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3화. 시체가 아니라 그림자를 베어라
문령은 자신이 잘못 본 줄 알았다.
조금 전 직접 맥을 짚었다. 숨도 멎었고 심장도 뛰지 않았다.
그런데 죽은 사내의 손가락이 천천히 돌바닥을 긁으며 선을 그리고 있었다.
한 획이 이어지고 또 다른 획이 붙을수록 문령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진문?’
죽은 사람은 진을 그릴 수 없다. 진문은 살아 있는 사람의 호흡과 맥, 손끝의 기운이 함께 움직여야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내의 손은 정확하게 칠방위의 결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저 사람이 그리는 게 아니에요.”
하륜이 검을 들었다.
“그럼?”
문령의 시선이 시신의 발밑으로 내려갔다.
“안쪽에서 조종하고 있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체의 몸이 뒤틀렸다.
우드득.
굳어 있던 팔과 다리가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일어났고, 흐려진 눈과 달리 입술만은 천천히 올라가 웃는 모양을 만들었다.
“두…… 주인…….”
죽은 목소리 안에 다른 음성이 섞여 있었다.
“검의 패…… 진의 패…….”
하륜의 검이 어둠을 갈랐다.
검광이 시체의 어깨를 베었지만 검은 기운은 갈라졌다가 순식간에 다시 붙었고, 오히려 검끝을 타고 손목 쪽으로 번져왔다.
“검을 빼요!”
하륜은 즉시 검을 거뒀다.
바닥으로 떨어진 검은 기운을 바라보던 문령은 그제야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모든 등불이 꺼져 있는데도 시체의 발밑에는 짙은 그림자가 붙어 있었다.
그림자는 몸보다 조금 먼저 움직였다.
“시체가 아니에요.”
하륜이 문령을 보았다.
그녀가 바닥을 가리켰다.
“그림자를 베어야 해요.”
“어디를?”
그 질문에 문령은 잠시 말을 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경계하던 남자가 지금 자신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령은 시선을 아래로 내려 진의 흐름에 집중했다. 복잡하게 얽힌 검은 기운이 눈앞에서 천천히 길을 드러냈다.
“왼쪽으로 세 걸음.”
하륜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문령이 말한 그대로 움직였다.
“검끝을 낮춰요. 몸을 베듯이 치면 다시 붙어요. 물 위의 달을 가른다고 생각하세요.”
하륜은 잠시 문령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자신을 보며 말을 더듬던 여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흔들리던 눈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았고, 진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는 시선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하륜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겁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겁이 나는데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시체가 달려들었다.
하륜은 시선을 거두고 왼쪽으로 정확히 세 걸음을 비켜섰다.
검끝이 낮아졌다.
촤악.
젖은 천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갈라졌고 시체는 그대로 바닥에 무너졌다.
문령은 순간 하륜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하지만 숨을 돌릴 틈은 없었다.
바닥에서 떨어져 나온 검은 그림자가 몸을 뒤틀며 솟구쳤고, 문령이 진침을 꽂으려는 순간 채찍처럼 손목을 감았다.
“아!”
얼음 같은 기운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눈앞이 흐려지는 순간 낯선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열어라.
네 부모도 끝내 열지 못했다.
문령의 몸이 굳었다.
서문가의 아이야.
네가 배운 모든 것은 나를 위해 존재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곧이어 목소리가 다시 속삭였다.
너를 사랑해서 가르친 것이 아니다.
너를 열쇠로 만들기 위해 길렀다.
진침이 손끝에서 미끄러지려는 순간 은빛 검광이 눈앞을 스쳤다.
챙!
검은 기운이 끊어졌고 문령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하륜의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정신 차려.”
문령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머릿속을 헤집던 목소리는 멀어졌지만 자신의 팔을 붙잡은 손의 온도만은 이상할 만큼 또렷했다. 얼굴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하륜의 낮은 숨소리와 약초 향도 선명했다.
문령은 그제야 자신이 그의 가슴 바로 앞까지 끌려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륜은 그녀의 얼굴을 잠시 살폈다.
겁에 질려 창백해진 얼굴과 달리 눈은 아직 완전히 꺾이지 않았다.
문령이 몸을 바로 세우자 그는 곧바로 손을 놓았다.
“계속할 수 있나?”
문령은 손목에 남은 검은 흔적을 바라보았다.
무서웠다.
하지만 그림자는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떨어진 진침을 집어 들었다.
“할 수 있어요.”
그리고 하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잠깐만 막아주세요.”
“명령하는 건가?”
순간 문령이 당황했다.
“부탁이에요.”
하륜의 입가에 아주 짧은 미소가 스쳤다.
“알았다.”
그는 문령 앞에 섰다.
그 등 뒤에서 문령은 마지막 진침을 꽂았다.
푸른빛이 물 위의 달빛처럼 번져나갔고, 세 개의 진침에서 이어진 선이 검은 그림자를 감쌌다.
“수월은 형체가 없고, 그림자는 뿌리가 없다.”
어머니에게 배운 진결이 자연스럽게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형체 없는 것은 물로 가두고, 뿌리 없는 것은 달빛으로 묶는다.”
검은 그림자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회랑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때 백유겸이 바닥에 쓰러진 사내를 바라보며 낮게 이름을 불렀다.
“목진…….”
문령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월영서고 깊숙한 곳에 보관된 오래된 명부에서 누군가 일부러 지우려 한 듯 검은 먹으로 덧칠되어 있던 이름이었다.
“기록에는…… 사라졌다고 되어 있었어요.”
백유겸은 한동안 시신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십 년 전에 죽었습니다.”
문령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조금 전 자신의 문을 두드리고 말을 했던 사람이 십 년 전에 죽었다는 사실보다 더 섬뜩한 것은, 누군가 그 죽은 몸을 이용해 자신과 하륜을 이곳에서 만나게 했다는 점이었다.
별궁 깊은 곳에서 다시 울림이 들렸다.
쿵.
백유겸이 고개를 들었다.
“월영서고로 가야 합니다.”
세 사람은 어두운 회랑을 따라 움직였다.
익숙해야 할 길은 이미 조금씩 뒤틀려 있었다.
문령이 검게 변한 방위석 앞에서 멈춰 섰고 하륜이 검을 들려는 순간, 곧바로 손을 내밀었다.
“베지 마요. 길을 틀어놓은 진이에요.”
하륜은 검을 멈췄다.
문령이 손끝으로 흐름을 바로잡자 검게 물들었던 방위석에서 푸른빛이 다시 살아났고, 막혀 있던 회랑 끝이 천천히 열렸다.
“잘 봤다.”
하륜이 짧게 말했다.
문령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조금 전 검은 그림자가 손목을 감았을 때보다 그 한마디에 손끝이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괜히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회랑 끝에 월영서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조차 열리지 않았던 가장 안쪽의 문이,
이미 열려 있었다.
14화. 우리가 정할게요명월석 위의 두 이름은 마치 누군가 마지막 획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서문령.단하륜.문령은 자신의 이름을 한참 바라보았다. 평생 수없이 써온 이름이었다. 부모가 불러주었고, 책의 첫 장에도 적었고, 진법을 익힌 종이 아래에도 남겼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이름은 전혀 다른 의미로 보였다. 이름을 새기면 수월별궁과 연결된다. 별궁이 흔들리면 자신도 흔들리고, 자신이 무너지면 별궁도 무너진다. 명월석 아래에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이름을 새기면 주인이 된다.새기지 않으면 세 번째 봉인은 열린다.하륜이 낮게 웃었다.“선택권이 아주 친절하군.”문령도 같은 생각이었다. 선택하지 않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선택하지 않았을 때 벌어질 일을 너무 잘 보여주고 있었다.“결국 또 해야 한다는 말이네요.”문령의 말에 하륜이 그녀를 돌아보았다.“아니다.”“뭐가요?”“안 해도 된다.”문령은 눈을 깜박였다.하륜은 명월석이 아니라 그녀를 보고 있었다.“네가 싫으면 이름을 새기지 마.”“그러면 봉인이 열려요.”“그건 별궁의 문제지.”문령의 눈썹이 조금 찌푸려졌다.“강호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그래도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을 네 책임이라고 밀어 넣는 건 다른 문제다.”문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월별궁보다 자신을 먼저 두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부모도, 백유겸도, 별궁 자체도 늘 문령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먼저 말했다. 그런데 하륜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지를 묻고 있었다. 문령은 그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칠고 무뚝뚝해서 남의 마음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누구보다 사람의 선택을 먼저 보았다.“단 공자는요?”문령이 물었다.“뭐가.”“정말 하기 싫으면 안 할 거예요?”하륜은 잠시 명월석을 바라보았다.“아직 모르겠다.”솔직한 대답이었다.문령은 그런 점도 마음에 들었다. 괜찮다고 허세를 부리지 않았고, 운명이니 책임
13화. 이름을 새기는 곳호수 아래로 이어진 계단은 수심각 뒤편에 숨어 있었다. 낮에는 물과 수초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돌계단이 새벽빛이 희미하게 번지자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은 물속으로 내려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위로 물이 넘치지 않았다. 양옆에서는 검푸른 호수가 벽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계단 위에는 달빛을 머금은 듯한 푸른 기운이 엷게 흐르고 있었다.문령은 첫 계단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여기로 내려가는 거예요?”백유겸이 고개를 끄덕였다.“명월석은 수심각보다 더 아래에 있습니다.”강무결이 하륜의 팔을 한 번 바라보았다.“사형, 지금 상태로 내려가도 괜찮겠습니까?”“안 괜찮으면 네가 대신 이름을 새길 건가?”강무결이 입을 다물었다. 문령은 그 둘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아주 작게 웃었다. 하륜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웃었나?”문령의 얼굴이 굳었다.“아니요.”“방금 웃었는데.”“잘못 보신 거예요.”“그런가.”하륜의 입가에도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그 짧은 표정 때문에 문령은 괜히 먼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물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생각보다 더 조용했다. 발밑에서 돌을 밟는 소리가 작게 울렸고, 양옆의 물에서는 물고기들이 멀찍이 지나갔다. 머리 위로는 분명 호수가 있었는데 숨이 막히지는 않았다. 마치 물이 두 사람을 피해서 길을 내주는 것 같았다.문령은 몇 계단을 내려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하륜은 두 걸음쯤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문령은 괜히 앞을 보았다. 처음에는 뒤에 누군가가 따라오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섰다. 지금은 오히려 일정한 발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더 신경 쓰일 것 같았다. 그 변화가 문령에게는 아직 낯설었다.“멈춰요.”문령이 갑자기 말했다.하륜은 즉시 멈췄다.“왜.”문령은 물벽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물결처럼 흔들리던 선이 점차 글자가 되고 있었다.검의 주인은 베지 못할 것을 알아야 하고,진의 주인은 열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한다.하륜이 글을 읽더니 낮게 말했
12화. 아직 주인이 아니다수심각 위로 새벽빛이 번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검은 그림자와 물보라로 뒤엉켜 있던 호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잔잔했다. 달은 서쪽으로 기울었고, 수면 위에 남은 은빛도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문령은 그 고요가 오히려 낯설었다. 위험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나무함을 내려다보았다. 물 아래에서 떠오른 함 안에는 빛이 바랜 비단 조각과 옥가락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어머니의 글씨가 적힌 비단은 아직 펼치지 않았다. 흑련이 남긴 말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봉인한다.문령은 무심코 하륜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난간 가까이에 서서 호수를 보고 있었다. 검은 이미 칼집에 들어갔지만 오른팔에는 조금 전의 검은 기운이 남긴 선이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는 먹물이 피부 밑으로 스며든 것처럼 보였다. 문령은 그 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렇게 보면 없어지나?”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문령이 고개를 들었다. 하륜은 여전히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자신이 보고 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안 봤어요.”“봤다.”“……조금 봤어요.”하륜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강무결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의 전투보다 더 무거운 표정이 걸려 있었다.“사형. 그 기운은 단가로 돌아가 치료해야 합니다.”하륜이 이번에는 고개를 돌렸다.“치료할 수 있나?”강무결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만으로 충분했다. 백유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일반 의술로는 어렵습니다. 수월별궁의 진기가 눌러주지 않으면 더 깊이 파고들 가능성이 있습니다.”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문령에게 향했다. 문령은 그 시선이 싫었다. 봉인을 읽는 것도 자신이었다. 진을 여는 것도 자신이었고, 이제 하륜의 몸에 남은 기운까지 자신이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누군가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사람이 아니라 열쇠나 도구가
11화. 봉인보다 먼저중심 진침이 빠진 순간 수심각이 크게 흔들렸다.기둥 아래까지 올라온 물결이 난간을 세차게 때렸고, 차가운 물방울이 문령의 뺨과 머리카락 끝에 튀었다.물 아래의 문이 더 크게 벌어졌다.검은 기운이 틈 사이로 솟구쳤다.그러나 문령의 눈에는 그보다 하륜이 먼저 들어왔다.그는 검을 든 채 서 있었다.검은 선이 오른팔을 타고 올라가 있었고, 눈동자 안의 금빛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문령은 그의 앞에 진침을 꽂았다.푸른빛이 퍼졌다.검은 기운과 부딪히며 낮은 울림이 났다.하륜의 검끝이 문령의 어깨 가까이에서 멈췄다.“비켜.”목소리는 하륜의 것이었지만, 평소와 달랐다.문령은 고개를 저었다.“안 비켜요.”“진이 무너진다.”“알아요.”문령은 자신이 떨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손도 떨렸고 숨도 짧았다.그래도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하륜의 검끝보다 그의 눈을 보았다.조금 전까지 자신이 보는 곳을 먼저 보던 사람.자신이 틀릴지도 모른다고 말했을 때도, 지금까지는 맞았다고 담담히 말하던 사람.문령은 그 기억들을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았다.다만 낮게 말했다.“돌아와요.”하륜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문령은 그 반응 하나에 숨을 붙잡았다.“단하륜.”검은 기운이 거칠게 일어났다.하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문령은 피하지 않았다.“저 여기 있어요.”그 말은 자신도 모르게 나왔다.말을 한 뒤 문령은 잠시 멈췄다.왜 그런 말을 했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다만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이 한 쌍의 진처럼 움직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자신이 길을 보면 하륜이 그 길로 왔다.그렇다면 이번에도 자신이 길을 보여야 했다.문령은 아주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검날이 아니라 하륜 쪽으로.“이쪽이에요.”그녀의 목소리가 바람 사이로 낮게 흘렀다.하륜의 시선이 손끝을 따라왔다.검은 빛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금빛이 흔들렸다.문령의 가슴이 조여왔다.“아까 그랬잖아요.”문령은 숨을 골랐다.“제가 보는 곳으로 간다고.”하륜
10화. 네가 보는 곳으로검은 손이 수면을 뚫고 올라온 순간, 호수의 달빛이 산산이 흔들렸다.조금 전까지 잔잔하던 수심각 아래로 먹빛 파문이 번지더니, 물속에서 사람의 형상을 닮은 그림자들이 하나둘 기어올랐다. 얼굴도 눈도 없는 검은 몸이 물에 젖은 천처럼 늘어졌다가 다시 일어섰다.문령은 난간 가까이에 서서 숨을 낮췄다.하륜의 검이 가장 먼저 달려든 그림자의 몸을 갈랐다.검은 형체가 양쪽으로 찢어졌다.그러나 쓰러지지는 않았다.바닥으로 흩어진 검은 물방울들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나였던 그림자가 둘이 되어 일어났다.문령의 얼굴이 굳었다.“베면 안 돼요.”하륜의 검끝이 허공에서 멈췄다.그는 돌아보지 않았다.“그럼?”짧은 한마디였다.문령은 그림자를 보지 않고 그 아래를 보았다.수면 위에서 끊어지는 달빛, 기둥 아래로 모였다 흩어지는 물결, 검은 형체가 올라오기 직전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파문.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아무 의미 없는 움직임이었다.그러나 진은 언제나 흐름을 남겼다.문령의 시선이 동쪽 기둥 아래에서 멈췄다.“오른쪽으로 두 걸음.”하륜이 바로 움직였다.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검은 팔 하나가 솟구쳤다.문령은 손에 쥔 진침을 조금 더 세게 움켜쥐었다.“검을 세우지 말고 눕혀요. 달빛 밖으로 밀어내듯이.”하륜의 손목이 돌아갔다.세워져 있던 검날이 비스듬히 누웠다. 검은 그림자의 옆구리를 밀어내자, 형체가 수심각 기둥이 드리운 그늘로 미끄러졌다.그 순간 몸이 힘을 잃었다.검은 물처럼 바닥에 흩어지더니 그대로 수면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문령의 눈빛이 선명해졌다.“맞아요.”“다음.”하륜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문령은 다시 호수를 읽었다.“왼쪽 한 걸음.”하륜이 움직였다.“조금 뒤로.”이번에는 문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이 먼저 돌아갔다.두 번째 그림자가 밀려났다.세 번째도 마찬가지였다.몇 번쯤 이어졌을 때, 문령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하륜이 너무 빨랐다.자신이 끝까지 말하기 전에
9화. 물 아래의 달별궁으로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조용했다.강무결은 단가의 명령서가 하륜의 손에서 찢어진 뒤부터 거의 입을 열지 않았고, 하륜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서문령은 두 사람 사이를 걷다가 몇 번이나 앞선 하륜의 등을 바라보았다.며칠 함께 지내며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단하륜은 화가 날수록 오히려 조용해지는 사람이었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주변 사람에게 감정을 쏟는 대신 입을 다물었고, 생각이 많아질수록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처음에는 자신에게만 무뚝뚝한 줄 알았다. 하지만 강무결에게도, 백유겸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필요한 말 이상은 하지 않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람을 함부로 몰아붙이지도 않았다. 말투는 거칠어도 행동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문령은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몇 걸음 앞서가던 하륜의 보폭이 어느 순간 느려졌다.동쪽 회랑을 지나 수심각으로 이어지는 돌길에 들어서자 그와 문령의 거리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하륜의 한 걸음은 자신보다 훨씬 컸는데도 이상하게 계속 같은 간격이었다.“저 때문에 천천히 걷는 거예요?”하륜이 고개만 조금 돌렸다.“아니다.”“아까는 더 빨리 걸었잖아요.”잠깐의 침묵 뒤 그가 앞을 보며 말했다.“밤길이 미끄럽다.”문령은 저도 모르게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비는 오지 않았고 돌길은 말라 있었다. 그 사실을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수심각은 수월별궁의 가장 동쪽, 호수 안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낮이라면 푸른 물결과 낡은 기둥이 어우러져 고즈넉하게 보였겠지만, 달이 뜬 뒤의 수심각은 전혀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검푸른 호수 위로 은빛이 길게 부서졌고 처마 끝의 풍경은 바람도 없는데 이따금 낮게 울었다.문령은 좁은 나무다리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수심각 아래 물고기를 보고 싶어 호숫가까지 내려갔던 날, 평소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던 어머니가 멀리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문령아. 저곳에는 가지 마라.왜냐고 묻자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