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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와 파혼하겠습니다
세자와 파혼하겠습니다
Author: 청산

제1화

Author: 청산
“서음의 부모님은 네 아버지를 구하려다가 희생하였다. 그런데 의지할 곳 없이 고아가 된 그 아이를 모른 체할 수는 없으니 평처로 들이고자 한다. 혼례는 우리의 혼인식날 같이 치르기로 하였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오주은은 익숙한 사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그가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그와 육준수는 성상께서 직접 점지해 주신 약혼으로,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며 정을 쌓아왔는데 말이다.

곧 7일 후면 그들의 혼인식이라는 것을 온 경성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이 시기에 하인의 딸을 평처로 맞이하겠다니, 모두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제가 허락하지 못하겠다면요?”

오주은이 싸늘한 목소리로 그에게 되물었다. 그녀의 어여쁜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게 식어 있었다.

그러자 육준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너와 나는 황명으로 이어진 사이다. 허락을 안 하겠다는 것은 항명을 뜻하는 것이냐?”

“서음을 같은 날 집으로 들이기로 한 것은 그 아이의 신분이 미천하여 조금이라도 위신을 세워주기 위함이야. 그러지 않으면 저택에서 천대받을 것이 분명하니.”

“너는 어릴 때부터 여계와 여훈을 익혀왔다. 그런데 어찌 부군의 뜻을 어기려 하느냐!”

육준수는 표정을 수습하고 오주은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속삭였다.

“본디 서음과의 혼례를 앞당길 생각이었으나, 그렇게 하면 너와 나의 혼례가 미루어지게 될 것이고, 넌 나이가 들었으니 계속 혼례를 미루다가는 안 좋은 소문이 돌 것이다. 이건 너를 위한 안배이기도 하다.”

그 말에 오주은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부모님의 삼년제를 치르느라 그녀의 나이는 벌써 열일곱을 훌쩍 넘겨버렸다.

다른 집 여인들은 진작에 자식을 품에 안았을 나이였다.

그녀 역시도 혼례식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유서음의 부모가 임종 전에 딸을 오라버니께 부탁한 일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그저 좋은 혼처를 찾아주고 혼수를 두둑이 해주면 될 것을, 굳이 그 아이와 혼인을 해야 하나요?”

오랜 시간 정을 쌓아온 사람이었기에 오주은은 그에게 기회를 한번 더 주고 싶었다.

사내가 첩을 들이는 일은 흔한 일이었기에 혼인식을 치르고 나서 육준수가 첩을 들이겠다 했으면 절대 막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서음의 신분을 올려치기 위하여 같은 날 혼례를 치르겠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것은 오주은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

오씨 가문 일가족은 모두 조정에 충성을 다하다 돌아가셨다. 오늘날 그녀의 신분은 부모님이 목숨 바쳐 일구어 낸 것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육준수라도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은 봐줄 수 없었다.

말문이 막힌 육준수는 이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나도 전에는 그럴 생각이었지만, 서음이가 다른 사내와 혼인할 거면 차라리 죽겠다고 하더라고.”

오주은이 그 아이가 왜 그런 고집을 피우는지 물어볼 틈도 없이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 통방으로 있었던 아이이고 순결을 나한테만 주었는데 어찌 다른 사내와 혼인할 수 있겠어?”

오주은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통방이라니!

육준수는 항상 그녀에게 자신은 고결한 사람이라며 그녀를 부인으로 맞기 전에는 절대 첩을 들이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첩실은 들이지 않았다고 해도,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아이를 통방으로 두겠다니!

그가 첩실도 아닌 통방을 부인이 될 사람과 같은 날 평처로 맞이하겠다고 당당히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게 된다면, 오씨 가문의 체면은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육준수는 그녀의 침묵을 묵인으로 받아들였다.

“서음은 그저 평처의 명분만 필요할 뿐이고, 집안 살림 방면에서는 너를 따라갈 수 없으니 후작가의 안주인은 계속 너이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어.”

오주은은 결심을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육준수가 돌아간 후, 심복인 영주가 분을 참지 못한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아씨, 육씨 가문은 우리 가문에 사람이 없다고 무시하는 것 아닙니까! 어찌 이런 해괴한 요구를 할 수 있습니까!”

오주은은 오히려 피식 냉소를 지었다.

글공부도 하지 못한 영주마저 해괴한 요구인 것을 아는데 육준수가 그걸 모르고 했을 리 없었다.

그저 부모님을 여읜 그녀를 힘이 없다고 무시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만 방으로 돌아가자.”

오주은은 별다른 말없이 방으로 돌아가서 하다 만 혼례복을 계속 짜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녀에게 물었다.

“저 집에서 이리도 아씨를 무시하는데 왜 혼례복을 계속 짜시는 겁니까? 이런 수모를 받고도 꼭 그런 사람이랑 혼례를 올려야 하나요?”

오주은은 금실로 봉황의 날개를 수놓으며 담담히 말했다.

“폐하께서 친히 점지하여 주신 인연이야. 아무리 싫어도 황명을 거스를 수는 없지 않겠니?”

담담한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조금 전의 불쾌감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영주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신하 된 자로서 어찌 황명을 거스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녀는 어렴풋이 과거가 떠올랐다.

당시에는 촉지에 수재가 들어 매년 사상자가 나왔었다.

오주은의 부모님은 명을 받고 수재를 해결하기 위해 머나먼 촉지로 떠났고, 그곳에서 6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었다.

그렇게 드디어 명을 완수하고 돌아오던 길, 두 분은 피로가 쌓이고 쌓인 탓에 결국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오주은의 아버지에게 충숙공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오주은은 촉지의 현주로 책봉하였다.

하지만 그때부터 오씨 가문에는 오주은 한 사람만이 외로이 남게 되었는데, 그 무렵, 문관들의 지지가 필요했던 육씨 가문은 문관의 수장이었던 오 대인의 딸인 그녀를 며느리로 삼겠노라고 황명을 청한 것이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으로 간사해서 그때그때 변하는 법이지.”

오주은의 탄식 소리에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담겨 있었다.

현재 문관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육씨 가문은 조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미 떠나고 없는 오 대인을 기억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충신의 후손인 오주은에게는 그녀가 죽든 살든, 무시를 당하든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한낱 하인의 딸이 내 머리 위까지 기어오르는 일은 용납할 수 없어!’

혼인식까지 이제 4일밖에 남지 않았다.

남겨둔 시종이 많지 않기에 혼례식 절차는 오주은 혼자 준비해야 했다.

그녀는 영주와 함께 필요한 물품을 사러 시내로 나갔다.

그런데 앞장서서 걷던 영주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부루퉁한 얼굴로 한 연지 점포를 가리켰다.

“아씨, 저 사람 유서음 아닌가요?”

오주은은 이내 영주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금은 장신구를 가득 두르고 있는 유서음이 있었다.

유서음의 아버지는 한때 육씨 가문의 집사로 일했었다.

비록 가문에서 다소 권력을 행사했다고 하더라도 하인의 핏줄은 역시 하인인 법이었지만, 지금 차림새만 보면 유서음은 양반댁 규수라고 해도 전혀 뒤처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직 혼례도 올리지 않았음에도 육준수에게 퍽이나 예쁨 받는 듯했다.

여기서 혼례까지 올리면 얼마나 더 기세가 올라갈까?

“가자.”

하지만 이미 결심이 선 오주은은 더 이상 유서음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뒤돌아서 가려고 하는데 등 뒤에서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은 언니!”

고작 몇 발자국 뛰었음에도 유서음은 숨을 헐떡이며 가련한 척을 하며 다가왔다.

오주은은 가녀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왜 육준수가 욕 먹을 각오하고까지 그녀를 평처로 들이기로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무슨 일이지?”

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예전의 유서음이었다면 그녀를 보고 아씨라고 하며 공손히 대접해야 하는데, 아직 혼례도 올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언니라고 부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얼마나 급했으면….’

유서음은 그녀의 앞에 고개를 살짝 수그리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따로 볼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혹시 준수 오라버니가 혼례식 때 어느 정도 격식으로 언니를 맞이할지 궁금해서요.”

오주은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는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육준수가 알아서 할 일인데 왜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유서음은 여전히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준수 오라버니께서 저를 삼서육례의 격식에 맞춰서 팔인 가마를 보낸다고 했거든요. 하지만 주은 언니는 명문 귀족 출신이시니 저보다 격식이 떨어지면 안 되잖아요. 언니가 입장할 때 팔인 가마보다 안 이쁘면 얼마나 난처하시겠어요!”

그 말에 오주은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귀족의 혼례에서 삼서육례에 팔인 가마면 이미 최고의 격식이었다. 육준수가 그녀에게 팔인 가마를 보낸다고 해도 유서음과 동일한 격식이라는 뜻이었다.

이것은 귀족 가문인 오씨 가문에게는 크나큰 모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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