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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은 제가 정하겠습니다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6 03:51:09

에드윈 마르켈의 마지막 공판은 첫 심리가 끝난 지 닷새 뒤 열렸다.

그사이 새로운 범죄가 발견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법무부가 닷새 동안 한 일은 이미 법정에 제출된 기록에서 무엇이 확인되었고 무엇이 확인되지 않았는지를 다시 나누는 일이었다. 리아에게 제3단계 매개체를 이식하라고 지시한 사람은 에드윈이었고, 이안의 생존과 안정화를 이용해 그 명령을 실행하게 한 것도 에드윈이었다. 리아에게서 얻은 반응은 제4단계 전사 연구에 사용됐고, 이안은 제5단계 정착용 그릇으로 지정됐다. 에드윈은 리시안이 살아 있는 제어핵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뒤에도 그 연구를 기존 제어망에 연결했고, 자동 기동 가능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제6단계 접속을 시도했다.

반면 에르반 저택의 화재를 직접 지시하거나 실행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리시안을 처음 살아 있는 제어핵으로 만든 사람이라는 증거도 없었으며, 제6단계에서 제5단계 반응이 갑자기 끌려 들어간 순간 그 흡인을 직접 명령했다는 기록도 발견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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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자와 결혼한 여우의 사정   이름을 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황실 재산관리국의 전수 조사 결과는 예상보다 두꺼웠다.리시안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책상 위에는 전날까지 없었던 갈색 서류철 하나가 놓여 있었다. 봉인 위에는 황실 재산관리국의 문장과 담당관 아델라 로웬의 이름이 찍혀 있었고, 그 아래에는 작게 에르반 구 영지 내 장기 거주 및 사용 현황 1차 조사 보고라고 적혀 있었다.리시안은 외투를 벗다가 그대로 멈췄다.“왔네.”뒤따라 들어오던 리아가 그의 어깨 너머로 서류철을 봤다.“그거야?”“응.”“열일곱 집?”“아마.”리아는 곧장 책상 앞으로 가려다가 리시안을 돌아봤다.“지금 볼 거야?”리시안은 시계를 확인했다. 재활까지 한 시간 남짓 남아 있었다. 손은 이미 봉인 가까이까지 가 있었다. 엄지로 봉인 가장자리를 한 번 문지르던 리시안이 그대로 손을 거뒀다.“재활 끝나고.”리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진짜?”“왜.”“예전 같으면 지금 뜯었을 것 같아서.”“예전의 내가 언제인데?”“한 사흘 전?”“너 나를 너무 성급한 사람으로 보는 거 아니야?”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리시안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으며 서류철을 책상 오른쪽 끝으로 밀어두었다. 그런데 두 걸음쯤 문으로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봐. 역시 뜯으려고—”리시안은 서류를 뜯는 대신 그 위에 다른 종이 한 장을 엎어놓았다.“자꾸 보이잖아.”“그게 더 신경 쓰는 사람 같은데.”“가자.”리아가 웃으며 먼저 나갔다. 리시안도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고 뒤따랐다.갈색 서류철은 그대로 남았다.⸻그날 치료사는 네 걸음을 허락했다.첫 번째 네 걸음을 성공한 뒤 며칠 동안 세 걸음과 휴식일을 번갈아 거쳤고, 오른쪽 다리의 반응도 안정적이었다. 추가적인 감각 저하도 없었고 마력 역류도 나타나지 않았다.그렇다고 훈련량이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오늘은 네 걸음 한 번입니다.”치료사가 말했다.“한 번.”리시안이 확인했다.“네.”“기립은요?”“보행 후 상태를

  • 사자와 결혼한 여우의 사정   거절한 기록도 남아 있었습니다

    다음 날 리시안은 세 걸음을 걸었다.네 걸음이 아니었다.아침 검사가 끝난 뒤 치료사가 오늘 훈련량을 말했을 때 리시안은 아주 잠깐 입을 다물었다. 어제 네 번째 걸음을 내디딘 다리는 밤사이 충분히 쉬었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특별한 통증은 없었다. 발끝의 저림도 평소 수준으로 돌아와 있었다.그래서 조금은 기대했던 모양이었다.“세 걸음입니까?”“네.”“상태가 나빠졌습니까?”“아닙니다.”치료사는 기록지를 돌려 보여주었다. 어제 네 번째 걸음을 걸은 뒤 오른쪽 무릎의 떨림이 평소보다 오래 지속됐고, 앉은 직후에는 발끝 감각도 일시적으로 둔해졌다. 모두 예상 범위 안에서 회복됐지만 새로운 부하에 몸이 제대로 적응했는지 확인하려면 적어도 하루는 기존 단계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리시안이 기록지를 한참 들여다봤다.리아가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싫어?”“조금.”솔직한 대답이었다.치료사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수 있습니다.”“그래도 세 걸음이죠?”“네.”리시안은 더 흥정하지 않았다. 지지대를 잡고 일어나 호흡을 정리한 뒤 첫 번째 걸음을 옮겼다. 두 번째는 오른쪽 무릎이 흔들리지 않는지 확인하며 천천히, 세 번째는 전날보다 조금 안정적으로 내디뎠다.그리고 멈췄다.어제와 똑같은 재활실이었지만 세 번째 걸음 뒤에 보이는 바닥은 전날과 조금 달라 보였다.저 너머를 한 번 가봤기 때문이었다.리시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네 번째 걸음을 놓았던 자리로 향했다.치료사가 바로 말했다.“오늘은 거기까지입니다.”“압니다.”입으로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한 번 더 바닥을 보는 바람에 리아가 피식 웃었다.“엄청 가고 싶은 얼굴인데.”“가고 싶지.”“그런데 안 가네.”“선생님이 가지 말랬잖아.”치료사가 기록지에 무언가 적다가 고개를 들었다.“아주 훌륭한 판단입니다.”리시안이 미묘한 얼굴로 돌아봤다.“왜 어린애 칭찬하는 것처럼 들립니까?”“어제 네 번째 걸음을 걷고 나서 다섯 번째는 언제 걷느냐고 물어보려던 분이니까요.”“물어보진 않

  • 사자와 결혼한 여우의 사정   네 번째 걸음은 허락받고 걷습니다

    리시안이 아버지의 수첩을 펼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누군가 곁에 있을 때도 아니었고, 특별히 마음을 먹고 책상 앞에 앉은 것도 아니었다. 평소처럼 눈을 뜨고 약을 먹은 뒤 하인이 가져다준 따뜻한 물을 반쯤 마셨다. 재활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고, 창밖에는 전날 밤 내린 비가 난간 끝에 조금씩 맺혀 있었다.책상 위에는 어젯밤 그대로 두었던 두 가지가 있었다.접어둔 에르반 영지 지도.그리고 아버지의 수첩.리시안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채 한참 그것들을 바라봤다.어제는 지도부터 펼쳤다. 서쪽 제분소 뒤에 메이라 홀튼의 집을 표시하고, 그 옆에 아직 이름도 제대로 외우지 못한 열여섯 가구의 위치를 작은 점으로 남겼다. 그 일을 끝내고 나서야 수첩에 손을 댔지만 결국 열지 않았다.오늘은 반대였다.지도를 건드리지 않고 수첩을 집었다.낡은 가죽 표지에 손가락을 올리고 잠시 기다렸다. 심장이 빨리 뛰는 것도 아니었고 손이 떨리지도 않았다. 이상할 만큼 평범했다.그래서 오히려 첫 장을 넘길 수 있었다.처음 나온 것은 예상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북쪽 제방 보수. 우기 전에 석재 추가 필요.리시안의 눈이 멈췄다.다음 줄.밀 수확량 전년 대비 감소. 서부 농가 종자 지원 검토.그 아래에는 비용으로 보이는 숫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리시안은 눈을 깜빡이고 다음 장을 넘겼다.마구간 지붕 누수.서쪽 우물 수질 검사.도란에게 겨울 장작 배분량 다시 확인할 것.그리고 페이지 아래쪽에 전혀 다른 내용이 하나 끼어 있었다.리시안 검술 수업 또 도망감.“…….”리시안의 표정이 묘해졌다.바로 아래에는 작은 글씨가 덧붙어 있었다.뒤뜰 나무 위에서 발견. 내려오라고 하니 배고프다고 함.리시안이 수첩을 조금 멀리 떨어뜨렸다.기억났다.아주 희미하게.검술 선생이 싫어서 뒤뜰 나무 위로 올라갔던 날이었다. 찾으러 온 아버지가 화를 낼 줄 알았는데, 한참 올려다보다가 정말 배가 고프냐고 물었다.그 뒤의 기억은 조금 더 선명했다.아버지가 하

  • 사자와 결혼한 여우의 사정   돌아온 사람이 있다고 떠날 필요는 없습니다

    리아의 빨간 리본은 다음 날 아침에도 침대 옆 탁자 위에 있었다.어젯밤 잠들기 직전에 풀어둔 그대로였다. 아침 햇빛이 창문을 넘어 탁자 끝까지 들어왔을 때 리아는 한동안 그 리본을 바라봤다고 했다. 다시 머리에 묶을까 고민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손가락으로 매듭 자국이 남은 천을 한 번 쓸어보고 방을 나왔다.그 이야기를 굳이 먼저 꺼낸 사람도 리아였다.“오늘은 안 묶을 거야.”아침 식탁에 앉아 빵을 반으로 뜯던 리아가 갑자기 선언했다.리시안은 수프를 한 숟가락 뜨려다 말고 동생을 봤다. 전날 면담에서 돌아온 뒤에도 리아가 꽤 오랫동안 리본을 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 얼굴이었다.“누가 물어봤어?”“아무도.”“그런데 왜 말해?”리아는 뜯은 빵 한쪽을 수프에 적셨다.“내 마음이니까.”리시안의 입술이 한 번 달싹였다. 예전 같았으면 ‘그럼 굳이 왜 말하느냐’고 한마디 더 했을 텐데, 요즘은 동생과 말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그 끝이 어디쯤일지 짐작하는 법부터 배우고 있었다.“……그래.”결국 그것만 말하고 다시 수프를 먹었다.리아는 자기가 이겼다는 듯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내일은 묶을 수도 있어.”“그것도 네 마음이지.”“응.”“미리 말 안 해도 되고.”리아의 숟가락이 그제야 멈췄다.“오빠 요즘 말이 많아졌어.”“누구 때문인데.”“치료사?”“너.”“왜 나야?”“네가 말을 계속 시키잖아.”“나는 대답하라고 한 적 없는데.”리시안이 할 말을 잃었다.맞은편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레오나르드가 찻잔을 입에 댔다. 웃음을 감추려는 것이 너무 뻔해서 나는 식탁 아래로 그의 무릎을 살짝 건드렸다. 황금빛 눈이 나를 향했다. 나는 웃지 말라는 뜻으로 눈짓했는데, 오히려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리아는 그런 우리를 보지 못한 채 리시안의 접시를 내려다봤다.“그런데 오빠 오늘은 다 먹어.”“먹고 있잖아.”“어제는 반 남겼잖아.”“어제는 피곤했으니까.”“오늘은?”리시안은 잠시 자기 몸의 상태를 확인하듯 다리를 내려다

  • 사자와 결혼한 여우의 사정   기다린 마음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습니다

    에르반가에 다녀온 다음 날, 리시안은 늦잠을 잤다. 정확히는 치료사가 깨우지 못하게 했다.“어제 장거리 이동에 현장 확인까지 했습니다. 오늘 오전 재활은 없습니다.”아침 식탁에서 그 말을 들은 리시안은 숟가락을 든 채 굳었다.“아예요?”“아예입니다.”“세 걸음도?”“오늘 오전에는 없습니다.”“그럼 오후에는요?”치료사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상태를 보고 결정하겠습니다.”“걷지 않으면 상태가 좋은지 어떻게 압니까?”“환자분은 걸어야만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리시안의 입이 다물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아가 빵에 잼을 바르며 중얼거렸다.“또 졌네.”“나는 지금 싸우는 게 아니야.”“맨날 지는 사람은 그렇게 말해.”“누구한테 배운 말이야?”“내가 만들었어.”“요즘 네가 만드는 말은 왜 다 나를 공격하지?”“쓸 데가 오빠밖에 없으니까.”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레오나르드도 웃으려다가 리시안과 눈이 마주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를 마셨다.“방금 웃으셨죠?”“아닌데.”“웃으셨습니다.”“증거 있어?”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그거 내 말인데.”“좋은 말은 같이 쓰는 거야.”“돈 내요.”“왜?”“내가 만들었으니까.”“얼마?”리아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리시안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둘을 번갈아 봤다.평범한 아침이었다. 어제 십이 년 만에 불탄 집을 보고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리아는 평소처럼 빵을 먹었고, 리시안은 재활을 못 한다고 불평했다. 레오나르드는 리아가 잼을 너무 많이 바른다고 했다가 자기 접시의 고기를 빼앗겼고,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있던 과일 접시를 슬쩍 내 쪽으로 옮겼다.그리고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하인이 편지 한 통을 가지고 들어왔다.“리시안 에르반 님께 황실 재산관리국에서 전달된 서신입니다.”리시안의 표정이 달라졌다.어제도 같은 곳에서 문서를 받았다. 에르반가의 잔존 재산과 작위 및 가문 복원 절차, 그리고 결정을 유예할 수 있다는 안내였다. 오

  • 사자와 결혼한 여우의 사정   집인지, 옛집인지

    이틀 뒤.리시안은 세 걸음을 걸었다.첫 번째 걸음은 안정적이었다.두 번째 걸음에서는 오른쪽 무릎이 아주 조금 흔들렸지만 스스로 중심을 잡았다.세 번째 걸음을 내디딘 뒤에는 치료사가 손을 떼었다.“하나.”리아가 먼저 세기 시작했다.“둘.”리시안이 숨을 골랐다.“셋.”발끝이 조금 움직였다.“넷.”허리는 곧게 펴져 있었다.“다섯.”치료사가 리시안의 무릎을 살폈다.“여섯.”리아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일곱.”리시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여덟.”“앉으세요.”리시안은 곧바로 앉았다.토를 달지 않았다.네 번째 걸음을 내딛으려 하지도 않았다.의자에 앉은 뒤에는 먼저 자기 다리를 내려다봤다. 오른쪽 무릎을 천천히 굽혔다 폈다가 발끝을 움직여보고, 눈을 감은 채 몸 안쪽의 마력 흐름까지 확인했다.치료사가 물었다.“어떻습니까?”“오른쪽 발바닥이 조금 저립니다.”“어제보다?”“비슷합니다. 통증은 없고, 어지러움도 거의 없습니다.”“역류는요?”리시안이 조금 더 기다렸다.“없습니다.”치료사는 손목의 맥과 마력 회로를 확인했다.리아가 옆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기다렸다.마침내 치료사가 손을 놓았다.“좋습니다.”리아의 얼굴이 밝아졌다.리시안은 더 빨랐다.“그럼 갈 수 있습니까?”치료사가 대답하기도 전에 리아가 끼어들었다.“에르반가.”“알고 있습니다.”“오늘.”“그것도 알고 있습니다.”“마차도 준비했어요.”“그건 왜 벌써 준비했습니까?”리아가 레오나르드를 가리켰다.“저 사람이.”레오나르드가 억울한 얼굴로 리아를 봤다.“네가 준비해달라고 했잖아.”“그래서 준비했잖아요.”“그럼 네가 준비한 거지.”“돈은 대공님 거잖아요.”레오나르드가 입을 다물었다.리아가 이겼다.요즘 자주 보는 광경이었다.나는 웃음을 참으며 치료사를 봤다.“상태는 괜찮은 거죠?”“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그 말에 리시안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치료사가 바로 손을 들었다.“끝까지 들으십시오.”리시안이 다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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