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은과 육준수는 황제가 짝지어준 인연이었다. 그런데 혼례를 앞둔 어느 날, 그는 시종의 딸을 팔인 가마에 태워 평처로 들이려 했다. 이는 귀족 아씨인 오주은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였다. 대문 앞에 세워진 사인 가마를 본 그녀는 화려한 혼례복을 입은 채로 황궁으로 향했다. 오늘 날 오씨 가문의 영광은 그녀의 부모님이 목숨 바쳐 일궈낸 것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정혼자라 하여도 가문의 영광을 짓밟는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View More놀란 이 내관은 급기야 황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황제는 시시껄렁한 그의 모습을 곱지 않게 흘겨보았다.“허락하마. 상안성에서 복귀하면 바로 이 내관을 시켜 첩지를 공표하게 하지.”그제야 연예준은 공손히 예를 행했다.원하던 바를 이루었으니 계속 황궁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그는 대충 핑계를 둘러대고 이 내관의 안내를 받으며 궁을 나섰다.연예준은 상자 하나를 이 내관의 손에 건네며 말했다.“난 태부인에게 이 희소식을 알리러 가야겠으니, 이건 이 내관이 직접 폐하께 전해주시오.”상자 안의 물건을 확인한 이 내관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왜 폐하께 직접 전하지 않고 저에게 맡기는 겁니까?”그것은 병부였다!“이 내관, 수고 좀 해주시게.”희색이 만면해서 떠나는 그 모습에서 오주은을 향한 진심이 느껴졌다.이 내관은 속으로 혀를 차며 다급히 내전으로 돌아갔다.“폐하.”황제는 상자 안에 든 병부를 집어들고 요리조리 살펴보았다.“그 녀석이 어쩌다가 오태화의 딸에게 마음을 준 거지?”이 내관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말했다.“어쩌면 첫눈에 반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폐하께서도 촉왕 전하의 짝으로 현숙하고 조용한 아씨를 맺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현숙하고 조용한?!”황제는 그만 피식 냉소를 터뜨렸다.“오주은 그 계집이 어딜 봐서 현숙하고 조용하다고! 허나 오가에 그 아이 홀로 남았으니 차라리 이게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구나.”황제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이 내관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 보면 오 소저도 불쌍한 사람 아닙니까. 정말 막다른 길에 다다르지 않았다면 그렇게 소란을 만들지도 않았겠지요. 폐하, 촉왕 전하와 그 소저의 혼인식에 혼수를 보태주실 건가요?”이 내관도 황실 명성을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황실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충신의 자식이 혼례를 올릴 때, 혼수를 보태주는 게 전통이었다.황제는 죽은 충숙공을 떠올리자 한숨을 내쉬었다.“충숙공은 참으로 충직한 신하였지. 참 안타깝게… 되었지. 짐의 뜻
연예준은 부자연스러운 그녀의 표정을 알아차리고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오주은은 갑작스러운 그의 동작에 놀라 본능적으로 시선을 회피했다.그런데 허리춤에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그가 평소에 늘 하고 다니던 자색 옥패가 있었던 것이다.오주은이 당황한 사이, 사내의 정중한 목소리가 귓가에 전해졌다.“오늘 밤 폐하를 알현하고 혼인을 허락받을 것이오. 소저가 서운해할 일은 만들지 않을 것이오.”고개를 든 그녀는 흑요석처럼 빛나는 그의 눈동자를 보고 순간 할 말을 잃었고, 내심 다시 한번 믿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그 말을 끝으로 연예준은 밖으로 나갔지만 오주은은 한참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아씨, 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어떤지요?”영주가 재촉해서야 그녀는 창가에서 시선을 돌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그가 탁자에 두고 간 문서를 집어 영주에게 건네며 말했다.“돌아가서 태워버리렴.”사람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오주은은 나가기 전 그가 달아준 옥패를 빼서 손에 쥐었다.저택으로 돌아온 그녀는 상 위에 옥패를 올려놓고 자세히 관찰했는데, 그 위에는 작은 흠집 하나가 나 있었다.“왜 여기에 흠집이 있는 거지?”오주은은 자신이 실수로 부딪친 적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전장에서 싸우다가 난 흠집인가 보네요. 아씨, 이 옥패는 촉왕을 대표하는 신물이에요. 그만큼 촉왕 전하께서 아씨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의미겠죠?”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던 영주로서는 걱정이 앞섰지만 옥패를 보자마자 그런 걱정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이렇게 귀중한 신물을 아무 생각없이 건넸을 리는 없었다.평양 후작가와 오씨 가문이 사이가 좋을 때도 신분을 상징하는 옥패를 선물로 준 적은 없었다.“그분은 참 좋은 분이야.”오주은이 옥패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쩐지 황궁으로 간 연예준이 걱정되었다.그 시각, 황제의 서재.황제는 정중하게 자신의 앞에 무릎
사내의 뜨거운 숨결이 귓불에 닿자, 오주은은 당황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전하, 이만 놓아주십시오.”하지만 아무리 바둥거려도 그의 품을 벗어날 수 없자, 그녀는 심통이 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전하,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연예준은 그런 그녀의 모습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좀 더 놀려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지만 혹여 밉보이기라도 할까, 그는 천천히 손을 놓았다.“오늘 오 소저가 나를 찾아오지 않았어도 내가 소저를 찾아갔을 것이오.”그 말을 들은 오주은은 놀란 얼굴을 하고 그에게 물었다.“전하 같은 분이라면 혼인을 원하는 귀족 아씨들이 줄을 섰을 텐데 왜 하필 저인가요?”“그럼 오 소저는 왜 굳이 나를 택한 거지?”말을 마친 그는 다시 성큼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당연히 전하께서는 준수한 용모를 가지셨고 일등 신랑감이기 때문이지요.”연예준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냉소를 터뜨렸다.“거짓말쟁이 같으니라고.”오주은은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당황한 얼굴로 반박했다.“저 거짓말쟁이 아니거든요?”어린아이처럼 새침한 모습에 연예준의 미소가 짙어졌다.그는 일부러 한걸음 더 다가서서 뜨거운 숨결을 그녀의 얼굴에 뱉으며 말했다.“소저를 선택한 건 내가… 소저의 부모님과 한 약조가 있기 때문이오. 그리고 오직 소저만이 나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지.”오주은은 어쩐지 그의 말속에 말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연예준은 촉지에서 귀경했으나, 손에는 병부를 들고 있었다.다른 세가의 딸과 혼인하면 황제의 경계심을 살 수 있으니 배후에 지지세력이 없는 천애고아인 그녀가 최적의 선택지일 수 있었다.“전하께서 저를 선택하신 이유는 제가 고아이기 때문이지요?”속으로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확실히 물어보고 싶었다.사내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소.”연예준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대를 연모해 왔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소녀의 경계심을 살까 봐 두려웠다.어
약간 날이 선 그의 말투에 찻잔을 든 오주은의 손이 떨렸다.그녀는 맞은편으로 다가와서 앉은 연예준의 눈치를 살피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괜찮은 것 같았는데 왜 갑자기 심통이 난 거지?’오주은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담담한 얼굴로 어제 쓴 문서를 꺼내 그의 앞으로 건넸다.“일단 이거 좀 읽어 보시고, 제가 이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연예준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별을 담은 듯한 그녀의 눈망울을 보고 안 좋았던 기분이 금세 사라졌다.그러나 문서를 읽어보자마자 표정은 다시 굳었다.“왜 이런 걸 나한테 보여주는 거요?”오주은이 건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오씨 가문의 재산 명세와 그녀의 혼수품 목록이었다.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어떻게 성의를 보일지 떠오르지 않아서 가장 현실적인 것으로 들고 온 것이다.그것은 그녀가 가진 최상의 협상 조건이었다.“전하, 소녀가 오늘 이렇게 따로 뵙자고 한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하고 행한 일이오니, 기분이 안 좋으시더라도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시겠습니까?”연예준은 간절한 그녀의 눈빛을 보고 말없이 자리로 돌아가서 앉았다.‘나쁜 계집 같으니라고! 대체 날 뭐로 보고!’“이것은 저희 가문의 재산 현황과 소녀의 혼수품 목록입니다. 전하께서도 혼사 일로 골머리를 앓고 계신다는 얘기를 들었사옵니다. 그리고 소녀 역시 같은 고민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전하도 잘 아실 테지요. 저는 전하와 거래를 하고자 이것을 가져온 것입니다.”연예준은 그녀가 이어서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은 갔지만, 그저 모르는 척하기로 하고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되물었다.“그래서 오 소저는 나와 무슨 거래를 하고 싶은 게요?”오주은은 사내의 노골적인 시선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전하께서도 소녀와 같은 고민을 앓고 계시니 차라리 저와 동맹을 맺는 것은 어떠십니까? 여기 적힌 것이 소녀의 성의입니다.”현재의 오씨 가문은 이것들을 제외하고 내놓을 수 있는 게 없었다.한때는 조정에서 무소불위의 권
청수각은 경성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찻집으로 별실을 예약하기 매우 힘든 곳이었다.“아씨, 제가 갔을 때 마침 촉왕이 예약한 옆방이 남았더라고요? 하늘이 저희를 돕는 걸까요?”영주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우연일까?’오주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저도 모르게 연예준을 떠올렸다.‘우연이겠지. 내가 그리로 갈 줄 어찌 알고.’생각을 정리한 오주은은 내일 그에게 무슨 말을 할지 머릿속으로 복귀했다.한편.“전하, 예지 능력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오 소저의 심복 영주가 청수각으로 가서 별실을 예약했더라고요!”서재에 들어선 상청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고했다.연예준에게 진맥을 해주던 안 신의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오 소저요? 돌아가신 충숙공의 따님 아닙니까?”연예준은 손을 내리며 덤덤히 물었다.“어떤가?”그가 답이 없자 안 신의의 입가에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독소가 완화된 증세를 보이네요. 혈색이 좋아지신 걸 보니 최근에 잠을 잘 주무셨나 봅니다.”그 말을 들은 연예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상청에게 눈치를 주었다.상청은 향대 하나를 안 신의에게 건넸다.“이 안에 든 성분을 좀 알아보게.”향을 들고 냄새를 맡던 안 신의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물었다.“유란향 아닙니까?”연예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안 신의는 그것을 조심히 싸서 챙긴 뒤에 조용히 촉왕부를 떠났다.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촉왕부를 감시하던 사람 조차도 그가 다녀간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상청도 조용히 서재를 나섰고, 그렇게 홀로 남은 연예준은 책상 위에 놓인 초상화 하나를 집어들었다.두루마리가 펼쳐지자 환하게 웃는 여인의 초상화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오주은이 이곳에 있었다면 그 초상화가 어머니의 작품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을 것이다.“양심도 없는 여인일세, 감히 나를 잊다니.”연예준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는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도로 말아 책상 위에 놓았다.한편, 시간 맞춰서 청수각에 도착한 오주은은 심부름꾼의 안내를 받으며 위층
“영주야.”부름을 들은 영주가 안으로 들어왔다.“왕 집사를 불러주렴. 긴히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야.”왕 집사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저택에서 시중을 들던 사람으로 그녀보다 경성 사람들에 대해서 아는 게 많았다.잠시 후, 안으로 들어온 왕 집사가 공손히 예를 올렸다.“아씨, 부르셨습니까?”그러자 오주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아저씨, 촉왕부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왕 집사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더니 물었다.“아씨,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제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주세요.”오주은은 담담한 표정으로 왕 집사에게 자리를 권했다.비록 이미 결심이 선 상태이긴 했지만 그래도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기 때문이다.“아씨도 아시겠지만, 촉왕 전하는 이성왕입니다. 폐하께서 특혜를 내려서 오늘날의 촉왕부가 있게 된 것이지요. 다만 촉왕은 황실 혈통이 아니라 신분을 봉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기에 촉왕의 생모를 고명부인으로 봉하고 태부인의 칭호를 내렸습니다.”“손 태부인께서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시나 문장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조용하고 인자한 성격이라고는 하지만 눈 밖에 난 사람들에게는 가차없다고 하더군요.”오주은도 태부인 손씨에 관해 들은 바가 있었다.몇 년 전 지나가다가 손 태부인이 진왕부의 측비에게 호통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진왕 측비가 태부인을 일찍이 부군을 잃은 재수없는 과부라고 흉을 봤다고 한다.연예준의 생부는 전장에 나가 나라를 위해 희생한 대장군이었다. 손 태부인은 당연히 노할 수밖에 없었고 황제를 찾아가서 억울함을 호소했다.진왕이 나중에 측비에게 중벌을 내렸지만 그 뒤로 태부인은 진왕만 보면 화를 냈다고 했다. ‘촉왕께서 어머니를 많이 닮으셨네.’“다른 건 더 없나요?”오주은은 찻잔에 차를 따르며 담담히 물었다. 그 외에는 딱히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지금 중요한 것은 손 태부인의 태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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