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내가 먼저 가서 물을 수도 있겠구나.그 생각은 집에 도착하고도 사라지지 않았디.지안은 현관에 서서 한참 신발도 못 벗었다. 가방 끈이 어깨에 걸린 채로, 휴대폰만 쥐고 있었다.누구한테 연락할 것도 아니고, 당장 어디로 갈 것도 아닌데 몸이 먼저 멈췄다.갈 수 있겠구나, 가야 하나, 는 완전히 다른 문장이라서.지안은 결국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거실은 조용했고, 시계 초침 소리만 얇게 들렸다. 생각은 계속 같은 데를 맴돌았다.왜 그랬냐고 묻는 건 이미 늦었다. 그 질문 뒤엔 결국 또 재하 설명만 남을 것 같았다. 지안이 알고 싶은 건 이제 조금 달랐다.그 사람이 뭘 했는지보다, 그걸 다 보고 난 뒤 자기가 뭘 할 건지.그게 어려웠다.지안은 눈을 감았다 뜨고, 머릿속으로만 몇 번 정리했다.용서해 주려고 가는 거 아님.불쌍해서 가는 것도 아님.내가 선택할지 말지, 그걸 더 미루기 싫어서.그 정도까지 오자 좀 숨이 붙었다. 이유가 없어서 못 가는 건 아니었다.이유를 자꾸 상대 쪽에서 찾느라 늦었던 거지.지안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이제 와서야 겨우 방향이 잡히는 게 웃겼다. 그래도 적어도 끌려가는 쪽은 아니라서 전보다 낫긴 했다.다음 날 아침, 사무실은 평소보다 더 분주했다.프로젝트 마감 주간 특유의 조급한 공기."오늘 끝나면 TF도 사실상 정리네."소율이 지나가듯 말했고, 지안은 그 말에 손을 잠깐 멈췄다.사실상 정리.그 단어가 유독 오래 남았다.프로젝트가 끝나면 숨길 이유도, 핑계도 같이 줄어든다. 회사 안에서 둘 사이를 가리는 명분도 점점 얇아진다. 그 사실이 갑자기 너무 분명해졌다.계속 미루다 보면 그냥 타이밍이 지나가는 쪽이 먼저 올 수도 있다는 뜻.맞은편에선 재하가 내부 수정본을 정리하고 있었다.대외 공유에서 빠지고 난 뒤로 더 조용해진 자리. 움직임은 평소 같았는데, 일의 결이 달라진 건 이제 누가 봐도 알았다.팀장도 재하한테 말 거는 횟수가 줄었고, 외부 통화는 거의 서연이나 지안 쪽으로
그래도..그 한 단어가 집에 가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 올랐다.지안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현관 비밀번호를 누를 때까지도 그다음 문장을 못 붙였다.그래도. 그 뒤의 문장은 떠오르지 않았다.차라리 싫다, 아니다, 끝났다, 같은 쪽이면 편했을텐데. 지금은 무슨 마음인지 잘 모르겠다.소파에 가방을 던져 두고도 한동안 불을 안 켰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바닥에 길게 걸렸다. 지안은 거실 한가운데 서서 휴대폰만 내려다봤다.연락할 사람도 없고, 올 연락도 없는데 화면만 껐다 켰다.그러다 결국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미치겠네."누가 들을 것도 아닌데 목소리가 작았다. 진짜 미치겠다고 소리치는 쪽이 아니라, 자기가 어디쯤 와 있는지 이제 무시가 안 되는 쪽.다음 날 점심시간 직전에 서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오지안.""왜.""밥.""입맛 없어.""그럼 커피.""그것도 없어."서연은 한쪽 눈썹만 올렸다."네가 입맛 없다고 해서 세상이 멈추진 않거든.""박서연.""빨리와."지안은 결국 노트북을 덮었다. 따라나서면서도 기분은 별로였다. 정확히는, 서연이 무슨 말을 할지 대충 보여서 더.둘은 회사 건물 뒤편 작은 카페로 갔다. 점심시간 끝 무렵이라 사람이 애매하게 빠져 있었다.서연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두 잔 시키고는 창가 자리에 먼저 앉았다. 지안은 컵을 받아 놓고도 바로 마시지 않았다."그래서?"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어제 그 뒤로 뭐 했어.""뭘 하긴.""계속 생각했겠지.""너 점쟁이냐.""아니, 네 친구."서연은 빨대를 한 번 눌렀다가 놓았다."표정이 딱 그 얼굴이야. 생각은 엄청 했는데 결론 낸 척하는 얼굴."지안은 웃음도 안 났다."결론 안 냈어.""그것도 알아.""그럼 왜 물어?""네가 뭘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보려고."지안은 그 말에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기준이 뭐긴 뭐야.""왜 자꾸 걔가 뭘 잘못했고 뭘 대가로 내고 있는지만
"걔, 네 앞에서만 조용한 거 아니야."서연 말이 탕비실 안에 오래 남았다.지안은 종이컵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한 번 눌렀다가 놓았다. 눌린 자국이 금방 펴졌고, 그 별것 아닌 모양이 괜히 눈에 들어왔다.네 앞에서만 그런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 침묵도, 무표정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도 전부 자기 앞에서만 만들어 낸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그래서."지안이 겨우 입을 열었다."그게 뭐."서연은 바로 답하는 대신, 지안을 한 번 쭉 봤다. 지금 이 인간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까 고민하는 얼굴."뭐긴 뭐야."결국 서연이 말했다."네가 자꾸 같은 패턴으로 생각하고 있단 거지.""무슨 패턴?""이용하고 빠지는 쪽."지안은 너무 정확해서 웃지도 못했다. 반박할 문장이 떠오르기 전에 먼저 열이 올랐다. 자기 속을 싫은 방식으로 짚히면 늘 그랬다."야.""왜. 틀렸어?""지금 쟤 편 드는 거야?""아니."서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나는 네 편 드는 거지. 네가 자꾸 이미 끝난 상처 방식으로 지금 걸 읽는 게 답답해서."지안은 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탕비실 냉장고 모터 소리가 얇게 들렸다. 밖에선 누가 프린터를 쓰는지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전부 평범한 회사 소리인데, 지금은 전부 다 거슬렸다."같은 게 아니라고."서연이 낮게 덧붙였다."이용만 하고 빠지는 사람이 자기 쪽 일 먼저 잘리게 놔둬?"그 말이 그대로 꽂혔다.프리랜서 연결 하나가 다른 사람한테 넘어갔고, 대외 설명 자리에서 빠졌지만, 이유는 다들 돌려 말했다.그걸 다 듣고도 지안은 아직 마음 한쪽에서 같은 질문을 붙들고 있었다. 결국 너도 네 필요 때문에 움직인 거 아니냐고. 그런데 그 문장이 갑자기 예전만큼 단단하지 않았다."필요가 없진 않았겠지."지안이 툭 내뱉었다."나한테."말을 뱉고 나서도 기분이 더러웠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쪽으로 자꾸 문장이 가서.서연은 한숨도 안 쉬고 받았다."그래. 필요했을 수도 있지. 좋아했고, 미안했고, 그래서
지안은 순간 재하 쪽을 봤다. 재하는 이미 화면으로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손은 마우스를 잡고 있었고, 표정은 특별히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무표정이 더 신경 쓰였다.대신 들어간 오후 미팅 설명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시안 흐름도 알고, 클라이언트 포인트도 알고, 원래 자기 일에 가까웠으니까.다만 설명하면서도 자꾸 한쪽에 찝찝함이 남았다. 원래 여기 재하가 앉아 있어야 하는 자리에 자기만 있는 느낌. 클라이언트가 별말 없이 넘어갈수록 더 그랬다. 다들 그냥 자연스럽게 교체된 것처럼 받아들였다. 회사는 늘 그런 식으로 조용히 사람을 옮겼다.미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재하를 마주쳤다. 재하는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지안이 다가오자 바로 화면을 잠갔다."끝나셨어요?""네.""문제 없었죠?""네."짧았다. 딱 일만 확인하는 말. 그런데 지안은 그 말 안에 어딘가 피로가 낀 걸 느꼈다."윤재하 씨."이름을 부르고 나서 지안은 바로 뒷말을 못 이었다. 왜 그랬는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자기한테도 애매했다.재하가 먼저 기다렸다."네."결국 다른 말을 골랐다."시안 파일, 최종본 폴더에만 다시 넣어 주세요. 버전 겹쳐서 헷갈려요.""네. 정리해 둘게요."그 말이 끝나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둘은 같이 탔고, 같이 서 있었지만, 끝까지 말은 더 하지 않았다. 좁은 공간인데도 서로 너무 멀었다. 옆에 있는 사람을 의식하는 게 아니라, 의식 안 하는 척하느라 더 피곤한 쪽.사무실로 돌아오는 동안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열리는 그 짧은 시간 안에서 하나가 자꾸 걸렸다.재하의 목소리. 끝나셨어요, 문제 없었죠, 네. 세 마디. 전부 일 얘기뿐.해명도, 변명도, 자기 사정 한마디도 없었다. 대외 자리에서 빠지고, 설명 미팅에서도 밀리고, 그걸 다 알 텐데 지안한테 와서 한 말이 시안 파일 정리 확인뿐이었다.이용하는 사람은 저런 식으로 안 한다.그 생각이 복도를 걸으면서 불쑥 올라왔다. 자기한테 필요한 게
사진 속 자기 얼굴을 한참 보고 나서야 지안은 노트북을 덮었다.잠은 깊게 못 잤다. 새벽에 두 번 깼고, 한 번은 저도 모르게 운영사무국 메일을 다시 열 뻔했다. 지안은 끝내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눈을 감았다.확인하고 나면 마음이 좀 정리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더 어색해졌다. 재하를 미워하는 쪽도, 덜 미워하는 쪽도 아닌 상태. 둘 다 아닌데 계속 같은 사무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 상태.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지안은 그 어색함이 자기 것만은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았다.재하는 자리에 없었다.평소보다 십 분쯤 늦은 시간인데도 노트북이 닫혀 있었고, 의자도 반듯하게 들어가 있었다. 늦을 수도 있었다. 그 정도는 이상할 게 없었다.그런데 유독 오늘은 그 빈자리가 눈에 밟혔다. 어제까진 그냥 시야 끝에 걸리던 자리였는데, 오늘은 비어 있는 방식까지 읽히는 기분이었다."윤재하 씨 아직 안 왔어?"지안이 별생각 없는 척 묻자 소율이 고개를 들었다."아까 잠깐 왔다가 다시 내려간 거 같던데요? 통화하는 것 같았어요.""그래."답은 짧게 했는데, 시선은 다시 빈자리로 갔다. 통화. 별거 아닌 말인데 공연히 걸렸다. 그 인간이 요즘 바깥 전화 받는 얼굴이 평소 같지 않다는 건 이미 몇 번 봤다.오전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에야 재하가 들어왔다. 표정은 멀쩡했지만 넥타이 없는 셔츠 깃이 평소보다 조금 더 눌려 있었다.재하는 자리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켰고, 팀장이 곧바로 회의실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오늘 외부 공유본은 오 대리랑 서연 씨가 먼저 정리해요."팀장이 말하자 지안은 순간 고개를 들었다."재하 씨는 내부 수정본 쪽 더 잡아주세요. 대외 쪽은 잠깐만 빼고."말투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냥 업무 조정처럼. 이유도 길게 붙이지 않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티가 났다. 원래 이번 공유본은 재하가 시안 설명까지 같이 붙기로 돼 있었다.사무국 확인 메일이 외부로 돌기 시작한 뒤부터 분위기가 달라진 거였다. 지금 와서 대외 쪽만 잠깐 빼는 건, 굳이 말하
폴더가 열리자 발표본이 버전별로 쭉 떴다.파일명부터 한숨이 나왔다. 최종본이 세 개였다.전부 급하니까 '최종'이라고 붙였던 흔적. 졸업 직전이었고, 발표만 끝나면 다 끝날 줄 알았으니까. 지금 보니 전부 도망치듯 저장한 흔적 같았다.지안은 제일 마지막 버전을 열었다.슬라이드가 천천히 넘어갔다. 첫 장 카피, 서브 문안, 발표 구조, 결론 페이지. 하나씩 보는데 딱히 새롭진 않았다.자기가 만든 거니까 당연했다. 운영사무국 메일 한쪽에 적혀 있던 제출 항목이 자꾸 시야 구석에서 걸렸다.발표 자료 원본. 작업 파일 이력. 팀 메일. 현장 사진. 재하가 낸 순서까지 떠오르는 게 짜증 났다."진짜 순서도 똑같네."지안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다음 폴더를 열었다.작업 파일 이력 캡처는 예전 노트북에서 뽑아 둔 이미지들이었다. 생성 날짜, 수정 시각, 파일 경로.평소 같으면 숫자만 봐도 피곤했을 텐데 오늘은 그게 덜했다. 그런 차가운 정보가 나았다. 감정이 끼어들 틈이 적어서.첫 캡처와 발표본 수정 시각을 맞춰 봤다.두 번째 캡처와 메일 발신 시간을 대조했다.세 번째 캡처에서 문안 수정된 흔적을 보고 다시 발표본 페이지를 열었다.한 번, 두 번, 세 번.같은 슬라이드를 계속 오가다 보니 처음엔 안 보이던 게 보였다. 카피가 바뀐 지점, 순서가 밀린 페이지, 최종 발표본에만 남아 있는 문장.그리고 그 흐름이 메일 시간과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누가 먼저 정리했고, 누가 그걸 받아 취합했고, 누가 발표했는지까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읽히는 구조.지안은 의자에 등을 붙이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시계를 보니 폴더를 연 지 벌써 한 시간이 넘어 있었다.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고, 건너편 아파트 불빛이 줄줄이 켜져 있었다.여기까진 솔직히 예상 못 한 건 아니지만, 예상과 확인은 다르다.머릿속으로 아는 거랑, 자기 손으로 클릭해서 같은 시간과 같은 문장을 대조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다.지안은 팀 메일 캡처 폴더를 열었다.제목에 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