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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실장실로 오세요

Author: 지호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7-29 16:04:27

며칠 뒤, 노유경이 제이를 불러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이거, 오늘 오후에 전략기획실 쪽에 보고할 자료예요. 제이 씨가 정리해준 초안, 내가 좀 다듬었어요."

제이는 서류를 넘겨보다 표정이 굳었다. 밤새 짜낸 핵심 아이디어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지만, 표지에는 노유경의 이름만 올라 있었다.

"이거, 제가 정리한 초안 그대로인데요."

"내가 손을 좀 봤어요. 큰 틀은 비슷해도 디테일은 다르잖아요."

노유경이 태연하게 넘겼다. 제이는 더 따지지 않기로 했다. 여기서 얼굴을 붉혀봐야 얻을 게 없었다.

어차피 이 사람 밑에 있는 것도 잠깐이야.

곧 있을 TF 발표를 생각하면, 지금 이 정도 억울함은 감수할 만했다.

"제이 씨는 오늘 회의실 뒤에서 자료나 넘겨줘요. 발표는 내가 할 테니까."

반박할 틈도 주지 않는 말투였다. 제이는 짧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대회의실, 상무를 비롯한 임원 몇 명이 이미 자리해 있었다. 제이는 노유경의 뒤편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수정도 그 자리에 배석해 있다가, 작게 속삭였다.

"이거 제이 씨 아이디어잖아요. 근데 왜 노 과장님이 발표해요?"

"괜찮아요. 지금은."

제이가 짧게 답했다. 속은 편치 않았지만, 지금 얼굴을 붉힐 자리는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문이 열리고, 새로 부임한 온라인 TF 실장이 들어섰다.

슈트 차림의 준호였다. 큰 키에 곧은 어깨, 흐트러짐 하나 없이 넘긴 머리, 몸에 딱 맞게 떨어지는 짙은 슈트까지. 회사 밖 에서 마주치던 그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여기저기서 낮은 웅성거림이 새어 나왔다. 임원들 사이에서도, 그리고 회의실 구석에 서 있던 여직원들 사이에서도.

냉정하게 정돈된 얼굴로, 그는 상석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다.

노유경도, 다른 임원들도 정준호의 등장에 술렁였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이번 온라인 사업 TF를 맡게 된 정준호입니다."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제이만이 그 목소리에 놀라지 않았다.

 

발표가 시작됐다. 노유경은 매끄럽게 자료를 넘기며 설명을 이어갔다. 순조로운 흐름이었다.

"이 부분, 실행 시점을 앞당긴 근거가 뭡니까?"

준호가 자료 한 페이지를 짚으며 물었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아, 그건..."

노유경의 말이 순간 끊겼다. 제이와 회의 할때도 나오지 않았던 사안이었다. 초안에도 비슷한 내용 조차 없었다.  당황한 노유경은 뒤를 돌아보며 눈짓했다.

이럴 줄 알았지.

실행 시점을 앞당긴 진짜 이유는, 제이가 애초에 노유경에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넘어간 부분이었다. 이런 날이 올 걸 알고 일부러 남겨둔 여백이었다. 일 잘하기로 유명하다던 그 깐깐함도, 결국 남이 짜준 틀 안에서만 빛나는 것이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현제이 씨가 자세히 설명해드릴게요."

제이를 앞세워 곤란함을 넘기려는 속셈이 뻔히 보였다.

제이는 잠깐도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실행 시점을 앞당긴 건, 경쟁사 쪽 유사 서비스 출시 일정을 고려한 결정입니다. 늦어질 경우 선점 효과를 놓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경쟁사 일정, 근거 자료는요?"

"업계 관련 공시 자료와 채용 공고 추이를 함께 봤습니다. 신규 개발 인력을 최근 집중적으로 채용하고 있는 게 확인됩니다."

막힘없는 설명이 이어졌다. 준호는 몇 가지를 더 물었고, 제이는 그때마다 정확하게 답했다.

"...설명 잘 들었습니다."

준호가 짧게 정리하며 자료를 덮었다.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잠깐 스친 눈빛에는 감탄이 담겨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짧은 순간이었다.

임원들 사이에서도 작게 감탄 섞인 웅성임이 들렸다. 노유경은 애써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지만, 손끝으로 자료를 정리하는 손길이 눈에 띄게 빨라져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노유경이 굳은 얼굴로 제이 쪽으로 다가왔다.

"제이 씨, 다음부턴 이런 사안들도 초안에 넣어야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준호의 비서가 다가와 끼어들었다.

"실례합니다. 현제이 씨 맞으시죠. 정 실장님께서 따로 뵙자고 하십니다."

노유경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실장실로요?"

"네. 지금 바로 오시면 됩니다."

노유경은 뭐라 덧붙이려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까지 제이를 몰아세우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제이는 노유경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비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걷는 내내, 등 뒤로 여러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신입사원이 새로 온 실장에게 단독으로 불려가는 일이, 이 회사에서 흔한 그림은 아니었다.

실장실 문 앞에 서자,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처음 마주하는, 그의 진짜 자리였다.

제이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문을 두드렸다.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리고, 그 너머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얼굴의 준호가 제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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