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예요."복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순간적으로 계단 난간을 꽉 잡고 멈춰 섰다.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누그러졌다.잠시 후, 뒤돌아 올라가자 어두운 복도에 서 있는 진정우가 보였다.얼마 전 어색하게 헤어졌던 순간이 떠올라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지만 깜짝 놀란 건 사실이라 일부러 짜증 난 척하며 말했다.“이런 식으로 갑자기 나타나면 놀라는 거 몰라요?”“네.”그는 늘 그렇듯 짧게 대답했다. 그런 그의 태도가 어찌나 무심하게 느껴지는지 뭔가 더 말하려던 순간, 그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다음번엔 안 그럴게요.”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열쇠를 꺼내 문을 열려는데 열쇠가 자물쇠에 닿기도 전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도 진지했다.“오늘 밤은 제가 오해했어요.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게요.”응?내가 멍하니 돌아보자 그는 이미 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 나를 잠시 바라보며 말했다.“잘 자요.”입술이 떨렸지만 그의 문이 닫히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앞으로... 라는 게 무슨 뜻이지?”사실 그가 말하는 뜻은 알고 있었다. 가짜 연인 관계를 끝내기 싫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이 관계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상처를 더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진정우는 여자 친구조차 사귀어본 적 없는 사람인데 나 때문에 억지로 연애를 흉내 내면서 소중한 첫 경험들까지 다 내주고 있었다.이젠 너무한 것 같아서 스스로가 미워졌다.자책하는 마음으로 집에 들어왔고 그날 밤 죄책감에 뒤척이며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꿈속에서도 진정우가 나를 따라다니며 "왜 키스했어요? 그건 내 첫 키스였는데."라고 묻는 장면이 반복됐다.결국 새벽 4시 반쯤에 눈을 떴다.이 시간쯤이면 진정우는 벌써 운동을 나갔을 것이다. 이 틈을 타서 서둘러 씻고 준비한 후, 그와 마주치지 않도록 서둘러 집을 나섰다.아침 해가 희미하게 떠오르는 거리를 달리며 문득 내가 왜 이토록 피해 다니고 있는지 스스로가 한심하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회사 업무에 빨리 익숙해지고 싶어서요.”“그래도 너무 일찍 나오신 거 아니에요? 회사에서 추가 수당 안 주는 거 아시죠?” 허진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나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제가 자발적으로 하는 겁니다.”“그래서 윤 부장님이 이 자리까지 오신 거겠죠. 모두가 부장님처럼 열심히 하면 우리 회사도 금방 대박 나겠어요.” 허진호의 지나친 칭찬에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났다.그는 항상 이렇게 말에 진심과 농담을 섞어서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나는 이런 말에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농담이 아니라, 회사 발전이 한 사람에게만 의존할 수는 없어요. 윤 부장님의 노력은 저도 충분히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표님께도 말씀드렸어요. 부장님이 너무 무리하셔서 건강을 해치기라도 하면 회사로서는 큰 손실이라고요. 앞으로는 좀 더 건강에 신경 쓰라고 하셨어요.”허진호는 아예 내가 일찍 출근할 핑계마저 막아버렸다. 그래도 뭐, 오히려 잘 됐다. 이제 더는 진정우를 피해 다닐 필요도 없으니까.진정우는 요 며칠 아침 식사를 문 앞에 두지 않았다. 내 뜻을 알았는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한 것 같다.“듣기로는 오늘 고객이 오신다면서요? 게다가 꽤 큰 계약이라던데?” 허진호가 화제를 돌렸다.“네, 10시에 오기로 했어요. 한 시간 정도 남았네요.”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이제 준비하러 가봐야 해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좋아요. 윤 부장님, 오늘도 좋은 결과 기대하겠습니다.” 허진호는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나를 응원했다.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준비한 자료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9시 50분쯤 미리 회의실에 들어가 준비 상태를 확인했다.오늘 만날 분은 정말 중요한 고객이었다. 이 계약을 성사할 수만 있다면 며칠 전 강유형이 빼앗아 간 고객으로 생긴 손해를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성과를 몇 단계 더 끌어올릴 기회였다.10시 정각, 고객이 도착했다.그런데 그가 회의실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표정이 굳어졌다.
우리 회사 사장은 마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모든 걸 알고 있는 신비한 인물 같았다.강유형은 내게 쏟아붓던 분노를 허진호에게 돌리며 소리쳤다.“안 한다고? 네가 지금 누구랑 얘기하는지 알고는 하는 소리야? 내가 누군지 알아?”지금 강유형은 무례하고 돈만 많은 졸부같았다.허진호는 물컵을 들고 무표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사장님께서 당신이 누군지 알아서 이 거래를 안 하신다고 하셨습니다.”그는 짧은 말로도 강유형을 제대로 자극했다.강유형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네 사장 누구야? 해동에서 발붙이고 살기 싫단 거야?”“네, 사장님께서 말씀하시길 해동에서 장사를 안 해도 되니까 당신과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허진호의 말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다.강유형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좋아, 두고 보자고. 네 사장한테도 전해.”“알겠습니다. 사장님께서도 강 대표님께 전하라 하셨습니다. 언제든 환영한다고요.”허진호의 말이 강유형을 완전히 자극했다.그러자 강유형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나는 그가 허진호에게 주먹이라도 날릴까 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하지만 강유형은 이를 꽉 물고 몇 초간 허진호를 노려보다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네가 이렇게 버티면 결국 다른 사람들만 피해를 보는 거 알지? 오늘 나와 함께 가면 좋게 끝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 회사가 네 고집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될 거야.”강유형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도 소용없자 협박하기 시작했다. 비록 나는 그의 집에서 자란 사람이긴 해도, 우리 부모님이 물려주신 고집은 쉽게 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쉽게 겁을 먹었다면, 우리가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만약 네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 사이의 마지막 정까지 스스로 짓밟는 거야.”“네가 날 버린 마당에 무슨 정 타령이야?”그는 화가 나서 욕설을 내뱉었다.더 이상 그와 말다툼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회사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길 원하지도 않았다.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강 대표님, 이제 그만 가세요.”
“부대표님, 혹시 사장님에 대해 아는 정보가 좀 있으세요?”직접 뵐 수 없다면 이름이라도 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허진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사장님께 관심이 생기셨나 봐요?”“네, 너무 신비로워서요. 도대체 어떤 분인지 궁금해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허진호는 마침 커피 가루를 다 갈고 커피 향을 맡으며 말했다.“음, 향이 참 좋네요.”그러고는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한 잔 내려드릴까요?”“괜찮아요.”사장님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서 지금은 커피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그는 갈아놓은 커피 가루를 내게 내밀며 말했다.“이 커피, 사장님께서 보내주신 거예요. 한 번 맛보지 않겠어요?”“그분이 보내주신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 직접 만나 뵙는 게 더 좋겠는데요.”나는 솔직하게 말했다.허진호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미소가 왠지 모르게 이상하게 느껴졌다.“뭐가 그렇게 웃기세요? 제 부탁이 과한가요? 왜 웃으세요?”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과한 건 아니에요. 사장님을 이렇게 궁금해하다니. 얼굴도 못 본 분한테 이리 관심을 가지다니. 우리 사장님 역시 대단하시네요.”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허진호가 장난스럽게 말을 돌리려는 건 알았지만 사장님에 대한 궁금증은 오히려 더 커졌다.그가 내게 커피를 건넸을 때,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혹시 제가 괜한 마음을 품을까 걱정되신다면, 차라리 그분에 대한 기본 정보라도 알려주세요.”“그건 좀 어렵겠네요.”허진호는 예상대로 거절했다.나는 약간 비꼬듯이 물었다.“그럼 이유라도 설명해 주시죠.”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사장님께서 원치 않으신다네요.”“왜요?”나는 그가 계속 빙빙 돌려 말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사장님이 본인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서요. 사람들이 다 반할까 봐 그러시나 봐요.”그는 커피 향을 깊게 들이마시며 말했다.강유형 집안에서 상급 커피를 많이 접해본 터라 이 커피가 꽤
이소희의 다급한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무슨 일이에요?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봐요.”“지금 누군가가 놀이공원에서 정우 씨에게 시비를 걸고 있어요. 몇 명인데 다들 무섭게 생겼어요.”이소희의 말을 듣고 긴장이 풀렸다. 큰일이 난 줄 알았는데 그냥 진정우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이소희는 많이 놀란 듯했지만 진정우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그 사람들이 벌써 정우 씨를 찾았어요?”“아직은 못 찾았지만 곧 올 것 같아요. 경찰을 불러야 할까요?” 이소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일단 정우 씨에게 먼저 상황을 알리고 어떻게 할지 물어보세요. 본인이 판단해서 결정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진정우가 그들과 마주하게 된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판단을 따르기로 했다.“네, 그럼 그렇게 할게요. 언니, 올 거죠?”“당연히 가야죠.” 진정우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데 안 갈 수가 없었다.사실 강유형이 남긴 말도 마음에 걸렸다. 혹시 그가 회사를 위협하면서 진정우에게도 어떤 식으로 압박을 주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가방을 챙겨 나갈 준비를 하며 강유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허진호가 사무실 밖으로 나오며 내 가방을 보고 물었다.“어디 가시려고요, 윤 부장님?”나는 통화 연결음이 울리는 걸 확인하며 잠시 답하지 않았다.“윤 부장님, 대체 어디 가시나요?” 허진호가 다시 물었다.답하려던 순간, 강유형이 전화를 받았다.“왜, 이제 마음이 바뀐 건가?”“지금 놀이공원에 사람들 보냈어?”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는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무슨 소리야? 내가 뭘 보냈다고? 무슨 얘긴지 모르겠는데.”그의 반응에 순간 당황했다. 내가 아는 한, 강유형은 자신의 행동을 숨기거나 부정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만약 진정우를 위협하려는 의도였다면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우를 찾은 사람들은 강유형과는 무관한 셈이다.“설마 나한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갑자기 오늘 아침 허진호가 말했던, 아니 정확히는 허진호가 사장님의 말씀이라고 전해줬던 그 말이 떠올랐다. 순간 진정우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내가 아는 그라면 사장님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았다.“허... 잘도 버티네.”대머리 남자는 비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그렇게 버티는 대가를 보여주지.”그가 목을 한 번 비틀자 뼈마디가 우두둑 소리를 냈고 그의 신호에 부하들이 한꺼번에 놀이공원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정우는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가 가만히 있는 이유를 나는 알 것 같았다.그가 겁이 나서가 아니라 그들이 놀이공원을 망가뜨리는 순간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건 곧 강유형의 이익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순식간에 놀이공원 보안 요원들이 뛰어왔다. 그들이 진정우를 건드리는 것까지는 무시할 수 있었겠지만 공원을 훼손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들의 임무는 놀이공원을 지키는 것이었으니까.위압적이던 그들도 보안 요원들의 수에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제압당했다. 하지만 이들 역시 범상치 않은 상대들이었다. 마침내 그들 중 한 명이 칼을 꺼내 보안 요원 대장의 목에 겨누며 협박했다.“전부 손 떼! 안 그러면 이 자식 죽을 줄 알아!”뜻밖의 상황에 나는 보안 요원들에게 눈짓을 보내며 일단 물러나게 했다. 보안 요원들은 사람을 풀었지만 대머리 남자는 여전히 인질을 붙잡고 있었다. 그는 진정우를 보며 비웃었다.“왜 이렇게 고집이 센 거야? 난 이런 강한 놈들 골라서 부러뜨리는 걸 좋아하지. 지금 당장 무릎 꿇고 세 번 절하면 이 사람은 살려줄게. 안 그러면 바로 죽을 수도 있다고.”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말했다.“사람을 다치게 하는 건 안 돼요.”그러자 대머리 남자는 나를 바라보며 비열하게 웃었다.“어디서 온 미녀야? 그럼 차라리 네가 내 품에 안겨봐. 그러면 너도 이 사람도 안전하게 놔줄게.”이런 사람들에게는 헛소리도 수준에 맞춰 나온다는 말이 딱 맞았다. 그는 보안 요원을 끌고 나에게 다
“무슨 일이야?”강유형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모든 걸 내려다보는 CEO의 태도였다. 조금 전 내게 투정을 부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여자가 변덕이 빠르다지만 남자도 만만치 않았다.얼굴이 하얗게 질린 보안 책임자가 다리가 후들거리는 와중에도 재빨리 달려와 상황을 보고했다.강유형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 진정우에게 시선을 돌렸다.“그러니까 이 사태가 정우 씨의 개인적인 일 때문에 생긴 건가요?”그 말을 듣고 나는 강유형이 진정우를 난처하게 만들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진정우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강유형은 비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맞죠?”“맞습니다.”진정우는 부정하지 않았다.강유형은 바닥에서 부서진 물건 조각을 주워들었다.“정우 씨,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까요?”“강 대표님은 어떻게 처리하시려는데요?”진정우는 그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나는 가만히 지켜봤다. 지금 내가 나서면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내가 없었다면 강유형이 이렇게까지 진정우를 곤란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성격상 오히려 진정우를 보호했을지도 모른다.어쨌든 여기는 KS 그룹의 영업장이고 부서진 것도 KS 그룹의 놀이공원이다. 이곳에서 난동을 부리는 건 강유형을 무시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강유형은 손에 든 조각을 내던지며 손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정우 씨의 개인적인 일부터 처리하시는 게 좋겠네요. 일이 해결될 때까지 이곳 일은 강 이사님께 맡기는 게 낫겠습니다.”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강유형이 진정우의 업무를 중단시키려는 것이었다.지금 조명 조정은 거의 마무리 단계라 진정우가 없더라도 큰 차질은 없겠지만 강유형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마치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격이었다.순간 아까 그 사람들이 혹시 강유형이 보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우를 쫓아낼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저는 강 대표님의 직원이 아닙니다. 대표님은 이런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어요.”진정우가 단호하게 말하자 강유형은 비웃으
강진혁은 상황을 파악한 듯 진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정우 씨가 개인적인 문제로 업무를 방해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오늘의 일은 보안팀이 외부인 출입을 막지 못한 탓도 있으니 정우 씨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죠.”강유형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형인 강진혁이 이렇게까지 진정우를 두둔할 줄은 예상치 못한 것 같았다.“강 실장, 지금 이곳은 내가 관리하는 곳입니다. 여기 일은 제게 맡기세요.”강진혁의 말은 강유형이 관할 범위를 넘지 말라는 뜻이었다.강유형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형의 말을 억지로 삼키며 물러섰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진작 내쫓았을 것이다.“좋아요. 또 이런 일이 발생하면 강 이사님과 정우 씨가 함께 책임지게 될 겁니다.” 강유형은 이를 악물며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그가 멀어지자 나는 숨을 고르며 한숨을 내쉬었다.강진혁은 진정우를 향해 차분히 말했다.“이번 일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해 주세요. 그리고 오늘 손상된 시설은 제가 수리팀을 보내 복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수리 비용은 정우 씨 측에서 부담하는 걸로 하죠.”공과 사를 명확히 하는 그의 태도에 진정우는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강진혁 실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 나에게 따로 말은 건네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강진혁은 나를 위해 강유형과 맞서 싸웠다. 그의 배려에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일이 마무리되었기에 나는 진정우를 한 번 바라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놀이공원을 나가던 중 내 차 앞에 강유형의 차가 가로막으며 서더니 강유형은 차에서 내리며 다가와 내 차 문을 열고는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운전해.”나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할 말 있으면 지금 해. 출근해야 해.”“운전하라고 했잖아!”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셔츠 깃을 풀어 헤쳤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을 보고 더 이상 저항해 봐야 소용없을 것 같아 핸들을 잡았다.“그래. 어디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