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붉은여우 수인인 그녀가 황금사자 수장의 아내가 된 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필요한 것을 얻는 순간 조용히 사라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날 속인 건 용서하지.” 황금빛 눈이 그녀를 집요하게 좇았다. “하지만 내 아내가 도망치는 건 허락한 적 없어.” 사자를 속이고 떠나려는 여우와, 처음부터 여우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 사자. 두 사람의 위험하고 은밀한 결혼생활이 시작된다.
View More결혼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사랑해서 하는 결혼. 가문을 위해 하는 결혼. 정략을 위한 결혼. 그리고. “계약 기간은 1년.” 나는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황금빛 머리카락. 햇빛을 그대로 녹여 만든 듯한 눈동자. 단단한 턱선과 넓은 어깨. 검은 제복 위로도 숨길 수 없는 압도적인 체격. 제국에서 가장 강한 육식계 수인. 황금사자 일족의 수장. 레오나르드 발테리온. 그리고 오늘부터. 내 남편. ……서류상으로만. “1년 후에는 합의 이혼.” 나는 계약서의 마지막 조항을 확인하며 말했다. 레오나르드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혼 기간 동안 서로의 사생활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래.” “각자의 침실을 사용하고.” “그래.”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부부 행세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 말 듣고 계세요?” “듣고 있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그래만 하세요?” 그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순간. 내 머리 위에 솟아 있던 붉은 귀가 움찔했다. ……젠장.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귀를 눕혔다. 여우의 귀는 쓸데없이 솔직하다. 놀라면 움직이고. 당황해도 움직이고. 기분이 좋아도 움직인다. 그렇다고 잘라버릴 수도 없고. “문제가 없으니까.” “…….” “네가 원하는 조건이 내가 원하는 조건과 같아.” “그건 다행이네요.” 나는 다시 계약서로 시선을 내렸다. 이 결혼은 철저한 거래였다. 발테리온 공작가는 후계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정확히는. 후계자를 만들라는 황실과 원로원의 압박 때문에. 하지만 레오나르드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반대였다. 결혼을 해야 했다. 붉은여우 일족인 로제니아 가문은 오래전부터 상업으로 부를 쌓았다. 돈은 많았다. 아주 많았다. 문제는. 권력이 없었다. 그리고 최근. 아버지가 쓰러졌다. 친척이라는 작자들이 하나둘 가문을 뜯어먹기 위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을 막으려면. 그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이름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발테리온. 황금사자의 이름. 레오나르드는 귀찮은 혼담을 막기 위해 아내가 필요했고. 나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남편의 이름이 필요했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1년 후 깔끔하게 헤어진다. 완벽한 거래였다. 나는 펜을 들었다. “그럼 서명하죠.” 사각. 계약서 아래에 이름을 적었다. 세리아 로제니아. 오늘부터는. 세리아 발테리온이겠지만. 고작 1년뿐이었다. 레오나르드도 펜을 들었다. 사각. 그의 이름이 내 이름 옆에 적혔다. 레오나르드 발테리온. “됐네요.” 나는 계약서를 들어 올렸다. “그럼 1년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공작님.”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공작님?” “네.” “결혼했는데?” “계약결혼이잖아요.” “…….” “설마 여보라고 부르길 원하세요?” 레오나르드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나는 웃음을 참았다. 황금사자라고 해서 얼마나 무서운가 했더니. 놀리는 재미가 꽤 있었다. “걱정 마세요. 공식 석상에서는 제대로 불러드릴 테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어디 가지?” “제 방이요.” “아직 설명이 끝나지 않았다.” “무슨 설명이요?” “저택.”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처음 이곳에 들어왔다. “집사가 해주면 되잖아요.” “내가 한다.” “공작님이 직접요?” “내 아내가 살 곳이니까.” “…….” 내 아내. 별것 아닌 말인데. 귀가 또 움찔했다. 나는 재빨리 귀를 눕혔다. 레오나르드의 시선이 내 머리 위로 향했다. “……왜요?” “아무것도.” “지금 제 귀 봤죠?” “봤다.” “보지 마세요.” “내 앞에 있는데 어떻게 안 보지?” “…….” 말을 참자. 계약 첫날부터 싸울 필요는 없다. 나는 심호흡했다. “안내해 주세요.” 레오나르드가 먼저 걸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열 걸음쯤 걸었을 때. 문득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 남자. 진짜 크다. 나는 수인 중에서도 작은 편이 아니었다. 붉은여우 일족은 평균적인 체격이었다. 그런데 레오나르드 옆에 있으니 내가 유난히 작아 보였다. 어깨도 넓고. 등도 크고. 다리도 길고. “뭘 보지?” “헉.”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안 봤는데요?” “거짓말.” “……사자는 뒤에도 눈이 달렸어요?” “냄새가 달라졌다.” 내 걸음이 멈췄다. “뭐라고요?” 레오나르드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섰다.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봤다. “당황하면 냄새가 달라지는군.” “…….” “재미있네.” “……공작님.” “왜.” “계약서에 조항 하나 추가할게요.” “뭔데?” “냄새 맡지 않기.” 처음으로. 레오나르드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건 불가능해.” “왜요?” “숨을 쉬지 말라는 건가?” “제 냄새에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잖아요!” 내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멀리 서 있던 하인들이 흠칫했다. 레오나르드는 태연했다. 오히려 내 머리 위를 보며 말했다. “귀.” “…….” “서 있다.” 나는 황급히 양손으로 귀를 눌렀다. “보지 마세요!” 이번에는. 확실히 봤다. 레오나르드가 웃었다. 아주 짧게. 하지만 분명히.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 결혼. 생각보다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 결혼식은 일주일 뒤 열렸다. 제국 전체가 떠들썩했다. 황금사자와 붉은여우의 결혼. 사교계에서는 세기의 결혼이라고 했다. 누구도 몰랐다. 신랑과 신부가 결혼식 일주일 전에 계약서부터 작성했다는 사실을. “신부 입장!” 문이 열렸다. 수백 명의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새하얀 드레스. 붉은 머리카락. 그 사이로 드러난 붉은 귀. 평소라면 숨겼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수인의 결혼식에서 귀와 꼬리를 숨기는 것은 상대를 배우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래서. 내 뒤로 풍성한 붉은 꼬리가 드레스 자락 위로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제단 앞. 레오나르드가 서 있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금빛 사자 귀. 그리고 뒤로 늘어진 굵은 황금빛 꼬리. ……처음 봤다. 나는 잠시 걸음을 늦췄다. 레오나르드가 사람들 앞에서 수인화를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다고 들었다. 그런데. 오늘은 완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계약결혼이라도 형식은 제대로 갖추겠다는 의미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나는 그의 앞에 섰다. “세리아 로제니아.” 사제가 물었다. “레오나르드 발테리온을 배우자로 받아들이겠습니까?” “네.” 레오나르드에게도 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받아들인다.” 반지가 교환됐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제 부부가 되었습니다.” 박수가 터졌다. 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끝났다. 이제 형식적인 입맞춤만 하면. “…….” 잠깐. 입맞춤? 계약서에. 이거에 대한 내용이 있었나? 나는 황급히 레오나르드를 올려다봤다. 그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나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적당히 해요.” “뭘.” “입맞춤이요.” “어떻게?” “그냥 닿는 척만.” “알았다.” 다행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따뜻한 손이 허리를 감쌌다. “……!” 몸이 그대로 레오나르드 쪽으로 당겨졌다. 순식간에 가슴이 그의 몸에 닿았다. 놀라 눈을 뜨려는 순간. 입술이 닿았다. 짧게. 정말 짧게.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레오나르드가 움직이지 않았다. 입술이 그대로 맞닿아 있었다. 하나. 둘. 셋. 이 인간이? 나는 그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그제야 레오나르드가 떨어졌다.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내 얼굴은 이미 뜨거워져 있었다. “적당히 하랬잖아요.”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적당히 했다.” “어디가요?” “혀는 안 썼는데.” “……!” 귀가. 확 솟았다. 레오나르드의 황금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이 남자. 일부러 이러는 거다. ⸻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내 방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갔다. “미친 사자.” 귀가 아직도 뜨거웠다. 나는 침대에 엎어졌다. “계약결혼이라며.” 결혼식에서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나? 아무리 남들 앞이라고 해도. “……혀는 안 썼는데?”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으아아악!” 꼬리가 침대를 마구 두드렸다. 한참 후에야 겨우 진정했다. 그래. 오늘만 지나면 된다. 이제 각자의 생활을 하면 된다. 나는 이곳에서 로제니아 가문을 정리할 시간을 벌고. 레오나르드는 귀찮은 혼담에서 벗어나고. 1년 후. 깔끔하게 이혼. 완벽하다. 똑똑. “부인.” 문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왜?” “공작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뭘?” “……담요를.” “담요?” 문을 열었다. 시녀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황금빛 털로 만들어진 담요가 있었다. 아니. 잠깐. 이 냄새. 나는 담요에 코를 가까이 댔다. 익숙했다. 오늘 하루 종일 맡았던. 짙고 묵직한 향. “……이거.” 시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공작님의 털로 만든 담요라고 합니다.” “…….” “황금사자 일족에서는 배우자에게 자신의 털로 만든 물건을 선물하는 전통이 있다고…….” “돌려보내.” “하지만.” “당장.” 그때였다. “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복도 끝. 레오나르드가 서 있었다. 편한 검은 셔츠 차림. 목 단추가 몇 개 풀려 있었다. 결혼식 때와 달리 흐트러진 금발. 그리고. 황금빛 귀와 꼬리. 나는 담요를 가리켰다. “이거 뭐예요?” “선물.” “왜요?” “결혼했으니까.” “계약결혼이잖아요.” “그래도 결혼은 결혼이지.” “필요 없어요.” 레오나르드의 눈썹이 꿈틀했다. “왜.” “공작님 냄새가 너무 많이 나요.” 순간. 복도가 조용해졌다. 시녀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레오나르드의 눈빛이 변했다. “내 냄새가 싫어?” “싫다기보다…….” 나는 담요를 들어 보였다. “이 정도면 제가 공작님 몸에 파묻혀 자는 거랑 뭐가 달라요?” 정적. 시녀가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떨리는 걸 보니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레오나르드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왜, 왜 와요?” “확인하려고.” “뭘요?”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가 허리를 숙였다. 코끝이 내 머리카락 가까이 닿았다. 숨결이 귓가를 스쳤다. “……!” 내 귀가 바짝 섰다. 레오나르드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공작님!” 나는 그를 밀어냈다. “냄새 맡지 말라고 했죠!” “확인했다.” “뭘요!”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내 냄새가 거의 안 나.” “어디서요?” “너한테.” “당연하죠!” “당연하지 않아.” 그의 황금빛 눈이 내 목덜미를 향했다. 순간. 이상하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배우자인데.” “……계약 배우자.” “다른 놈들은 모른다.” “네?” “네가 내 아내라는 걸 냄새로 알아야 하니까.” “…….”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리고 겨우 입을 열었다. “계약서.” “뭐?” “계약서 가져오세요.” “왜.” “조항 추가할 거예요.” “또?” 나는 손가락을 하나 펼쳤다. “첫째. 냄새 맡지 않기.” 두 번째. “둘째. 자기 냄새 묻히지 않기.” 세 번째. “셋째.” 나는 레오나르드를 노려봤다. “영역 표시 금지.” 레오나르드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싫은데.” “……뭐라고요?” “앞의 두 개는 노력해 보지.” 그가 말했다. “세 번째는 안 돼.” “왜요?” 황금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 순간. 사람의 모습인데도. 거대한 사자가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본능이라.” “…….” “고칠 수가 없어서.” 나는 그때는 몰랐다. 그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그리고 앞으로 1년 동안. 이 황금사자가 얼마나 뻔뻔하게 계약을 어길 것인지도. 더더욱. 몰랐다. :::다음 날 아침, 리시안은 다섯 번째 걸음을 묻지 않았다.치료사가 먼저 새 보행화를 벗겨 오른쪽 발목을 확인했다. 복사뼈 주변에 눌린 자국은 없었고, 발가락 감각도 전날과 같았다. 무릎을 굽혔다 펴는 동안 통증도 없었다. 다만 종아리 뒤쪽을 눌렀을 때 전날보다 아주 조금 단단한 부분이 있었다.“아픕니까?”“아니요.”“당기는 느낌은요?”리시안이 발목을 천천히 움직여봤다.“조금 있습니다.”치료사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세 걸음 하겠습니다.”리아가 이제는 놀라지도 않고 말했다.“어제 네 걸음 했으니까 오늘 세 걸음.”치료사가 웃었다.“꼭 그것만으로 정하는 건 아닙니다.”“그래도 맞았잖아요.”“오늘은 맞았습니다.”리시안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신발을 다시 신었다. 오른쪽 신발의 지지대를 조절한 뒤 천천히 일어섰다.오늘 기립은 다섯 번이었다.첫 번째에는 체중이 왼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두 번째부터 바로잡았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안정적이었다. 다섯 번째에는 일어난 상태로 열을 셀 동안 오른쪽 다리에 힘이 과하게 들어가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조절했다.잠깐 쉬고 걷기를 시작했다.첫 번째.두 번째.세 번째.어제 네 번째를 밟았던 자리보다 한 발 앞에서 멈췄다.“끝.”치료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리시안은 돌아와 앉았다.이번에는 아쉽다는 생각이 전날보다 덜했다. 네 걸음을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매일 네 걸음을 증명할 필요는 없었다.치료사는 오른쪽 종아리를 다시 확인한 뒤 기록했다.신규 보행화 8일 차.기립 5회.3보 1회. 추가 보행 없음.전일 4보 반복 수행 후 부하 조절. 우측 종아리 경미한 긴장. 보행 후 증가 없음. 발목·감각 안정.리아가 기록을 보다가 말했다.“이제 오빠도 익숙해졌지?”“뭐가.”“어제보다 적게 했다고 뒤로 간 게 아니라는 거.”리시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치료사가 신발을 벗기는 동안 오른쪽 발을 내려다봤다.“조금.”“조금?”“알기는 아는데. 기분까
다음 날에도 다섯 번째 걸음은 없었다.치료사가 재활실에 들어오자마자 전날 기록을 펼쳤다.신규 보행화 4일 차.기립 4회.4보 1회. 추가 보행 없음.우측 발목 지지 및 감각 안정. 4보 후 이상 반응 없음.밤사이 통증과 저림은 없었다. 붓기도 없었다. 다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오른쪽 종아리가 조금 당겼다가 움직이고 나니 풀렸다. 치료사는 그 사실까지 기록한 뒤 발목과 종아리를 눌러보고, 발가락 감각과 무릎 움직임을 차례로 확인했다. 새 신발을 신긴 뒤에도 곧바로 걷게 하지는 않았다.“오늘은 세 걸음입니다.”리아가 먼저 눈을 크게 떴다.“어제 네 걸음 했는데요?”“그래서 오늘은 세 걸음입니다.”리시안도 치료사를 바라봤다.“상태는 괜찮은데도요?”“괜찮습니다. 하지만 어제 네 걸음을 한 번 걸었다는 것과 네 걸음이 이제 안정적인 훈련량이 되었다는 건 다릅니다.”치료사는 기록지를 리시안 쪽으로 조금 돌렸다.“한 번 가능했던 것을 곧바로 다음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리시안의 시선이 어제 기록에 머물렀다. 분명 네 걸음을 걸었다. 걸은 뒤에도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네 걸음은 당연히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어쩌면 다섯 번째까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그럼 다섯 걸음은요?”“네 걸음이 반복해서 안정적이라는 걸 확인한 다음입니다.”기립은 다섯 번이었다. 네 번째에 오른쪽 무릎이 아주 조금 안쪽으로 기울었지만 스스로 바로잡았고, 다섯 번째에는 일어난 상태에서 열을 셀 동안 자세를 유지했다.그다음 걷기.첫 번째.두 번째.세 번째.리시안은 세 번째 발을 완전히 디딘 뒤 멈췄다. 어제 네 번째 걸음을 내디뎠던 자리가 바로 앞에 있었다.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한 발만 더 옮기면 된다는 것도 알았다. 발목이 아픈 것도 아니었고 무릎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었다.그래도 가지 않았다.“끝.”치료사가 말하기 전에 먼저 말했다.“네. 돌아가겠습니다.”자리로 돌아와 신발을 벗긴 뒤에도 발목과 감각에는 이상이 없
제3호 협의에 필요한 추가 자료는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목교 회의를 마친 다음 날 오전이었다. 리시안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재활실로 가기 전에 서재에 들렀다가 책상 오른쪽에 놓인 두꺼운 봉투를 발견했다.상속권자 직접 협의 요청 제3호.그 아래에는 자신이 붙여둔 표찰이 있었다.자료 확인 중.봉투 위에는 황실 재산관리국의 추가 표시가 하나 붙어 있었다.요청 자료 1차 취합 완료.리아가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벌써 왔어?”“그러게.”“읽고 재활 갈 거야?”리시안은 시계를 봤다. 재활까지 삼십 분 정도 남아 있었다. 손은 이미 봉투 쪽으로 갔다. 봉인 끝에 손가락까지 걸렸다가 멈췄다.삼십 분이면 첫 장 몇 장은 읽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한 장을 읽으면 다음 장을 펼칠 것이고, 이상한 숫자가 있으면 이유를 찾을 것이고, 확인할 것이 생기면 관련 자료까지 꺼낼 것이다. 그러다 재활 시간이 가까워지면 중간에서 끊든지, 재활실에 가서도 읽던 내용을 계속 생각하게 될 게 뻔했다.어제 목교 회의를 앞두고 치료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할 수 있는 만큼과 오늘 해도 되는 만큼은 다릅니다.당시에는 다리 이야기였다.리시안은 봉투에서 손을 뗐다.“아니.”리아가 눈을 깜빡였다.“안 읽어?”“재활 끝나고.”“삼십 분이나 있는데.”“읽을 수는 있어.”리시안은 봉투를 다시 책상 가운데에 놓았다.“그런데 끝까지는 못 볼 것 같아.”“조금만 보면 되잖아.”“그러면 나머지가 계속 신경 쓰일걸.”리아가 잠시 오빠를 바라봤다. 리시안은 표찰 아래에 작은 메모를 끼웠다.재활 후 확인.“지금은 재활부터 할래.”리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요즘 진짜 잘 멈추네.”“그게 이상해?”“조금.”“너 자꾸 내가 이상하다고 하지 마.”“좋은 뜻이야.”“좋은 뜻으로도 하지 마.”리아가 웃으며 먼저 문을 나섰다.리시안은 책상 위의 봉투를 한 번 더 봤다.읽을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 읽지 않기로 했다.그리고 재활실로 갔다.⸻새 신
다음 날 아침, 리시안은 어젯밤 뜯지 않았던 봉투부터 확인했다.상속권자 직접 협의 요청 제3호.봉투를 열기 전에 시계를 봤다.아침 여덟 시 십 분.식사도 끝냈다.치료사가 새 신발을 확인하기로 한 시간까지는 충분했다.리시안은 어젯밤 자신이 적어둔 내일 오전 확인이라는 메모를 떼어 옆에 놓고 봉인을 잘랐다.제3호 협의는 남동쪽 작업장 인근의 주택과 부속 토지 매입 요청이었다.오래 임차해 살던 가족이 자신들이 거주 중인 주택을 사들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임차 기간은 십일 년. 지붕과 외벽 일부를 거주자가 자기 비용으로 고쳤고, 뒤뜰 우물로 이어지는 통로 일부를 이웃 두 가구가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매각을 검토하려면 감정가뿐 아니라 거주자가 부담한 수선비를 어디까지 인정할지, 공동 통행로와 우물 이용권을 어떻게 남길지, 인접 가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까지 확인해야 했다.리아가 맞은편에서 첫 장을 읽었다.“이것도 복잡하네.”“응.”“이것도 회의할 거야?”리시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먼저 마지막 장을 봤다.긴급성: 없음.현재 임대 계약은 일곱 달 남아 있었다.거주자 역시 즉시 매입을 요구하지 않았다.희망 사항: 계약 갱신 시점 전까지 매입 가능 여부를 알고 싶음.리시안은 펜을 들었다.이번에는 사람 이름부터 적지 않았다.첫 장 오른쪽 위에 썼다.긴급 집행 없음.그 아래.현 임대 조건 유지.그리고 별도의 요청란에 적었다.감정가 산정 근거.거주자 자비 수선 내역 및 증빙.공동 통행로·우물 이용 현황.인접 두 가구 의견.매각 시 통행권 유지 가능 방식.리아가 물었다.“그럼 이것도 자료부터?”“응.”“직접 회의는?”“자료 보고.”리시안은 제3호 협의를 새 받침에 넣었다.표찰에는 아직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잠시 생각하다 적었다.자료 확인 중.리아가 그걸 보다가 웃었다.“두 번째랑 다르네.”“다른 일이잖아.”“어제는 사람부터 불렀는데.”“어제 건은 서류에 적힌 말의 뜻을 모르겠어서 불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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