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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이제 겨우 시작

Author: 지호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16 07:02:27

새로운 보금자리는 도심의 화려한 심장부를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초고층 오피스텔이었다.

24시간 보안 요원이 상주하는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 카드 키를 대야만 들어설 수 있는 완벽한 요새. 지문 인식 한 번에 묵직한 마찰음을 내며 우아하게 열리는 현관문을 통과하는 순간, 제이는 비로소 자신이 이전 생의 구차했던 밑바닥을 완전히 벗어났음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거실 전면을 가득 채운 대형 통창 너머로 밤의 도심이 보석을 흩뿌려 놓은 듯 아득하게 펼쳐졌다.

"내 공간이야……."

제이는 가만히 읊조렸다. 낡은 조립식 가구와 삐걱거리는 문틈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오던 이전 빌라의 기억은 저편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스스로 설계한 전쟁에서 온전한 제 힘으로 쟁취해 낸 안식처였다.

"마음에 듭니까?"

어느새 다가온 준호가 제이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묵직한 온기가 제이의 몸에 남아 있던 마지막 긴장마저 부드럽게 녹여 내렸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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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56. 두 사람만의 전쟁

    사무실을 가득 채우던 먼지 냄새 대신, 이제는 새 가죽 의자의 묵직한 가죽 향과 매끄러운 유리 테이블이 제이의 눈에 들어왔다.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 화면 속 숫자는 매일 아침 전산이 리셋될 때마다 기어코 앞자리를 바꾸며 치솟고 있었다. 이영민의 몰락이 가져온 반사이익은 실로 엄청났다. 갈 곳을 잃고 시장에 쏟아진 중소 물류 거래처들이 제이의 계열사로 도미노처럼 흡수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매출 곡선은 가파른 수직을 그렸다.​임원들은 매일 아침 문턱이 닳도록 사장실을 드나들며 아부 섞인 보고서를 내밀었지만, 그들의 눈빛 깊은 곳에는 여전히 스물다섯의 낙하산 핏덩이를 향한 은근한 무시와 불만이 깔려 있었다.​"현 사장님, 이번 달 지표는 창사 이래 최대치입니다. 정 회장님께서 내리신 목표치도 이미 가볍게 넘겼습니다."​보고서를 검토하는 제이의 눈빛은 무미건조했다. 숫자는 화려했지만, 이건 제이가 원하는 진짜 승리가 아니었다. 단지 상대의 파멸로 인해 굴러떨어진 눈먼 떡고물에 불과했다. 매출의 외형만 불어났을 뿐, 시스템은 여전히 구시대적인 대량 수송 방식에 머물러 있었다.​"이건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제이는 펜 끝으로 붉은색 지표를 툭툭 치며 단호하게 말했다.​"공산품과 생필품 몇 상자 더 나르는 걸로 만족할 생각 없습니다. 이영민의 망가진 물류망을 거저먹었다고 안주하는 순간, 다음 주자는 우리가 될 겁니다."​보고를 하던 기획조정실장의 안색이 일순 굳어졌다.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면에 걸린 대형 도심 지도를 짚었다. 지도의 주요 거점마다 붉은색 핀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보통의 물류는 썩지 않는 물건을 며칠에 걸쳐 배송하는 것에 안주하죠. 하지만 제가 그리는 최종 목적지는 다릅니다. 신선식품입니다."​"신선식품이요?"​실장의 입에서 헛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장실 한구석에 대기하고 있던 상무와 전무들의 얼굴에도 순식간에 황당함과 실소가 번져나갔다.​"야채나 고기, 우유 같은 것들 말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55. 이제 겨우 시작

    새로운 보금자리는 도심의 화려한 심장부를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초고층 오피스텔이었다.​24시간 보안 요원이 상주하는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 카드 키를 대야만 들어설 수 있는 완벽한 요새. 지문 인식 한 번에 묵직한 마찰음을 내며 우아하게 열리는 현관문을 통과하는 순간, 제이는 비로소 자신이 이전 생의 구차했던 밑바닥을 완전히 벗어났음을 온몸으로 실감했다.​거실 전면을 가득 채운 대형 통창 너머로 밤의 도심이 보석을 흩뿌려 놓은 듯 아득하게 펼쳐졌다.​"내 공간이야……."​제이는 가만히 읊조렸다. 낡은 조립식 가구와 삐걱거리는 문틈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오던 이전 빌라의 기억은 저편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스스로 설계한 전쟁에서 온전한 제 힘으로 쟁취해 낸 안식처였다.​"마음에 듭니까?"​어느새 다가온 준호가 제이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묵직한 온기가 제이의 몸에 남아 있던 마지막 긴장마저 부드럽게 녹여 내렸다.​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현관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백화점과 명품 브랜드의 배송 직원들이 줄을 지어 박스를 들고 들이닥치기 시작했다.​"여기에 내려놓으시면 됩니다."​준호의 지시에 따라 거실과 드레스룸이 순식간에 화려한 박스들로 채워졌다. 제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포장을 뜯어내다 이내 숨을 삼켰다.​악어가죽으로 마감된 클래식한 블랙 백부터,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우아한 로즈골드 팔찌와 목걸이, 스위스제 가죽 스트랩 시계까지. 드레스룸의 조명 아래 유리 진열장을 채운 것들은 보통의 여자들이라면 평생을 열망할 법한 초고가 명품들이었다.​"준호 씨, 이게 다 뭐예요?"​제이가 놀라 뒤를 돌아보자, 준호는 그저 당연하다는 듯 싱긋 웃으며 유리장에 시계를 가지런히 올려놓을 뿐이었다.​"저…… 아직 스물다섯이에요. 이런 건 감당하기 너무 벅차요."​제이가 뺨을 살짝 붉히며 손을 내젓자, 준호가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두 팔로 부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54. 거대한 음모의 전초전

    "정 본부장님도 한잔 받으셔야죠!"사내 TF 팀원들과 새로 흡수된 물류 사업부 직원들이 한데 섞여 들어 올린 맥주잔들이 요란하게 부딪쳤다."오늘 제가 사장님 에스코트를 책임져야 해서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준호는 가득 채워져 다가오는 맥주잔을 부드러운 손짓으로 밀어내며 대신 얼음이 가득 담긴 탄산수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쏟아지는 아쉬움 섞인 야유 속에서도, 준호의 눈빛에는 제이의 안전한 귀갓길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단단한 이성이 빛나고 있었다.​시끌벅적한 갈빗집 안은 숯불 열기와 알코올 냄새, 그리고 성공적인 역공을 자축하는 활기찬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제이의 계열사 사장 취임과 동시에 준호가 이끌던 PF 팀까지 제이의 지휘 아래로 공식 이전되면서, 두 사람은 이제 명실상부한 최고의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사내 최대의 권력 축이 되어 있었다.​"우리 사장님, 스물다섯에 계열사 탑이라니 진짜 전무후무한 신화 아닙니까? 정 본부장님이 안목이 대단하십니다!"​취기가 오른 부장 한 명이 넉살 좋게 준호를 치켜세웠다. 준호는 단정한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쳐둔 채,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제이의 옆자리를 지켰다. 소란스러운 축하 속에서도 준호의 시선은 틈만 나면 제이의 잔을 대신 비우거나, 매운 음식을 짚는 그녀의 앞접시를 묵묵히 챙기는 데 여념이 없었다.​제이는 크림색 실크 블라우스 소매를 가볍게 걷어 올린 채 직원들의 인사를 여유롭게 받아넘겼다. 과거의 트라우마였던 '가스라이팅 당하던 며느리'의 그늘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스스로의 지략으로 거대 기업의 왕관을 쟁취한 경영자의 당당함만이 그녀의 옆얼굴에 빛나고 있었다.​밤 열한 시가 넘어서야 겨우 끝난 회식 자리. 준호는 비틀거리는 직원들을 택시에 태워 보낸 뒤, 제이를 조수석에 태우고 그녀의 낡은 빌라 골목으로 차를 몰았다.​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길은 평소보다 유독 쓸쓸하고 축축했다.​골목 어귀에 차를 세운 준호가 시동을 끄자, 좁은 차창 너머로 낡은 가로등 불빛이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53. 미션 성공

    아침 햇살이 하얀 레이스 커튼을 뚫고 침대 끝자락에 닿았을 때, 제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전신을 무겁게 지배하는 뻐근한 열기와 손목뼈 마디마디에서 느껴지는 둔탁한 시큰거림이 지난밤의 격정적인 온도를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었다.제이는 뻣뻣하게 굳은 목을 돌려 곁을 살폈다. 이불 밖으로 드러난 준호의 단단한 어깨와, 규칙적으로 숨을 몰아쉬며 오르내리는 그의 묵직한 가슴팍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언제나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던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엉망으로 흐트러진 모습은, 오직 이 침대 위에서만 허락된 그만의 무방비한 영토였다.제이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려 움찔한 순간, 허리춤을 감싸고 있던 준호의 굵은 팔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준호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제이를 제 품속으로 더욱 깊숙이 끌어당겨 묻었다.잠결에도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듯한 집요한 독점욕이 그의 뜨거운 체온을 타고 척추를 타고 전해졌다. 제이는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댄 채, 두 사람의 심장 박동이 서서히 포개어지는 감각을 가만히 느꼈다.하지만 평화는 정오가 채 되기도 전에 거칠게 깨졌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준호의 휴대전화가 진동을 울려대기 시작했다.발신인은 대기업의 절대권력이자 준호의 할아버지, 정 회장의 비서실이었다.[정 회장님께서 오늘 오후 세 시, 본가로 현제이 씨와 함께 들라 하십니다.]단 한 마디의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끊긴 전화기 너머로 정막이 가라앉았다.잠에서 완전히 깬 제이는 침대 밑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참담하게 흩어진 어제의 잔해들을 보았다. 이영민이 무자비하게 잡아 뜯어 깃이 통째로 날아간 셔츠와, 갈기갈기 찢겨 속살을 전혀 가려주지 못하는 속옷. 이 꼴로는 정 회장을 마주하기는커녕 준호의 집 현관문을 나서는 것조차 불가능했다."이거라도 걸쳐요."준호가 드레스룸 서랍을 거칠게 뒤져 내민 것은 그가 운동할 때 입는 짙은 회색 후드티와 밴딩 트레이닝 바지였다.옷을 입자 준호 특유의 짙은 우디 향이 코끝을 찔렀다. 그의 넓은 어깨에 맞춰진 옷자락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52. 뜨거운 밤

    준호의 묵직한 가슴팍이 거칠게 오르내릴 때마다, 그의 셔츠 너머로 요동치는 심장 박동이 제이의 뺨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 숨을 들이쉴 때마다 준호의 온기 어린 호흡이 제이의 드러난 쇄골과 턱 끝을 간지럽히듯 흩어졌다.제이는 벌어진 셔츠 앞자락을 쥔 손끝에 억지로 힘을 주었지만, 뼈마디가 시큰거릴 때마다 얇은 천자락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내렸다. "준호씨……." 갈라진 목소리가 제이의 입술 틈새로 겨우 흘러나왔다. 준호를 만난 이래 처음으로 비즈니스라는 견고한 방패 없이, 오직 현제이라는 나약한 인간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순간이었다. 준호는 대답 대신 제이의 가녀린 손목을 조심스럽게 거머쥐었다. 상처를 덧나지 않게 하려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지만, 그를 감싼 마디 굵은 손가락에는 결코 놓아주지 않겠다는 단호한 힘이 실려 있었다. "이 손, 이제 놓아도 됩니다." 잠긴 목소리가 어둠을 타고 가라앉았다. 준호의 긴 손가락이 제이가 쥐고 있던 셔츠 깃 위로 겹쳐졌다. 그의 뜨거운 손끝이 닿자마자, 제이는 마치 전류에 감전된 듯 전신을 작게 떨었다.움켜쥐고 있던 힘이 허무하게 풀렸고, 잡고 있던 마지막 천자락이 어깨 아래로 맥없이 흘러내렸다. 투둑, 하고 단추가 뜯겨 나간 셔츠가 바닥으로 낙하하며 서늘한 공기가 제이의 상체에 닿았다. 은은한 오렌지빛 조명 아래, 제이의 하얗고 풍만한 가슴의 실루엣과 유려한 허리 선이 무방비하게 드러났다.얇은 속옷은 이미 찢겨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풍만한 굴곡 위에 선명하게 가라앉은 이영민의 붉은 손자국이 거친 낙인처럼 박혀 있었다. 그 흉측한 흔적을 마주한 순간, 준호의 눈동자가 갈라지듯 흔들렸다. "……그 새끼가." 낮 동안 억눌러왔던 그의 지독한 독점욕과 이성 아래 봉인해 두었던 날것의 본능이 단숨에 금이 가며 쏟아져 내렸다. 준호는 제이의 허리를 안아 제 품속으로 거칠게 밀착시켰다. 단단한 그의 가슴팍에 제이의 연약한 살결이 빈틈없이 맞닿았다.제이는 저도 모르게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51. 아슬아슬한 밤의 시작

    ​차창 밖으로 붉은 노을빛이 흔적도 없이 걷히고 가라앉은 감청색 어둠이 길게 내려앉을 때까지, 차 안에는 오직 엔진의 미세한 진동과 묵직한 침묵만이 흘렀다.​준호는 신호 대기에 걸릴 때마다 조수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이는 그의 정장 재킷을 이불처럼 온몸에 감은 채 깊은 단잠에 빠져 있었다. 일생을 통틀어 가장 지독했던 사냥을 끝낸 직후, 긴장이 풀려서 인지 단단하게 닫혀 있던 그녀의 입매가 힘없이 풀려 있었다.​가쁘게 오르내리는 얇은 숨결은 평소 사내를 벌벌 떨게 만들던 냉혹한 지략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무방비하고 가녀렸다.​골목 어귀, 제이의 빌라 앞에 차를 세운 준호가 숨을 죽이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제이 씨. 도착했어요."​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지만, 제이는 고개를 돌리며 재킷자락을 더 팽팽하게 끌어당길 뿐이었다.​눈꺼풀은 무겁게 가라앉아 떠질 기미가 없었다. 이마를 타고 관자놀이께로 흘러내리는 얇은 식은땀을 가만히 훔쳐내던 준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피로와 잔뜩 짓이겨진 상처를 안고 차가운 방안에 홀로 쓰러져 있게 둘 수는 없었다.​준호는 기어를 다시 D단으로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차는 이내 도심의 불빛들을 뒤로하고, 한적하고 보안이 철저한 그의 빌라 주차장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 *​손목뼈 마디마디가 타들어 가듯 시큰거리는 통증에 제이는 결국 눈을 떴다.​낯선 천장 아래였다. 은은한 오렌지빛 간접 조명만이 정막한 방 안을 낮게 채우고 있었고, 등 뒤로 와닿는 매트리스의 감각은 제 좁은 방의 딱딱한 요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아늑하고 폭신했다.​제이는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려다 허리와 어깨를 관통하는 예리한 통증에 낮게 신음했다. 낮 동안 이영민이 완력으로 짓눌렀던 신체적 충격이 전신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어스름한 방 안을 짚어보던 제이는 이내 이곳이 준호의 침실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방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묵직한 기타의 하드케이스와, 그가 곁을 스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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