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는 대공의 것이 아니다

황후는 대공의 것이 아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6
By:  Jino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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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을 위해 아르벤 제국에 시집온 노르덴 공주 엘리네. 3년 동안 황제의 장식으로 살았다. 결혼 3주년 연회, 북부 전선에서 돌아온 대공 칼릭스가 황후에게 춤을 청한다. 3분. 그리고 엘리네는 황제 서재에서 고향 노르덴을 칠 침공 지도를 본다. 같은 전쟁을 막으려는 남자와 손을 잡는다. «황제를 끌어내린다. 끝나면 서로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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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첫 춤

『황궁 공보: 황제 부부의 결혼 3주년 축하 연회가 열렸다.』

아드리안은 엘리네의 앞을 지나 에스텔에게 손을 내밀었다.

붉은 드레스 자락이 대리석 바닥에 끌렸다. 에스텔이 부채를 접어 시종에게 맡기고 황제의 손을 잡았다. 악사들이 활을 들었다. 첫 음이 울리자 황제는 에스텔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엘리네는 웃는 얼굴로 잔을 들었다.

잔 안의 포도주는 입술에 닿지 않았다. 마주 선 귀부인이 엘리네의 손을 보고서야 자기 잔을 내렸다.

“오늘 연회가 참 아름답습니다, 황후 폐하.”

“준비하는 사람들이 애를 썼어요.”

“꽃도 노르덴에서 가져왔다지요.”

탁자마다 흰 꽃이 놓여 있었다. 노르덴에서는 여름에 피는 꽃이었다. 겨울에 구하려면 온실을 빌리고 마차 안에도 불을 피워야 했다.

엘리네는 꽃병에 꽂힌 줄기의 끝을 보았다. 잎이 대부분 잘려 있었다.

“먼 길을 왔으니 물을 자주 갈아 주라고 해야겠어요.”

귀부인이 고개를 숙였다. 더 할 말을 찾지 못한 입술이 잠깐 벌어졌다가 닫혔다. 엘리네는 먼저 시선을 돌려 주었다.

아드리안이 에스텔에게 무슨 말을 했다. 에스텔은 고개를 조금 젖혀 웃었다. 황제의 금발과 에스텔의 귀걸이가 등불 아래서 선명하게 보였다.

엘리네가 선 곳까지 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등 뒤에서 마리엔이 작게 불렀다.

“공주님.”

엘리네는 잔을 쥔 손을 조금 내렸다.

마리엔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노르덴에서 함께 온 시녀는 아직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호칭을 틀릴 때가 있었다.

“목이 마르시면 물을 가져올까요?”

“괜찮아. 이 잔만 맡아 줘.”

마리엔이 잔을 받다가 엘리네의 오른쪽 손목을 보았다. 장갑 끝의 단추가 하나 풀려 있었다. 시녀가 손을 뻗으려 하자 엘리네는 팔을 가볍게 내렸다.

“나중에.”

황제의 첫 춤이 끝나기도 전에 시녀에게 장갑을 고치게 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이미 엘리네를 충분히 보고 있었다.

춤을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척하는 사람이 나뉘어 있었다. 기둥 옆의 젊은 부인은 부채를 편 채 엘리네 쪽을 살폈고, 그 옆 남자는 악단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엘리네는 목을 곧게 세웠다. 노르덴의 사절이 서는 자리는 비어 있었다. 결혼 기념 연회일 뿐이니 먼 북쪽에서 왕족이 올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누가 편지를 쓴다면 오늘 밤의 일을 적을 터였다. 황제는 정부와 첫 춤을 추었고, 노르덴에서 온 황후는 옆에서 웃고 있었다고.

에스텔의 치맛자락이 돌아갔다. 붉은 천 아래로 구두 끝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엘리네는 악사들이 같은 구절을 되풀이하는 것을 들었다. 곧 첫 춤이 끝났다. 아드리안은 에스텔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박수를 받았다.

엘리네도 손뼉을 쳤다.

오른쪽 장갑이 손등 쪽으로 조금 밀렸다. 풀린 단추 아래로 맨살이 보였다. 엘리네는 손을 포개어 가렸다.

그때 연회장 문 옆에서 의전관이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칼릭스 아르벤 대공 전하께서 드십니다.”

문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먼저 돌아보았다.

엘리네도 고개를 들었다. 황제에게 이복동생이 있다는 것은 알았다. 북부군을 이끄는 대공이며, 엘리네가 제국에 온 뒤로 줄곧 전선에 있었다.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문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검은 예복을 입고 있었다. 어깨에 눈도 먼지도 없었지만, 장화에는 자주 닦아 생긴 주름이 남아 있었다. 다른 남자들의 허리에 달린 장식용 검과 달리 칼집에는 보석이 없었다.

남자가 걸음을 멈추자 의전관이 몸을 깊이 숙였다.

“북부에서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수고했습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엘리네는 검은 머리 아래 드러난 얼굴을 보았다. 황제와 닮은 곳을 찾기는 어려웠다. 아드리안은 웃을 때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고, 칼릭스는 앞에 난 길을 보며 걸었다.

사람들이 알아서 비켰다.

방금 전까지 황제에게 향하던 얼굴들이 조금씩 방향을 바꾸었다. 누군가 낮게 귀환을 축하했고, 다른 사람은 북부의 날씨를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칼릭스는 황제 앞에 멈춰 섰다.

“폐하.”

“드디어 왔군. 3년 만인가.”

아드리안은 에스텔에게 잔을 건네며 동생을 보았다.

“씻고 쉬어도 됐을 텐데. 오늘은 사람이 많아.”

“연회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내 결혼 기념일이지. 기억은 하고 있었나?”

“축하드립니다.”

아드리안이 웃었다. 손가락에 낀 반지 넷 가운데 하나를 엄지로 밀어 돌렸다.

“그럼 즐기다 가게. 북부에는 이런 자리가 드물 테니.”

엘리네는 시선을 내렸다. 황제의 말이 끝났으니 칼릭스는 군부 사람들이 모인 쪽으로 갈 터였다. 그쪽에서 벌써 자리를 벌려 두고 있었다.

하지만 구두 소리는 엘리네 앞에서 멎었다.

가까이서 보니 키가 컸다. 엘리네가 얼굴을 보려면 턱을 조금 들어야 했다. 검은 예복의 깃은 단정히 잠겨 있었다.

칼릭스가 고개를 숙였다.

“황후 폐하.”

“돌아오신 것을 환영해요, 대공 전하.”

처음 나누는 인사였다. 엘리네는 준비된 말에 짧은 말을 더했다.

“먼 길에 피곤하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칼릭스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춤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옆에서 부채 접히는 소리가 났다.

엘리네는 내민 손을 보았다. 흰 장갑을 낀 손이었다.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새 곡을 준비하던 악사들 사이에서 활 하나가 내려갔다. 귀부인이 마저 잇지 못한 말이 가까이서 끊겼다. 연회장 전체가 조용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엘리네 주위에서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시동생이 형수에게 춤을 청하는 일 자체가 잘못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황제 부부의 결혼 기념일이었다. 황제는 다른 여자와 첫 춤을 추었고, 엘리네는 아직 누구와도 춤추지 않았다. 칼릭스가 내민 손을 모두 보고 있었다.

엘리네는 황제 쪽을 보지 않았다.

허락을 구한다면 아드리안은 웃으며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할 터였다.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저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엘리네가 청한 춤이 되어 버렸다.

칼릭스는 손을 더 가까이 내밀지 않았다.

거절해도 거둘 수 있는 거리에 두고 기다렸다. 그 손끝에서 눈을 뗀 엘리네가 칼릭스의 얼굴을 보았다. 웃음도 재촉도 없었다.

엘리네는 포개 두었던 손을 풀었다.

“좋아요.”

오른손을 올리자 장갑 너머로 단단한 손바닥이 닿았다.

칼릭스는 그제야 몸을 돌렸다. 엘리네가 먼저 발을 옮길 자리를 남겨 두고 나란히 걸었다. 등 뒤에서 누군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악단 앞에 이르자 지휘자가 활을 들었다.

엘리네는 왼손을 칼릭스의 어깨에 얹었다. 예복 안쪽이 단단했다. 칼릭스의 오른손은 허리에 놓였고, 맞잡은 손은 엘리네의 어깨보다 낮은 곳에서 멈췄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춤의 간격이었다.

첫 음이 울렸다.

엘리네는 오른발을 뒤로 뺐다. 드레스 밑단이 구두에 걸리지 않도록 발끝을 돌렸다. 칼릭스가 같은 박자에 따라왔다.

첫 회전이 끝나고 나서야 엘리네는 칼릭스가 춤에 익숙하다는 것을 알았다.

걸음이 크지 않았다. 힘으로 방향을 바꾸지도 않았다. 엘리네가 움직이면 그만큼 자리를 내주었고, 돌아설 때는 다른 쌍이 있는 쪽을 먼저 확인했다.

사람들이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낮은 목소리가 연회장 둘레에서 들렸다. 엘리네는 어느 말도 알아듣지 않으려 했다. 대신 악사들의 손과 바닥의 이음매를 차례로 보았다.

벨모르에 오기 전에는 이런 바닥에서 춤추지 않았다.

노르덴 왕궁의 마룻장은 모서리가 들뜬 곳이 있었다. 유겐은 그곳을 피하려다 늘 같은 방향으로만 돌았고, 춤 선생은 유겐에게 다른 쪽도 연습하라며 손뼉을 쳤다.

지금 발밑은 고른 대리석이었다. 발을 헛디딜 곳이 없는데도 엘리네는 구두 안에서 발가락을 굽혔다 폈다.

악단의 둘째 구절이 시작됐다.

이 곡은 3분이었다.

엘리네는 마지막 박자까지 알고 있었다. 결혼식 전에 익혔고, 그 뒤로도 연회가 열릴 때마다 들었다. 황제가 엘리네를 찾지 않는 날에는 잔을 든 채 끝까지 듣기만 했다.

오늘은 눈앞에 검은 예복의 깃이 있었다.

엘리네가 시선을 올리자 칼릭스와 눈이 마주쳤다. 칼릭스는 곧 엘리네가 움직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유를 묻고 싶었다.

황제의 동생이니 엘리네의 체면을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돌아온 첫날이라 궁정의 사정을 몰랐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춤추는 동안 물을 말은 아니었다.

회전하며 맞잡은 손이 바깥쪽으로 향했다.

풀린 장갑 끝이 다시 벌어졌다.

엘리네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장갑을 당겨 올리려면 손을 놓아야 했다. 막 춤을 시작한 두 사람을 보고 있는 얼굴들이 정면에 있었다.

칼릭스의 시선이 잠깐 내려갔다.

다음 걸음에서 손을 고쳐 잡았다. 엘리네의 오른손을 다른 손으로 받아 몸 가까이 이끌고, 회전이 끝나자 다시 왼손으로 받았다.

박자는 어긋나지 않았다.

바뀐 손바닥의 위치가 엘리네의 손목을 가렸다. 장갑 끝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칼릭스는 단추를 만지지 않았다. 고쳐 주려 하지도, 엘리네를 내려다보며 괜찮은지 묻지도 않았다. 그저 맞잡은 손의 높이를 조금 낮췄다.

엘리네는 어깨에서 힘을 뺐다.

칼릭스의 손가락이 오른손의 굳은살에 닿았다. 가운뎃손가락 옆에 남은 자국이었다. 장갑을 껴도 펜을 오래 쥐던 자리는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엘리네는 무심코 손가락을 오므렸다가 폈다.

칼릭스의 손은 그대로였다.

탁자 옆에서 마리엔이 빈 쟁반을 들고 있었다. 시녀는 엘리네의 손목을 보고, 이어 칼릭스를 보았다. 그러고는 쟁반을 배 앞에 붙여 들었다.

엘리네는 시녀에게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춤의 방향이 바뀌며 황제가 보였다.

아드리안은 에스텔 옆에 서 있었다. 잔을 든 손을 내린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에스텔의 부채는 펼쳐지지 않은 상태였다.

엘리네의 발끝이 치맛단 안에서 멎을 뻔했다.

허리에 놓인 손이 밀거나 당기지 않았다. 칼릭스는 엘리네가 다음 발을 옮길 때까지 보폭을 줄였다. 엘리네는 박자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이번에는 황제를 지나 악단을 보았다.

바이올린을 켜는 악사의 소매 끝이 닳아 있었다. 활이 위로 올라갔다. 마지막 구절이었다.

맞잡은 손을 놓을 때가 다가오자, 엘리네는 자신이 단추를 잊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칼릭스는 춤을 추는 동안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그런데도 웃는 얼굴을 계속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엘리네가 밟는 자리와 남은 간격만 보면 됐다.

마지막 회전에서 드레스가 칼릭스의 장화에 스쳤다.

음악이 끝났다.

칼릭스는 먼저 허리에서 손을 뗐다. 엘리네가 어깨에 얹었던 손을 내리자 맞잡은 손도 놓았다.

박수가 울렸다.

엘리네는 오른손을 왼손 아래로 넣었다. 칼릭스가 고개를 숙였다. 가까이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노르덴 산길 지도를 그리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엘리네의 손이 멎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는 모두 알았다. 동맹을 위해 시집온 둘째 공주라는 것도, 수를 잘 놓는다는 것도 연회에서 자주 들었다.

지도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없었다.

엘리네는 칼릭스를 다시 보았다. 누구에게 들었느냐고 묻기 전에 옆에서 구두 소리가 났다. 사람들 사이가 벌어지고 아드리안이 걸어왔다.

칼릭스가 몸을 돌려 황제를 향했다.

예복의 깃 위로 왼쪽 목이 드러났다. 흰 흉터가 귀 아래에서 깃 안쪽까지 이어져 있었다. 엘리네는 처음 보는 자국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드리안이 동생과 엘리네를 번갈아 보았다.

박수는 이미 그쳐 있었다. 황제는 손가락의 반지를 돌리며 웃었다.

“동생이 황후를 좋아하나 보군.”

(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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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서가 사이
『황궁 공보: 황궁 도서관의 북부 자료 열람은 정상 운영된다.』엘리네는 마지막 줄에서 손을 뗐다.“빠진 이름이 있나요?”“뒤에 도착한 보고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칼릭스는 책을 든 채 서가 너머에 서 있었다. 엘리네가 보고의 다음 장을 넘겼다. 빈 종이 뒤에는 다른 부대의 기록이 이어졌다.“고친 기록은 따로 있나요?”“군에 있습니다.”“여기에는 왜 그대로 두었을까요?”“요약본을 다시 만들지 않았으니까요.”엘리네는 수첩을 폈다. 적어 둔 제목 아래에 펜을 대려다가 멈췄다.“제가 적어도 되는 숫자인가요?”“예.”펜촉이 종이를 긁었다. 엘리네는 숫자 옆에 출처를 적을 자리를 남겼다. 칼릭스가 들고 있는 책의 모서리가 서가 밖으로 나와 있었다.“대공 전하께 들었다고 적을게요.”“알겠습니다.”엘리네는 이름까지 적고 펜을 내려놓았다. 칼릭스는 더 말하지 않았다. 군복의 소매가 조금 움직였고, 책이 선반 위에 놓였다.문 쪽에서 수레 바퀴가 삐걱거렸다. 사서가 눕혀 둔 사다리를 다른 직원과 들고 나가고 있었다.엘리네는 통행세 장부를 다시 폈다.“여기는 군대가 출발하기 전에 수레를 돌려보냈다고 되어 있어요.”“읽었습니다.”“말만 보낸 기록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고요.”“수레가 못 가도 말은 갈 수 있습니다.”“말도 못 가게 되면요?”칼릭스가 서가의 빈칸으로 엘리네를 보았다.“짐을 나눕니다. 사람에게도 싣습니다.”엘리네는 장부를 누르고 있던 추를 옮겼다. 천 끝이 페이지 사이에 끼어 있었다. 종이를 당기지 않고 추부터 들어 냈다.“그럼 하루에 가는 거리가 줄겠네요.”“예. 보급을 받는 날도 늦어집니다.”“돌아오는 길에 쓸 식량까지 가져가야겠어요.”“돌아올 때 남아 있을 창고를 정해 둡니다.”칼릭스의 대답은 짧았다. 엘리네는 보수 목록에 나온 창고 이름을 찾아 수첩 옆에 놓았다.“이곳인가요?”칼릭스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서가에 가려 글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엘리네는 책을 들어 보이려다 내려놓았다. 묶음의 끈이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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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서재
『황궁 공보: 노르덴 국왕께 보내는 황실 서한을 준비한다.』에스텔은 접은 부채로 손바닥을 눌렀다.“북부 기록을 보셨나 봅니다.”엘리네는 수첩 옆에 놓인 책을 덮었다.“찾는 자료가 있었어요.”“대공 전하께 여쭤보시면 빠르겠네요. 도서관 기록보다 잘 아실 테니까요.”문밖에서는 아직 구두 소리가 들렸다. 엘리네는 그쪽을 보지 않고 잉크병 마개를 닫았다.“기록과 다른 숫자를 알려 주셨어요.”“그러셨군요.”에스텔의 시선이 펼쳐진 수첩에 머물렀다. 엘리네는 잉크가 마른 것을 확인하고 접는 자를 거두었다.“이 자리를 쓰실 건가요?”“아니요. 폐하께서 책을 찾아 오라 하셔서요.”에스텔이 사서를 불렀다. 엘리네는 마리엔에게 반납할 책을 건넸다. 수첩을 닫기 전에 물길 옆에 찍은 점이 보였다.길이 바뀐 곳은 표시하겠다고 했다. 칼릭스는 알겠다고 답했다.그 말 뒤에는 다음에 언제 볼 수 있는지 묻지 못했다.◊겨울 첫째 달 7일, 황제의 시종이 황후궁에 왔다.엘리네는 수틀을 무릎에서 내려놓았다. 바늘에 꿴 실이 천 아래로 늘어졌다.“서재로 오시라는 말씀인가요?”“예, 황후 폐하. 노르덴 국왕께 보내는 서한에 서명이 필요하십니다.”“지금요?”“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시종은 문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엘리네는 실을 짧게 자르고 바늘을 천에 꽂았다.황제의 서재에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엘리네가 확인할 서류는 시종장이 가져왔다. 인장이 필요한 날에도 황제는 사람을 보냈다.마리엔이 겉옷을 가져왔다.“황후 폐하, 소매를 조금만 걷어 주세요.”엘리네가 손을 들자 마리엔이 손목의 레이스를 안으로 정리했다.“서명하실 때 잉크가 묻을까 봐요.”“그렇게 두면 되겠어.”“장갑도 드릴까요?”“벗어야 하니까 괜찮아.”엘리네는 서랍에서 은 컴퍼스를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수틀 아래에 두었던 손수건도 챙겼다. 마리엔은 엘리네의 소매가 걸리지 않도록 문을 더 열었다.본궁으로 이어진 복도에서 근위병이 길을 비켰다. 시종은 문 앞에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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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동맹
『황궁 공보: 양국의 우의를 담은 황실 서한을 봉한다.』“손에 뭘 쥐고 있소?”엘리네는 주머니 안에서 손가락을 폈다. 경첩에 눌린 자리가 아팠다.“컴퍼스예요.”“서명하는 데 그런 것도 쓰나?”“늘 지니고 다녀요. 아버지께 받은 거라서요.”아드리안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서한을 당겨 서명부터 살폈다.“꿀 이야기도 적으시오. 그대 말 때문에 사람을 다시 부를 수는 없으니.”엘리네는 펜을 들었다. 꿀을 잘 받았고, 아버지의 건강을 바란다고 썼다. 종이 아래에 빈 곳이 조금 남았다.펜촉을 받침에 내려놓자 황제가 서한을 가져갔다.“이제 가 봐도 좋소.”“예, 폐하.”엘리네는 의자를 밀어 넣었다. 창 아래 탁자로 눈을 돌리지 않고 문까지 걸었다.문밖에서 마리엔이 겉옷을 펼쳤다.“오래 걸리셨네요. 손이 차세요?”“주머니에 넣고 있었어.”마리엔이 소매를 잡아 주었다. 손을 넣는 동안 서재 안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노르덴행 문서는 함께 봉하라고 해.”황제의 말에 시종이 대답했다. 마리엔이 엘리네의 옷깃을 여몄다. 엘리네는 시종이 문을 닫을 때까지 서 있었다.◊황후궁의 저녁 식탁에는 수프와 익힌 채소가 놓였다.엘리네는 숟가락으로 수프를 떴다가 내려놓았다. 식탁 건너편 의자는 비어 있었다. 시녀가 빵 접시를 가까이 밀어 주었다.“다른 것으로 가져올까요?”“아니에요. 이것이면 돼요.”엘리네는 빵을 조금 떼어 먹고 물을 마셨다. 시녀가 접시를 거두어도 좋을지 눈으로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방으로 돌아오자 마리엔이 머리핀을 빼 주었다. 거울 아래에는 낮에 쓰던 수틀이 놓여 있었다. 자른 실 끝이 천 밖으로 나와 있었다.“오늘은 여기까지 하실 거죠?”“응. 서류함을 가져다줘.”“어느 것을요?”“노르덴에서 올 때 가져온 것. 인장 달린 서류가 든 함.”마리엔이 옷장 아래에서 함을 꺼냈다. 엘리네는 열쇠를 찾아 뚜껑을 열었다.혼인 때 오간 문서와 물품 목록이 차례로 들어 있었다. 노르덴에서 실어 온 가구, 겨울옷, 은식기. 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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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초대장
『황궁 공보: 북부군 추모 미사에 황실의 예를 갖춘다.』서쪽 담 밖 창에는 불이 없었다.엘리네는 창문 걸쇠에서 손을 떼었다. 겨울 첫째 달 9일 아침이었다. 마리엔이 탁자에 잔을 놓고 커튼을 마저 걷었다.“오늘은 바깥이 좀 맑아요.”“길에 눈은?”“밤에 치웠대요. 본궁에서 서쪽 문까지요.”엘리네는 의자를 밀어 넣었다. 조약 사본은 서류함에 넣어 잠갔지만, 서재에서 본 날짜를 적은 종이는 아직 책 아래에 있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마리엔이 문밖에서 봉투를 받아 왔다. 황실 문장이 아닌 대공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대공 저택에서 왔어요. 답을 기다리신대요.”엘리네는 잔을 내려놓았다.봉투 안에는 초대장과 참석 절차를 적은 종이가 들어 있었다. 초대장 아래에 칼릭스 아르벤의 이름이 보였다.『북부군 전몰 병사 추모 미사에 황후 폐하를 모십니다.』장소는 대공 저택에 딸린 예배당이었다. 미사 뒤에는 참석한 유족들에게 차와 식사를 낸다고 적혀 있었다.엘리네는 따로 붙인 종이를 펼쳤다. 황실을 대표할 황족 한 사람의 참석을 요청했으며, 황제의 일정은 본궁에서 확인을 마쳤다는 내용이었다.“폐하께서도 가시니?”“오신 분께 물어볼까요?”“아니. 시종장에게 확인해 줘. 내가 가면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도.”마리엔이 나간 뒤 엘리네는 봉투를 뒤집어 보았다. 뒷면에는 다른 글이 없었다. 초대장에도 미사에 관한 말만 있었다.도서관에서 칼릭스는 단둘이 있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늘은 유족과 장교들 앞에서 엘리네를 맞겠다는 초대였다.엘리네는 초대장을 탁자에 놓았다.잠시 뒤 시종장이 마리엔과 함께 들어왔다. 손에는 이미 펼쳐 본 일정표가 들려 있었다.“황제 폐하께서는 참석하지 않으십니다. 황후 폐하께서 가신다면 황실의 헌화도 함께 맡아 주시면 됩니다.”“참석하지 않으면요?”“황실 이름으로 꽃만 보내게 됩니다.”엘리네는 초대장에 적힌 유족 접대 순서를 다시 읽었다.“제가 갈게요.”“수행 인원을 정하겠습니다.”“마리엔도 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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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없어진 장
『황궁 공보: 추모 미사에 참석한 황후가 황실의 뜻을 전했다.』엘리네는 찻잔에서 손을 뗐다.복도에서 쟁반을 든 시종이 지나갔다. 마리엔이 길을 비켜 주었다가 다시 문 곁에 섰다. 칼릭스는 그쪽을 보지 않고 엘리네의 대답을 기다렸다.“제가 서재에 갔다는 건 누가 알려 드렸나요?”“본궁에서 황후 폐하의 서명을 기다리느라 군무 보고가 늦어졌습니다. 제게도 대기하라는 전갈이 왔습니다.”“그것만으로 제가 무엇을 봤는지 아신다고요?”칼릭스가 찻주전자를 내려놓았다.“그 지도는 제가 수도로 돌아오기 전부터 서재에 있었습니다. 북부에서 올린 보고에 첨부된 지도입니다.”엘리네는 무릎 위의 봉투를 눌렀다. 종이 모서리가 손가락에 닿았다.“제가 보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요.”“그렇습니다.”칼릭스는 곧바로 대답했다.“보셨는지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아는 것처럼 말씀드린 건 제 잘못입니다.”엘리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칼릭스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문밖에서 수행 기사가 자세를 바꿨다. 칼집 끝이 문틀에 닿는 소리가 났다. 엘리네가 고개를 돌리자 기사는 허리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열린 문으로는 응접실 탁자까지 보였다. 차를 마시는 엘리네와 칼릭스를 가릴 것은 없었다.엘리네는 봉투를 탁자 가장자리에 놓았다.“봄 첫째 달 10일.”칼릭스의 시선이 봉투에서 올라왔다.“맞습니까?”“예.”“군사 3만도요?”“예.”엘리네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잔을 내려놓은 뒤 손잡이 방향을 바로 잡았다.“노르덴은 동맹국이에요.”“알고 있습니다.”“전하께서는 북부군 사령관이시죠.”“그렇습니다.”“그런 분이 제게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뭔가요?”칼릭스는 대답하기 전에 복도를 보았다. 빈 찻잔을 거두러 오던 시종이 문 앞에서 멈췄다.“나중에 부르겠습니다.”시종이 물러났다. 칼릭스는 문을 닫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그날 회색 고개를 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엘리네는 봉투 위에서 손을 뗐다.“넘을 수는 있어요.”칼릭스가 엘리네를 보았다.“사람이 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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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열쇠
『황궁 공보: 황후궁의 물품과 출입 열쇠를 점검한다.』마리엔이 촛대를 조금 내렸다. 촛농이 받침 안으로 흘렀다.“열쇠는 제 주머니에 있었어요.”“알아. 네 것을 누가 가져갔다는 말은 아니야.”엘리네는 자물쇠에서 손을 뗐다. 마리엔이 들고 있던 열쇠를 받아 책상에 놓았다. 고리에는 방문 열쇠와 서랍 열쇠가 함께 걸려 있었다.“내 것도 가져와 줘.”마리엔은 옷장 안쪽 상자에서 같은 모양의 꾸러미를 꺼냈다. 엘리네는 서랍 열쇠를 나란히 놓고 홈을 맞췄다. 어느 쪽도 휘거나 닳은 곳이 없었다.“시종장이 가진 것도 같겠지?”“처음 왔을 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공주님 것을 잃어버리면 내주신다고요.”“그리고 본궁에 한 벌.”마리엔이 문을 돌아보았다.엘리네는 열쇠를 각각의 고리에 돌려 끼웠다. 남은 지도 6장은 다시 끈으로 묶었다. 매듭을 당기기 전에 종이 끝을 살폈다. 접힌 자리는 모두 익숙했다.없어진 장만 누가 꺼내 갔다.엘리네는 묶음을 서랍에 넣고 잠갔다.“내일 시종장을 만나 볼게.”“지도 이야기를 하실 거예요?”“아니. 열쇠부터 확인하려고.”마리엔은 촛대를 내려놓았다. 손수건은 아직 다른 손에 쥐고 있었다.“제 주머니도 다시 찾아볼게요.”“열쇠는 여기 있어.”엘리네가 고리를 들어 보였다.“네가 놓친 게 있는지 찾지 마. 누가 들어올 수 있었는지 알아보는 거야.”마리엔은 손수건을 펴서 접었다. 엘리네는 그 손이 멎은 뒤에야 열쇠를 건넸다.“오늘은 네가 가지고 있어. 평소대로.”방문이 닫힌 뒤 엘리네는 서랍 앞에 의자를 놓았다. 밤중에 누가 문을 연다면 의자부터 보일 자리였다.옷을 갈아입으러 가기 전, 서랍 손잡이를 한 번 더 당겼다.◊아침 식사를 물리자 시종이 빈 찻잔을 거두었다. 엘리네는 새로 온 우편을 살피는 대신 시종장의 근무 장소를 물었다.“황후궁 물품실에 계십니다. 열쇠와 장부를 맞추고 계십니다.”“내가 가겠다고 전해 줘.”시종이 쟁반을 든 채 멈췄다.“이리로 부르실까요?”“확인할 물건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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