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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접은 글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4 19:11:42

멀리서 망치 소리가 끊겼다 이어지고 회랑으로 발소리가 바삐 오가는 가운데, 여울은 접어 두었던 유서를 무릎 앞에 펼쳤다.

석 장의 글을 다시 읽고, 이름만 적은 한 장을 맨 뒤에 놓았다. 뒤로 갈수록 기울어진 글씨도 그대로 두었다.

넉 장을 포개 접었다. 손바닥에 들어올 만큼 한 번 더 접었을 때 봉수가 죽을 가져왔다.

“다 썼습니다.”

여울이 손을 내밀었지만 봉수는 소반을 내려놓고 허리를 폈다.

“맡아 주십시오.”

“안 읽습니다.”

“읽으시라는 게 아닙니다. 맡아 달라는 겁니다.”

“맡으면 읽게 됩니다.”

봉수의 손은 빈 채로 늘어져 있었다. 여울은 종이를 무릎에 놓고 소반을 당겼다. 죽을 몇 술 뜨는 동안에도 봉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제가 죽으면 이거 누가 읽습니까.”

“……그때 가서 보지요.”

“어른이 읽으신다는 말씀입니까.”

여울이 숟가락을 내려놓자 봉수가 아직 죽이 남은 그릇을 가리켰다.

“식기 전에 마저 드십시오. 물도.”

여울은 남은 죽을 마저 먹었다. 물까지 마시고 그릇을 소반에 돌려놓았을 때도 봉수는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두겠습니다. 마음 바뀌시면 꺼내 가십시오.”

여울은 유서를 옷깃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안감에 꿰매 둔 종이와 달리 바로 꺼낼 수 있는 자리였다.

끝내 누구에게도 맡기지 못했다. 옷깃을 여미자 겹친 종이 끝이 가슴을 눌렀다.

봉수는 소반을 들었다. 문턱을 넘기 전에 여울의 옷깃으로 눈길이 내려갔다가, 그대로 나갔다.

단이가 문 옆에 앉아 있다가 다가왔다.

“무슨 글을 쓰셨습니까.”

“아버지 얘기. 고향 얘기도 조금.”

“고향은 어디십니까.”

“물목마을이다. 북도 낙수 상류에 있다.”

단이는 문 앞에 앉으며 치마를 무릎 밑으로 여몄다.

“저는 동도 청천입니다.”

“그건 안다.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북도도 멀겠습니다.”

여울이 고개를 끄덕이자 단이는 발끝을 치마 속으로 넣었다. 아이의 버선 바닥이 닳아 있었다.

“마루가 차냐.”

“조금입니다.”

여울이 개어 둔 이불을 당겨 아이 곁에 밀어 주었다. 단이는 손사래를 치다가 눈치를 살피고는 이불 위에 올라앉았다.

“문 앞이 편하냐.”

“여기서 길이 보입니다.”

문틈으로 회랑의 기둥과 그 너머 돌길이 조금 보였다. 누가 오면 방 안보다 먼저 알 수 있는 자리였다. 여울은 아이를 더 안쪽으로 부르지 않았다.

못 박는 소리가 다시 났다. 내일 즉위식이 열리면 저 일도 끝날 터였다.

단이가 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사이, 여울은 뻣뻣한 옷깃을 손끝으로 펴 눌렀다.

—

밤 곡이 끝나고 빈전 뜰의 등불이 하나둘 낮아질 무렵, 세자는 여막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빈전 뜰을 건너 선정당 옆길에 이르자 뒤따르던 도홍이 가까이 다가왔다.

“저하, 어디로 가십니까.”

“여기서 기다려라. 따라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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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왕의 남총을 처분하는 법   저하

    저녁 연기가 걷히고 담 밖에서 개 한 마리가 짖다 그쳤을 때, 여울은 그 물음을 품은 채 등잔에 불을 붙였다.켜 두는 것이 이제는 이상하지 않았다. 단이도 더는 묻지 않았다.강진은 해시 순찰보다 먼저 왔다. 문을 닫고 들어와 이부자리 곁에 앉았다. 등잔 맞은편이 아니었다.“묻겠다고 했다.”여울은 대답 대신 낮에 휘정전에서 들은 것을 꺼냈다.“……예조에서 고을 이름을 고쳤습니다.”“내가 그리하라 했다.”“그런 함자를…….”“그래서 너만 부르라는 것이다.”여울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강진은 대답을 기다렸다. 대답이 오지 않자 손이 여울의 턱으로 왔다. 들어 올리기 전에 그 손이 한 번 멎었다.여울이 그 손바닥에 뺨을 기댔다.그제야 입술이 내려왔다. 등잔불 아래서 여울은 눈을 감았다. 저고리 고름은 이번에도 여울의 손이 풀었다.강진이 여울을 이부자리에 뉘었다. 접어 둔 이불 한 자락을 끌어다 무릎 밑에 괴었다. 베를 감은 무릎이 굽지 않고 그 위에 얹혔다.허리춤의 끈은 강진이 끌렀다. 여울이 허리를 들어 거들었다.저고리가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강진은 팔꿈치로 제 몸을 받쳐 얼굴을 여울의 얼굴 가까이 두었다. 갈색 눈이 바로 위에 있었다.강진이 천천히 몸을 낮췄다. 여울의 손이 강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강진은 그대로 멎어 있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여울이었다.이불이 흔들리고, 벽에 비친 그림자가 따라 흔들렸다.여울이 얼굴을 가리려고 손을 들자, 강진이 그 두 손목을 한 손에 모아 쥐어 제 가슴 위로 내렸다. 가릴 데가 없어진 얼굴이 강진의 눈 아래 있었다.“불러라.”쉰 목소리였다.여울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름 대신 숨이 새어 나왔다. 모아 잡힌 손목은 빼지 않았다.강진은 더 시키지 않았다. 허리를 붙든 다른 손이 여울을 느리게 이끌었다. 강진의 가슴 위에서 여울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목 안에서 무엇이 차오르다 터졌다.“……저하…….”강진이 멎었다.손목을 쥔 손가락에 한 번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갈색 눈이 여울을

  • 선왕의 남총을 처분하는 법   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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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왕의 남총을 처분하는 법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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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왕의 남총을 처분하는 법   등잔

    창호가 다 희어지도록 쪽문은 열리지 않았다.도홍의 발소리도 오지 않았다. 올 사람이 여기서 자지 않았으니 올 까닭이 없었다.여울은 일어나 이부자리를 갰다. 이불 하나였다. 둘이 덮던 이불을 혼자 개니 가벼웠다.—낮에는 봉수가 일어섰다.허운이 나흘은 더 누우라 한 사람이 성한 손으로 문설주를 잡고 섰다. 무릎의 베가 당겨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울이 마루를 건너가 그 팔을 받쳤다.“누우십시오.”“마루까지만 나가겠습니다.”“허운 나리가.”“여울님 말만 듣는다고 하셨지요.”봉수가 웃었다. 웃고 나서 다시 앉았다. 여울이 받친 팔을 놓지 않아서였다.단이가 마당에서 빨래를 널다가 그 둘을 보고 저도 웃었다. 세 사람 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저녁 죽이 식어 가고 마당에 그늘이 다 번졌을 때, 여울은 등잔 앞에 앉았다.심지를 돋우고 부싯돌을 쳐서 불을 붙였다.해시 순찰은 아직이었다. 오는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도 아직이었다. 여울은 불을 켜 놓고 그 앞에 앉았다.단이가 상을 내가다가 멈췄다.“……오라버니, 오늘은 켜셨네요.”“어두워서.”“어제도 어두웠는데요.”여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이는 더 묻지 않고 나갔다. 나가면서 쪽문을 잠그지 않았다. 잠그지 말라는 분부를 단이도 알았다.뒷방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들어갔을 것이었다. 봉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쪽문 밖에 선 강진은 창호에 비친 불빛을 보았다.걸음이 멈췄다. 담 밖으로 해시 순찰이 멀어진 뒤였다.창호에 불이 비친 밤은 전에도 있었다. 바느질을 하던 밤, 죽을 먹던 밤. 할 일이 있는 불이었다. 지금은 할 일이 없는 시각이었다.요 며칠은 늘 어두운 방이었다. 들어가서 제가 켜던 등잔이었다.강진은 한참을 문밖에 서 있었다. 도홍이 뒤에서 기다리다가 물러갔다.문을 열었다.여울은 등잔 앞에 앉아 있었다. 일어서려다 무릎 때문에 손으로 마루를 짚었고, 짚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불을 켜 두었군.”“……기름이 남아서요.”강진은 문을 닫고 들어왔다. 도포 자락이 찼다

  • 선왕의 남총을 처분하는 법   오지 않은 밤

    볕이 마루 끝에서 기둥 아래로 물러나는 동안, 여울은 줄어든 흰 옷의 소매를 뜯고 있었다.빨아서 줄어든 소매였다. 단이가 옆에서 실을 꿰어 주었다.“그냥 입으셔도 돼요. 반 치도 안 줄었는데.”“서 있을 때 손목이 보인다.”“보이면요?”여울은 대답하지 않고 솔기를 뜯었다. 단이가 실 꿴 바늘을 내밀다가 제 손가락을 찔렀다. 작게 아, 하고는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허운이 다녀간 것은 그 뒤였다. 뒷방에서 봉수의 무릎을 보고 나와, 마루에 앉은 여울의 무릎도 보았다.“담 밖까지는 아직입니다. 마당은 하루 두 번. 서 있는 것은 반 시진 넘기지 마십시오.”“조회는 반 시진이 넘습니다.”허운은 흠, 하고 약 이름을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대답 대신 봉수 쪽을 돌아보았다.“저 어른은 나흘은 더 누워 계셔야 합니다. 일어나려 하면 여울님께서 말리십시오.”“제 말을 들으십니까.”“여울님 말만 들으십니다.”허운이 나갔다. 여울은 뜯은 소매를 다시 붙였다. 반 치가 길어졌다. 손목이 가려졌다.—저녁 연기가 걷히고 담 위 하늘이 붉다가 검어지는 동안, 여울은 등잔 옆에 앉아 심지만 보고 있었다.기름은 채워져 있었다. 항아리의 봉한 종이는 뜯겨 있었다. 뜯은 사람은 여울이 아니었다.불은 붙이지 않았다.단이가 저녁상을 내가면서 등잔을 보았다.“오라버니, 안 켜세요?”“아직.”“어두운데요.”“어두워도 된다.”단이는 상을 든 채 잠깐 서 있다가 나갔다. 뒷방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봉수가 닫은 소리였다. 성한 손으로 닫으면 소리가 작았다.—해시 순찰이 담 밖을 지나갔다.여울은 그 발소리가 모퉁이를 돌 때까지 듣고, 그 뒤를 들었다. 뒤에 오는 발소리가 없었다.바람이 창호를 두드렸다. 그것뿐이었다.여울은 무릎을 폈다. 폈다가 다시 모았다. 불을 붙이면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방이 됐다.어둠 속에서는 그냥 앉아 있는 방이었다.벽 너머에서 봉수가 기침을 했다. 한 번, 두 번. 그러고 낮은 목소리가 벽을 넘어왔다.“여울님.

  • 선왕의 남총을 처분하는 법   닫힌 문

    서별당 마루에서 여울이 흰 옷의 소매를 당겨 내리던 그 시각, 자경전 안마당에는 볕이 들어도 소리가 들지 않았고, 곁채 문은 닫힌 채였고, 윤척은 그 마당을 가로질러 오면서 제 발소리를 두 번 죽였다.대비는 창호를 등지고 앉아 있었다. 찻잔이 앞에 있었다. 김이 나지 않는 잔이었다.“대비마마께서도 근심하시는 바라고 아뢰었습니다.”“그래서.”“적으라 하셨습니다. 두 번.”대비는 잔을 들지 않았다. 윤척은 말을 마친 뒤 대비 쪽을 보았다. 대비가 보고 있지 않아도 보는 버릇이었다.“죄인은 또 섰느냐.”“섰습니다. 귀 밑에……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아침에 그 방에서 곤룡포를 입었다지.”“그리 들었습니다.”대비는 창호 쪽으로 고개를 조금 돌렸다. 빛이 뺨의 한쪽만 밝혔다.“선왕은 여덟 해 동안 그 아이를 안방에서 멀리 두었다. 낮에도 밤에도. 내 아들은 사흘 만에 궁 안에 다 보였다.”윤척은 대답하지 못했다.“그것이 무엇인지 아느냐.”“……소신은.”“급한 것이다. 급한 사람은 기다리면 된다.”윤척은 홀을 고쳐 쥐었다. 쥔 손에 땀이 배었다.“좌상은 의금부를 잃었습니다. 앞으로 사람을 잡으려면 승정원의 글이 있어야 한다 하옵니다.”“안다.”“그러면 조정에서 사람을 세울 수 있는 것은…….”“너다. 그래서 급하게 굴지 말라는 것이다.”문이 열렸다. 최령이 찻상을 들고 들어왔다. 연금 중인 사람이 드는 찻상이었다. 자경전 밖으로 못 나갈 뿐, 안에서는 전과 같이 움직였다.최령이 새 잔을 놓고 식은 잔을 거두었다. 거두는 손이 잔 가장자리에서 한 번 미끄러졌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대비는 그 손을 보았다.“손이 왜 그러느냐.”“……아무것도 아니옵니다.”“아무것도 아닌 손이 잔을 놓치느냐.”최령이 엎드렸다. 대비는 더 묻지 않았다. 윤척은 그 사이에 눈을 어디 둘지 몰라 제 홀을 보았다.“우상.”“예, 마마.”“예조에 간택 절차를 살피라는 말은 네가 한 것으로 해라. 내 이름을 앞세우지 마라.”“대비마마께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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