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토요일 아침.애리가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류정호는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다.어젯밤 늦게 들어온 사람답지 않게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난 모양이었다.애리가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아빠 몇 시에 일어났어?”“조금 전에.”“안 피곤해?”“괜찮아.”어머니가 애리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괜찮기는. 어제 몇 시에 들어왔는데.”류정호가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마셨다.애리가 웃었다.“엄마한테 혼나네.”“너까지 보태지 마.”“오늘은 회사 안 가지?”“오늘?”류정호가 대답하려던 순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화면으로 향했다.류정호가 발신자를 확인했다.아주 잠깐 표정이 굳었다가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여보세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네, 이사님.”애리는 포크를 들다가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낮은 목소리로 대화가 이어졌다.내용까지 들리지는 않았다.어머니가 애리의 접시에 음식을 더 놓아주며 말했다.“먹어.”“응.”애리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통화는 생각보다 길었다.류정호는 한참 뒤에야 식탁으로 돌아왔다.의자에 앉지 않고 커피잔만 집어 들었다.어머니가 먼저 물었다.
아이비 모임이 지나고 평일 저녁이었다.애리는 줄리안과 마주 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일요일 오후였다.지율은 맨해튼에 있는 집에 있었다.전날 아이비리그 모임 때문에 뉴욕에 온 뒤 그대로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저녁에는 다시 보스턴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지율은 방에서 한동안 노트북을 들여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출력해야 할 자료가 있었는데 방에 있는 프린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몇 번을 다시 해 봐도 종이만 걸렸다.결국 노트북을 들고 방을 나왔다.아버지 서재에 있는 프린터를 쓰면 될 일이었다.복도 끝에 있는 서재로 향했다.문은 닫혀 있었다.지율은 별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아버지는 집에 없었다.주말인데도 오전부터 회사에 나간 상태였다.요즘 들어 이런 일이 잦았다.어머니가 회사가 많이 바쁜 모양이라고 말했던 게 떠올랐지만, 지율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최근 뉴스만 틀면 경제 이야기가 나왔다.뉴욕의 금융회사들이 무너지고 주가가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졌다.아버지가 근무하는 회사도 영향이 없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지율은 책상 옆에 놓인 프린터를 켰다.노트북을 연결하고 필요한 자료를 출력했다.종이가 한 장씩 빠져나왔다.기다리는 동안 지율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책상 위로 향했다.평소보다 서류가 많았다.파일 몇 개가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는 숫자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들이 겹쳐 놓여 있었다.지율은 별 관심 없이 시선을 돌렸다.그때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류정호.지율의 시선이 다시 종이 위로 향했다.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하지만 분명히 적혀 있었다.류정호 본부장.애리의
아침이었다.애리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건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이었다.잠이 덜 깬 채 가만히 누워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줄리안은 아직 자고 있었다.새벽 몇 시에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피곤했던 모양이었다.애리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허리에 둘러진 팔을 살짝 들어 올리고 침대에서 빠져나가려던 순간이었다.팔에 힘이 들어갔다.애리의 몸이 그대로 뒤로 끌려갔다.“어디 가.”눈도 뜨지 않은 채였다.애리가 다시 베개 위에 머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일어나려고.”“왜.”“아침이니까 일어나지.”“좀 더 자.”“나 잠 다 깼어.”“난 안 깼어.”애리가 어이없다는 듯 뒤를 돌아봤다.“그럼 오빠가 자. 나는 일어날게.”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줄리안은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오히려 애리를 품 안으로 더 끌어당겼다.“줄리안.”“응.”“놔.”“싫어.”애리는 결국 몸을 돌려 줄리안을 마주 봤다.“새벽에 들어와 놓고 왜 이렇게 귀찮게 해.”그제야 줄리안이 천천히 눈을 떴다.“보고 싶어서 왔는데.”“누가 오랬어?”“안 오랬어?”“뉴욕에서 자는 줄 알았지.”“그건 네가 그렇게 생각한 거고.”말은 맞았다.애리가 대꾸하지 못하자 줄리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봐.”“뭘 봐.”“할 말 없잖아.”“귀찮아.”애리가 다시 돌아누우려 하자 줄리안이 먼저 얼굴을 가까이했다.
모임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처음에는 네 사람이 함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는 얼굴들이 하나둘 합류했다.애리와 같은 예일 학생들도 있었고, 지율과 샬롯이 아는 얼굴들도 있었다.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사람도 계속 바뀌었다.그러다 다시 테이블로 돌아오면 이안은 어김없이 말을 걸었다.“예일에서 무슨 수업 들어?”“여러 개.”“뭐가 제일 재밌는데?”애리가 이안을 바라봤다.“또 시작이네.”“뭐가?”“질문.”이안은 그제야 자신이 또 묻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그 모습을 보던 샬롯이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지율은 별다른 반응 없이 음료를 마셨다.그때 애리의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는 줄리안의 이름이 떠 있었다.“나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이 적은 쪽으로 걸어갔다.통화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뭐 해?”“아직 모임이야.”애리는 주변을 한번 둘러봤다.“근데 이제 거의 끝날 것 같아.”“재밌어?”“응. 지율이랑 샬롯도 만났어.”“잘됐네.”주변이 조금 시끄러운지 줄리안의 목소리 뒤로 사람들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들렸다.애리가 물었다.“오빠는 아직 촬영 중이야?”“응.&rdqu
10월이 되자 뉴헤이븐의 공기도 제법 선선해졌다.애리도 어느새 대학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었다.수업이 있는 날이면 직접 차를 몰고 학교에 갔고, 수업이 끝나면 뉴헤이븐의 집으로 돌아왔다.줄리안은 3집 활동 때문에 뉴욕에 있는 날이 많았다.덕분에 평일에는 혼자 집에 있는 시간도 자연스럽게 늘어났다.그날 오후.수업을 마치고 나오던 애리에게 제이미가 물었다.“이번 주 토요일에 갈 거지?”“어디?”“아이비리그 모임.”애리가 걸음을 멈췄다.“아.”잊고 있었다.학기가 시작된 뒤 처음 열리는 아이비리그 학생들의 교류 행사였다.예일뿐 아니라 하버드와 프린스턴을 비롯한 다른 학교 학생들도 참석할 예정이었다.애리는 문득 두 사람이 떠올랐다.지율과 샬롯.지난여름 이스트햄튼에서 만난 게 마지막이었다.애리는 핸드폰을 꺼내 지율과 샬롯에게 각각 문자를 보냈다.[너희도 토요일에 와?]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연달아 도착했다.지율이 먼저였다.[응. 갈 거야.]곧이어 샬롯에게서도 답장이 왔다.[가지. 오랜만에 얼굴 보겠네.]애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그럼 토요일에 보자.]잠시 후 지율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나 친구 한 명 같이 갈 거야.]애리가 바로 답했다.[누구?][같은 학교 친구.][같은 수업 들어.]지율다운 대답이었다.애리는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토요일 오후.애리는 뉴욕으로 향했다.이번 아이비리그 학생 모임은 컬럼비아대학교 인근에서 열렸다.지난해에는 하버드 근처에서 열렸지만, 올해는 장소가 뉴욕으로 바뀌었다.행사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애리는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둘러봤다.익숙한 얼굴을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애리!”먼저 손을 흔든 건 샬롯이었다.애리의 얼굴이 바로 밝아졌다.“샬롯.”두 사람은 가까이 다가가 자연스럽게 서로를 끌어안았다.“진짜 오랜만이다.”“그러게. 햄튼 이후 처음이지?”“응.”샬롯이 애리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