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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청산
“주은아, 일단 뭐가 원통한지부터 말해보거라. 대체 무슨 일이기에 아비의 위패까지 들고 온 것이냐?”

황제는 오주은을 보고 있으면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안고 있는 위패를 보니 측은해서 화조차 낼 수 없었다.

오주은은 위패를 안은 채, 먼저 황제에게 큰절을 올렸다.

“오래전 폐하께서는 소녀에게 약혼자를 정해주셨지요. 그러니 소녀는 본디 오늘 평양 후작가로 시집을 가야 마땅하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말하던 중 갑자기 가라앉기 시작했다.

“허나… 육 세자께서는 집안 하인의 딸과 정분이 나서 그 아이를 평처로 들일 결정을 하셨지요.”

“이품 현주인 소녀가 시종의 딸과 같은 날 혼례를 올리고 동등한 신분의 평처가 된다는 것은 이미 오씨 가문의 명성을 더럽히는 일이옵니다.”

“그러나 육 세자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유서음에게 팔인 가마의 격식을 주고 제게는 고작 사인 가마를 보냈습니다. 이게 저희 집안에 사람이 없다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오주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평양 후작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혼례복도 못 갈아입고 온 육준수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저 경고만 하려고 했을 뿐인데….’

“폐하, 소인은… 절대 오씨 가문에 모욕을 주려는 의도는 없었사옵니다. 서음의 부모는 제 아버지를 구하려다 사망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만 있을 뿐이옵니다.”

“그리고 주은이가 말한… 사인 가마는… 단지 후작가의 재정에 무리가 좀 있어 팔인 가마 한 대를 더 마련하기 곤란하여서 그런 것입니다!”

육준수의 변명이 끝나자 평양 후작은 절망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멍청한 자식!’

오주은은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울먹이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시종의 딸의 위신을 세워주고자 팔인 가마의 격식을 차려주었으면서 이품 현주인 저에게, 하물며 폐하께서 점지해 주신 약혼녀인 저에게는 사인 가마만 보냈습니다. 이것은 우리 오씨 가문을 무시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폐하의 은총을 무시한 행위입니다!”

오주은의 말을 들은 황제는 기가 막혀 웃음만 나왔다.

“평양 후작 가문은 참으로 인정 많은 세자를 길러냈구나! 시종의 딸의 자존심을 챙겨주려고 짐이 친히 점지한 약혼녀를 홀대하다니!”

황제가 용상을 탕 내려치자 대전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렇게 한참동안 침묵이 오가는 가운데, 연예준이 늠름한 자태로 황제의 곁으로 가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 평양 후작의 세자는 참으로 건방지기 짝이 없습니다. 약혼녀를 무시한 것도 모자라 반역의 마음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평양 후작과 육준수는 고개를 번쩍 들고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촉왕 전하께서는 말을 삼가십시오. 반역은 구족을 멸할 대죄인데, 저희가 어찌 반역을 꾀하겠나이까!”

반평생을 조정에서 노심초사해 온 평양 후작은 자신의 아들이 혼례식같이 중요한 날에 이런 대형 사고를 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반면, 육준수는 뭔가 짚이는 것이라도 있는 듯, 멍한 표정으로 연예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예준은 황제의 곁에서 냉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잔뜩 웅크리고 있는 유서음을 가리켰다.

“며칠 전, 장공주의 관저에서 저 계집은 육 세자가 십이인 가마의 격식으로 자신의 혼례를 치러주고 싶어한다고 제 입으로 말했습니다. 반역을 꾀할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그런 말을 입에 담았겠나이까?”

“그날 그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폐하께서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시면 자연스레 알게 되실 겁니다.”

연예준의 거들먹거리는 태도는 마치 황제 곁에서 악행을 부추기는 간신배가 따로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주은은 억지로 짜냈던 눈물이 쏙 들어갈 뻔했다.

‘촉왕께선… 지금 날 도와주시는 건가?’

곧이어 분노한 황제는 안색이 파랗게 질린 육준수를 가리키며 호통쳤다.

“한낱 시종의 딸 따위를 짐의 십이인 가마에 태운다니! 짐이 이 용상도 너희에게 양보할까?”

육준수는 온몸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버렸고, 겁에 질린 유서음은 바닥에 앉아서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

“서음은 배운 것이 없는 아이라서 황가의 예법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 말실수를 한 것입니다. 소인이 돌아가서 잘 가르치겠습니다. 저희 가문은 절대 반역을 꾀한 적이 없사옵니다!”

육준수는 후회가 막심했다. 향락에 취해 아무 생각없이 건넨 말이 반역의 죄가 되어 돌아올 줄을 대체 누가 알았겠는가!

대전에서 장엄하고도 싸늘한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유독 연예준만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천자의 의장을 하사받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 있는 촉왕으로서 용상을 넘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폐하, 후작가에서 반역을 꾀한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충신의 자식을 이토록 홀대하고 폐하의 정혼을 무시한 것은 사실입니다. 오주은의 부모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다 장렬히 희생하였습니다. 폐하께서 저 아이의 억울함을 모른 체하신다면 문관들은 크게 실망할 것입니다.”

오주은이 굳이 뭘 할 필요도 없이 연예준은 그녀가 하고싶은 말을 모두 대신해서 해주었다.

그녀는 위패를 꼭 품에 안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 말들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면 황제에게 무례하다고 비난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녀도 이 길을 걷고 싶지 않았다.

촉왕이 그녀를 대신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해준 것은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황제는 굳은 표정으로 평양 후작 일가족을 노려보았다.

오태화는 이미 죽은지 오래되었고 조정에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자는 더 이상 없었다.

오주은의 억울함을 모른 체하여도 아무도 그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반면, 오주은은 위패를 안고 거리를 활보하며 일을 크게 만들었으니 평양 후작가가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넘어간다면 조정의 대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평양 후작, 자네 슬하에 자식이 더 있는가?”

영문을 모르는 평양 후작은 순순히 답했다.

“예, 육준후라고 서자가 한 명 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피식 냉소를 터뜨리고는 곧바로 명을 내렸다.

“좋다. 육준수의 세자 자리를 박탈하고 오늘 부로 육준후를 세자로 봉하는 바이다. 유씨 계집은 품행이 단정치 못하고 대역무도한 말을 입에 담았으니 정실의 자격이 없는 것 같도다. 평생 천첩으로 살도록 명하노라!”

천첩이란 통방보다 못한, 시종과 다름없는 명분이었다.

낮에는 시종들과 함께 일을 하고 밤에는 주인을 섬겨야 하며,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도 호적에 올릴 수 없었다.

그러나 육준수는 유서음의 처벌에 대해 사정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오늘 부로 세자 자리를 잃은 것이다.

게다가 늘 눈엣가시처럼 굴던 서자 육준후가 그를 밟고 세자가 되었다.

오주은은 위패를 꼭 안고 웅크린 채로, 하얗게 질린 육준수의 얼굴을 감상했다.

평양 후작 일가의 처우를 결정한 황제는 부드러운 어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이 정도면 만족하느냐?”

오주은은 공손히 절을 올리고 답했다.

“소녀 감히 폐하께 간청을 드리옵니다. 부디 소녀와 육준수의 혼사를 물려주십시오.”

육준수는 경악한 얼굴로 오주은을 노려보았다.

‘혼사를 물려? 서음이는 평생 천첩으로 만들어 놓고 혼사를 감히 혼사를 물린다고?’

그는 줄곧 오주은의 불만이 유서음을 향한 시기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난감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짐이 기억하건데, 너가 올해 벌써 열일곱이더구나. 이 시점에 파혼하면 앞으로 혼인이 더 힘들 수도 있다.”

청운국 여인은 열일곱이 되기 전까지 시집을 가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만약 그전에 시집을 못 가면 품행이 단정치 못하다고 인정되어 삭발하고 승려원에 보내지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오주은은 열일곱 생일까지 고작 몇 달 남은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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