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신분증과 여권은 모두 호텔에 있었다.용설아는 내 쪽을 힐끗 보더니 이번엔 진정우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정우는 마치 내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들었을 테니 굳이 다시 말할 필요는 없었다.역시나, 반 시간쯤 지나자 차가 호텔 앞에 멈춰 섰다. 내가 차에서 내리려던 순간, 진정우가 말했다.“용설아, 너도 같이 가.”그는 여전히 경계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내가 납치당한 적이 있었으니,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용설아는 고개를 젖히며 무심하게 말했다.“배고파. 저기 가서 뭐 좀 사 먹고 올게.”그녀는 진정우의 시선을 피한 채 태연히 걸어 나갔다. 진정우가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마치 그가 뭐라든 상관없다는 듯 전혀 개의치 않았다.이런 나쁜 여자의 매력에 진정우가 빠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여자가 무심할수록 남자는 더 관심을 갖게 된다.”누군가 했던 이 말이, 이제야 이해될 것 같았다. 강유형과 진정우, 나는 그들에게 너무 많은 감정을 쏟아부었고 돌아온 것은 결국 배신과 이별뿐이었다.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진정우가 용설아에게 나를 맡기려 했다는 건, 그가 나와 단둘이 있는 걸 원치 않는다는 뜻이겠지.이제 와서 서운해할 필요는 없었지만 가슴 한편이 괜히 답답해졌다. 그래도 아무리 무서워도, 혼자 올라갈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먼저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나는 곧장 프런트에 있는 보안 요원을 불렀다.“죄송한데 짐을 찾으러 가야 하는데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진정우가 다가와 말했다.“됐어. 내가 갈게.”그가 간다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정말 문제가 생겼을 때, 보안 요원보다 그가 더 믿음직할 테니까.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같이 가. 보안 요원이 함께 가면 오해받을 일도 없으니까.”진정우가 나를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
브라운의 목소리였다.바로 그 순간, 내 앞에 있는 CCTV 화면에서도 용설아가 커피를 들고 가게 앞에 서 있다가 두 명의 남자에게 팔을 붙잡힌 후, 순식간에 차에 태워지는 장면이 보였다.이번에 브라운이 보낸 사람들은 아예 그녀가 저항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정말 나를 보고 싶었나 보군?”진정우는 화면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브라운의 목소리는 한 글자 한 글자, 기괴할 정도로 느리게 발음되었다.그가 품고 있는 증오가 뚝뚝 묻어나는 듯했고 이건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진정우가 가면 분명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그는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좋아. 내가 직접 가지.”“그럼 행운을 빌게.”브라운이 비웃으며 덧붙였다.“아, 그리고 네 옆에 있는 미녀도 같이 데려오는 게 어때?”그 순간, 몸이 경직되며 나는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브라운이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에 나는 얼른 창밖을 내다보았다.그리고 길 건너에 세워진 검은색 차를 발견했다. 그 차의 창문이 살짝 내려가 있었고 그 안에서 누군가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저기 있어!”나는 본능적으로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진정우도 그들을 발견하고 곧장 밖으로 뛰어나갔다.브라운은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고 아예 도로 건너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웃으며 소리쳤다.“기다리고 있을게!”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향해 장난스럽게 윙크를 보내곤 차에 올라탔다.브라운의 차가 사라지자, 진정우가 짧게 말했다.“타.”나는 그를 따라 재빨리 차에 올라탔고 그는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나는 진정우가 곧바로 브라운을 쫓아가는 줄 알았지만 그는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신지태, 지금 당장 818번 도로로 이동해.”“무슨 일인데?”스피커 너머로 신지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브라운이 용설아를 납치했어. 나보고 설아와 맞바꾸자고 했어. 그리고… 지원이도 차에 타고 있어. 네가 지원이를 데리고 공항으로 가.”그 순간, 나는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
나는 시선을 내리깔고 발끝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자.”신지태는 내 짐을 차에 실어준 뒤, 조수석 문을 열어 나를 태우고는 문을 닫고 조용히 차를 출발시켰다.“지태 오빠, 어떻게 이렇게까지 된 걸까. 그냥 단순히 스누커 한 경기였을 뿐인데...”나는 신지태를 원망하지 않고 단지 지금까지의 일들을 곱씹어 보고 있었다.원래는 별일도 아닌 작은 사건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헤르나와 브라운까지 엮이게 되었을까. 이제는 마치 어디에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듯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그러다 문득 강유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지태 오빠,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이 일을 꾸민 배후가 누구일까? 왜 하필 오빠부터 노린 걸까?”신지태는 내 질문을 받아들이며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나도 고민 중이야. 가장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이런 일을 벌인 목적이 뭔지 파악하는 거지.”나는 지금까지 엮인 사람들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목표는 하나뿐인 것 같아. 우리 모두를 한꺼번에 엮어서 끝장을 보겠다는 거지.”신지태는 내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특히 너와 관련된 남자들이 집중적으로 공격받고 있잖아.”그 말에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강유형, 신지태, 그리고 진정우, 이들은 모두 나와 관련된 사람들이었다.신지태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말이야, 이 배후가 사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을 없애서 자기 기회를 만들려고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하지만 나는 전혀 웃을 수 없었고 오히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이때 머릿속을 스쳐 간 건 강진혁의 일기였다. 나는 숨을 들이마신 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진혁 오빠가 최근에 휴링턴에 온 적 있어?”갑작스러운 질문에 신지태는 백미러를 통해 나를 흘끗 바라보았다.“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왜, 혹시 강진혁까지 포함해야 할 것 같아?”나는 그의 농담을 신경 쓰지 않고 조용히 속삭였다.“그는 이전에 휴링턴에서 4년을 살았어.”그가 그곳에서 4년을 보냈다면
나와 신지태가 탄 차는 사방에서 몰려온 차들에 완전히 막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디든 빠져나갈 틈을 찾으려 했지만 함부로 돌파하는 것도 위험했고 성공할 가능성도 작았다.신지태가 말했던 대로, 진정우가 자리를 비운 지금 나를 잡는 게 훨씬 쉬워진 셈이었다. 신지태는 진정우처럼 전투 기술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를 완벽하게 지켜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브라운의 진짜 목표는 나였다.차에서 내리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신지태에게 말했다.“이따가 나는 그들과 함께 갈 거야. 오빠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진정우한테 연락만 해줘.”“안 돼!”신지태는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나는 냉정하게 현실을 짚었다.“지태 오빠, 강유형은 이미 브라운에게 잡혔고 진정우도 거기에 갔어. 여기서 오빠까지 끌려가면 결국 우리 모두 꼼짝없이 브라운 손아귀에 들어가는 거야.”신지태는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우리가 아까 얘기했던 거 기억나? 만약 이 모든 일이 강진혁이 꾸민 거라면 나는 절대 다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하지만 그가 배후라는 확신도 없잖아!”신지태는 여전히 강진혁을 의심하는 걸 망설이고 있었다.나는 담담하게 말했다.“진혁 오빠가 아니라면 더 좋아. 그럼 그를 불러서 날 구하게 하면 되니까.”신지태의 눈빛이 번쩍였고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이건 그를 시험해 볼 기회야. 만약 그가 와서 우리를 구한다면 그가 배후가 아니라는 증거가 될 거야. 하지만 만약 그가 나타나지 않고 브라운이 다른 사람들만 협박하면서 나만 놔둔다면 이 모든 판을 짠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해지는 거지.”신지태가 더 말하려는 순간, 다가온 사람들이 차 문을 억지로 열고 나를 끌어내려 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내가 따라갈게.”내가 스스로 따라가겠다고 하자, 그들은 신지태를 바라봤고 나는 곧바로 덧붙였다.“그는 상관없는 사람이야.”하지만 무리의 리더 격인 남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물고기를 키우는 건 강진혁뿐이었다. 그를 의심하고 있던 나는 일부러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네 물고기들은 사람 말을 알아듣기라도 해? 내가 잡혀 오기 전에, 난 말귀를 알아듣는 물고기한테 먹이를 줬거든.”나는 일부러 이렇게 말하면서 승부욕이 강한 브라운을 자극했다. 그가 이전에 진정우에게 당한 후 복수를 결심한 것만 봐도, 그는 절대 스스로 지는 걸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었다.역시나 브라운은 미소를 지으며 받아쳤다.“그래?”그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먹이를 줬던 물고기들은 아마 ‘지원아, 밥 먹자’이 한마디만 알아듣지 않았을까?”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를 날카롭게 쳐다보며 속을 떠봤다.그냥 나를 조롱하는 걸까, 아니면 강진혁이 실제로 그런 식으로 물고기를 길렀던 걸까?브라운은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 웃었고 나는 그 웃음 속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그렇다면 그는 강진혁과 친분이 있는 게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강진혁이 물고기를 어떻게 길렀는지까지 알고 있을까?강진혁이 나를 주제로 한 그림으로 방을 가득 채운 것도 모자라 그가 기르는 물고기에게까지 내 이름을 붙였다는 사실이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브라운은 내 반응을 지켜보며 더욱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자, 한 번 보여줄게. 내 물고기들은 사람 말을 알아듣는 건 물론이고 춤까지 출 줄 안다고.”그는 한껏 뽐내는 태도로 연못을 향해 외쳤다.“돈나무들아, 밥 먹자!”그 말이 떨어지자, 연못 속 물고기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정해진 패턴처럼 모여서 특정한 모양을 만들었고 질서 정연하게 헤엄쳤다.나는 순간적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고기가 이 정도까지 훈련될 수 있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그리고 또 하나, 그의 물고기 이름도 너무 노골적으로 그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었다.브라운, 그는 철저히 돈을 탐하는 인간이었다.그렇다면 만약 강진혁이 그를 이용하고 있다면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돈이었을
브라운이 말하는‘게임’이라는 건 절대 단순한 놀이가 아닐 터였다.그가 원하는 건 분명 잔혹한 무언가였다.나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지만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번갈아 쳐다봤다.“너희 네 사람의 관계가 참 흥미롭군. 강유형은 윤지원의 전 남자 친구였고 윤지원은 네 전 여자 친구. 그리고 지금 용설아가 네 여자 친구라면서?”그는 일부러 우리 사이를 더 꼬아보려는 듯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그러다 보니 궁금해지더라고. 과연 이 중에서 누가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지 말이야.”나는 차갑게 쏘아붙였다.“누굴 사랑하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 괜한 걱정은 집어치워.”브라운은 크게 웃었다.“이건 걱정이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이야. 게다가 너희 관계가 너무 복잡해서 좀 정리해 주고 싶어졌거든.”그는 한껏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진정우는 그가 계속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게 짜증 났는지,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할 말 있으면 돌려 말하지 말고 바로 해.”브라운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렇게 빨리 알고 싶어? 좋아.”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으로 걸어갔다.진정우와 나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곧바로 브라운의 경호원들이 다가와 강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두 분, 이쪽으로.”이곳은 브라운의 구역이었다. 강유형과 용설아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니, 지금은 그가 원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브라운의 저택은 예상보다 훨씬 컸다. 현관문을 통과하자마자 한쪽 벽면에 걸린 거대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눈을 부릅뜬 벵골 호랑이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하는 모습이었는데 그 위압감이 보는 사람을 움찔하게 만들 정도였다.이런 그림을 집 안에 걸어 놓는 건 좀 부담스러웠다.어릴 적 나는 동물을 좋아해서 동물 그림을 걸어두고 싶어 했지만 아버지는 늘 반대하셨다.집에는 산수화나 꽃 그림을 걸어야지 맹수 같은 공격적인 동물을 그린 그림은 좋지 않다고 하셨다. 풍수적으로도 그러한 그림은 집안에 불운을 가져온다고 했지만 브라운은 그런 걸 신경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허공에 매달려 있었고 용설아와 나란히 묶여 있었다.우리 아래에는 커다란 수조가 있었고 밧줄이 풀리는 순간 그대로 물속으로 떨어지게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수조 안에 진정우만 있는 게 아니었고 강유형도 함께 있었다.그들은 브라운의 부하들에게 제압당한 채 수조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브라운은 수조 옆에 앉아 여유롭게 무언가를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게다가 고소공포증까지 있어서 아래를 내려다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스누커 걸, 이 두 남자를 다 사랑했었지? 그들도 널 사랑했었고. 하지만 결국 둘 다 널 배신했잖아? 그래서 오늘, 내가 테스트를 하나 해보려고 해. 과연 누가 널 더 사랑하는지 확인해 보는 거지. 어때?”브라운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가 말하는 ‘테스트’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는 단순히 우리를 가지고 노는 거였다.“헛소리 말고 당장 날 내려놔!”나는 악을 쓰며 소리쳤지만 브라운은 내 말을 무시한 채 진정우와 강유형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지금부터 이 여자를 풀어줄 거야. 하지만 떨어지는 곳이 어디겠어? 바로 이 수조지. 그리고 너희도 봤다시피, 수조 안에 뭐가 있는지 알겠지? 이 녀석들, 일주일 동안 굶겼거든. 아주 배가 고플 거야.”브라운의 말에 등골이 서늘해지며 본능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자 두 눈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수조 안에는 악어들이 가득했고 브라운이 쓰다듬고 있던 것도 악어였다.그러니 이곳에서 나는 지독한 비린내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굳이 일주일 동안 굶기지 않았더라도, 내가 물속으로 떨어지는 순간 녀석들은 본능적으로 달려들어 나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게 뻔했다.브라운은 지금 이 상황을 이용해 진정우와 강유형을 시험하려고 했다.“이 미친놈아! 네가 직접 덤벼보든가!”용설아가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브라운은 나만 위협하는 게 아니었다. 용설아 역시 같은 상황이었기에, 그는 그녀를 이용해 진정우를
“아아악!”추락하는 느낌에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다.“지원아!”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강유형이었다.곧이어‘풍덩’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순간, 나도 내가 물에 빠졌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젖은 느낌이 들지 않았고 주변에는 물이 철벅이는 소리만 가득했다.눈을 뜨자, 나는 여전히 밧줄에 매달려 있었고 대신 강유형이 물속에 뛰어들어 있었다.그는 이미 수조 안에서 악어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럼, 방금 그 위험한 순간에 나를 구하려고 뛰어든 건 강유형이었고, 진정우는 그대로 서 있었다는 뜻인가?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내 마음이 또다시 얼어붙었다.브라운이 말대로 며칠 동안 굶은 악어들이기에 강유형이 악어들의 표적이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그는 필사적으로 악어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자 두려움과 절망이 한꺼번에 밀려와 나는 겁에 질려 울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강유형! 강유형!”“스누커 걸, 이제 알겠지? 누가 널 더 사랑하는지.”브라운이 비웃으며 말했다.“브라운, 당장 유형이를 풀어줘! 난 네가 누구한테 지시받고 있는지 알고 있어. 그 사람한테 전해. 강유형이 잘못되면, 나도 그대로 악어 밥이 될 거라고.”나는 분노에 차서 소리쳤고 브라운이 잠시 멈칫하더니, 피식 웃었다.하지만 그의 손놀림은 멈추지 않았고 진정우는 여전히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다급하게 외쳤다.“진정우, 제발... 강유형을 구해! 제발 좀 구해줘!”그러자 브라운이 다시 비웃으며 끼어들었다.“걔가 뛰어들면 똑같이 악어 밥이 될 텐데? 이렇게 보니, 넌 결국 물속에 있는 남자를 더 사랑하는 거구나?”난 이제 진정우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면 내가 떨어지려던 그 순간, 그도 뛰어들었을 것이다.그리고 지금, 나는 강유형의 팔이 악어의 날카로운 이빨에 물린 것을 똑똑히 보고 있다.단 한 번의 물림으로 그는 다른 악어들을 피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이대로 가면 그는 악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