인 모양이었다. 아침 햇살이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 위로 떨어져 눈부시게 빛났다. 이준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그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 유일하게 색채를 띤 풍경이었다.
린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 밑에는 짙은 피로가 서려 있었지만, 이준을 발견하자마자 입가에 희미한 안도의 빛이 스쳤다.
"한... 무사했군요."
그녀의 서툰 한국어가 아침 안개를 뚫고 이준의 가슴에 안착했다. 이준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자신의 수통을 꺼내 깨끗한 물을 그녀의 마른 손등 위로 부어주었다.
"밤새 한숨도 못 잤나 보군요. 얼굴이 반쪽이 됐습니다."
이준의 말에 린은 슬프게 웃었다.
"아이들이 무서워해요. 밤마다 숲에서 들리는 소리가... 총소리인지, 귀신 소리인지 물어봐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어요."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이준은 그 손을 꽉 잡아주고 싶다는 충동을 억눌렀다. 군인인 자신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총자루를 쥐는 힘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신 자신의 주머니에서 구겨진 비스킷 봉지를 꺼내 그녀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이거라도 좀 먹어요. 기운을 차려야 아이들도 돌볼 것 아닙니까."
린은 비스킷을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 이슬 같은 눈물이 고였다.
"한은 왜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는 거죠? 우리는...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고, 당신은 전쟁을 하러 온 사람인데."
이준은 잠시 침묵했다. 그 질문은 스스로에게도 수없이 던졌던 것이었다.
"전쟁을 하러 온 건 맞지만, 누군가를 아프게 하려고 온 건 아닙니다. 적어도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에게는요."
'지키고 싶은 사람.'
그 말속에 린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린은 비스킷 봉지를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마치 그것이 이 잔인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받은 선물인 것처럼.
하지만 그들의 짧은 평화는 정글의 그림자 아래서 도사리는 적들의 존재로 인해 늘 위태로웠다. 마을 청년들 중 몇몇이 보이지 않는다는 소문은 현실이 되어 돌아왔다.
공산주의자들은 '인민의 해방'이라는 구호를 앞세워 마을 사람들의 정신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밤마다 집집마다 찾아가 식량을 빼앗고, 젊은이들을 정글 속 비밀 기지로 끌고 갔다.
린의 교실에도 변화가 생겼다. 가장 영특하던 소년 하나가 며칠째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린은 그 아이의 집을 찾아갔지만, 아이의 어머니는 문도 열어주지 않은 채 울음 섞인 목소리로 가라고만 소리쳤다.
"그들이 아이를 데려갔어요, 한. 총을 쥐여주고, 부모를 고발하라고 가르친대요.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죠?"
교실 뒤편에서 이준을 만난 린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준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상이 인간의 도리보다 우선시되는 광기. 그것이 지금 이 땅을 뒤덮고 있는 공산주의의 민낯이었다. 그들은 가족의 유대를 끊고, 오직 당에 대한 충성만을 요구했다."그게 그들이 말하는 혁명입니다. 인간을 기계로 만드는 혁명이죠."이준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이미 전선에서 그런 광경을 수없이 목격했다.자식의 손에 죽어가는 부모, 형제를 배신하고 훈장을 받는 청년들.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톱니바퀴는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으며 굴러가고 있었다.린은 고개를 저으며 괴로워했다. 그녀에게 교육은 희망을 심어주는 일이었지만, 현실은 그 희망을 비웃듯 어둠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준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린, 당신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꿈을 꾸게 하는 것. 그것이 저들의 총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질 날이 올 겁니다."린은 이준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묵직한 군복에서 나는 화약 냄새와 땀 냄새가 신기하게도 그녀를 안심시켰다."약속해 줘요, 한. 절대로... 저들처럼 변하지 않겠다고. 끝까지 따뜻한 사람으로 남아주겠다고."이준은 그녀의 머릿결에 가만히 턱을 괴었다."약속합니다. 당신의 미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이 전장의 가장 어두운 곳까지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그날 밤, 이준은 초소에서 홀로 달빛을 받으며 린이 주었던 보랏빛 야생화를 꺼내 보았다. 꽃잎은 말라 비틀어졌지만, 그 향기는 여전히 살아있는 듯했다.'만약 이 전쟁이 끝나고, 우리가 살아남는다면.'이준은 결코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를 가정을 해보았다. 그녀를 데리고 한국의 사계절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산과 진달래 피는 봄의 언덕을. 붉은 대지가 아닌, 생명이 움트는 그 땅에서 그녀와 함께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싶다는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현실의 바람은 차가웠다. 정글 깊은 곳에서 부엉이 울음소
린의 시선이 숨어 있던 이준과 마주쳤다. 그녀의 눈은 간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제발 도와달라고, 이 광기를 멈춰달라고. 이준은 무력감에 치를 떨었다. 군인으로서의 규율과 사나이로서의 끓는 피가 충돌했다.결국 그날 몇몇 주민들이 소리 소문 없이 끌려갔다. 광장에 남은 것은 흩어진 붉은 흙과 주인을 잃은 신발 한 짝뿐이었다. 밤이 되자 린은 이준을 찾아 주둔지 외곽으로 왔다. 그녀의 아오자이는 여기저기 찢겨 있었고, 얼굴은 초췌했다."한... 도와주세요. 그들이 다시 올 거예요. 다음은 저일지도 몰라요."린이 이준의 옷깃을 잡고 매달렸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준은 그녀를 품에 안아 체온을 나누어 주었다."가지 마세요, 린. 내가 당신을 지킬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그것은 약속이자 선언이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이방인 병사는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해진 여인을 위해 기꺼이 지옥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린은 이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포성이 들리지 않는 밤이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미 가장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사랑이라는 이름의 전쟁,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시작이었다. 이준은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어두운 숲 너머를 응시했다. 그곳에는 붉은 눈을 번뜩이는 사상의 괴물들이 숨죽인 채 다음 사냥감을 노리고 있었다.'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없을지도 몰라.'불안한 예감이 엄습했지만, 이준은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이 가냘픈 여인을 지키지 못한다면, 자신이 총을 든 이유조차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베트남의 우기는 슬픔처럼 끈적거렸고, 붉은 대지는 피와 섞인 빗물을 삼키며 신음하고 있었다. 이준과 린, 두 사람의 운명은 그렇게 폭풍 전야의 고요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정글의 그림자 아래서베트남의 정글은 낮에는 증기를 뿜어내는 가마솥이었고, 밤에는 만 개의 눈을 가진 거대한 짐승이었다. 한이준은 야간 매복을 마치고 복귀하는 길에 눅눅한
* 낯선 미소, 이름 없는 꽃화약 연기가 채 가시지 않은 마을의 공기는 매캐했다. 한이준은 거칠게 몰아쉬던 숨을 고르며 제 품 안의 온기를 느꼈다. 린, 그녀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이준의 단단한 가슴 근육 너머로 전달되는 그녀의 가냘픈 심장 박동이 마치 전장의 소음보다 더 크게 귓전을 때렸다."이제 괜찮습니다. 상황 끝났어요."이준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파편에 스친 것인지 그녀의 하얀 뺨에 붉은 핏방울 하나가 맺혀 있었다.이준은 자신도 모르게 장갑을 벗고 투박한 손가락으로 그 핏자국을 닦아내려다 멈칫했다. 피로 물든 전장의 손이 그녀의 깨끗한 살결에 닿는 것이 송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린은 겁에 질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산조각 난 교실 창문, 엎어진 책상들, 그리고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그녀는 곧바로 이준의 품에서 벗어나 아이들에게 달려갔다. 아이들을 하나하나 안아주며 다독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이준은 묘한 상실감을 느꼈다. 방금까지 제 품에 머물던 온기가 한여름 밤의 꿈처럼 흩어졌다.소대원들이 마을 곳곳을 수색하며 베트공의 잔당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이준 역시 부하들을 독려하며 경계 태세를 강화했지만, 시선은 자꾸만 아이들을 챙기는 린에게 머물렀다. 그녀는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 뒤, 다시 이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흙먼지가 잔뜩 묻은 아오자이 자락을 정리하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깜언. 또 고마워요."이번에는 한국어였다. 서툴고 투박한 발음이었지만, 그녀가 이 짧은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마음을 썼을지 짐작이 갔다. 이준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번졌다."한국말을 할 줄 압니까?"린은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아주 조금 안다는 뜻인 모양이었다."조금... 배웠어요. 한국 군인들, 친절하니까."그녀의 말에 이준은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친절한 군인. 죽이러 온 자들이 아니라 지키러 온 자들로 기억되고 싶다는 욕
* 이방인의 계절, 붉은 흙의 땅습한 열기가 군복 안감을 파고들어 살죽을 짓눌렀다. 한이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헬멧 아래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한국의 여름과는 차원이 다른, 마치 거대한 찜통 속에 갇힌 듯한 불쾌한 감각이었다. 1968년, 베트남의 중부 전선은 그렇게 질척이는 열기로 이방인을 맞이하고 있었다.'도대체 여기가 어디라고.'이준은 소총을 고쳐 쥐며 주위를 경계했다. 울창한 밀림은 언제든 죽음을 뱉어낼 준비가 된 거대한 짐승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뭇잎 하나가 흔들리는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이곳에서 적은 보이지 않았다. 땅 밑에 숨어 있거나, 나무 뒤에 숨어 있거나, 아니면 평범한 농민의 얼굴을 한 채 등 뒤에서 대창을 휘둘렀다."한 병장님, 또 멍 때리십니까? 그러다 베트공 놈들이 목 따갑니다."옆에서 걷던 박 일병이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이준은 대답 대신 묵직한 군화를 옮겨 붉은 흙바닥을 밟았다. 비라도 내릴 모양인지 하늘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공기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화약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파병을 자원했을 때의 결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가난한 집안 형편을 일으켜 세우고 싶다는 소박한 욕망과 국가의 부름이라는 거창한 명분은, 동료의 창자가 쏟아져 나오는 전장 한복판에서 비명과 함께 휘발되었다. 이준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살아남아 돌아가는 것뿐이었다.그날 오후, 이준의 소대는 '빈호아' 인근의 작은 마을에 주둔하게 되었다. 전략촌으로 지정된 이곳은 남베트남 정부의 통제하에 있다고는 했으나, 밤이 되면 누가 주인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공간이었다. 이준은 마을 어귀에 있는 낡은 우물가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그때였다.나무 그늘 사이로 하얀 옷자락이 나풀거렸다. 이준은 반사적으로 총구를 그쪽으로 돌렸다."누구냐!"날카로운 외침에 수풀이 흔들리더니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아오자이를 입고 목에는 낡은 책가방을 멘 여인이었다. 그녀는 갑작스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