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쫓아가다 말고 멈춰 서면서 갑자기 머릿속에 이소희의 말이 떠올랐다.이소희가 누군가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했는데. 혹시 방금 본 그 사람일까? 만약 그렇다면 용씨 가문의 불법 사업에도 그가 개입되어 있다는 뜻일까?생각해 보니 우리 부모님의 죽음도 두 가문이 공모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거세게 몰려왔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서 있다가 뒤늦게 용준호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화장실 못 찾았어?”나는 재빨리 태연한 척하며 대답했다.“생리 중이라서요. 생리용품이 필요해요.”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참 묘한 타이밍이네. 내가 사람 시켜서 가져다주라고 할게.”그러고는 정말로 여성 직원에게 시켜 생리대까지 챙겨오게 했다. 나는 연극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화장실에 다녀왔다.방으로 돌아오자 용준호가 불러둔 남자 모델들이 도착해 있었다. 모두 183cm 이상의 키에 체형은 큰 차이가 없었고 넓은 어깨에 잘록한 허리, 긴 다리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피부도 깨끗하고 세련된 외모에다, 굉장히 예의 바르기까지 했다.나를 보자마자 일제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이 친구들, 모두 프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야. 원하는 대로 만족할 거야.”용준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괜찮네요. 역시 여기에는 진짜 숨은 고수들이 많은 곳이군요.”내 말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고 그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던진 말이었다.용준호는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래서 만족해?”“아주요.”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 사람들, 제가 필요할 때 미리 하루 전에 전화만 하면 준비해 줄 수 있죠?”“당연하지..”그는 거리낌 없이 대답했지만 나는 여전히 아까 봤던 그 그림자가 신경 쓰였다.그래서 이번 기회에 확실히 조사하기로 했다.“준호 씨, 특별한 일이 없으시면 가보세요. 저 혼자 술 좀 더 마시고 싶네요.”그는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강진혁의 옷깃을 잡아끌며 그를 내 눈앞으로 바짝 당겼다.“진정우, 드디어 왔네... 이 개자식아, 왜 이제야 온 거야?”강진혁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 그는 내 손목을 눌러 잡으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지원, 너 술 너무 많이 마셨어. 나는 진정우가 아니야.”“아니야, 너 진정우 맞아.”나는 그의 눈가를 손으로 더듬으며 나직이 속삭였다.“내 진정우야. 너 변했어. 이제 나 안 사랑하지? 나 버린 거야?”남자들은 대체로 다른 사람의 대체품 취급받는 걸 가장 싫어한다. 게다가 강진혁은 나를 좋아하는데 이런 말이 그에게는 더 큰 상처일 것이 분명했다.내 말이 그의 심장을 정통으로 찌른 것이었을까. 그는 갑자기 내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며 흔들었다.“정신 차려. 내가 누군지 똑똑히 봐.”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몇 초 후 입술을 삐죽이며 울음을 터뜨렸다.“진정우, 너 나한테 이럴 거야? 너 진짜 나쁜 놈이야!”여자가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눈물이다. 내가 눈물을 흘리자 강진혁도 결국 내 손목을 서서히 놓았다.나는 틈을 타 그의 가슴을 밀치고 주먹으로 툭툭 쳤다. 그러나 그는 한순간에 나를 번쩍 안아 들고 방을 나섰다.방을 막 나서자 용준호가 걸어오더니 싱글거리며 말했다.“스코틀랜드산 위스키 한 병이면 남자라도 누구든 정신 못 차릴 정도라고 하던데?”그 말을 듣자 나는 속으로 이를 꽉 깨물었다. 다행히도, 나는 미리 대비를 해뒀다.강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품에 안고 빠르게 걸어갔다. 용준호는 강진혁의 뒷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강 대표님, 오늘 밤 즐겁게 보내시길. 나한테도 공 좀 돌려줘야 해.”이 둘의 관계, 절대 단순하지 않았다.나는 강진혁에게 이끌려 그의 차에 올랐다. 호랑이 굴에 직접 들어가는 격이었지만 나는 가야만 했다.강진혁이 날 데려간 곳은 그의 개인 거처였다. 이곳은 내가 알지 못했던 장소였고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곧이어 강유형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는 거침없이 침실로 향했지만 소파에 누워 있는 나를 보지 못했다.강진혁은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들었고 그 손끝에 묻은 붉은 흔적이 희미하게 보였다.잠시 후, 강유형이 침실에서 나왔고 강진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너, 내가 그렇게 더러운 놈이라고 생각하지 마.”그제야 강유형의 시선이 소파 위의 나에게 향했다. 그리고 내가 옷매무새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걸 확인하자 그의 분노가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그럼 처음부터 건드리지 말았어야지.”강진혁은 입가를 닦은 휴지를 쓰레기통에 던지며 조용히 술잔을 들었다.“건드린 건 나야. 하지만 먼저 다가온 건 쟤라고.”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강진혁이 내가 일부러 접근했다는 걸 눈치챈 건가?“네가 처음부터 탐내지 않았어?”강유형도 강진혁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진혁은 술잔을 기울이며 한쪽 다리를 살짝 꼬았다. 하얀 셔츠의 단추 두 개가 풀어진 그의 모습은 평소보다 한층 나른하면서도 거친 느낌을 풍겼다.“유형아, 네가 잊지 말아야 할 게 하나 있어. 넌 이제 지원이와 아무 관계도 아니야. 지원이는 지금 자유로운 몸이고 새 사랑을 시작할 권리도 있어.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게 윤리적으로 문제 될 게 뭐가 있겠어?”강진혁은 늘 침착했고 그의 말에는 한 치의 틀림도 없었다.반면 강유형은 전혀 달랐다. 그는 조급했고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다.“누구를 좋아하든 네 자유지만 지원이만큼은 안 돼.”“왜?”강진혁이 비웃듯이 물었다.“한때 네 여자였기 때문이야? 난 신경 안 쓰는데?”그 말을 듣는 순간 예전에 강진혁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내 과거 따윈 상관없고 '나'이기만 하면 된다고 했던 그 말 말이다.“하지만 난 상관있어.”강유형은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었다.“지원이만큼은 안 돼. 누구라도 상관없지만 지원이는 안 돼.”강진혁은 짧게 웃었다.“왜지? 혹시 나와 함께 있는 게 두려워서야? 아니면... 아직도 지원이를 사
그렇다면 용씨 가문의 불법 사업을 조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문득 떠오른 사람이 용설아였지만 그녀는 용씨 가문의 사람이었다.아무리 정의롭고 진정우와 같은 편에 서 있었다고 해도 진정우가 사라진 지금 나를 도울 이유가 없었다.게다가, 용씨 가문은 그녀의 뿌리다. 아무리 대의를 중요하게 여긴다 해도, 가족을 배신할 만큼은 아닐 것이다.그렇다면 또 다른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한 명은 함소은이다. 그녀는 예전에 용진표를 증오한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문제는, 그녀가 한때 나를 배신했다는 점이다.그녀를 찾았다가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내 정보를 팔아넘길 가능성이 컸다.이리저리 생각해 보았지만 마땅한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용씨 가문의 불법 사업을 밝혀야만 그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그렇게 해야만 부모님의 복수를 할 수 있고 또한, 용씨 가문에게 희생당한 수많은 여자를 구할 수 있었다.이소희가 구체적인 정보를 주진 않았지만 그녀가 겪은 일들만 봐도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용씨 가문은 이소희의 남자 친구 같은 사람들을 키워 여자들에게 접근해 연애 감정을 이용한 뒤 고리대금이나 인터넷 대출을 유도했다. 그리고 빚을 갚지 못하면 강제로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하게 했다.그리고 이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용씨 가문의 불법 사업은 단순히 성매매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했다.그렇게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새 밤을 새우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운동이라고들 해서 나는 아침 일찍 조깅을 나섰다.그런데 아파트 1층에서 뜻밖의 사람을 마주쳤다. 강유형의 차 앞에는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들이 보였다. 그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눈빛은 초점을 잃고 있었다.‘설마... 여기서 밤을 샌 걸까?’그가 날 지켜보며 밤을 지새웠다면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첫째, 강진혁이 다시 나를 데려갈까 봐. 둘째, 내가 또 무슨 일을 벌일까 봐.그가 감기
화장을 해도 다 가려지지 않은 다크서클을 보자 안리영이 나를 보자 깜짝 놀라며 말했다.“너 어젯밤에 뭐 했냐?”나는 그녀에게 숨길 필요가 없었다.“잠을 못 잤어.”그 말을 듣자 안리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마도 또다시 진정우를 떠올리느라 밤을 새웠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구 교수님은? 왜 안 왔어?”오늘 구안석을 부른 이유는 진소영 때문이었다.“왜? 갑자기 그 사람이 보고 싶어졌어?”안리영이 장난스레 물었다.“응, 오랜만에 보고 싶더라.”나도 가볍게 농담을 받아쳤다. 그녀는 물을 따라 내 앞에 밀어주며 말했다.“오늘 지인이 부탁해서 어떤 환자를 보러 갔대. 진료 끝나면 바로 올 거라고 했어.”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그래서 부모님은 잘 만나고 왔어? 순조로웠어?”“응. 부모님 두 분 다 오빠를 마음에 들어 하셨어. 오히려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하시더라.”그녀의 말에는 특별한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오래 알아 왔기에 바로 이상한 점을 감지했다.“근데... 왜 그렇게 기뻐 보이지는 않지?”안리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야, 그냥... 너무 빠른 것 같아서. 우린 아직 서로를 충분히 알아가기도 전에 결혼을 생각해야 하는 게 좀 부담스러워.”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솔직히 좀 그렇긴 해. 네가 얼마나 오래 선배를 좋아했는데.”“그러니까. 선배를 오래 좋아하긴 했지만 정작 제대로 연애다운 연애를 해본 적도 없어. 그런데 갑자기 결혼이라니...”나는 그녀의 속마음을 알 것 같았다.“장거리 연애하는 게 싫은 거지?”그녀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고민이 깊은 걸 보니 당장 해결책이 없는 문제였다.나는 현실적인 조언을 했다.“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해. 아니면 그냥 장거리 연애를 감수하는 수밖에 없지.”그녀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사랑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너, 요즘
조나연은 늘 나와 경쟁하려 했고 나를 뛰어넘고 싶어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이건 전적으로 그녀 스스로 자초한 일이지만 그녀는 절대 자신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원망할 것이다.나는 그녀가 나를 증오하게 만들고 싶었다.나는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조나연은 단 한 번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그러나 자리를 뜨기 전에, 나는 일부러 그녀를 불렀다.조나연은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난 너 같은 손님 안 받아.”그녀는 돈을 벌 기회조차 뿌리칠 정도로 자존심을 세웠다.“난 VIP 멤버십을 만들고 싶은데? 연간 회원권으로. 그럼 다른 직원 불러와.”여기서 VIP 연간 회원권을 개설하면 그녀는 그 금액의 25%를 커미션으로 받는다.내가 6천만 원을 충전하면 그녀는 두 달 치 월급을 단번에 벌 수 있는 셈이었다.“윤지원, 돈 좀 있다고 잘난 척하지 마.”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웃었다.“난 원래 잘난 척하는 걸 좋아해. 너도 하고 싶으면 해 봐. 근데 그럴 돈이 있어야겠지?”그녀는 얼굴을 굳히고 돌아섰다. 그러나 몇 걸음 가던 그녀는 다시 나를 향해 돌아섰다.“그렇게 돈이 많으면 최고 등급 VIP로 하지 그래? 1년에 2억짜리 말이야.”자존심으로는 돈을 못 버린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드디어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 모양이다.나는 피식 웃었다.“2억이라 해도, 너한테 들어오는 돈은 얼마 안 될 텐데. 차라리...”나는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이 술집을 아예 사 버릴까? 그럼 너는 사장이 될 수 있잖아. 어때? 사장님 되는 거, 탐나지 않아?”그녀는 순간 멍해지더니 몇 초 후, 비웃듯이 코웃음을 쳤다.“웃기지 마. 누가 그딴 걸 원한다고.”나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진심이야. 네가 관심 없다면 다른 사람을 고용하지. 연봉 2억짜리 직업 꽤 인기 있을걸?”내 말에 조나연의 입술이 살짝 들썩였지만 이번에는 나를 반박하지 않았다.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태
조나연이 내 덫에 걸려들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일 차례였다. 하지만 술집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사들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이곳은 정상 영업을 하고 있고 매출도 꽤 좋은 편이었다. 그런 곳을 누가 쉽게 넘기겠는가?즉,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강씨 가문의 힘을 빌린다면 그럼 이 일은 아주 간단할 것이지만 지금 나는 강씨 가문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고민 끝에, 나는 허진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원 씨가 사장이 되고 싶으면 제 자리 넘겨줄까요?”이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걸 보면 허진호가 얼마나 속세에 무심한 사람인지 다시금 실감했다.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저 한테 사장 자리는 필요 없어요. 그냥 술 마실 때 돈 안 내고 마시고 싶을 뿐이에요.”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 돈으로 술을 사 마시면 다음 생까지 마셔도 못 마실걸요?”그는 농담을 던지면서도 진지하게 충고했다.“지원 씨, 충동하지 마세요. 술집을 사는 건 장난이 아니에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장난이 아닌데요. 술집 주인과 연락이 닿을 수 있는지만 알려줘요. 안 되면 다른 사람을 찾을 테니까.”내가 술집을 사려는 건 단순한 충동이 아니고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하지만 허진호에게 자세한 설명을 할 수는 없었다.용씨 가문을 조사하는 일은 알면 알수록 위험해지는 일이니까.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알았어요. 제가 한 번 시도해 볼게요.”“고마워요, 허 대표님.”그는 피식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잠이 오지 않는 두 번째 날이다. 사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심각한 불면증을 겪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야 불면증을 앓는 사람들의 고통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그렇게 잠들지 못한 채, 나는 많은 생각을 했고 해야 할 일들도 정리했다.그중 하나는 강진혁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었다.우아한 분위기의 레스토랑.강진혁은 내가 건넨 넥타이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오늘이 내 생일도 아니고 특별한 날도 아닌데?”나는 그의 손에 들린 넥타이를
강진혁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지원아, 네가 아직 진정우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이렇게 망가뜨리지는 마. 정말 외롭고 힘들다면 날 찾아오면 되잖아.”그의 눈빛은 깊고 표정은 진지했다. 그 감정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조용히 말했다.“진혁 오빠, 저는 오빠랑 강유형이 갈등을 빚는 걸 원하지 않아요. 유형이가 저를 찾아왔어요...”“그 일은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해결할 거니까.”그는 단호하게 말을 끊으며 내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그러나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긴장시켰다. 손을 빼내려 했지만 억지로 참아내며 불안한 눈빛을 띄웠다.“오빠도 알잖아요. 부모님도 반대하실 거예요. 그분들도 우리가 이렇게 가까워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하지만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난 이미 한 번 널 놓쳤어.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하진 않을 거야. 설령 온 세상이 반대하더라도, 넌 내 사람이 될 거야.”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속에 감춰진 집착과 고집은 너무나도 명확했다.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나는 손을 빼내어 테이블 아래에서 옷에 슬쩍 문질렀다.“하지만 나는 원하지 않아요.”그러자 강진혁이 나지막이 물었다.“정말 원하지 않는 거야? 아니면 그냥 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거야?”나는 그를 바라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때로 가장 명확한 답변이 된다.강진혁은 몇 초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그래... 내가 너무 조급했나 보네. 네가 날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릴게.”그는 차분하게 젓가락을 들어 반찬을 내 접시에 올려주며 말했다.“지원아,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난 오랫동안 기다렸어. 조금 더 기다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모든 걸 내려놓고 날 온전히 받아들이는 날까지.”그가 말하는 '기다림' 이라는 단어가 왠지 모르게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그가 내게 주는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 감정이 불안과 공포로 변하는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
나는 오직 그녀만을 믿었다.“괜찮아. 초음파 사진 봤어. 아기는 아주 건강해.”안리영의 곱고 단정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저 그렇게 미묘하게 번진 웃음 하나가 내겐 믿음을 주는 보약처럼 느껴졌다.“리영아, 제발 이 아이만은 꼭 지킬 수 있게 도와줘.”나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듯 말했다.“당연하지. 이건 너랑 정우 씨의 사랑의 결실이잖아.”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렸다. 감춰지지 못한 외로움이 스쳐 지나갔다.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이미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 역시 이별을 받아들였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했다.안리영 덕분에 나는 병실에, 그것도 VIP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당직실이 아니라 정식 병실이었다.아랫배의 통증도 가라앉았고 출혈도 점점 잦아들었다. 마음이 조금 놓이자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그 강 선생님이라는 사람, 갑자기 부임한 거라면서? 어떻게 된 일이야?”안리영은 반 박자쯤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소희연의 고모인가 이모인가 그래.”이 말을 듣고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전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얼굴이 조금 더 야위어 보였다.그녀는 구안석과 헤어졌다. 게다가 먼저 끝내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실망이 극에 달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구안석은 그녀가 오랜 세월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 오랜 감정을 끊어낸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그런 감정은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히 말했다.“강유형이 병원장한테 얘기할 것 같아.”“고자질할 만하면 해야지.”안리영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당해줄 호구도 아니었다.나는 웃음이 터졌다.“의사 선생님답네. 칼 쥐고 돈 받는 직업이라 그런가 마음도 차갑기 그지없군.”“남한테 괜히 마음 써봤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셈이나
“유산 조짐이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나는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듯 얼이 빠졌다.‘유산이라니?’“의사 선생님, 저 임신한 거예요?”놀라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의사의 가운을 붙잡았다.“몰랐어요?”의사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곧 못마땅하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요즘 젊은이들은 쾌락만 즐기고 책임질 생각을 전혀 안 한다니까요.”의사는 나와 강유형을 연인으로 착각하고는 설교를 퍼부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해명할 정신도, 그의 핀잔에 대응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선생님, 저 정말 임신한 거 맞죠?”“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산 조짐이 보여요.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아직 몰라요.”의사의 말에 나는 그의 가운을 더 꽉 움켜쥐었다.“제발 부탁드릴게요. 아이를 지켜 주세요.”흥분에 겨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요즘 들어 이유 없이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선물처럼 안겨 오다니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그런데도 나는 멍청하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아가야, 아무 일 없어야 해. 꼭...’“우선은 보태부터 시작할게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는 것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누워 있어야 해요. 일주일 정도 상태를 지켜본 후에 다시 판단할 겁니다. 계속 출혈이 있으면 아이는 지키기 힘들지도 몰라요.”의사는 이미 키보드를 두드리며 처방전을 작성하고 있었다.“선생님, 여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나는 지금 몸을 함부로 움직이기 두려웠고 그저 병원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이 병원엔 안리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산부인과 과장이기도 하다.지금은 또 수술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줬을 것이 분명했다.“지금은 남는 병상이 없어요. 일단 집에서 안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