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전날 저녁.
한남동의 프렌치 레스토랑.
지안은 약속 시간보다 이십 분이나 일찍 도착해 있었다.
이번 맞선은 아버지 서정욱이 일방적으로 잡아놓은 자리였다.
상대가 태강그룹 부회장 강태호라는 사실도 며칠 전에야 비서를 통해 전해 들었다.
더 황당했던 건 자신이 유일한 상대조차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한영백화점 윤세림을 비롯해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집안의 여자들이 후보로 올라 있었다.
그 명단을 본 지안이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구색 맞추기.
어차피 자신이 선택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한 남자가 다가왔다.
강태호였다.
짙은 남색 슈트가 큰 체격을 따라 군더더기 없이 떨어졌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사람을 긴장시키는 묘한 압박감이 있었다.
……이거 쉽지 않겠는데.
기선을 제압해보려던 생각은 삼 초 만에 접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
태호가 맞은편에 앉았다.
“주문은 편하신 걸로 하시죠.”
“네.”
지안은 메뉴를 몇 장 넘겨보다 무난한 코스를 골랐다.
잠시 뒤 직원이 물러나자 테이블 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부회장님은 평소에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먼저 입을 연 건 침묵을 견디다 못한 지안이었다.
“가리는 건 없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서지안 씨는.”
“저도…… 딱히 가리는 건 없어요.”
대답을 마친 지안은 잠시 맞은편의 태호를 살폈다. 사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게 하나 있었다.
“그런데 제가 왜 맞선 후보인지 알고 계세요?”
“저도 모릅니다. 근데 그건 왜 묻습니까?”
“사실 제가 좀 알아봤거든요. 다른 후보들이요.”
태호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다들 어마무시하시던데. 제가 왜 거기에 껴 있는지…… 혹시 아버지가 돈을 막 엄청 찔러줬나 싶어서요.”
“돈을 찔러줬다면 뭐가 달라집니까?”
지안이 잠시 고민했다.
“달라질 건 없는데, 이젠 하다 하다 딸 팔아먹으려고 그러시는 건가 싶어서요…….”
평생 사랑이라곤 제대로 받아본 기억도 없는데.
그 말까지 내뱉으려다 겨우 삼켰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뭐, 재벌가들 결혼이 다 그런 거겠죠.”
지안은 하하, 머쓱하게 웃으며 태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태호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어색해진 공기에 직원이 마치 구세주처럼 두 사람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직원이 접시를 내려놓은 뒤 와인 리스트를 펼쳐 보였다.
“와인은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태호는 건네받은 리스트를 느긋하게 훑어내렸다. 몇 줄쯤 시선을 옮기던 그가 눈을 들어 지안을 향했다.
“드시는 와인 있으십니까?”
지안이 가볍게 고개를 내젓자 태호는 더 묻지 않았다. 다시 리스트로 시선을 내린 뒤 한쪽을 손끝으로 짚었다.
“이걸로 하죠.”
직원이 확인하듯 이름을 되짚자 태호가 끄덕였다.
“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이 리스트를 거두고 물러났다.
지안은 맞은편의 태호를 슬쩍 일별했다.
그가 고른 건 뤼나르 로제였다. 화사한 향과 부드러운 맛으로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샴페인이었다. 평소 와인을 즐겨 마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지안도 몇 번 접해본 적 있어 제법 익숙한 이름이었다.
여자 취향을 제법 아는 듯 보였다.
여자를 꽤 만나봤나.
그러고 보니 생김새도 제법 지안의 취향이었다. 짙게 뻗은 눈썹 아래로 깊게 자리한 눈매와 곧은 콧날, 선이 분명한 입매까지. 거칠게 잘생긴 얼굴에 가까웠다.
지안은 새삼 제 취향이 꽤나 얼굴에 관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 잠깐 마음이 흔들린 것도 같았다.
“서한호텔, 리뉴얼했다고 들었습니다.”
“네. 객실이랑 라운지 위주로 전반적으로 손봤어요. 나중에 한번 놀러 오세요. 제대로 모실게요.”
“가면 뭐 해줍니까?”
“혼자 오시면 별로 해드릴 거 없고요.”
지안이 가볍게 웃었다.
“결혼하실 분이랑 같이 오시면 좋은 방으로 빼드릴게요.”
태호의 눈매가 느슨하게 내려앉았다.
자신과의 다음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 듯한 지안의 태도가 묘하게 거슬려 태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소문이 안 좋으시던데.”
지안의 손이 우뚝 멈췄다. 아까 흔들렸다는 거 취소.
얼굴은 멀쩡한데 말에는 여과가 없었다. 처음 보는 맞선 상대에게 저걸 대놓고 묻는 사람도 드물 텐데.
그렇다고 발끈해서 변명부터 늘어놓는 것도 영 모양 빠지는 일이었다.
지안은 순간 고민했다. 제 소문에 대한 해명을 하는 것과 인정해버리는 것 중 어느 쪽이 자신에게 더 좋을지.
“원래 예쁜 여자한테 소문은 액세서리 같은 거죠.”
지안은 굳이 해명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태호는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몇 초쯤 버티던 지안이 먼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농담이에요.”
진짜 재미없는 사람이네.
그래도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식사가 끝난 뒤 지안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태호가 지안을 내려다봤다.
“진짜?”
지안이 눈을 깜빡였다가 싱긋 웃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부회장님.”
짧은 인사를 끝으로 두 사람은 무난하게 자리를 마무리했다.
불편하게 끝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특별한 여운이 남은 것도 아니었다.
딱 한 번의 맞선.
지안에게는 그 정도였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안녕하세요!《소문난 강제결혼》이 외전까지 모두 마무리되며 드디어 완결을 맞이했습니다!그동안 이 작품을 사랑해 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늘 말씀드리지만, 독자님들이 남겨주 댓글 하나하나가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힘을 내서 마지막까지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제 첫 작품이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아직도 얼떨떨하기만 하답니당......앞으로도 더 좋은 글, 더 재미있는 이야기로 찾아뵐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지금까지 지안이와 태호의 이야기를 함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독자님들 모두 늘 행복하시고,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라겠습니다.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혁아! 아빠 오신대!” 지안의 목소리에 거실 바닥에 엎드려 장난감 자동차를 굴리던 지혁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진짜? 아빠 왔어?” “응. 이제 거의 다 오셨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현관까지 달려가 신발을 꺼내 신더니, 뒤따라 나온 지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엄마, 빨리!” “잠깐만. 신발 반대로 신었잖아.” 지안이 쪼그려 앉아 신발을 바로 신겨주자 지혁이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평소에는 태호와 사사건건 투닥거리면서도, 아빠가 퇴근한다는 소리만 들으면 매번 이 난리였다. 현관문을 나서자 선선한 저녁 바람이 불어왔다. 지혁은 지안의 손을 꼭 잡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쪼르르 걸었다. 그러다 대문 쪽으로 차 불빛이 비치자 손가락을 쭉 뻗었다. “아빠 차!” 검은 승용차가 천천히 진입해 멈춰 섰다. 도윤이 먼저 내려 뒷좌석 문을 열자, 태호가 재킷 앞섶을 매만지며 차에서 내렸다. “회장님, 내일 오전 아홉 시에 임원회의가 있습니다. 보고 자료는 미리 준비해 두겠습니다.” “응. 다른 건?” “오후 일정은 아직 조율 중입니다.” 도윤의 보고를 듣던 태호가 고개를 끄덕이려던 순간이었다. “아빠!” 멀리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혁이 지안의 손을 놓고 쪼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태호는 자연스럽게 허리를 굽혀 다가오는 아들을 번쩍 안아 올렸다. “아빠아!” 지혁이 까르르 웃으며 태호의
그런데 담배만 끊으면 될 줄 알았던 건 태호의 착각이었다. 씻고 나온 태호는 거실 한쪽에 놓인 술장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위스키가 한 잔 생각나 유리문을 열고 병을 꺼냈다. 잔을 집어 들고 뚜껑을 돌려 열려던 순간이었다. “부회장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잠옷으로 갈아입은 지안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태호의 손에 들린 위스키병으로 향했다. “뭐 하세요?” “한 잔 마시려고.” “안 돼요. 술도 좀 줄이셔야죠.” “한 잔인데.” “한 잔도 안 돼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안이 태호의 손에서 잔을 빼앗았다. 그대로 술장 안에 밀어 넣더니, 위스키병까지 받아 제자리에 올려놓았다. 딸깍. 유리문이 닫히자 태호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담배도 안 된다더니, 이제는 위스키 한 잔까지 못 마시게 할 생각인가. “애기야.” “잠깐만요.” 지안은 그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주방으로 향했다. 태호는 닫힌 술장을 한번 바라보다 소파에 걸터앉았다. 잠시 후,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안이 머그잔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이거 드세요.” “뭔데.” “따뜻한 차요. 몸에 좋은 거예요.” 잔 위로 희미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흐음.” 태호는 선뜻 받아 들지 않고 지안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지안은
어느새 신호가 바뀌고, 차가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근사한 곳에서 주고 싶었는데.” 태호가 지안의 왼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차창 밖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네가 지금 너무 예뻐서.” 지안은 대답 대신 반지를 내려다봤다. 손가락을 살짝 굽혔다 펴 보더니 태호의 손에 끼워진 반지에도 시선을 주었다. “아니에요. 지금도 충분히 좋은데.” 화려한 장소에서 거창하게 건네받는 선물보다, 이렇게 담백하게 반지를 건네는 모습이 오히려 태호다워서 더 좋았다. “그리고 부회장님이랑 커플이어서 더 좋아요.” “나도 그래.” 지안의 입가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작고 반짝이는 반지 하나가 뭐라고, 태호와 자신이 같은 편이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게 괜히 마음을 들뜨게 했다. “직접 고르신 거예요?” “응. 저번에 일 있어서 백화점 들렀다가.” “되게 예쁘네요.” 딱 제 취향이었다. 원래 화려한 걸 좋아하지 않아 액세서리도 잘 착용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이 반지는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에 손가락에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평소 이런 물건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이더니, 은근히 세심한 구석이 있었다. 어떻게 제 취향에 꼭 맞는 반지를 골랐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아, 이제 나 유부녀인 거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서 남자들이 대시도 안 하겠네.” 짐짓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태호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큰일 났네.”
그렇게 결혼식이 마무리되고, 곧이어 식사가 시작되었다. 직원들이 테이블마다 음식을 차례로 내오기 시작했다. 그 무렵, 하객들에게 인사를 돌던 하람과 윤재가 두 사람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서지안!” 하람의 목소리에 지안이 고개를 들었다. “야, 오하람! 너 오늘 좀 예쁘더라.” “히히, 이게 얼마짜리 화장인데. 사진은 많이 찍었어?” “그럼. 쟤 우는 것도 찍었어.” 지안이 손가락으로 윤재를 가리키자, 옆에 서 있던 윤재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야, 내가 언제 울어.” “눈물 고여 있던데?” “조명 때문에 눈이 시려서 그런 거거든?” “아, 네네. 그러시겠죠.” 지안이 능청스럽게 대꾸하자 하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와줘서 고마워. 부회장님도요.” 하람이 태호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윤재도 덩달아 허리를 굽혔다. “형님, 바쁘실 텐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태호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지안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언제 봤다고 형님이래.” “돈 많으면 형님이지.” 윤재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자 태호가 피식 웃었다. “거봐. 형님도 좋으시다잖아.” 윤재가 능청스럽게 말을 받으며 지안을 향해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지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의 팔뚝을 툭 쳤다. “아주 신났네, 신났어.” 그 모습에
은은한 조명 아래로 잔잔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람과 윤재의 결혼식은 가까운 지인들만 초대해 소규모로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식장 내부는 화려했다. 버진로드 양옆으로 새하얀 꽃들이 풍성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부드러운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잠시 후, 버진로드 끝에 윤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쏟아지는 박수 속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평소와 달리 말끔하게 넘긴 머리와 반듯한 턱시도 차림이 제법 근사했다. 다만 긴장한 탓인지 입가에는 어색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단상 앞에 도착해서야 짧게 숨을 내쉰 윤재는 재킷 앞섶을 가볍게 매만지더니 신부가 입장할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 윤재의 모습에 지안도 덩달아 긴장했는지 괜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곧 음악이 바뀌고, 식장 안의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버진로드 끝에 부드러운 빛이 내려앉았다.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리며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하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 예쁘다…….” 지안의 입술 사이로 저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따라 부드럽게 흘렀고, 긴 베일 아래로 하람의 환한 미소가 드러났다. 지안은 하람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개를 조금씩 움직이며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러다 단상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윤재가 하람을 향해 손을 내밀자, 지안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부회장님, 하람이 진짜 예쁘죠?” “응, 그러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태호의 시선은 줄곧 지안에게 머물러 있었다. 하람을 따라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눈동자며, 연신 감탄하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까지. 신부보다 예쁘면 반칙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