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반역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반역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By:  서화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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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8년의 통일 대한민국에서는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슬퍼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거대한 국가 체제 아래 고개 숙인 사람들 속 피어난 두 괴물이 있었다. 완벽한 인간 병기, 한도희. 사람을 살리는 동시에 가장 능숙하게 사람을 죽이는 군의관 백시현. 국가가 허락하지 않은 오류를 품은 두 사람의 총과 칼은 이제 대한민국이라는 통제 체제를 향한다. 우린 정의로운 혁명가도 아니고, 자유를 갈망하는 시민도 아니다. 그저 빼앗기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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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누가 더 미쳤을까

한도희는 피에 젖은 군복을 질질 끌며 문을 걷어찼다.

그 문은 철판이었고, 도희의 발도 군용 부츠였는데 이상하게 문이 먼저 비명을 질렀다.

안에서는 피 냄새가 뜨겁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냄새 위에, 달콤하게 미친 웃음이 가볍게 얹혀 있었다.

백시현은 조용히 피 튀긴 얼굴을 들었다.

불 꺼진 방에서 그의 눈만 유난히 맑았다.

마치 좋은 일이라도 생긴 사람처럼.

“너 왔네.”

도희는 방바닥의 시체들을 스치듯 보았다.

심장이 뜯긴 놈, 척수가 잘린 놈, 이미 죽었어야 하는데 아직도 헉헉거리며 살려달라 기어오는 놈.

“혼자 다 했어?”

“응. 지루해서.”

도희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총을 발끝으로 밀어 올려 잡았다.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놈의 머리통을 겨눴다.

“살려줘…….”

“살려달래.”

“죽일까?”

시현은 메스를 닦던 손을 잠시 멈추고 말했다.

“도희야. 그건 네 몫이 아니지. 오늘은 내가 하고 싶어.”

도희는 총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가더니 시현의 턱을 엄지로 툭 밀었다.

피가 튀어 손톱에 고였다.

“오늘 너 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네가 들어오는 소리 들리니까 더 미쳤지.”

둘의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포개졌다.

시체 위에서.

피 웅덩이 위에서.

군 병동 지하의 썩은 공기 속에서.

시현은 다시 메스를 들었다.

이번엔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우리 어디로 갈까?”

도희가 웃었다.

“몰라. 근데 너랑 있으면 어디든 괜찮을 것 같아.”

“내가 데려갈까?”

“응. 날 좀 망가뜨려봐. 이 지옥을 먼저 때려부수기 전에.”

시현은 도희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천천히 스며들었다.

도희는 건물 밖으로 뛰어오르는 순간,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시현은 그 뒤를 따라가면서 아주 천천히, 아주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지옥에서 기다릴게.”

***

“에러코드 442. 감정 통제 이상 감지됩니다. 반응 임계치 초과. 세부 경로, 섹터 2.”

화면에 뜬 글자들과 숫자들, 그리고 붉게 울리는 'Warning' 이라는 신호.

경고 사인을 읽은 연구원이 한숨을 쉬었다.

또 시작이었다, 백시현.

금속성 기계음이 일정한 음으로 메아리치고, 곧 길거리에는 드론이 지나간다.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익숙하게 메스와 주사기를 정리하던 시현의 이마에 붉은 레이저가 쏘였다.

수틀리면 그 레이저가 찍힌 이마에 안정제가 박힐 것이다.

그러나 백시현은, 웃었다.

“또 에러가 났다 이건가…….”

드론에서 경고음이 터져나왔다.

감정도, 높낮이도 없는 차가운 음색.

-경고. 감정 과다. 제어 바랍니다. 경고, 감정 과다. 제어 바랍…….

“……시끄럽게…….”

시현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옆에 놓인 흰 약을 아무렇게나 입에 털어 넣었다.

-전파 감지. 안정 수치 돌아옵니다.

드론에서 안정 수치가 돌아온다는 기계음과 함께 그의 이마를 겨누던 레이저가 사라졌다.

드론은 할 일을 끝냈다는 듯, 복귀했다.

드론이 돌아가고 나자 시현은 마지막 남은 은빛 메스를 가슴 쪽 주머니에 꽂았다.

그리고는 아주 작게 웃었다.

“에러라…….”

감정을 억제하는 약은 그에게 필수였다.

이번에도 그는 약을 먹어야 했다.

칩조차 그의 광기 서린 감정을 온전히 제어하지 못했다.

“쾌감이겠지.”

다시 오류를, 에러를 낸 자신의 감정이다.

정교하고 견고하게 설계된 칩조차 뚫고 나오는 자신의 광기.

그 순간에 그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

2118년, 대한민국.

통일의 이름 아래 하나가 된 한국은, 결국 인간의 마음까지 지배하려 들었다.

더 이상 감정은 없다.

민족은 만났으나 자유는 없다.

남쪽이 북쪽을 흡수한 결과치고는, 꽤나 어두운 현실이었다.

모두가 평화롭게 살아간다, 그러나 행복하지는 않다.

감정을 통제하고 억압한다.

2118년의 대한민국 정부는 파격적인 제도를 내놓았고 반발 속에서 하나 둘씩 감정을 잃어갔다.

뉴스는 매일 같은 내용이 반복되었다.

“오늘도 안정 지수를 초과한 감정 표출자 57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지속적 안정 지수 초과한 표출자 중 4명의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정서 안정 칩 미이식자 추적 중, 국민 제보 협조 바랍니다. 또한 감정 로그 미제출 시 통행제한이 강화될 예정입니다.”

거리는 깨끗하고, 조용하다.

웃음은 가짜였으며 눈물은 범죄다.

한때 감정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던 것이라 했었다.

지금은 통제의 대상이며, 감시의 이유가 되었다.

“국가는 지금껏 분단되어 왔던 국민을 전적으로 보호하고 빠른 단일화를 진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국가가 허락한 감정만이 ‘건강한 시민’의 조건이다.

불안, 분노, 슬픔, 증오는 반역이다.

웃음, 행복, 기쁨은 질병이다.

누구도 몰랐다.

자유 대한민국이, 통일을 하면 더욱 강해질 줄 알았던 시기가 벌써 수십 년 전이었다.

“흡수 통일은 우리 정부가 이뤄낸 가장 큰 업적입니다.”

“이번 시험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요소이니, 꼼꼼히 필기하도록 하세요.”

학교에서는 정부가 검열하고, 정제한 것들만을 가르친다.

정부에게 반하는 사상은 불온 사상으로 간주되었고, 조금이라도 다른 가치관을 드러낸다면 가차 없이 사살이었다.

감정을 드러내면 사이렌이 울리고, 억제제를 먹어야 했으며 반항하는 이에게는 드론이 날아왔다.

이 디스토피아 속 사람들은 색을 잃고 희미해져만 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있는 괴물이 있었다.

***

“오늘 사살 명단입니까?”

“그래, 이쪽 세 명은 주요 인물이니 이 세 명을 중심으로 타격해라.”

“알겠습니다.”

한도희.

언제부터 괴물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녀 스스로도 답을 찾지 못했다.

“재밌겠네.”

도희에게 내려온 사살자 명단.

반국가단체로 간주된 잠재적 반역자들, 이란다.

정부는 그렇게 말하고 도희에게 총을 건넸다.

명단을 보던 도희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순간 붉은 색으로 물들며 치솟는 감정 게이지.

“이리부대, 작전 개시.”

특수부대 요원이었고, 정부 소속의 극비 요원이다.

더더욱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타격 지점 전송 완료. 침투하라.”

무전기로 들려오는 본부의 명령에 도희는 검은 마스크 아래 또다시 섬뜩하게 웃었다.

미소조차 금지된 곳이었다.

분명 그녀는 사살 대상에 올랐어야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정부는 그녀에게 총을 겨누지 않았다.

“침투 완료. 2시 방향 타깃 두 명.”

“이브, 천천히 침투해. 급할 것 없어.”

무전기로 들려오는 상사의 목소리에 도희는 눈을 내리깔았다.

계속해서 감정 게이지는 붉은 색에서 내려올 줄을 모른다.

‘아니, 내 임무야.’

도희는 망설임없이 침투한다.

정부가 죽이라고 한 국민에게, 총을 겨눈다.

“타깃 발견.”

짧은 목소리와 함께 총성이 울렸다.

탕-

격발되는 총탄은 깔끔하고 아름답게 날아가 정확히 조준했던 머리를 맞추었다.

피가 튄다.

도희의 얼굴에도 튄 피가, 꽃잎처럼 물들었다.

하지만 잔혹한 이리부대의 요원은 개의치 않았다.

“타깃 다섯 명 남았습니다. 주요 인물은 전원 사살 완료.”

본부에서는 탄성을 내뱉었다.

“저게 진짜 사람인가…….”

“사살 인원 전원 헤드샷 명중입니다.”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침투하고 타격하며 퇴각한다.

눈에 띄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그러나 신속 정확하다.

흑복의 이브는 언제나 그렇게 처리를 해 왔다.

“전원 사살 완료. 임무 성공. 이브, 복귀합니다.”

본부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한 중년의 여성.

짧은 머리칼은 날렵한 외형을 부각시켜 주었고 날카로운 눈빛은 바쁘게 스크린을 꿰뚫고 있었다.

늘씬한 팔다리에 마른 체구.

건조한 표정.

국가정보국의 고위 간부 중 하나인 박소연이었다.

“본부장님, 이리부대 복귀합니다. 한도희 요원 전원 사살 성공입니다.”

“역시 이브야.”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동시에 이브, 도희는 골이 아픈 존재였다.

“이브, 오늘 감정 수치 최대 몇이었지?”

“최대 81%, 최소 33%입니다.”

그녀는 한숨을 지으며 이마를 짚었다.

위험한 존재다.

최대가 81%인 것도 문제였지만 최소가 33%인 건 더 문제였다.

도희는 유독 감정 제어가 안 되는 요원이었다.

비뚤어진 미소를 짓고, 적을 향해 짜증을 내고, 후임에게 화를 냈다.

“감정 억제제 더 처방시켜. 오늘 안정화 교육 다시 들어가고.”

“알겠습니다.”

무거운 표정으로 스크린을 돌려보는 그녀에게, 옆에 앉아있던 팀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박소연 본부장님, 저…… 이브 말입니다. 그냥 사살하면 안 됩니까? 저 정도 수치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거면 진작 사살됐어야 하는데…….”

“나도 알아.”

“그럼 왜…….”

“이걸 봐.”

소연은 도희의 프로필과 실적 문서를 띄웠다.

화면에 꽉 들어찬 화려한 이력과 실적들.

보기만 해도 눈이 어지러웠다.

“임무 성공률 보여? 무려 97%야.”

“97%라고요?”

“저게 사람으로 보여? 저건 괴물이야.”

소연이 피식 웃으며 무표정한 얼굴의 프로필을 확대시켰다.

한도희, 이리부대 소속 중사. 코드네임 EVe.

임무 성공률, 97.2%.

“저번에도 민방연 고위 간부 7명을 혼자 다 사살했어. 전부, 헤드샷. 말이 되나, 이게? 저런 괴물을, 내가 써먹지 않는다고?”

소연의 눈에 광기가 어렸다.

끈적한 욕심이 가득한 빛이었다.

“저런 괴물이 우리 정부 소속에서 움직인다는 건…… 특수부대 하나를 추가 운용하는 것과 같은 거야.”

“……무시무시하군요.”

하지만 소연은 도희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다.

도희의 치명적인 단점이라면, 역시…….

“본부장님, 이브 복귀 완료했습니다.”

“그래, 2병동으로 데려가서 안정화 교육 수료하라고 해. 수료 마치면 로그 데이터 전송하고.”

“알겠습니다.”

저 스스로도 통제 못하는 광기와 감정이 문제였다.

도희도 분명히 억제제를 먹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빈번히 안정화 교육을 받는다.

감정 제어 칩도 문제 없다.

그러나 그걸 뚫고 나오는 저 기이한 감정이 문제였다.

도희는…….

“시한폭탄이지.”

핀이 빠질 듯 말 듯 덜렁거리는 수류탄.

그게 딱 한도희였다.

“교육 수료 이후에는 숙소 제대로 복귀하는지 잘 봐. 위치 불일치하면 바로 추적 뜰 거야.”

“네, 본부장님.”

도희의 시한폭탄 같은 감정은 소연이 24시간 내내 그녀를 감시하고, 추적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위험인물 1순위 한도희.

잠재적 반역자 변질 가능성 매우 높음.

그게 정부가 바라보는 도희의 진짜 모습이었다.

***

“백시현 대위, 응답하라. 사형 집행하도록. 응답하라.”

“네, 대위 백시현입니다.”

“금일 18시, 수감자 1830번 사형 확정. 수술형 집행하도록.”

“알겠습니다.”

시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과 전문 군의관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충직한 정부의 개이기도 했다.

외과의이자 동시에 그는 사형 집행인이 되었다.

“금일 18시 수술 집도합니다.”

시현의 말에 군의관들은 아무 말 없이 수술을 준비한다.

어떤 수술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게 시현이 동료들에게 ‘사형 집행’임을 알려주는 방식이었다.

누가, 어떤 수술을, 왜 받는지 알려줘야 할 이유조차 없으니까.

“시작합니다.”

“저, 선생님……. 저 진짜 수술 받는 거 맞나요?”

수술대에 누운 환자, 아니, ‘사형수’가 물었다.

시현은 말없이 주사를 손끝으로 톡톡, 튕기며 수술 준비를 했다.

마치 들을 필요도, 그럴 가치도 없다는 듯이.

“서, 선생님. 이거 수술 맞아요? 아니죠?”

시현에게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점점 사형수의 얼굴이 겁에 질려갔다.

하얗게 변한 낯빛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는 오늘, 감정 제어 강화 수술을 받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네, 수술 진행 예정입니다.”

난동을 피우면 피곤하니까.

시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결코 어떤 수술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이미 시현의 말조차 신뢰하지 못하게 된 사형수는 패닉에 빠져 어떻게든 수술대를 벗어나려 애썼다.

“서, 선생님.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제 말 좀 들어보…….”

“수술 시작합니다. 마취 주세요.”

“선생님! 안 돼! 으아악! 제발, 아아아아악!”

수술 사형은 마취를 하지 않는다.

시현이 요청한 ‘마취’는, 진정제였다

산 채로, 몸이 수술대에 묶인 채로 해체되고 해부된다.

그것이 정부가 백시현에게 명령한 ‘수술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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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누가 더 미쳤을까
한도희는 피에 젖은 군복을 질질 끌며 문을 걷어찼다.그 문은 철판이었고, 도희의 발도 군용 부츠였는데 이상하게 문이 먼저 비명을 질렀다.안에서는 피 냄새가 뜨겁게 피어올랐다.그리고 그 냄새 위에, 달콤하게 미친 웃음이 가볍게 얹혀 있었다.백시현은 조용히 피 튀긴 얼굴을 들었다.불 꺼진 방에서 그의 눈만 유난히 맑았다.마치 좋은 일이라도 생긴 사람처럼.“너 왔네.”도희는 방바닥의 시체들을 스치듯 보았다.심장이 뜯긴 놈, 척수가 잘린 놈, 이미 죽었어야 하는데 아직도 헉헉거리며 살려달라 기어오는 놈.“혼자 다 했어?”“응. 지루해서.”도희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총을 발끝으로 밀어 올려 잡았다.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놈의 머리통을 겨눴다.“살려줘…….”“살려달래.”“죽일까?”시현은 메스를 닦던 손을 잠시 멈추고 말했다.“도희야. 그건 네 몫이 아니지. 오늘은 내가 하고 싶어.”도희는 총을 내렸다.그리고 천천히 걸어가더니 시현의 턱을 엄지로 툭 밀었다.피가 튀어 손톱에 고였다.“오늘 너 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네가 들어오는 소리 들리니까 더 미쳤지.”둘의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포개졌다.시체 위에서.피 웅덩이 위에서.군 병동 지하의 썩은 공기 속에서.시현은 다시 메스를 들었다.이번엔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우리 어디로 갈까?”도희가 웃었다.“몰라. 근데 너랑 있으면 어디든 괜찮을 것 같아.”“내가 데려갈까?”“응. 날 좀 망가뜨려봐. 이 지옥을 먼저 때려부수기 전에.”시현은 도희의 손을 잡았다.손가락 사이로 피가 천천히 스며들었다.도희는 건물 밖으로 뛰어오르는 순간,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시현은 그 뒤를 따라가면서 아주 천천히, 아주 부드럽게 중얼거렸다.“지옥에서 기다릴게.”***“에러코드 442. 감정 통제 이상 감지됩니다. 반응 임계치 초과. 세부 경로, 섹터 2.”화면에 뜬 글자들과 숫자들, 그리고 붉게 울리는 'Warning' 이라는 신호.경고 사인을 읽은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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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폭탄과 군견
“수고하셨습니다.”다른 군의관들이 하나 둘 수술방을 나왔다.시현에게 인사를 하던 동료들이 사라지자, 시현도 수술복을 벗고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정돈했다.여전히 무미건조한 표정, 공허한 눈, 차가운 입꼬리.모든 게 정부가 원하는 모범 시민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의 손목을 감싸던 작은 기계에서 경보음이 울린다.-감정 수치 74%. 안정화 필요합니다.시현은 다시 거울을 보았다.날카로운 조각 같은 얼굴에는 그 어디에도 균열이라곤 없었다.그러나 경보음이 계속되고, 점차 그의 눈빛도 살아나기 시작했다.-감정 수치 78%. 안정화 필요합니다.‘귀찮았지. 짜증도 나고.’앞으로는 그냥 대충 둘러댈까.살려달라고 비는 사형수가, 사실은 내심 귀찮고 짜증이 났다.어차피 애원해도 달라질 것 없는데 말이야.피식, 그의 굳었던 입매에 작은 미소가 생겼다.-감정 수치 82%. 안정화 필요합니다.90%를 넘기면 드론이 날아올 거다.하지만 시현은 억제제를 먹을 생각도, 애써 억누를 생각도 없었다.도희가 시도 때도 없이 마구 치솟는다면, 시현은 아슬아슬하게 한계점 주위를 맴도는 사람이었다.“선생님, 파견 명령 내려왔습니다.”그때, 간호사가 들어왔다.그녀는 시현에게 작은 스크린을 건넸다.“파견?”“네, SMD로의 파견입니다.”“SMD…….”이제 진짜 마음대로 부려먹겠다는 건가, 아니면 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걸까.SMD, 정부 직속 산하 의료기관이었다.여기에 간다는 건, 정부가 직접 시현을 눈여겨 보았다는 것이었다.그걸 잘 알고 있는 시현은 궁금해졌다.정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네, 알겠습니다.”근무지와 자세한 소속까지 전부 확인한 시현은 화면을 꺼 버렸다.어차피 거기 가도 똑같겠지.똑같이 사람을 살리고, 그러다 몇 번은 또 사람을 죽이고.그저 이렇게 로봇 흉내내는 인간으로 살아가면 되는 거야. *** “백시현. 오늘부터 공군에서 SMD로 파견이라고?”“네, 그렇습니다.”“근무지는?”“섹터 2 M구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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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수술 속 피어나다
“마취 하나요?” “그렇습니다.” 시현이 주사기를 집어들었다. 진정제와 마취제가 든 주사기였다. 그러자 그녀의 눈빛이 이상하리만치 붉게 빛이 났다. “필요 없어요.” 수술 도구들을 펼쳐놓던 시현의 손이 멈칫했다. 일순간 그의 눈빛도 흥미롭게 빛났다. 그러나 이내 그는 그 모든 기색을 감추었다. 다시금 시현은 도희의 데이터를 천천히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글자 하나하나가 그의 머리에 전부 저장되어 있었다. ‘한도희, 89년생, 특전사 이리부대 중사. 코드네임 EVe. 강화 3단계 완료.’ 아주 간단하고 당연한 정보들이다. 그러나 마스크 속에서, 시현은 피식 웃었다. 재밌는 애네. 아플 텐데도 묘하게 광기가 살아있는 것 같은 눈빛을 보며 시현은 자기도 그 눈에 물드는 것 같았다. 매번 저런 눈을 하고 다니는데 아무도 저 눈빛을 신경쓰지 않았단 말인가? “아플 텐데, 잘 참네요.” “살아있는 것 같으니까요.” 그 말에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도희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자신을 에러 보듯 쳐다보는 그 시선은 익숙하다. 하지만 단 한 명, 묘하게 동감하는 듯한 시현의 눈빛은 처음이었다. 도희는 주사기를 집어든 시현을 보며 슬며시 웃었다. “미친 사람 같죠?” 시현은 도희의 미소를 보며 멈칫했다. 웃을 줄…… 아는 건가? “아니요.” 시현은 대답하며 주사기 바늘 끝을 두드렸다. “원한다면 수면 마취는 안 하겠지만, 약은 소량만 쓰겠습니다. 지금 이 정도 부상이면 쇼크 와요. 일반인이면 벌써 기절하고 난리 났어요.” 강화인간이라 이 정도 버티는 거지. “배려심 있으시네요, 선생님.” 시현은 익숙하게, 그리고 빠르고 정확하게 주사를 놓았다. 점점 고통이 희미해져 간다. 무딘 감각이 찢어진 살갗을 대신 채운다. 상처 부위가 무감각해지는 그 기분이 도희는 영 별로였다. “보통 안 아프게 해 달라던데.” “전 이게 좋아요.” 시현이 살짝 도희의 눈을 쳐다보았다. 도희의 눈과 시현의 눈이 허공에서 맞붙었다. 이상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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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너의 눈
바깥에서 다급한 병동 관계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시현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수술 집도한 지 7분밖에 안 지났는데.‘갑자기 집도의 교체? 수술 도중에?’수술방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어서, 그는 밖에서 계속 명령이라며 시현을 불러야 했다.“백시현 대위! SMD 직속 명령입니다! 집도의 교체하세요!”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도희도 뭔가 이상한지 인상을 쓰고 있었다.시현은 트레이에 올려진 추적기와 칩을 힐끔 보고는 망설임없이 쓰레기통에 그대로 떨어트렸다.아무런 미련도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는 손짓.싸늘한 손놀림의 바람 속에서 도희를 짓누르던 작은 감정 억제기는 그저 쓰레기로 전락했다.탁, 하는 소리가 이제는 그 고철덩이에 불과한 검은 플라스틱의 마지막 비명이 되었다.“한도희 씨.”시현은 도희를 바라보며 말했다.그 건조한 눈이, 불꽃 같은 눈을 만나자 일시적으로 살아난 듯했다.“다음에 보죠.”도희는 그가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수술방을 나갈 때까지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시현의 눈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피처럼 스며든 광기, 미처 제대로 억누르지 못한 생기.‘나랑 같은 부류다.’같은 사람이란 걸, 도희는 보자마자 느꼈다.다음에 보자는 말이 도희에게는 여운이었다.수술방을 나가며 시현이 마스크를 벗었다.이상했다.SMD에서 직접 내린 명령?게다가 그 명령은 수술 도중에 집도의 교체.‘내가 저 여자 수술을 집도하면 안 되는 건가?’시현은 소독을 하고 가운을 입은 의사에게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수술 도중에 집도의 교체를 명령하냐고.그러나 그도 잘 모르는 눈치였다.“어깨, 늑골, 경부 총상에 2도 화상 있습니다. 우선 어깨 지혈은 완료했고 바이탈은 심박수 100에서 110, 조금 빠릅니다. 혈압은 120/80으로 유지 중입니다. 폐 손상은 경미하지만 기흉 여부 체크 부탁드립니다. EKG도 같이요. 아, 늑골 쪽은 아직 시작도 못했습니다.”“그렇군요. 알겠습니다.”교체된 집도의는 수술방으로 들어섰다.시현이 인계해 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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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이제 꺼져
수술 가운을 벗고 당직실에 돌아왔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인지라 사방이 조용했다. 몇 분 째 시현의 벼려진 메스가 손끝을 두드리고 있었다. 시침 소리 대신 메스가 피부를 툭, 툭 건드리는 소리. 정적 속에서 몇 번이고 메스 소리가 흩어졌을까. ‘미친 짓이야.’ 반역죄였다. 들키면 사형이다. ‘금방 잊혀질 거야. 잠깐 특이한 사람을 만나서 그런 거겠지.’ 칩을 빼버린 것도 단순한 충동이자 해프닝이었다. 도희의 감정 제어 칩까지 없애버린 건,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저 더 보고 싶어서. 그 눈빛이, 더 살아움직이는 걸 보고 싶어서. 망할 칩 따위가 도희를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목줄을 풀어주면 어떻게 될지 흥미롭기까지 했다. 도희의 저 눈빛이 폭발하면 어떻게 될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상을 했다. 그리고, 무언가가 틀어졌다. 시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그 안에서 이성의 막이 찢기듯 흔들렸다. “아…….” 눈에 닿지 않는 미소였다. -감정 수치 92%. 안정화 필요합니다. 동시에 드론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또 에러가 났다고……?” 당직실로 드론이 날아들며 경고음이 울렸다. -대상 0075. 감정 초과. 제어 불가. 안정화 프로토콜 가동합니다. 익숙한 기계음. 시현은 그 음성을 향해 천천히 총을 들었다. 탕- 한 번, 두 번. 확실히 하겠다는 무언의 태도. 망설임도 없었고 경고도 없었다. 드론이 폭발하며 공기 중에 작은 불꽃이 튀었다. 드디어 시현의 손끝을 두드리던 메스가 멈췄다. 시현은 목을 덮고 있던 머리카락을 걷었다. 도희를 억누르고 시현을 묶어두던 얇은 칩. “에러 통제하느라 고생 많았어.” 그가 속삭였다. “이제 꺼져.” 날선 메스가 거침없이 피부를 갈랐다. 순간의 고통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피에 물든 손끝이 칩을 움켜쥐었다. 치익- 피와 기계음이 동시에 터졌다. 억눌러졌던 감정의 댐이 터지는 소리였다. 정제되지 않은 분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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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폭풍전야
또 다쳤나?도희가 보고 싶어 온 N구역이었다.도희는 아직 회복 단계에 있을 테니 어느 회복실에 있는지 찾아낼 생각이었다.‘그런데 또 수술이 있다고?’스크린을 아래로 내렸다.그리고 그는 이내 허, 하고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감정 통제 목적으로 제어 칩 재삽입 예정……이라.’시현의 고개가 조용히 비뚤어진다.입가에는 광기 서린 미소가 걸리고.‘그걸 또 집어넣겠다고.’스크린을 내리는 시현은 도희의 수술방을 알아냈다.오늘 오후 16시.10분 뒤다.10분만 늦었어도…….도희가 안쓰러워서가 아니다.연민도, 동정도 아닌 감정이다.‘내가 빼냈는데…… 또 손을 대?’비틀린 집착이었다.도희를 본 순간부터, 스스로 칩을 없앤 순간부터.그는 소유욕에 잠식되고 있었다.천천히 허리를 일으킨 그는 다음 장소로 향했다.병동 8층, 도희의 수술방으로.***“M구역 군의관 이도준 중위입니다. 집도의 교체 명령입니다.”“……예?”“SMD 상부 명령입니다.”“저는 못 받았습니다만.”수술방 앞에서 시현과 집도의의 기싸움이 벌어졌다.간단한 삽입술이라 집도의는 고작 한 명.갑자기 나타난 시현 때문에 도희의 시술이 지연되고 있었다.“보이십니까? SMD 직속 명령입니다.”시현은 그에게 패드를 내밀었다.물론 조작이었다.예전에 썼던 명령서를 글자 몇 개만 바꾼, 아주 조잡한 가짜 문서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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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선악과를 먹은 이브
회복실.도희는 수술만 마치고 떠나버린 시현 때문에 혼란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다.그가 추적기를 버려 주었다.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픈데, 도희는 정부가 자신에게 추적기를 다시 심으려 했다는 것 때문에 화가 치밀어오르는 중이었고, 그 분노가 너무 생경하게 느껴져 어색하기까지 했다.지금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게 맞나?언제 이렇게 강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었나?하지만 이번엔 뭔가 다르다.단지 도희가 이상하다기에는, 몸에서 뭔가 변화가 있는 거다.‘그 의사…….’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른다.그 사람은 내 이름을 알 텐데.‘그 의사라면 지금 내 상태가 왜 이런지도 알까?’심장이 조금 더 자유롭게 날뛰는 중이었다.숨이 살짝 더 가빠지지만 들숨에 들어오는 바람은 시원했다.몸이 가볍고, 머리가 상쾌했다.‘온 세상이 쨍한 기분이야.’광기가 들끓는 자유.신경감각이 살아 꿈틀대는 것 같은 흥분.하지만 지금 그녀는 고통스럽지 않았다.오히려 해방감이 느껴지고, 자유롭고, 몸이 가볍다.‘혼란스러워.’도희는 베개에 머리를 박았다.‘그 사람 때문일지도 몰라.’총에 맞고 그 남자에게 수술을 받은 이후부터.정확히 그때부터 변했다.그때부터 도희의 감정이 날뛰고 솟구치고 난리가 났다.‘만약 정말 그 의사 때문이라면,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물어봐야겠어.’정부의 숨겨진 사냥개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도희는 그 의사를 믿고 싶었다.살아 움직이는 도희의 눈빛이 보고 싶다던 말은 거짓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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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신을 모방하는 자
도희가 살짝 웃었다.그에게 화를 내고 싶었던 건 아니다.“처음엔 조울증인가 했어요. 그러다 생각해 보니 당신 수술받은 직후부터 이렇게 변했더라고요.”도희가 조용히 말했다.“싫냐고 묻는다면, 아니요. 원래대로 돌려놔 달라고 찾아온 것도 아니에요.”조용한 목소리다.그러나 시현은 웃었다.그 차분함 속에서 묘한 흥분을 알아차렸기에.“그냥 알고 싶었어요. 나한테 뭘 한 건지, 왜 한 건지.”시현은 제대로 숨을 쉬는 도희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그저 도희가 말을 다 뱉어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그리고…… 당신도 날 다시 보고 싶어했는지.”사실 가장 궁금했던 사실일지도 모른다.“당신의 단독 행동인가요?”도희가 물었다.“그렇습니다.”“또 만날 수 있어요?”잠시 그가 도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넘치려는 걸 겨우 막고 있는 듯한 백시현의 눈빛.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런 핑계도, 변명도 대지 않고 그저 그게 끝이었다.그게 시현의 대답이었다.“네.”***자유로워진 도희는 그런 감정의 파동을 만끽했다.그녀에게서 칩이 사라진 걸 아직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소연마저도.도희의 감정이 이상할 만큼 안정되어 있는데, 소연은 칩 추가 삽입이라는 스스로의 덫에 걸려 이상한 걸 느끼지 못했다.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를 찾고 안정화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중이었다.‘또 만나고 싶은데…….’서로 금지구역에서 근무하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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