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아, 소영이는 어디 있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진정우는 전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로 거의 간절하게 물었다.그 목소리에 나는 마음이 찔리듯 아팠다. 오랜만에 그의 입에서 지원이라는 내 이름이 들려왔다.그때 검사실 문이 열리면서 진소영이 나왔고 나는 휴대폰을 그녀에게 건넸다.“널 찾아.”진소영은 잠시 멈칫하다가 전화를 받아 귀에 대고 말했고 나는 조금 떨어져서 그녀의 말을 들었다.“비행기 타고 오느라 너무 힘들었어. 내가 걱정돼서 언니가 날 데리고 병원에 왔어. 괜찮대. 의사님은 심장에 문제없다고 했어. 그냥 좀 쉬면 될 거라고 했어.”“알았어. 언니가 날 잘 챙겨주니까 오빠도 걱정하지 마. 오빠, 나는 언니 외에 다른 여자를 절대 안 받아들여. 오빠가 다른 여자랑 결혼하면 나한테도 이제 오빠는 없는 거야.”진소영의 말에 나는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고 숨이 안 올라와서 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 말을 듣고 있었다.“알았어. 오빠, 걱정하지 마. 나도 언니 잘 챙겨줄게.”마지막 말은 좀 더 크게 나왔고 나는 그 말이 나에게 들리게 하려고 일부러 크게 말한 거라는 걸 알았다.진소영은 진정우와 나를 위해 너무 신경 쓰고 있지만 사랑은 그렇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언니, 괜찮아요?”진소영이 나에게 묻자 나는 이미 감정을 추스르고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괜찮아. 너는 좀 나아졌어?”진소영은 보고서를 건네주며 말했다.“보세요. 제가 괜찮다고 했잖아요. 언니는 뭐 하러 이렇게 돈 써서 검사까지 한 거예요.”“검사 안 하고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네 오빠가 내게 뭐라고 할 것 같아서.”나는 장난스럽게 대답했다.“그럴 리 없잖아. 오빠는 언니의 목숨을 자기 목숨보다도 훨씬 소중하게 생각해요.”진소영은 언제나 진정우를 챙기려고 하는 나쁜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나는 대꾸하지 않고 그녀를 데리고 호텔로 갔다.밤이 되자 진소영은 잠이 들었지만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휴대폰을 꺼냈다. 안리영이 보낸 여러 개의 읽지 않은
나는 전방위적으로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그런데 그는 왜 나를 따라다니는 걸까? 복수라도 하려는 걸까?나는 휴대폰을 꽉 쥐고 화면을 응시지만 더 이상 그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많이 고민하다가 나는 그 메시지를 캡처해서 진정우에게 보냈다.브라운이 나를 노리고 지금 진소영이 내 옆에 있다면 내가 위험에 처할 때 진소영도 연루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나는 진정우에게 내 위험을 알리기로 했다. 그가 나를 보호하고 싶지 않더라도 적어도 진소영은 그가 방치할 수 없을 것이다.이런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진정우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습관이겠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그에게만 의지하는 것 같았다. 설령 그가 나를 원하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내 전화가 울렸다. 진정우였다.나는 바로 전화를 받았지만 먼저 말을 꺼낸 건 진정우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사람을 보내서 너를 지켜줄게.”그 말을 듣고 내 마음이 묘하게 따뜻해졌지만 그 따뜻함 속에 씁쓸함도 섞여 있었다.그래도 나는 여전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날 지켜달라는 게 아니라 내가 걱정하는 건 소영이가 내 옆에 있는데 만약 내가 뭔가 문제가 생기면 소영이도 위험해질 거잖아. 네가 그런 상황을 방치하지 않길 바라는 거야.”전화기 너머에서 진정우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었고 전화를 끊지도 않았다.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나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브라운이 왜 나를 노리는데? 혹시... 신지태 때문이야?”브라운이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스누커 소녀라고 불렀고 나는 사실 신지태와만 게임을 했었다. 게다가 최근에 신지태 사건도 있었고 나도 그를 만나러 이곳에 왔다.그래서 브라운이 나를 따라오는 이유는 아마도 그것 때문일 거로 생각했다.진정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신지태는 그저 구실일 뿐이야. 그 사람들은 너를 이용해서 나를 공격하려는 거겠지.”그 말에 나는 잠시 놀랐고 바로 그때 강유형이 나한테 했었던 말이 떠올랐다.“Q 클럽의 보스
“지태 오빠의 경기는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까? 지태 오빠가 위험한 건 아닐까?”나는 어쩔 수 없이 신지태가 걱정되었다.“신지태는 괜찮아.”진정우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나는 창밖에 짙은 어둠을 바라보며 물었다.“나는 정말로 돌아가야 하는 거야?”진정우는 잠시 침묵한 후 말했다.“내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 그리고... 그 사람이 보낸 메시지는 삭제하고 차단해.”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잠시 멈췄고 나는 그가 더 말할 줄 알았지만 결국 전화를 끊었다.이국의 밤은 원래 잠들기 어려운 법인데 이렇게 상황이 꼬여버리니 나는 아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진정우의 말을 듣고 나는 그 사람의 메시지를 삭제한 뒤 신지태에게 보낸 메시지를 열어보았다. 정말로 그에게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그가 지금 긴급 훈련 중이라는 걸 알기에 그의 마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다시 채팅창을 닫았다.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잠이 오지 않아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러다 문득 진소영이 깬 걸 알고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전화하는 소리도 들렸다.그녀의 목소리는 원래 부드러운데 사랑하는 사람과 전화할 때는 더 부드럽고 온화했고 나는 듣기만 해도 행복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소지훈이라는 걸 생각하니 나는 또 불안해졌다.그래도 진정우가 그 사람에 대해 조사를 다 했을 테니 그가 나에게 진소영을 소지훈에게 맡기라고 했으니 나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나는 진소영이 소지훈과 전화하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 들었다. 아마도 그 행복한 기운이 내 불안을 치유해 준 것 같았다. 이 잠은 오전 11시까지 이어졌다.내가 눈을 뜨자 진소영이 책을 보고 있었다. 소지훈이 그녀에게 준 에너지는 확실히 긍정적이었다.“밥 먹었어?”나는 가장 먼저 진소영의 식사를 걱정했고 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음식 주문했어요.”진소영은 공부도 잘하고 어젯밤에 우리가 돌아왔을 때도 내가 전화해서 음식을 주문했다. 오늘은 내가 나서지 않아도 혼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소지훈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지 않았다. 혹은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나는 내가 짐작한 대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지훈 씨, 혹시 일부러 소영이 곁에 나타난 건가요?”소지훈은 갑자기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그의 반응 자체가 내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그때 나는 내 얼굴과 유난히 닮은 유희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유희연이 세상을 떠난 후, 소지훈은 나와 함께 진소영의 수술실까지 갔었다.“소영이와 가까워지면 나랑 자주 만날 기회가 생기고 그러면 희연 씨를 보는 것 같아 좋아요?”소지훈은 급하게 부인하며 대답했다.“아니에요, 누나. 정말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그는 급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진정하려는 듯했다. 나는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누나,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전 절대 누나를 희연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물론 두 분이 닮으셨지만 저는 분명히 알고 있어요. 희연이와 누나는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소지훈은 진지하게 말했고 그 말은 거짓말 같지 않았다. 나는 조금 안도하며 그를 바라봤지만 여전히 걱정됐다.소지훈이 나를 유희연이라고 생각하며 그리움과 고통을 끊어내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다. 비록 아니라고 했지만 여전히 내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그런데 왜 자꾸 소영이 곁에 나타나죠? 이건 우연일까요?”소지훈은 입술을 꼭 깨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지훈 씨, 만약 말할 수 없다면 더 이상 소영이를 만나지 마세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누나, 소영이에게 나쁜 의도가 없어요. 저는 그냥... 그녀를 지키고 싶어요. 조용히 지키고 싶어요.”소지훈은 다시 말을 멈췄다.“그냥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그의 진심은 보였지만 그는 진소영과 특별한 인연이 없고 그렇게 깊은 감정으로 지켜줄 이유가 없어 보였다.“왜요?”나는 그 질문을 던지면서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르며 순간 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지훈 씨, 혹시...”이번엔 내가 당
오늘 소지훈을 만나게 된 목적을 떠올리며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지훈 씨, 이번에 소영이가 경기를 보러 온 것도 지훈 씨를 만나기 위해서예요. 둘이 드물게 함께 시간을 보낼 기회니까 며칠 신경 써달라고 한 거예요. 이 기회를 통해서 지훈 씨도 마음을 확실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소지훈은 잠시 놀란 듯 표정이 굳었다.“누나,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나는 소지훈이 진소영에게 접근한 이유를 알고 있으니 소지훈의 말도 맞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진소영이 내 곁에 있는 건 너무 위험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소지훈에게 그녀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괜찮아요. 제가 지훈 씨를 믿으니까 괜찮아요.” 나는 그를 믿는다는 말로 한 번 더 언급했다. 그러자 소지훈은 표정이 살짝 어색해졌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믿어줘서 고마워요, 누나.”내가 커피잔을 살짝 들어 올리자, 그는 웃으며 받아 주었다.“희연 씨의 부모님은 어떻게 지내요?” 나는 불현듯 그 부부가 생각났다.“그분들은 괜찮아요. 아마 희연이가 병원에서 두 해 동안 누워 있었을 때 이미 그 사실을 받아들인 것 같아요. 그런데... ”소지훈은 잠시 망설였다. “최근엔 전혀 연락을 안 드렸어요.”“그분들이 지훈 씨 보면 마음 아파할까 봐?” 나는 그가 어떤 마음일지 눈치챘다.“그냥 아픈 게 아니라 저를 미워하실 거예요. 만약 제 탓이 아니었다면 그분들은 절대 딸을 잃지 않으셨을 테니까요.”소지훈은 깊은 자책감에 잠긴 듯했다.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위로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아, 맞다. 희연 씨 아버님이 저한테 전화했어요.”소지훈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뭐라고 했는데요?”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누나 전화번호랑 가족 상황을 물어보셨어요.”소지훈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내가 그들에게 그런 걸 말한 적은 없지만 그들의 묻는 의도가 무엇일까 궁금했다.혹시 내가 자기 딸과 닮아서 그리움에 잠시나마 얼굴을
“예쁜 아가씨,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순간적으로 긴장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그러자 흰머리의 외국인 할머니가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죠?” 나는 예의 있게 물었다.“커... 커피 한잔 사주실 수 있을까요? 돈이 없어서 너무 오래 마셔보지 못했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면서 그런 그녀가 불쌍하게 느껴졌다.그래서 나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내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여기 앉아서 마셔도 될까요?”선한 마음으로 도와주는 거니까 앉게 해주는 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기요. 저쪽 자리가 비었는데 그쪽으로 앉으세요.”나는 깜짝 놀라서 그를 보았다. ‘강유형이 왜 여기 있지?’어리둥절한 사이 강유형은 내 커피를 마시려던 그 할머니에게 옆자리를 가리키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건네주었다.“커피 드시고 싶으시면 직접 주문하시면 돼요.”강유형의 행동에 그 할머니는 그대로 물러나고 커피도 주문하지 않고 나갔다.나는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아무 말 없이 지켜봤다. 할머니가 돈을 들고 가는 모습에 미묘한 불쾌감이 들었다. 그때 강유형이 다시 말을 꺼냈다.“봤지? 그 할머니는 사실 커피를 마시고 싶었던 게 아니야.”“돈을 원한 거야?”“그래. 만약 오늘 그 할머니가 여기 앉아서 커피를 주문하게 되면 10분도 안 돼서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거야. 그러면 누군가 신고하고 넌 커피를 사준 사람으로 경찰에 끌려갈 거야.”강유형의 말에 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 말이 떠오르면서 신지태가 겪었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믿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강유형의 말에 반박했다.“사람들을 그렇게 나쁘게만 볼 필요 없잖아.”강유형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핸드폰을 꺼내 내 앞에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한 할머니와 젊은 여자가 싸우는 영상이 나왔고 내용은 강유형이 말한 것과 거의 똑같았다.
“경기를 보러 온 거야? 티켓 샀어?” 강유형이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아직 안 샀어. 너는 티켓 있어? 티켓 구하기 힘드니까 내가 네 걸 살게. 얼마야?”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빠른 길이 있는데 일부러 돌아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니까.그러자 강유형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있긴 한데 안 팔아.”그는 말하자마자 주머니에서 티켓을 꺼냈고 그것도 두 장이었다. “이미 나한테 남겨두라고 했어. 이건 신지태가 준비한 거야.”그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잠깐 떨렸다. 신지태는 나에게 오라고 연락도 안 했는데 티켓을 남겨둔 걸 보면 나를 기다린 거였을 거다. 내가 안 왔으면 실망했을 것 같았다.“한 장 더 줄 수 있어?”강유형이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또 다른 티켓을 꺼내주었다.“강유형, 너 진짜 티켓 파는 사람 같아.”나는 티켓을 받으며 그를 놀리듯 말했다. 강유형은 웃기만 했지 특별히 대답은 하지 않았고 나도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그때, 마침 소지훈이 진소영을 데리고 내려왔다. 그는 진소영의 짐을 밀어주고 진소영은 수줍게 그의 옆을 따르며 둘은 정말 달콤한 느낌을 주었다.“친구들이야.” 나는 강유형에게 두 사람을 소개하며 일어섰다.진소영은 소지훈과 함께 내 쪽으로 걸어오며 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새언니.”나는 진소영을 보며 그녀가 강유형을 경계하듯 쳐다보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의도적으로 ‘새언니’라고 불렀다. 이건 분명 강유형을 자극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지훈이가 잘 돌봐줄 거야. 그런데 만약 뭐가 이상하거나 네가 괴롭힘당하면 언제든지 전화해.”나는 진소영에게 말하는 척하며 소지훈에게 경고했다. 진소영은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소지훈을 지키려고 했다.“지훈 오빠는 저를 절대 괴롭히지 않아요.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나는 소지훈에게 티켓을 건네며 말했다.“이건 돈으로 살 수 없는 거야.”“고마워요, 새언니.”진소영은 예의 있게 답하며 또다시 나를 ‘새언니’라고 불렀다.“잘 가. 뭐 필요하면 연
강유형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이유는 분명히 뭔가 의도가 있는 거였다.그는 내 눈을 깊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진정우는 좀 더 신중하게 브라운을 처리해야 했어. 그의 배경을 먼저 조사하고 나서 행동을 취했어야지.”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네 말은 그 사람 배경이 강하니까 내가 괴롭힘을 당해도 참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 내가 피해를 봐도 그냥 참고 있으라는 거지?”강유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지원아, 그런 말은 아니야.”“강유형, 나는 진정우가 한 일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생각해. 브라운은 그냥 자업자득이야.”나는 단호하게 말했고 강유형의 눈빛에 잠깐의 무력감이 스쳤다.“내 말은 좀 더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었잖아. 이런 식으로 일을 키우는 건 결국 너를 더 위험하게 만들 뿐이야.”그는 말을 멈추고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지원아, 내가 말하는 건 진정우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상황을 냉정하게 보자는 거야.”나는 그가 내 뜻을 왜곡할까 봐 걱정하지 않기 위해 선을 그었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봤자 소용없어. 게다가 브라운의 목표는 나니까 진정우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가 더 대담해질 거야.”브라운은 이미 진정우와 강유형이 함께한 연회에서 나를 괴롭혔고 그는 아예 두 사람을 무시하고 행동하는 거였다.“지금은 그의 팬들이 더 난리가 났지.” 강유형은 멀리 있는 남자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지원아, 넌 지금 어디에 있든 위험할 수 있어. 그래서 여기에 있는 건 안전하지 않아.”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강유형이 나에게 말한 의도를 알겠지만 내가 그와 함께 호텔에 가는 건 더 불편한 일이었다.내가 그에게 피를 주고 진정우는 이미 자기와 헤어졌다고 오해하고 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있으면 상황이 더 복잡해지겠지.그래서 나는 그럴 수는 없었다.“그의 팬들이 나를 노리고 있는 거니까 어디에 있든 난 위험할 거야.”나는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강유형은 턱선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